47. 위기일발.
화요일 오전 대흥시청 시장실.
손님을 기다리는 도훈은 어제 아침의 대화를 떠올리고 있었다.
- 그분 7급으로 임용됐어요. 일 잘하고 성실하며 성격 좋기로 소문난 7급 출신이 아직도 4급인 게 이상하죠. 7급 출신은 사고 안 치고 업무 능력 무난하다는 얘기만 들어도 막판에라도 3급 되는 게 보통인데요.
- 그렇다고 하더군요.
정임이 쓰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 그분 5급까지는 착착 승진했는데, 미운털이 박혀서 꽤 오랫동안 5급에 머물렀대요. 한직으로만 돈 건 물론이고요. 그렇게 오래 왕따 당하다가 전 도지사님 때부터 좀 나아졌다죠.
- 그 이유가 내부고발이었고요?
- 네. 오래전 얘기라 저는 잘 모르는데 큰 사건이었다고 하더라고요.
정임의 말에 이어 두진이 끼어들었다.
- 큰 사건이었죠. 관급공사 입찰비리였는데, 경찰이나 검찰은 전혀 감을 못 잡고 있던 게 내부고발로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도청이 발칵 뒤집힌 건 물론이고 정치인도 관련이 있다고 밝혀졌죠. 그때 민간 업자를 제외하고도 도청 공무원이 10명 가까이 구속됐을 겁니다. 비리 액수가 100억 가까이 됐고요.
- 그 내부고발자가 전경완 과장이었다는 말씀이군요.
- 네. 옳은 일을 했는데 워낙 사건이 크고 여파도 커서···. 왕따로 고생한다는 소문은 당시 충남 공무원이라면 안 들어본 사람이 없을 겁니다.
- 하긴, 한참 후배인 정임 씨가 알 정도니까요.
대화를 되새기던 도훈이 가만히 중얼거렸다.
“어떤 양반일지 기대되네요.”
- 너무 기대하지 마라. 그러다 실망만 커질 수도 있다.
“글쎄요. 감사과장을 하고 있었다는 건, 과거의 그 결기가 그리 시들지 않았다는 걸 방증하는 것 아닐까요?”
- 흠, 그러면 좋겠다만···.
조상님은 물론이고 두진과 정임도 기대 반 우려 반의 태도였고, 다른 시청 직원들도 비슷한 모습을 보였다.
도훈이 그 이유를 묻자 정임과 두진은 이렇게 답했다.
- 일 잘하고 성실한 데다 강직하고 원칙적인 분이라는 건 나쁜 게 아니죠. 아니, 오히려 환영할 만하죠. 하지만 그건 오래전의 일이잖아요. 내부고발 이후 고난을 겪으셨으니 어떻게든 그 영향이 있지 않겠어요? 큰일을 겪으면 그 후유증이라는 게 있으니까요. 저나 직원들이 우려하는 건 그 부분이에요.
-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저야 그 사람을 모릅니다만, 내부고발 때 그대로라면 왠지 시장님과 잘 어울릴 거라는 생각도 듭니다. 부디,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내일이 광복절 휴일이고, 모레가 취임인지라 전경완 부시장은 오늘 업무 인수인계를 위해 방문할 예정이었다.
도훈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누군가 문을 노크했다.
똑똑.
“들어오세요.”
철컥.
영배가 문을 열고 들어왔고, 도훈이 입을 열었다.
“오셨어요?”
“네. 안으로 모실까요?”
“아뇨, 나가서 맞이해야죠.”
도훈이 얼른 몸을 일으켜 비서실로 나섰다.
비서실에는 낯선 사람이 둘.
하나는 두진과 웃는 얼굴로 대화하는 초로의 남자였고 하나는 정임에게 뭔가 이야기를 듣고 있는 젊은 여자였다.
‘... 헐.’
도훈이 속으로 기함한 것은, 초로의 남자가 인사 자료의 프로필 사진보다 훨씬 나이 들어 보였기 때문.
도훈이 알기로 두진이 남자보다 다섯 살 위였는데, 남자가 오히려 두진보다 더 나이가 많아 보였다.
‘고생 많았나 보네.’
속으로 중얼거린 도훈이 남자에게 가볍게 묵례하며 손을 내밀었다.
“어서 오십시오. 대흥시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김도훈입니다.”
“반갑습니다, 시장님. 전경완입니다.”
전경완이 도훈의 손을 맞잡으며 웃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부시장님.”
“하하, 제가 드릴 말씀입니다.”
푸근한 미소를 머금은 전경완은 공무원보다는 농부 혹은 시골 촌로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다만, 그의 눈빛이 서늘할 정도로 깊이 있는 게 보통 사람은 아니라는 느낌을 주고 있었다.
“... 이 분은?”
“제 조카입니다. 인수인계도 해야 하지만, 동시에 오늘 집도 알아보고 필요한 것도 사고 해야 해서요. 제가 몸이 하나뿐이라 도와주려고 함께 왔습니다. 대흥시는 초행이라 직원들의 조언을 구한다고 여기까지 따라 왔네요. 이제 일 보러 나갈 텐데 신경 쓰지 마십시오.”
전경완의 말에 젊은 여자가 꾸벅 도훈에게 묵례했고 도훈이 답례한 뒤 말을 이었다.
“그러시군요. 날도 더운데 고생하시겠습니다. 차 한 잔 같이하고 가시지요.”
“안 그러셔도 되는데요.”
“뭐, 어떻습니까. 차 한 잔일 뿐인데요.”
내일모레 정식 부임인데 내일은 광복절이었다.
당연히 인수인계도 필요하지만, 개인적인 준비도 필요할 터.
새 부시장의 조카이고 바쁜 그를 돕기 위해 왔다는데 그냥 모른 척하기가 좀 그랬다.
아예 안 봤으면 모를까.
“들어가서 이야기하실까요?”
“네.”
도훈이 전경완을 시장실로 안내했고 두진과 전경완을 따라온 젊은 여자가 뒤를 따랐다.
맨 마지막에서 걷는 젊은 여자가 도훈의 뒤통수에 시선을 고정하고 눈을 의미심장하게 빛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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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작스러운 발령 때문에 정신없으시겠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좀 그렇습니다. 인수인계 기간이 좀 짧아서요.”
소파에 앉아 차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는 네 사람.
도훈과 전경완이 대화를 이끄는 가운데 두진이 간간이 끼어들고 전경완의 조카라는 여자는 말없이 지켜보는 그런 형편이었다.
“집은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하하, 당분간 저 혼자 지내야죠. 아이 하나가 고등학생이라 가족 전체가 이사하기에는 좀 상황이 그렇거든요.”
“저런··· 힘드시겠습니다.”
“저보다 와이프가 더 힘들죠. 그래도 다행인 게 인터넷으로 찾아보니 대흥시에 나와 있는 집이 많더군요.”
“네.”
도훈은 전경완과 10분 정도 이야기를 나누고 자리를 마무리했다.
더 이야기하고 싶긴 했지만, 여성식이 기다리고 있으니 보내주어야 했다.
“점심은 어떻게 하실 계획이십니까?”
“아, 여 부시장과 함께하기로 했습니다. 그분도 오후에 이임식 마치고 도청에 가신다니 시간이 모자라겠죠.”
“아무래도 오늘은 안 될 모양이네요. 취임하신 후에나 식사를 함께···.”
“아마 가능할 것 같은데요.”
도훈의 말을 끊은 건 전경완이 아닌, 직장에 월차 내고 따라왔다는 조카라는 젊은 여자.
도훈이 말없이 시선을 주자, 그녀가 살짝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인수인계하신 다음에는 살 집을 결정하셔야 하잖아요. 제가 삼촌 일하시는 동안 미리 알아본다고 해도 바로 결정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은데···. 안 그래요, 삼촌?”
“그러··· 려나?”
“삼촌이 살 집인데 꼼꼼하게 살펴야죠.”
“... 하하, 그럴··· 수도 있겠구나.”
전경완의 반응이 조금은 어색했지만, 도훈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혹시 저녁 시간에도 대흥에 계신다면 연락 주십시오. 저녁이라도 함께하면서 좀 더 얘기를 나눴으면 좋겠습니다.”
“알겠··· 습니다.”
전경완이 조카의 눈치를 보고 답했고, 곧 자리가 마무리됐다.
들어올 때의 담담한 표정과는 달리, 왠지 모르게 기쁜 듯한 모습으로 나가는 그녀였다.
비서실 앞 복도에서 전경완과 인사한 도훈이 시장실로 돌아와 고개를 갸웃거렸다.
눈을 반짝이는 전경완의 조카가 어딘지 모르게 낯이 익다고 느꼈던 때문이었다.
“... 어디서 본 것도 같고···.”
- 그러게 말이다. 나도 좀 그런 느낌이었다.
내내 조용하던 조상님이 입을 열자, 도훈이 질문을 던졌다.
“그나저나 보시기에 새 부시장 어떤 것 같았습니까?”
- 네가 보기엔 어떤 것 같더냐?
“그게···.”
도훈이 조상님과 전경완의 첫인상을 놓고 대화하던 그 순간, 복도를 걷는 젊은 여자가 만면에 득의양양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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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일 저녁, 대흥시의 한 감자탕집.
도훈과 전경완 일행이 저녁을 먹고 있었다.
전경완 일행이 도훈의 초대에 응한 게 아닌 도훈 일행이 전경완과 조카의 저녁 식사자리에 합류해 마련된 자리.
“한잔 더 하시겠어요?”
“네, 주세요.”
“오호, 술 잘하시네요?”
“그냥, 조금요.”
영배의 말에 상큼하게 웃으며 술잔을 내미는 젊은 여자.
전경완의 조카라는 그녀의 이름은 민세경이라 했다.
“건배할까요?”
“네.”
쨍.
정임이 잔을 내밀고 다른 이가 동참하자 옆 테이블에서 얘기하느라 바빴던 도훈, 두진, 전경완도 뒤따랐다.
“크으, 좋다.”
영배가 나직이 중얼거리는데, 도훈이 담담하게 한마디 했다.
“조 비서관은 적당히 드세요. 내일 쉰다고 또 달리지 마시고, 알았습니까?”
“... 네.”
도훈의 말에 영배가 고개를 모로 돌리고 입을 삐죽였다.
영배가 술잔을 입에 털어 넣었고, 도훈은 다시 전경완, 두진과 함께 대화에 집중했다.
“이번 발령이 저로서는 아주 반갑습니다. 나이가 들어 그런지 감사과 일이 점점 더 버거웠거든요.”
“부시장 업무 인계는 잘 받으셨습니까?”
“여 부시장에게 개략적인 얘기는 들었고, 이제부터 공부해야지요. 허허, 비서가 당분간 고생 좀 할 것 같습니다.”
“그럴 리가 있습니까? 전경완 부시장님, 업무에 빠삭하다고 유명한 분인데요. 현안 파악만 마치면 금세 실력 발휘하실 거 잘 압니다.”
두진의 말에 전경완은 웃기만 했다.
아무리 한때 한직으로만 돌았다고 해도 정년을 2년여 앞둔 그의 경력은 무시할 수 없으니 도훈도 업무와 관련한 건 그다지 걱정되지 않았다.
“여 부시장과 얘기하다 보니 흥미로운 게 몇 가지 보였습니다.”
“그게 뭡니까?”
“우선··· 추진 중이거나 추진 예정인 사업 전반에 대한 평가를 진행하고 계시더군요. 시민 참여 평가위원회도 기획하셨고요.”
“아, 네.”
“사업 평가하고 과정에 시민 참여하는 것이야 드문드문 다른 시에서도 하는 일이긴 한데···, 대흥시 계획은 훨씬 더 본격적이랄까요? 그런 느낌을 받았습니다.”
전경완의 말에 도훈이 웃으며 답했다.
“맞습니다.”
“그런데도 딱히 서두르시지는 않는 것 같았고요.”
“네. 급히 만든다고 될 일이 아니니까요. 가장 중요한 건 ‘참여’ 부분이라고 생각해서 말입니다.”
“저도 공감합니다만, 스케줄을 명확히 하지 않으면 한없이 늘어지지 않을까 걱정이 되더군요.”
“그럴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내년 주민참여 예산 수렴과정을 계기로 시작해보려고 합니다.”
“아, 그렇습니까? 저도 문득 그 생각이 들었는데···. 허허, 제가 괜한 걱정을 한 모양입니다.”
도훈이 담담한 미소를 머금고 답했다.
“그런 걱정이나 지적은 언제나 환영입니다. 관심이 없으면 걱정도 없을 테니까요. 부시장님이 시정에 좀 더 관심을 기울여 주시면 그만큼 실수는 줄고 결과는 좋아질 거 아니겠습니까?”
“하하, 노력하겠습니다. 그럼 이 부분도 말씀을···.”
전경완은 인계받은 업무 중 궁금한 걸 도훈에게 물었고 도훈은 매 질문에 핵심과 문제점 등을 간략히 요약해 답했다.
불과 몇 시간의 인계를 통해 핵심을 파악해 묻는 전경완과 어떤 분야든 막힘없이 답하는 도훈.
‘호오? 이 친구 보게?
‘역시 내공이 장난이 아니시네.’
전경완과 도훈이 그렇게 속으로 감탄하는 걸 옆에 앉은 민세경이 눈을 반짝이며 보고 있었다.
전경완과 담담히 미소를 교환한 도훈이 문득 생각난 걸 물었다.
“그나저나 집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구하셨습니까?”
“예. 시청 앞 오피스텔에 빈집이 있더군요.”
“다행입니다.”
“사실 제 조카 녀석이 강력히 주장하는 바람에 거기로 했습니다. 제가 마음에 든 곳은 따로 있었거든요.”
“그래요?”
“네. 운계면 쪽에 신축빌라가 하나 있더군요. 주변에 집도 많지 않고 뒷산에 공원도 있어 조용하니 좋을 것 같았는데, 이 녀석이 결사반대를 하지 뭡니까.”
“흐음.”
도훈의 시선이 민세경을 향했고 살짝 술기운이 올라 발간 얼굴의 민세경이 새침하게 웃으며 답했다.
“좀 그렇잖아요. 주인이 타지에 있는 데다가, 3층짜리 신축빌라에 새벽같이 나갔다가 밤늦게 들어온다는 정체 모를 독신남 하나 산다는데···. 그것도 개 한 마리 키우는 사람이라던데 아무래도 신경 쓰이죠.”
움찔.
감자탕 국물을 뜨던 영배가 움찔했고, 다른 비서실 직원들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 왜들 그러세요?”
민세경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묻자 도훈이 일순 굳어졌던 얼굴을 얼른 펴고 얼버무렸다.
“아닙니다. 그, 그런 집은 신경 쓰이는 게 맞죠.”
“그렇죠? 요즘 세상에도 이웃은 중요하잖아요.”
“... 물론입니다.”
도훈이 어색하게 웃었고, 다른 직원들의 얼굴에도 비슷한 웃음이 걸렸다.
민세경이 말한 집이 어디인지 알 것 같아서.
“너 오늘 안 따라왔으면 난 거기 계약했을 거다. 하여튼, 너랑 있으면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없어.”
“나중에 숙모가 자주 오갈 텐데 그 집 계약했으면 가만히 계실 것 같아요? 저 때문에 숙모 잔소리 안 듣게 된 줄로나 아세요.”
“쩝. 어째 너까지 내 편이 아니라 숙모 편이냐.”
“당연한 거 아닌가요?”
전경완과 입씨름하는 민세경의 모습은 영락없는 삼촌과 조카의 모습이었다.
‘... 위기일발이었네.’
- ... 뭐, 위기일발까지야.
‘위기가 맞죠. 시장과 부시장이 같은 빌라에 산다고 생각해보세요. 그게 알려지면 어찌 되겠습니까?’
- ... 흠, 민원인들로 미어터지겠지.
‘... 그러니까요.’
가슴을 쓸어내리는 심정으로 조상님과 대화를 마친 도훈이 술병을 들고 말했다.
“제 술도 한잔 받으세요.”
“아, 네. 감사합니다!”
민세경이 지적인 느낌의 상당한 미녀인데도 눈길조차 주지 않던 도훈이었다.
그런 그가 무척 고마운 듯한 표정이라 민세경도 상큼하게 웃고 있었다.
“건배할까요, 시장님?”
“그러시죠.”
쨍.
도훈과 건배하는 민세경은 도훈이 무척 호의적인 눈빛을 보내는 이유도 모른 채 기뻐하고 있었다.
진상을 알았다면 땅을 치고 후회했을 것도 모른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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