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홧김에 시장 되다-52화 (53/279)

52. 결정은 내가, 매도 내가 - 2.

콰득. 콰직.

“부숴요! 얼른!”

“... 정말 이래도 괜찮은 겁니까?”

“제가 책임집니다!”

얼떨떨한 표정으로 포크레인을 조작하는 기사와 그 옆에서 소리치는 도훈.

위이이잉!

“... 이거 힘이···.”

“삽을 들어 올렸다가 내려쳐 봐요!”

시멘트로 된 배수로 구조물을 부수려고 기사가 포크레인 버킷을 들어 올렸다가 세게 내리쳤다.

쾅! 쾅!

“이러다 기계 부서집니다!”

“고장 나면 수리비 냅니다!”

“아예 맛이 간다고요!”

“그럼 중고로 같은 기계 사드릴게요!”

계속 작업하면서도 불안해하는 기사를 도훈이 연신 독려했다.

그러는 사이, 모여든 직원들은 전경완 부시장과 정임에게서 상황을 설명받고 지시를 받아 구역을 나눠 흩어지고 있었다.

“혹시 모르니까 그 누구도 여기 하류 쪽 천변에 접근하지 못하게 안내하세요.”

“알겠습니다, 부시장님!”

“조를 짜서 흩어지는 겁니다. 혹시 모르니까, 꼭 핸드폰 손에 들고 있어요. 일이 터지면, 여러분도 천변에 머무르면 안 되니까요.”

“네, 부시장님.”

모였던 공무원들이 흩어지고 포크레인이 한창 작업을 하는 와중에, 소방차 세 대가 나타났다.

그러나 화학차가 아직 도착하지 않아 본격적인 방제 작업을 할 수는 없었다.

“다른 쪽으로 흘러가지 않도록 막아!”

“... 뭐로 막습니까?”

“급수 호스로라도 둘러싸. 그리고 물을 조금만 채워!”

“알겠습니다.”

그나마 방열복에 산소호흡기를 장비한 소방대원들이 도착해 화학물질이 엉뚱한 쪽으로 흐르거나 배수구를 막는 일은 좀 더 빨리 진행될 수 있었다.

“배수구는 다 부쉈습니다!”

“그럼 흙을 파주세요! 논으로 물길을 내는 겁니다. 아셨죠?”

“알았습니다.”

포크레인이 작업하는 곳과 탱크로리가 쓰러진 현장의 거리는 약 30여 m.

점점 화학물질의 누출량이 많아져 이미 작은 물줄기가 배수로에 흘러들기 시작하고 있었다.

도훈이 잔뜩 굳어진 얼굴로 탱크로리 쪽을 바라보는데 소방관 하나가 뛰어와 산소호흡기를 벗고 말했다.

“하천으로 이어지는 배수로는 다 막았습니다!”

“새어 나오는 건 어떻습니까?”

“늘고 있습니다.”

“막을 수는 없겠습니까?”

“쓰러진 탱크로리의 바닥에 닿은 쪽에서 새는 거라 당장은 어렵습니다. 막으려면 장비를 이용해 탱크로리를 바로 세우거나 들어올려야 하는데 혹시나 그러다가···.”

“무슨 얘긴지 알겠습니다.”

소방관과 얘기하면서도 도훈의 시선은 탱크로리에 고정된 채 떨어질 줄 몰랐다.

그런 도훈의 곁으로 한 사람이 빠르게 다가왔다.

“시장님!”

“... 실장님.”

발개진 얼굴에 땀으로 범벅이 된 두진.

두진뿐만 아니라 도훈의 눈에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비슷한 모습이었다.

“얘기 들으셨죠?”

“네, 고 주무관에게 들었습니다.”

“아무래도 통제선을 뒤로 더 물려야겠습니다.”

“네?”

“화학물질이 본격적으로 새어 나오면 최소한 여기까지는 흘러옵니다. 그다음에는 논으로 흘러가겠지만요.”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소방관은 탱크로리 쪽으로 돌아갔고 두진이 통제선 쪽으로 움직이려는데 도훈이 다시 불렀다.

“실장님, 통제선 물린 다음에···.”

도훈의 말이 끝나자 두진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게 왜 필요한 겁니까?”

“논으로 흘려보낸 다음 그대로 내버려둘 수는 없으니까요.”

“알겠습니다. 그럼 갑니다.”

“부탁드립니다.”

두진이 통제선 쪽으로 가 뭐라 말하자 경찰관과 시청 직원들이 모여 있는 사람들을 뒤로 더 물러나게 했다.

찌는 듯한 날씨와 내리쬐는 햇볕에도 불구하고 수십 명의 사람이 통제선 밖에서 구경하고 있었고, 점점 더 늘어나고 있었다.

“... 차라리 헛수고였으면···.”

포크레인이 작업을 시작한 지 아직 10분도 되지 않았다.

그러나 괜히 중장비가 아니라는 걸 증명하듯, 매설된 작은 배수로의 한쪽 벽을 부수고 논으로 이어지는 물길이 거의 완성되고 있었다.

사고 현장 가까이에 옆으로 빠지는 비포장도로 연결 지점이 있어 포장된 인도를 부수지 않아도 되는 게 천만다행이었다.

“조금만 더 깊고 넓게요!”

“알겠습니다!”

도훈이 포크레인 곁으로 다가가 고함치는데 저만치 현장에서 다른 이가 소리치는 게 들렸다.

“물러나요! 누출량이 많아집니다!”

“철수! 철수! 물러나!”

보호장비를 갖추지 못한 소방관들이 황급히 물러나기 시작했다.

보호장비를 입고 산소마스크를 쓴 소방관들도 탱크로리로부터 뒷걸음으로 거리를 벌렸다.

그리고 쓰러진 탱크로리가 접촉한 아스팔트 지면으로부터 봇물이 터지듯 화학물질이 급격히 많이 흘러나오는 게 보였다.

“기사님, 내려요!”

“예? 아직 다···.”

“빨리 내려요!”

기사가 포크레인의 시동을 끄고 내리자 도훈은 그의 손을 붙잡아 도로 위로 당겼다.

“물러나요!”

“철수해! 철수!”

소방대원들이 도훈과 포크레인 기사를 재촉해 통제선으로 물러났다.

그리고 그와 거의 동시에 도로에 콸콸 쏟아진 화학물질이 배수로를 타고 물길을 낸 곳에 도착했다.

배수로를 막아놓았기 때문에 상가 쪽으로 흐르지 못한 화학물질은 자연스레 포크레인이 낸 물길을 타고 논으로 흘러내렸다.

“헉, 헉, 헉.”

“헥, 헥. 아이고··· 내 포크레인.”

“포크레인은 아무 문제 없을 겁니다. 저건 쇳덩이를 녹이거나 하는 게 아니니까요.”

소방관 하나의 말에 기사는 그나마 안도하는 표정이 됐다.

도훈이 워낙 다급해 기사에게 위험 물질, 독가스 어쩌고 설명은 했지만 제대로 알아듣지도 못하고 작업을 시작했었다.

콸콸콸.

제법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화학물질이 논으로 흘러드는 게 또렷하게 보였다.

“... 헛수고가 되지 않은 게 다행이라 해야 하나.”

숨을 고른 도훈이 그걸 바라보고 중얼거리는데, 어느새 곁에 다가와 있던 정임이 답했다.

“그럼요. 시장님의 빠른 결단이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했어요, 정말.”

“......”

도훈이 그녀의 연락을 받고 현장에 도착한 지 아직 30분도 되지 않았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조금이라도 허둥대 시간을 지체했거나 탱크로리로부터 화학물질이 누출되는 시간이 조금이라도 빨랐더라면 분명 논이 아닌 하천에 흘러들고 있었을 터.

그게 아니더라도 때마침 포크레인을 실은 차가 현장을 지나려 하지 않았다면 지금쯤 어떻게 됐을까?

‘... 운이 아주아주 좋았어.’

가만히 속으로 중얼거린 도훈이 소방대원에게 물었다.

“... 이 정도 거리면 안전한 겁니까?”

“네. 바람이 이쪽으로 불지 않으니까요.”

소방대원의 말에 안도의 한숨을 내쉰 도훈이 정임에게 물었다.

“도에 위험 물질 사고 났다고 보고는 아까 했죠?”

“네. 소방서 통해서요.”

“... 휴우.”

긴장이 풀린 도훈이 자기도 모르게 다시 한숨을 내쉬고 안전센터장을 불러 이후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를 묻는데, 구경하는 사람들의 대열을 헤치고 한 사람이 모습을 보였다.

“아이고, 내 논!”

비명과도 같은 외침에 사람들이 바라본 곳에는 밀짚모자를 쓴 창백한 표정의 노인 하나가 서 있었다.

“저게 뭐야? 내 논으로 지금 뭐가 흘러들어 가고 있는 거야?”

통제선을 지나가려는 노인을 비상 소집된 공무원들이 막아섰다.

“할아버지. 가까이 가시면 안 됩니다. 저거 위험 물질이에요.”

“뭐야? 위험 물질? 그게 논으로 흘러들어 가는데 그걸 가만히 보고만 있어?”

“이러지 마세요. 위험하다니까요!”

“... 가만.”

노인이 그제야 포크레인을 봤고, 왜 그게 거기에 세워져 있는지 알아챘다.

도로에서 논으로 원래는 없던 물길이 만들어져 있다는 것도.

“... 이, 일부러 그런 거냐?”

“어쩔 수 없었습니다.”

“내 논을 일부러 망쳤다고?”

“그러니까··· 억!”

분노한 할아버지가 직원들을 마구 밀쳤고, 직원들이 쩔쩔맸다.

경찰관들이 달려와 직원들을 도와 할아버지를 진정시키려던 순간, 도훈이 다가와 할아버지 앞에 섰다.

“어르신 놔주세요, 여러분.”

“... 시장님.”

“괜찮습니다. 제가 설명하겠습니다.”

담담한 도훈의 말에 어르신을 붙들고 있던 경찰관과 직원들이 하나씩 떨어졌다.

다행히 노인은 도훈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씩씩거릴 뿐 바로 달려들거나 하지 않았다.

“사정을 말씀드리···.”

“일부러 그랬냐?”

도훈의 말을 끊은 노인의 목소리는 주체할 수 없는 분노로 살짝 떨리고 있었다.

아무리 시대가 달라졌다지만, 농부에게 논이나 밭은 ‘전부’라고도 할 수 있었다.

자세한 사정은 모르지만, 자신의 소중한 논이 망가지고 있는 걸 눈으로 보고 있는데 그 분노는 결코 적을 수가 없었다.

“일부러 그랬느냐고!”

“... 네.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네가 시켰냐?”

벌겋게 달아오른 눈을 매섭게 빛내며 묻는 노인의 말에 도훈은 해명해야겠다는 마음을 접었다.

지금은 해명에 앞서 해야 할 게 있으니까.

“네. 제가 시켰습니다.”

선선히 인정한 도훈은 자세를 바로 한 뒤 허리를 깊이 숙였다.

“죄송합니다.”

주변의 사람들이 그런 도훈과 노인을 씁쓸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사죄하는 도훈에게 시선을 고정한 노인의 눈에 일순 불꽃이 튄다고 사람들이 느끼던 순간.

“네놈이 시장이면 다야!”

짜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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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일 아침, 시장 비서실.

“조 비서관님, 괜찮으세요?”

“물론입니다, 정임 씨.”

“어제 월차까지 쓰시길래 심하신 줄 알았어요.”

“하하, 사랑의 힘으로 극복했습니다.”

“... 다행이네요.”

“그나저나 일요일엔 대단한 활약을 하셨다던데요.”

“그냥 마침 사고 현장 근처를 지나가던 것뿐이었어요.”

조금 핼쑥해지긴 했지만, 하루를 통으로 쉬고 출근한 영배의 목소리에는 힘이 돌아와 있었다.

영배가 영진, 정임과 인사를 나눈 뒤 시장실로 들어왔다.

두진과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던 도훈이 손을 흔들자 영배가 시장실 문을 닫고 다가왔다.

“뭐 타고 왔어요?”

도훈이 존대하자 영배가 가볍게 고개를 젓고는 작게 속삭였다.

“와이프가 태워다 줬다. 밖에 들리지 말라고 문 닫았어. 이 얘기는 존댓말로 하기가 좀 그래서.”

“...뭔데? 형 없는 사이에 고생했다고?”

“그것도 있지. 그날은 수고했다. 하지만 본 용건은 다른 거야. 고맙다.”

“응?”

“내가 오늘 출근할 수 있었던 건 다 보약의 힘이다.”

“사랑의 힘이라며?”

“우정도 분명 사랑의 일종이니까.”

“......”

일요일 오후 배탈이 난 영배는 어제 월차까지 쓰며 쉬어야 했다.

수액까지 맞은 영배를 위해 도훈은 어제 한의원에 가서 보약을 지어 영배에게 보냈다.

가장 대중적이고 저렴한 것이었지만, 보약은 보약.

“됐으니까 아프지나 마. 내가 형수 볼 면목이 없잖아.”

“아니야. 네가 보낸 보약 보고 와이프가 감격해서 눈물을 글썽였어.”

“... 설마?”

“진짜야.”

영배는 잠시 더 대화를 나누다 나갔고, 두진이 열린 문 너머의 영배를 흘끔 하고는 피식 웃고는 작게 소곤거렸다.

“고맙다는 얘기는 존댓말로 하기 그랬나 보네. 하긴, 친구한테 ‘고맙습니다’고 하기는 좀 그렇지.”

“그런가요? 전 잘···.”

“저 친구가 자네보다 나이도 세 살 많잖아. 이 정도는 이해하게.”

“뭐, 친구 사이에 이해하고 말 것도 없습니다.”

“좋아. 자, 이제 다시 평소 모드로 돌아감세.”

“... 실장님도 참.”

빙긋 웃고 난 두진이 목소리를 키웠다.

“화학물질이 누출된 논은 오늘 2차 방제를 하기로 했습니다. 주인을 설득해 그 논 전체의 올해 수확은 포기하기로 했고요.”

“당연하겠죠.”

제법 넓은 논 하나가 오염되긴 했지만, 디니트로 어쩌고 하는 독성 물질이 하천으로 흘러들거나 상가 쪽으로 역류하는 건 간발의 차로 막을 수 있었다.

그래서 교통사고 부상자 말고 독성 물질로 인한 피해자는 전혀 없었다.

“... 누출량이 9,000리터 정도라고 했었죠?”

“네. 탱크로리에 실렸던 전부라고 들었습니다.”

“꽉 채우지 않았던 게 고맙네요.”

“그렇죠.”

화학물질의 유출을 막는 건 그나마 쉬웠지만, 오염된 논을 복구하는 건 어려웠다.

우선 화학물질 및 논의 물을 전부 퍼 올려 밀폐 보관시켰고, 해당 논과 인근은 당분간 접근 금지 조처를 내렸다.

앞으로 해당 논의 흙도 파내고 교환해야 할 터.

“비가 오래 오지 않아서 논에 물이 적었던 것도 다행이었습니다.”

“... 그러니까요.”

두진의 말에 맞장구치는 도훈의 얼굴은 그리 밝지 않았다.

인명피해 없이 사고를 수습한 건 다행이었지만, 뒷수습은 골치 아픈 일이 될 테니까.

“태풍 온다는 데 비 많이 올까요?”

“다른 걸 생각하면, 많이 왔으면 좋겠는데 그 논을 생각하면 너무 많이 와도 걱정입니다. 넘치기라도 하면 큰일 아닙니까.”

“... 그러니까요.”

안 그래도 일이 많은데, 일을 더 만들었다고 속으로 푸념하는 도훈이었다.

그것도 아주 골치 아프고 더럽고 위험한 종류로.

“... 그나저나 그날 맞은 데는 괜찮으십니까?”

“... 하하, 예.”

두진이 묻자 도훈이 머쓱하게 웃으며 얼버무렸다.

뒤통수를 긁는 그는 폭염이 한창인 한여름에 긴 소매 옷을 입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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