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 사람이 사람에게… 1.
9월 마지막 수요일이자 추석 연휴의 마지막 날.
도훈은 느지막하게 일어나 아침 겸 점심을 먹고 설거지를 막 마친 상태.
“자냐?”
도훈은 늦잠을 자는 와중에도 순심이의 짧은 아침 산책을 시키고 아침밥도 챙겨줬고, 사료 한 그릇을 깨끗이 비운 순심이는 아주 편하게 드러누워 자느라 대답도 안 했다.
“자식이 얼마나 열심히 놀았으면···.”
집에 다녀온 이틀간 순심이는 잘 때를 제외하고는 거의 마당에서 셰퍼드들과 뛰어노느라 정신이 없었다.
짧은 다리로 셰퍼드들을 쫓아다니느라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래서인지 대흥에 돌아온 뒤에도 계속 잠만 자더니 오늘까지도 피로가 덜 풀린 모양이었다.
“... 잠이 안 올 것 같은데···.”
도훈도 집에 다녀온 후 내내 잠만 잤다.
어제 시청 당직실에 잠깐 들러 당직 근무자를 격려하고 그간 이상이 없었는지 확인했던 걸 빼면, 온종일 책도 시정 자료도 보지 않고 잠만 잤다.
취임 이후 이렇게까지 긴장을 푸는 건 처음이라서인지, 자도 자도 잠은 쏟아졌고, 자느라 저녁도 때를 놓치고 10시가 다 되어서 미리 사다 놓은 빵 몇 조각으로 때울 정도였다.
그렇게 거의 하루를 잠에 투자하고 나니 뭔가 ‘완전 충전’된 느낌이랄까.
“... 쩝, 우선 담배나 한 대 피우고 보자.”
도훈은 커피를 타서 들고 집 밖 주차장으로 나와 담배에 불을 붙였다.
순심이를 생각해서 웬만하면 집 안에서는 담배를 피우지 않는 그였다.
“완연한 가을이긴 한데··· 가을이 너무 짧다.”
한낮, 햇살이 아주 쨍쨍한데도 선선한 바람이 불어와 전혀 덥지가 않았다.
“... 좋네.”
출근 걱정 없이 늦잠을 자고, 커피 한 잔 마시며 담배 피우는 여유.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그게 일상이었는데, 왠지 너무 오래전의 일 같은 느낌이 들었다.
불과 석 달 정도의 시장 생활이 얼마나 정신이 없었는지 뒤늦게 실감하게 되는 대목이랄까?
문제는 그 시장 생활이 앞으로 3개월이 아닌 30개월도 훨씬 넘게 남았다는 것.
전혀 즐겁지 않거나 완전 보람이 없다거나 한 건 아니었지만, 항상 긴장하고 매사 일에 쫓기다시피 해야 할 시간이 그렇게 길다는 걸 생각하니 좀은 우울해지는 도훈이었다.
“... 응?”
쪼그려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는데 인기척이 느껴졌다.
도훈은 슬그머니 앉은 그대로 방향만 바꿔 사람들과 얼굴을 마주치지 않으려 했다.
그런데 점점 소리가 가까워지더니 주차장 앞 길에 낯선 사람 둘이 멈춰 섰다.
들고 있던 커다란 쇼핑봉투를 내려놓은 두 사람이 한숨을 내쉬고 소매로 이마를 닦았다.
“... 응?”
담배를 피우며 흘끔 하던 도훈은 그들이 한국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아챘다.
옷차림이 ‘세련’과는 거리가 먼 것이 외국인 노동자로 추정되는 두 사람 역시 도훈을 흘끔거리고 있었고, 그러다 양쪽의 시선이 마주쳤다.
“... 안녕하세요.”
“안녕··· 하세요.”
상대가 수더분하게 웃었기에, 도훈이 엉겁결에 인사했고, 상대방이 꾸벅 고개 숙이며 답했다.
“......”
“......”
인사를 나누고 나니 더 할 말이 없어 잠시 뻘쭘한 시간이 흘렀고, 도훈이 먼저 입을 열었다.
“어디 멀리 가세요?”
“... 어디? 아, 네팔에서 왔어요.”
도훈은 딱 보기에도 무거운 짐을 들고 어디까지 가느냐 물었는데, 외국인은 어느 나라에서 왔느냐 묻는 걸로 알아들은 모양.
“고생 많으십니다.”
“... 당신도요.”
쪼그려 앉아 커피 마시며 담배 피우는 사람이 들을 말은 아니었기에, 도훈은 상대가 우리말이 그다지 익숙하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거, 들고, 멀리, 멀리까지, 가요?”
“어, 서련니까지요.”
도훈이 바디 랭귀지를 섞어가며 더듬더듬 묻자 두 외국인 중 키가 좀 작고 나이 들어 보이는 쪽이 답했다.
“설연리? 그렇게나 멀리요?”
“맞아요, 서련니.”
도훈이 놀란 건 도훈의 집에서 운계면 설연리까지 1km가 넘는 거리였기 때문.
어디서부터 걸었는지 모르겠지만, 이미 무거운 짐을 들고 걷느라 땀으로 범벅인 두 사람에게는 상당한 고역일 터.
“택시라도 부르지 그랬어요.”
“택시? 안 와요.”
택시를 불렀는데 안 왔다는 건지, 부르지 않았다는 건지 모르겠지만 보기에도 안쓰러운 두 사람을 그냥 보내기에는 도훈의 마음이 편치 않았다.
“내가 태워다 줄게요.”
“태워? 파이어? 왜요?”
“......”
도훈이 다시 손짓 발짓을 섞어가며 주차된 자신의 SUV와 두 외국인, 그리고 그들의 짐을 싣고 운전하는 시늉을 해 두 사람을 이해시켰다.
말뜻을 알아들은 두 사람은 대번에 얼굴이 환해졌고, 도훈은 안에 들어가 지갑과 차 키를 챙겨 나왔다.
“타요!”
“감샤합니다!”
위아래 모두 츄리닝에 슬리퍼를 신은 아주 ‘편한’ 모습으로 짐을 싣고 두 외국인을 태운 도훈은, 채 10분도 되지 않아 외국인의 손짓 안내를 따라 설연리의 어느 공장에 도착했다.
‘여기도 공장이 있었네?’
차를 세운 도훈이 속으로 중얼거리는데, 닫힌 정문 옆 작은 쪽문에서 외국인 노동자 둘과 돋보기안경을 쓴 한국인 노인 하나가 걸어 나왔다.
노인이 도훈을 의아하게 바라보다 키가 작은 쪽의 외국인에게 물었다.
“마가르, 택시는?”
“택시? 안 왔어. 이 사람 때문에··· 친절해요.”
노인이 도훈에게 다가와 말없이 쳐다봤고, 도훈이 입을 열었다.
“무거운 짐을 들고 길을 걷고 있길래, 제가 태워준다고 했습니다.”
“그래요. 고맙네요.”
푸근하게 웃는 노인에게 도훈이 질문을 던졌다.
“설마 저분들 물건 사러 갈 때도 걸어갔습니까?”
“아니요. 공장장이 일 보러 나가면서 마트까지는 태워다 줬지. 올 때는 택시 타고 오라고 했는데 택시가 안 잡혔나 보네요.”
노인은 도훈이 시장인 걸 모르는 듯했지만, 도훈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혹시 외국인 노동자들 말고는 어르신 혼자 계신 겁니까?”
“그래요. 내가 기숙사 관리인이나 마찬가지거든. 잠깐만요, 젊은이. 마가르!
노인은 도훈의 트렁크에서 내려진 짐이 큼지막한 비닐 봉투 둘 뿐인 걸 보고 마가르에게 걸어갔다.
한국어, 짧은 영어 거기에 온갖 손짓 발짓을 동원한 대화가 얼마간 이어지더니 노인이 혀를 차고 도훈에게 돌아오며 중얼거렸다.
“택시 불러서 갔다 와야겠네.”
“택시를 불러요? 혹시, 짐이 더 있습니까?”
“아, 들었어요? 살 게 좀 많았거든.”
노인이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콜택시 번호가··· 어디 보자.”
노인이 돋보기안경을 추어올리고 작은 피처폰 액정을 살피는 걸 가만히 바라보던 도훈이 말을 이었다.
“멀지 않으면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 고맙긴 한데···. 괜찮겠어요?”
“가까운 마트까지 한번 왕복하는 거 아닙니까. 쉬는 날 할 일도 딱히 없는데요, 뭐,”
“그럼 도와주시겠소?”
“물론입니다.”
“정말 고마워요. 잠깐만요. 마가르!”
노인이 마가르에게 다가가 뭐라 설명했고, 잠시 후 차에 탔던 남자 둘이 환하게 웃으며 다가왔다.
“던에바드!”
“감사··· 합니다.”
“천만에요. 어서 타요.”
두 사람을 뒷좌석에 태운 도훈이 마트를 향해 차를 몰았다.
도훈의 집 근처 마트에서 맡겨뒀던 짐을 찾아 공장으로 돌아오기까지는 채 10분도 걸리지 않았다.
“정말 고마워요, 젊은이.”
“아닙니다, 어르신.”
“사례해야 하는데···.”
“아이고, 그런 말씀 마십쇼. 이까짓 일로 무슨 사례를요.”
“그럼 커피라도 한잔 하고 가겠소?”
“괜찮습니다.”
“가만, 그럼 잠깐만 있어 봐요.”
“네?”
“아직 가지 말고, 잠깐만 기다려요.”
노인은 도훈을 기다리게 한 뒤 공장 안으로 들어갔다가 금방 돌아왔다.
노인이 도훈에게 손에 든 캔 커피 두 개를 건넸다.
“가면서 마셔요. 정말 고마웠어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안녕히 계세요.”
“그래요. 어서 가봐요.”
캔 커피를 받아든 도훈이 꾸벅 고개 숙여 인사하고 차에 올랐다.
그런데···.
키리릭. 키리리릭.
“어라?”
조금 전까지 멀쩡히 잘 달렸던 차의 시동이 걸리질 않는 게 아닌가.
키리리릭, 키리리릭.
“... 얘가 갑자기 왜 이래?”
당황한 도훈이 연거푸 키를 돌렸지만, 낡은 SUV는 푸드덕대기만 할 뿐 시동이 걸리질 않았다.
“왜, 시동이 안 걸려요?”
저만치 섰던 노인이 운전석 곁으로 다가와 물었다.
“그게··· 갑자기 이러네요.”
어색하게 웃으며 답하는 도훈을 향해 노인이 이유 모르게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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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리릭.
“이건 아니고···. 어디 보자. 이쪽인가?”
어느새 공장 안으로 옮겨진 도훈의 낡은 SUV는 보닛이 열린 상태.
차의 보닛을 열고 능숙한 움직임으로 이것저것 확인하고 있는 건 다름 아닌 돋보기안경을 쓴 노인이었다.
끝내 차 시동이 걸리질 않자 노인이 차를 봐주겠다고 말했고 외국인 노동자들이 차를 밀어 공장 안으로 들어온 터.
“이거구먼. 이게 문제였어.”
노인의 혼잣말에 곁에서 지켜보던 도훈이 물었다.
“되겠습니까, 어르신?”
“어, 부품 하나만 바꾸면 되겠어요. 차가 오래되긴 했지만, 상태는 좋네. 관리를 잘했나 봐?”
“아, 예.”
지금은 은퇴하고 공장 경비원 겸 노동자들 기숙사 관리를 한다는 노인은, 젊어서 카센터를 운영했단다.
일을 손에서 놓은 지 좀 됐다지만 오랜 경력의 전문가다 보니 어렵지 않게 문제가 뭔지를 알아챈 모양이었다.
“어, 박 사장. 나 김 간데, 오늘 쉬긴 해도 어디 멀리 안 갔지? 아, 그래? 다행이네. 부품이 필요해서 연락했어.”
차를 살핀 노인이 누군가와 통화했다.
나누는 얘기로 보아 자동차 부품가게 사장과 통화하는 모양이었다.
곧 통화를 마친 노인이 도훈에게 웃는 낯으로 다가왔다.
“한 30분 정도 기다려요. 부품가게 사장이 마침 가게에 나와 있었다네요. 30분이면 부품 가지고 올 거요.”
“정말 감사합니다, 어르신.”
“하하, 뭘. 도움받은 걸 갚을 수 있어 다행이오. 이리로 와요.”
도훈은 노인을 따라 그늘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내가 하는 일이니까 공임은 필요 없는데, 이따가 부품값은 내야 해요.”
“물론입니다. 수고비도 드려야죠.”
“에이, 그럴 수야 있나. 호의는 호의로 갚는 거라오.”
노인이 푸근히 웃으며 도훈의 제안을 거절했다.
도훈이 연거푸 수고비를 내겠다고 말했지만, 노인은 끝내 거부했다.
계속 고집하다가는 노인이 화를 낼 기색이라 수고비 건네기를 포기한 도훈은 생각 끝에 차에 다녀와 캔 커피를 내밀었다.
조금 전 노인에게 받은 바로 그 캔 커피였다.
“하하, 이거면 충분해요.”
도훈과 노인은 그늘에 나란히 앉아 커피를 마시며 얘기를 나눴다.
“여기 외국인 직원이 많습니까?”
“여섯 명 있어요. 우리나라 사람은 넷. 외국인 직원이 더 많지. 이런 영세한 공장, 그것도 시골에 있는 공장은 외국인 직원이 아니면 운영이 어려워.”
“흠. 그렇군요.”
시간을 보내느라 한동안 이런저런 얘기를 하는데, 노인의 이야기가 외국인 노동자들의 안타까운 처지로 이어졌다.
“우리 공장은 그나마 나아. 월급 제대로 주고, 기숙사 운영해서 무료로 숙식도 제공하니까. 하지만, 공단에 있는 공장 중에는 좀 심한 곳도 있다더라고.”
“... 그래요?”
“우리 외국인 직원들도 외식도 하고 다른 공장에서 일하는 자기 나라 사람들과 아주 가끔 만나기도 하고 그러거든. 당연히 서로서로 환경을 비교하지 않겠소? 전부는 아니지만, 심한 곳이 있는 모양이오.”
“흐음.”
캔 커피를 마시느라 노인은 보지 못했지만, 어느새 도훈의 눈빛이 서늘하게 변해 있었다.
“쩝, 사람이 사람에게 그러면 안 되는 데요.”
도훈이 안타까운 표정으로 말했고 노인이 맞장구를 쳤다.
“그렇지. 주기로 한 것만 줘도 그나마 이들한테는 도움이 될 테지. 하지만, 어떤 놈들은 심한 걸 넘어서 악랄하기까지 하다는데···. 참, 사람이 그러면 안 되지.”
미간을 잔뜩 찌푸린 노인의 말에 도훈이 차분한 표정으로 물었다.
“얼마나 심하길래 악랄하다고까지 하십니까?”
“말도 마요. 내가 본 건 아니고 우리 외국인 직원들한테 들은 건데···.”
노인의 말을 경청하는 도훈의 눈빛이 점점 더 차갑게 가라앉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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