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 해묵은 과제 - 1.
“잘 가요, 로안. 고마웠어요.”
“나야말로 고마웠어요. 고맙기만 한 건 아니지만요.”
“미안해요.”
“... 아뇨. 당신이 미안해할 일은 아니죠. 당신의 행동이 틀린 것도 아니고요.”
마지막으로 떠나는 로안과 다른 한 명의 외국인 노동자를 배웅하며 도훈이 담담히 악수했다.
외국인 여덟 중 합법 체류 상태인 셋은 다행히 폭행 사건 발생 닷새 만에 노동청과 산업인력공단에서 주선한 다른 직장으로 옮기며 먼저 대흥시를 떠났다.
정리를 빨리 마친 불법체류자 셋이 먼저 그제 출국했고, 로안과 동료가 열하루 만에 출국하게 된 터.
“홍 주무관님, 조 비서관님, 고생하세요.”
“다녀오겠습니다.”
운전석의 영진과 영배에게 인사한 도훈이 뒷좌석의 외국인들에게 손을 흔들자 로안의 동료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많이 고마워요, 시장님.”
“천만에요.”
“또 봐요.”
“... 네. 잘 가요.”
영진과 영배는 인천공항까지 외국인들을 바래다줄 터.
밴이 떠났고 도훈 옆에 선 두진이 입을 열었다.
“그래도 저들은 운이 좋은 편입니다.”
“그렇죠.”
폭행과 감금 가해자인 공장 사장 형제가 처벌받는 데다가 그들로부터 밀린 임금, 폭행 보상금까지 받고 불법체류자 자진출국 기간의 혜택을 받으니 운이 좋아도 아주 좋다 할 수 있었다.
피폐해진 생활 끝에 아무것도 챙기지 못하고 강제 출국당하는 이들이 다수가 아니던가.
불법체류 노동자 다섯이 출국 전까지 도훈의 감독하에 남을 수 있었던 건, 그들이 출입국관리사무소에 자신들의 처지를 자진 신고했기 때문.
그들이 자진출국 의사를 밝혔고 범죄 피해를 입었다는 사실을 고려해 출입국관리사무소는 도훈이 출국 때까지 감독한다는 조건으로 그들이 대흥시에 머무르는 걸 허락했다.
“우리도 운이 좋았다고 할 수 있겠죠, 실장님?”
“조금은요.”
지난주, 도훈은 경찰과 노동청과 협력해 대흥시의 공단 및 관내 외국인 노동자 실태를 점검했다.
적법한 절차를 거쳐 외국인 노동자를 고용하고 있고 제대로 대우하고 있으며 혹여 불법체류자를 몰래 쓰고 있는 건 아닌지 말이다.
또한, 외국인 노동자들에게도 그들이 받을 수 있는 법적 보호절차를 안내했다.
이 과정에 로안과 외국인들의 도움이 있었다.
시청에서 제작한 우리말 안내문을 각자의 나라 언어로 번역해줬으니까.
다행히, 또 다른 불법체류자가 발견되지는 않았고 공장 두 곳에 외국인 숙소 관련 시정조치가 내려진 것 말고는 큰 문제가 없었다.
공장 자체가 많지 않고 노동자를 고용할 정도의 규모로 시설, 상품 농업을 하는 이가 적은 덕분이랄까.
“사무실로 돌아가죠, 실장님.”
“네.”
저만치 떨어진 의회 현관에 나타난 누군가를 알아본 도훈이 두진에게 말했고, 두진도 그 사람을 확인하고 미간을 찌푸린 채 답했다.
계단을 오르며 두진이 속삭였다.
“요새 방금 그 양반에 대한 새로운 별명이 생겼다는 거 아십니까?”
“아뇨.”
“누가 먼저 부르기 시작했는지 모르겠는데 ‘부스럼 2’랍니다.”
두진의 말에 도훈이 미간을 찡그리고 물었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사정을 끝까지 알아보고 차분히 대응해야 할 일을 괜한 욕심에 나서 ‘긁어 부스럼’이 됐다는 말이지요.”
“... 그럼 ‘부스럼 1’도 있다는 거네요?”
“네. 그 별명 생긴 지 꽤 됐답니다. 저도 이번에 부스럼 1, 2를 동시에 알았습니다.”
부스럼 1은 차혜진 의원을 말하는 것이었다.
사정을 찬찬히 살피고 신중히 판단해야 할 일을, 튀어보려는 욕심 때문에 혹은 ‘흠집을 낼 좋은 구실’로 여겼다가 시의회에서 섣부르게 도훈에게 시비를 걸었다가 된통 당했으니까.
그녀의 뒤를 잇는 부스럼 2는 민의당의 장민호 의원으로, 이번 외국인 노동자 관련한 건으로 시의회에서 도훈을 노렸다가 오히려 망신을 당한 뒤 붙은 별명이었다.
- 시장님, 최근 우리 시 공단에 자리한 공장의 업주가 시장님 때문에 폐업을 고민하고 있다는 걸 아십니까?
- 무슨 말씀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 외국인 노동자를 고용한 건으로 문제가 생겼는데, 그들을 시장님이 부추겼다고 생각하고 있더군요. 이게 사실입니까?
- 사실이 아닙니다. 경찰에 관련 사실을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 이미 확인해 봤습니다. 폭행, 감금 등의 혐의를 받고 있던데, 공장주는 억울하다고 했습니다. 해당 공장에 한국인 직원도 있습니다. 공장이 폐업하면 직원들이 직장을 잃게 됩니다. 좀 더 신중히 행동하셨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
- 저 의원님, 그 일에 대해 좀 더···.
- 공장주가 특히 문제시한 것은 시장님의 치우친 태도입니다. 문제가 있을 때 쌍방의 주장이 엇갈리면 차분히 양자의 주장을 모두 들어주는 게 맞을 겁니다. 특히 한 시의 시장이라면 더욱 그래야 하겠지요. 하지만, 시장님은 처음부터 노동자들 편을 들었다더군요. 그것도 다수가 불법체류자인 걸 알면서도 말이죠. 이는 문제가 있는 태도 아닙니까?
문제의 사건이 터진 다음 주 화요일, 출석요구를 받아 의회에 출석한 도훈을 발언대에 세운 뒤 장민호가 추궁했다.
- 의장님, 이 질문에 대한 제 답변은 비공개로 하고 싶습니다. 의장님과 의원님들에게만 말입니다.
- 그럴 필요가 있습니까? 대강의 사정은 저도 들었는데요.
- 의심할 여지가 없는 일입니다. 그 증거를 보여드리고 싶은데, 의회에서 공개하기엔 좀 충격적이기도 하고 개인 신상을 불필요하게 드러낼 위험이 있습니다.
의장의 양해를 받아 시의원들만 모인 자리에서 도훈은 구타 장면과 공장 내 시설을 찍은 영상을 보여줬다.
게다가 서류상 공장주는 현행범으로 구속, 실질 소유주는 다행히 구속은 면했고 공장 직원들도 폭행과 감금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진 않았지만, 참고인으로 조사를 받아야 한다는 얘기도 해줬다.
장민호를 포함한 모두가 말문을 잃은 가운데, 잠시 후 속개된 의회의 첫 발언자는 다름 아닌 장민호였다.
- 오늘 제가 시장님을 상대로 한 모든 발언을 철회합니다.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장민호는 그렇게 말해야 했다.
의원들만 있는 자리에서 이미 도훈에게 ‘미안하다.’ 말해서 공개적인 사과를 할 필요가 없었던 게 그나마 다행이랄까.
후에, 안준식 의장에게 대충의 사정을 전해 들었다.
- 장 의원이 지난번 조례 개정안 통과 이후로 시장님을 벼르는 눈치이긴 했습니다만, 그렇게 저지르고 보자 식으로 나올 줄은 몰랐네요.
- 공장 사장이 어떻게 말했길래 그런 겁니까?
- 그 사람이 의원들을 쫓아다니며 ‘억울하다’는 얘기를 좀 했거든요. 그래도 다들 신중했지요. 상습폭행에 감금이 어디 보통 일입니까? 의원 중에 장 의원이 그나마 그 사장의 얘기를 잘 들어주니까 사장이 급한 마음에 매달려서 나오는 대로 얘기를 했던 모양입니다. 경찰 쪽에서 ‘동생이 현행범이고 사장은 공범인데 혐의가 거의 확실하다’고 얘기해 줬거든요. 의원들이 다 아는 얘기인데 장 의원이 경솔하게도 그걸 문제시해버렸네요.
- 그랬군요.
- 사실, 저도 경찰 얘기를 듣고도 그런가 보다 했는데, 영상 보고 많이 놀랐습니다.
여하튼, 그런 작은 잡음이 있긴 했지만, 사건은 순탄하게 해결되는 과정에 있었다.
공장주 형제는 피해자들에게 금전적 보상을 해주고 민사소송을 면했고, 처벌을 가볍게 해달라는 탄원서까지 받아냈지만 완전한 형사상 면책은 불가능했다.
직원들도 기소까지 되지는 않을 거라는데, 공장의 재가동 혹은 폐업 여부는 아직 결정된 게 없었다.
계단을 걸어 3층에 오른 도훈이 문득 생각난 걸 물었다.
“업무 지침은 언제까지 완성하기로 했죠?”
“이번 주 목요일에 초안을 보고받기로 했습니다.”
“훗, 도청 걸 요약만 해도 될 것 같던데요.”
“그러니까 그렇게 빨리 되는 걸 겁니다.”
지금껏 대흥시에는 불법체류자는 물론 외국인 노동자 관리에 대한 특별한 지침이나 매뉴얼이 없었다.
현재 대흥시의 외국인 노동자는 백 단위가 되지 않지만, 앞으로도 그러리라는 법은 없다.
이번 일을 계기로 도훈은 지역경제과에 외국인 인력 관리 업무 지침을 만들게 했고, 이 과정에 불법체류자 관련 부분도 포함 시켰다.
사례가 많은 다른 시의 매뉴얼을 참고하고 대흥시 상황에 맞도록 수정한 이 지침을 통한다면, 최소한 어쩔 줄 모르고 허둥대는 상황은 피할 수 있을 터.
“도청 매뉴얼 작성을 민세경 과장이 총괄했다던데, 그냥 부시장님 조카가 아니고 능력자였습니다.”
“하하, 네.”
대흥시 매뉴얼 작성에 가장 큰 도움이 되는 건 재작년에 도청에서 만든 충청남도 외국인 노동자 관리 업무 지침.
일목요연하고 가능한 경우의 수를 다양하게 고려한 데다가 외국인 노동자가 많이 오는 여러 국가 언어로 꼭 필요할법한 회화가 부록으로 첨부되어 있어, 대흥시 실정에 맞는 부분을 선별 요약만 해도 훌륭한 지침이 됐다.
도청 지침이 당시 노동정책과장이던 민세경이 제안하고 총괄해 만들어졌다는 걸 도훈은 이번에 알았다.
“그 시장, 군수 회의 준비는 잘 돼갑니까?”
“딱히 저희가 열심히 준비할 게 없잖습니까. 다음 주 수요일에 선발대 와서 사용할 공간과 기기만 준비하면 됩니다.”
“뒤풀이 음식점은요?”
“리스트 만들어서 전해줬습니다. 도청 쪽에서 알아서 할 겁니다.”
시장, 군수 회의가 다음 주 목요일로 예정되어 있었다.
시청에서는 딱히 준비할 게 없이 도청 준비팀이 요청하는 부분만 해결해 주고 있는데, 업무 성격이 그래서 준비팀이 시청에 방문할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자주 보자던 민세경은 그날 이후 한 번도 시청에 나타난 적이 없었다.
도훈과 두진이 비서실로 들어서자 자기 책상에 앉았던 정임이 일어나 다가왔다.
그런데 그녀의 표정이 좀 이상했다.
“왜 그래, 고 주무관? 무슨 일 있어?”
두진의 말에 정임이 핸드폰을 꺼내더니 웬 사진을 띄워 보여주었다.
“... 서명운동? 이게 뭔가?”
“운계면 주민센터 신축을 요청하는 주민서명운동 용지에요. 친구가 찍어서 보내줬어요.”
“주민센터 신축?”
도훈과 두진이 의아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봤다.
주민센터를 새로 지을 필요가 있는 게 맞긴 했고, 주민의 요구도 높았지만 이렇게 서명운동까지 필요한 건가 싶었으니까.
주민센터를 새로 지을 필요가 있다는 건 시청도 공감하는 부분이나 예산 문제로 당장 시행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 아니던가.
특히, 현 주민센터 옆의 공터 주인의 요구가 만만치 않기 때문에.
“이 서명용지 언제부터 돌고 있는지 알아?”
“아뇨. 그건 저도···. 다만 제법 많은 사람이 참여하고 있답니다.”
“누가 주도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군.”
“... 네.”
“이걸 어쩐다···?”
“......”
두진과 정임이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말문을 못 잇고 있는데, 도훈이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어쩔 필요 없습니다.”
“네?”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의견을 모으는 건데 저희가 뭘 어쩌겠어요. 서명용지 모아서 나타날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죠.”
“하지만, 시장님. 이건 의심스러운 부분이···.”
두진이 말끝을 흐렸지만, 도훈은 그가 뭘 걱정하는지 모르지 않았다.
최근, 장민호 의원과 의견 차이가 드러나거나 안 좋은 일로 부딪히는 경우가 많으니 그와의 관련성을 우려하는 것일 터.
“거기에 문제의 그 주차장 매입하라는 얘기가 있나요?”
도훈이 물었고 정임이 답했다.
“그 내용은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그렇겠죠. 혹시 그걸 노린 거라고 해도 주민들이 바보도 아니고 그 땅을 포함 시키면 무슨 의도가 있는 건지 뻔히 보일 테니까요.”
“......”
“지금으로선 그 서명운동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주민들의 자발적인 행동이라고 생각하세요. 그러니 누가 주도하고 있는지 알아볼 필요도 없겠지요. 때가 되면, 싫어도 마주하게 될 테니까요.”
“......”
도훈의 말을 두진과 정임도 알아들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고 아무렇지 않게 넘어가기엔 걸리는 게 있었다.
“저 서명운동이 나중에 시장님을 압박하는 무기가 될 수도 있잖아요.”
정임의 말에 도훈이 쓰게 웃고는 답했다.
“압박당해야죠, 뭐. 시민의 의견이 모인 건데 압박감을 느끼지 않으면 그게 더 큰 일 아닙니까.”
“주민참여 예산 선정일이 다가오는데, 그때를 노린 걸까요?”
“글쎄요.”
도훈이 비서실 소파에 앉아 담담히 말을 이었다.
“그 서명운동 용지가 언제 어떻게 나타나는지 두고 보면, 그 의도를 좀 더 정확히 알 수 있겠죠.”
두진과 정임이 고개를 끄덕이는데 도훈이 말을 이었다.
“실장님.”
“네.”
“기획감사실하고 건설교통과에 연락해서 그간 운계면 주민센터 신축 계획 관련한 자료를 전부 모아주세요.”
“살펴보시게요?”
“그래야죠. 어떻게든 시민의 요구가 있으면 그에 대해 답할 의무가 있잖습니까.”
“... 그렇지요.”
“이왕 답해야 한다면, 최대한 합리적인 안을 찾아봐야죠.”
“알겠습니다. 바로 준비시키겠습니다.”
도훈은 자기 방으로 들어갔고, 두진과 정임이 각각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그렇게 도훈의 눈앞에 새로운 과제가, 그것도 무척 해묵고 어려운 과제가 주어지고 있었다.
# 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