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홧김에 시장 되다-84화 (85/279)

84. 예산 시즌 - 3.

일요일 오후, 대흥시청 시장 비서실.

“... 아니, 시청 앞 인도 보도블록은 맨날 다니면서 봐도 어디 깨진 거 찾기가 어렵던데, 이건 왜 요청했답니까?”

“그것까진 모르죠. 이건 일단 들어온 걸 모두 취합한 것뿐이니까요.”

“유서면 농수로 정리? 이거 작년에 해서 진행할 필요가 없다고 했던 것 같은 데 아닙니까?”

“맞습니다. 의원들이 흔쾌히 동의했던 몇 안 되는 부분이었죠.”

“... 금선면 가로등 교체? 여기 그 오상리까지 이어지는 길 말하는 것 맞죠?”

“네. 그럴 겁니다.”

“여기도 멀쩡하던데···.”

어이가 없어도 이 이상 없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의 도훈에게 두진이 담담히 답했다.

“제가 말씀드렸잖습니까. 일단 잔뜩 밀어 넣고 하나씩 포기하면서 정말 주력하는 걸 챙기는 방식이라고.”

“... 그래도 첫 장부터 이런 식일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습니다.”

“저도 시장님께서 중간중간 의원들과 소통했기에 올해는 이 정도는 아닐 줄 알았습니다.”

“... 허.”

“중복된 걸 제외하니까 예년보다는 좀 적은 수준이긴 합니다.”

“... 그래도 이건 정말···.”

말문을 잃은 도훈이 예산팀에서 취합한 예산 조정 의견 안을 빠르게 훑었다.

시의회에 제출한 예산안도 두꺼웠지만, 불과 며칠 사이에 정리된 조정안도 도훈의 생각보다는 매우 두꺼웠다.

한번 훑기만 했는데도, 시 집행부 논의를 통해 줄이고 삭제한 것들의 반 이상이 조정 신청이 들어온 것을 확인할 수 있을 정도였다.

서류에 시선을 고정한 채 말문을 잃은 도훈에게 두진이 말을 이었다.

“이건 제 짐작인데, 예상 밖으로 조정 제안이 많은 데에는 곡절이 있는 것 같습니다.”

“곡절이요?”

“네.”

막상 예산 시즌이 되니 다시 실감하고 있지만, 두진은 도훈에게 예산안 수립 과정의 중요성을 이전부터 강조했었다.

논의 과정에서 의원들과 충분히 소통하지 않으면, 완성된 안이 의회에 상정됐을 때 홍역을 치른다고 말이다.

때문에, 도훈은 기본적인 예산 수립의 원칙부터 의원들에게 거듭 설명한 후 예산안 작성을 시작했다.

그 과정에 의원 개인의 성향에 따른 반응의 차이는 물론 있었지만, 이렇게 봇물 터지듯 조정 요구를 하는 건 정말 예상 밖이었다.

“예산팀장이 말하길, 복수의 의원이 바람을 잡는 느낌이랍니다.”

“... 바람을 잡아요?”

“네.”

도훈은 대번에 두진의 말뜻을 알아챘다.

“먼저 자기 지역구 조정안을 왕창 내민 사람이 있다는 말이군요?”

“네.”

“다른 의원들이 뒤늦게 눈치가 보여 뒤따랐고 말이죠.”

“맞습니다.”

“한 사람은 차혜진 의원일 것 같고··· 복수라고 하셨으니까 서태기 의원도 그런 겁니까?”

“... 하하, 정확하십니다.”

두진이 쓰게 웃으며 답했고, 도훈의 표정도 비슷하게 변했다.

“... 휴우. 차 의원님은 좀 이해 가는 면이 있기도 한데, 서태기 의원은 도대체 왜 그러는 건지···.”

“......”

두진은 푸념하는 도훈을 안쓰럽다는 듯한 시선으로 바라만 봤다.

딱히, 뭐라 위로하거나 격려할 말이 없었으니까.

“참, 장민호 의원님은 어떻답니까?”

“안 그래도 제가 예산팀장에게 물었는데, 앞장서서 조정을 요구하지는 않았답니다. 민의당 다른 의원들처럼 서 의원님이 돌출적으로 나오시니까 뒤늦게 뒤따르는 느낌이었다고 하더군요.”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나마 다행이네요.”

“그 이유는 제가 짐작이 가는데, 예산 관련한 시장님 의견에 좀 더 공감해서는 아닐 겁니다.”

“... 아니면요?”

의아해하는 도훈에게 두진이 푹 한숨을 내쉬고 설명했다.

“휴우. 그 두 의원이 지역구가 같잖습니까?”

“그렇죠.”

“같은 당 의원이긴 하지만, 이런 때는 서로 경쟁자이기도 한 겁니다.”

“경쟁자요?”

“네. 지역구를 공유하는 처지에서 한 사람이 예산 문제로 주민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는 건 꼭 좋은 일이라고만은 할 수 없죠.”

대흥시 시의원 선거구는 두 곳으로 한 곳당 세 명씩의 지역구 시의원을 뽑고, 한 명이 비례대표로 뽑히게 되어 있었다.

서태기와 장민호는 같은 지역구 소속이었다.

“... 잘 이해가 안 갑니다.”

“이렇게 생각해보세요. 서 의원은 생색내기 쉬운 사안을 중심으로 예산을 조정하자고 했고, 뒤늦게 장 의원도 거의 비슷한 사안에 대한 조정을 요구했습니다. 전부가 아니라 해도 일부 조정을 이뤄냈다고 가정해보죠. 사이좋게 두 사람이 함께 노력해 이뤄냈다고 하겠습니까?”

“... 서 의원이 자기 공이라 선전할 거라는 겁니까?”

“십중팔구 그럴 겁니다. 혼자 돋보일 수 있는데 왜 스포트라이트를 나눠 받으려고 하겠습니까.”

“......”

“게다가 그 지역구 시의원 셋이 전부 민의당 의원들입니다. 당연히 같은 당 의원들이라도 서로 튀어야 하는 처지라는 거죠. 안 의장님과 차 의원의 지역구와는 사정이 다르죠. 그쪽은 이미 당이 다른 의원들끼리 경쟁하고 서로 대비되는 처지이지만 서, 장 의원의 지역구는 다 같은 당이라서 ‘튈’ 기회가 적거든요.”

“... 안 그래도 유권자에게 주목받기 쉬운 예산 문제니까···.”

“네. 서 의원이 작심하고 나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장 의원과 심 의원은··· 쉽게 말해 뒤통수를 맞은 거죠.”

“... 장 의원도 장 의원이지만, 심 의원님이 안쓰럽네요.”

“... 허허.”

두진과 도훈이 언급한 심 의원이란 심남진이란 이름의 민의당 소속 47세 초선 시의원으로, 매사 차분하고 조용하며 있는 듯 없는 듯한 인물이었다.

그는 대흥시 토박이가 아니라 도훈보다 1년 정도 먼저 대흥시로 이사를 온 서울 출신이었다.

성향은 안준식과 비슷한 것 같은데, 딱히 튀지 않으니 확실하질 않았다.

심남진이란 시의원을 한마디로 평하자면, 매사 열심히는 하는데, 왠지 모르게 존재감이 없다고나 할까?

심지어 그는 현 대흥시 의회의 부의장임에도 말이다.

서태기가 작심하고 노선을 바꾸면서 장민호도 타격 아닌 타격을 입겠지만, 평소에도 존재감이 없는 심남진이야말로 더 큰 타격을 입을 터였다.

“흐음.”

도훈이 다시 조정 의견 안을 훑기 시작했다.

몇백, 천몇백 등 한 사안이 필요로 하는 금액은 많다고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런 사안들이 모이고 또 모이니 당연히 그 합계는 상당한 수준이 될 수밖에 없었고, 이 요청을 최소한이라도 수용한다면 다른 부분의 조정이 불가피했다.

그러면 도훈이 세운 예산 수립의 원칙은 제대로 시작도 못 하고 후퇴할 수밖에 없을 터.

“찬찬히 살펴보시고, 이따가 말씀 나누시죠.”

“네.”

“전 제 자리에 있겠습니다.”

“알겠습니다.”

휙!

두진이 나가고 문이 닫히자마자 도훈은 들고 있던 서류를 테이블에 던져버렸다.

그 서류에 적힌 항목 하나하나가 정말 필요한 것인지 일일이 확인하고 조정하느라 얼마나 고생했던가.

특히, 보도블록 교체와 같이 습관적으로 제기되는 소모성 예산은 현장을 일일이 둘러보느라 비서실 직원들까지 용을 썼었다.

한편으로는 그렇게 예산을 가다듬고, 그 예산이 의회를 통과할 수 있게 하려고 의원들에게 ‘공’을 들이지 않았던가.

“... 생각할수록 열 받네.”

힘없는 목소리로 투덜거리고 있었지만, 도훈이 진심으로 화가 났다는 건 싸늘하게 가라앉은 그의 눈빛이 증명하고 있었다.

- ... 흐음. 잘못하면 사고 치겠는데···?

후손을 바라보는 조상님이 흥미진진하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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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오전, 대흥시 시의회 건물 대회의실.

예산결산특별위원회 개회를 앞두고 사무과 직원들이 분주히 오가는 가운데, 의원들이 하나씩 도착하고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의원님.”

“안녕하세요.”

직원의 인사를 받은 서태기가 마주 고개를 숙이고는 자신의 자리로 향했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안녕하십니까, 의원님.”

“아, 장 의원, 심 의원. 주말 잘 보냈습니까?”

“... 바빴죠.”

“하하, 이맘때야 다 그런 거죠.”

“......”

여유 있게 웃는 서태기와 눈빛이 날카로운 장민호, 그리고 어색한 표정의 심남진.

같은 당 같은 지역구인 세 사람의 표정이 이렇게 대조적인 것은, 셋 모두 지난 주말 지역 당원들 사이에서 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은 때문이었다.

- 서 의원이 우리 지역 예산 안 뺏기려고 작정을 했다며? 시장이 자기 철학대로 예산 짜려고 의원들에게 제법 공을 들였다는데, 지역 예산이 좀 많이 깎였대. 제일 먼저 그거에 반대하고 나선 게 서 의원이라던데?

지역 당원이라고 해도 활동을 열심히 하는 사람은 극소수.

일부 젊은 연령대의 사람을 제외하면 대부분은 특별한 ‘이벤트’가 있을 때나 당원 역할을 하는 이들이었다.

하지만, 서태기는 당원 중 나이가 좀 있으면서도 지역위 활동에 열심히 참여하는 이들과 관계도 오래됐고 친분도 깊었다.

그런 상황이었기에, 이번 예산안 심사 과정에서 어떻게 하면 주목받을 수 있을지 미리 계획을 세워 준비하고 실행했다.

다시 말해, 이번 서태기의 ‘예산 조정안 폭탄 투척’은 진즉부터 계획된 일이었다.

두 후배 의원을 지나쳐 자리에 앉은 서태기가 두 의원을 흘끔 하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제 밥그릇은 스스로 챙겨야지. 니들이 나보다 나이는 어릴지 몰라도 이런 경륜까지 따라올 수는 없지.’

양상택이 사퇴한 후, 서태기는 의회 유일의 다선 의원이 됐다.

그러나 나머지 전부가 초선에 최연소 의원이 의장까지 하는 상황이라 ‘대접’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

게다가 당 지역위 내에서도 서태기와 오랜 친분이 있거나 비슷한 나잇대의 당원보다 젊은 사람의 비중이 점점 늘고 있었다.

당연히, 반쯤은 ‘흘러간 물’ 취급을 당하던 와중에 그런 상황을 반전시킬 절호의 기회를 노렸고, 이제 본격적인 판이 벌어질 예정이었다.

‘... 잘만 하면···.’

서태기는 이번 일을 통해 ‘주목’받는 것만 노리는 게 아니었다.

4년 임기의 시의회 중, 의장과 부의장은 전, 후반기로 나뉘어 2년씩 맡는다.

당 지역위 내에 제대로 존재감을 드러낼 수만 있다면 후반기 의장이 되는 것도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즉, 이번 예산안 심사는 여러모로 서태기에게 ‘도약’의 기회가 되는 일이었다.

서태기가 그렇게 즐거운 상상을 하고 있는데, 안준식이 실내로 들어와 서태기에게 다가왔다.

“서 의원님.”

“아, 의장님.”

복잡한 표정의 안준식.

그도 끝내 예산 조정 요청을 하긴 했다.

하지만, 그가 낸 예산 조정 요청은 단 한 건으로 고심하고 고심한 끝에 고른 복지 관련 분야의 것이었다.

“예산 조정 요청 너무 많이 하신 거 아닙니까?”

“그래요? 저보다 더 많이 하신 분이 계신 것 같던데요.”

“......”

심드렁하게 답하는 서태기의 모습에 안준식이 말없이 얼굴을 굳혔다.

서태기의 말대로 감액되거나 삭제된 지역 관련 예산안을 거의 전부 조정 신청한 사람이 있긴 있었다.

다름 아닌, 도훈과 거래를 하려다 거절당해 화가 난 차혜진이었다.

평소에도 도훈에게 비협조적인 차혜진이 이번에 왜 단단히 마음을 먹었는지 알고 있었기에, 안준식은 차혜진보다 서태기가 더 얄미웠다.

“서 의원님도 시장님의 예산 수립 방침에 공감하신 거 아니었습니까?”

“글쎄요. 전혀 공감하지 못한 건 아니지만, 아무래도 현실과 이상은 다른 거니까 말입니다.”

느물느물하게 대꾸하는 서태기의 면상에 주먹이라도 한 대 날리고픈 심정이었지만, 꾹 참은 안준식이 말없이 꾸벅 인사하고 돌아섰다.

‘건방진 새끼.’

안준식을 굴러들어온 돌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서태기가 잠시 날카로운 눈빛을 안준식의 등에 보내다 서류로 시선을 돌렸다.

어찌 됐든, 이번 예산안은 중요했고 최대한 성과를 내야 했으니까.

서류에 시선을 고정한 의원들이 제각기 종이를 넘기는 소리만 이따금 회의실에 울렸다.

제각기 눈에 불을 켠 의원들의 모습은 진지하다 못해 엄숙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그리고, 같은 시각 바로 옆 건물 3층 어느 방에 사람들을 불러모은 누군가도 싸늘한 분노를 머금은 눈으로 엄숙한 발언을 하고 있었다.

# 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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