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 긴 밤 - 2.
끼익!
차가 청사 현관 앞에 멈추자마자 전원이 달리기 시작했다.
건물 안으로 들어선 이들은 모두 1층 상황실로 향했다.
“어떤 상황입니까?”
제일 먼저 문을 열고 들어선 도훈이 인사도 없이 물었고, 당직근무자가 벌떡 일어서 답하기 시작했다.
“안전센터는 이미 출동했습니다. 저랑 같이 당직하던 직원 한 명도 현장을 확인하러 조금 전에 출발했고요. 파출소에서도 순찰차가 나간 걸 확인했습니다.”
“불이 국도 너머에서 시작되어 이쪽으로 번졌다고요?”
“네. 제가 안전센터에서 전해 듣기로는 그렇답니다.”
당직근무자도 최초에 안전센터에서 전달받은 것 말고는 아직 아는 게 없었다.
전달받자마자 도훈에게 신속히 보고했기에 아직 얼마나 큰 불인지 제대로 확인하지 못한 것.
그러나 산불이라는 건 십중팔구 그 규모나 피해가 작을 수가 없는 것이 아닌가.
“금선면 주민센터나 의용소방대는요?”
“주민센터장에게는 제가, 의용소방대에는 안전센터에서 이미 연락을 했다고 했습니다. 의용소방대는 소집 중일 겁니다.”
화재가 발생한 국도변 야산은 금선면에 속한 지역.
당연히 금선면 직원들과 의용소방대가 먼저 대응해야 하는 게 맞았다.
물론 화재의 규모가 크다면, 시 전체의 직원과 의용소방대가 나서야 할 터.
“정임 씨. 직원 비상연락망에 산불 났다고 공지하시고, 다들 다음 지시를 기다리라고 하세요.”
“네, 시장님.”
“손 주무관님은 안전센터에 연락해서 화재 현장 상황 파악된 거 있나 알아보세요.”
“알겠습니다.”
“조 비서··· 아니 실장님은 의용 소방대장에게 연락해서 금선면 의용소방대가 언제 출동할 수 있는지 확인하세요.”
“네!”
“홍 주무관님은 금선면 주민센터장님에게 연락해서, 지금 어떻게 대응하고 있는지 알아보세요.”
“알겠습니다, 시장님.”
직원들에게 이런저런 지시를 내린 도훈이 영배 앞에 섰다.
제각기 전화기나 핸드폰을 붙들고 통화하기 시작하는 동료들의 모습에 영배가 긴장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 저는 뭐할까요?”
“... 심호흡부터 해요.”
“네?”
“진정부터 하라고요.”
“... 네?”
도훈이 영배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형, 정신 차려. 누가 보면 심장마비 온 줄 알겠어.”
도훈이 지시를 내리다 중간에 있던 영배를 건너뛴 건 그가 너무 긴장한 것 같아서였다.
“... 그, 그러냐?”
“화장실 가서 세수라도 하고 와. 거울도 좀 보고.”
“......”
“얼른.”
“아, 알았다.”
몸을 돌려 걸어가는 영배의 뒷모습에 도훈이 잠시 안쓰러운 시선을 보냈다.
그가 초등학교 때 화재 현장에 있다가 구조된 적이 있어 화재에 대한 트라우마가 살짝 있다는 걸 도훈은 모르지 않았다.
‘혹여라도 현장에는 내보내지 말아야겠네.’
속으로 중얼거린 도훈이 돌아섰고, 통화를 마친 직원부터 보고하기 시작했다.
“비상연락망 공지 끝냈습니다.”
“의용소방대 앞으로 10분이면 출발할 수 있답니다.”
“금선면 주민센터는 지금 직원 소집 중이랍니다. 먼저 모인 사람들은 당장에라도 움직일 수 있고요.”
“알겠습니다.”
직원들의 보고를 확인한 도훈이 당직근무자를 향해 돌아섰다.
당직자는 핸드폰 액정에 시선을 고정한 채 굳어져 있었다.
“손 주무관님?”
“아, 이, 이거 현장 영상입니다.”
당직자가 현장에 나간 다른 당직자와 영상통화가 연결된 핸드폰을 내밀었다.
그리고 모두가 굳어졌다.
“흡!”
“... 아이고.”
“맙소사.”
도로변 야산이 온통 불로 가득했다.
그냥 불이 난 정도가 아니라 넘실거리는 불길이 마치 살아있기라도 한 것처럼 꿈틀거리는 것이 핸드폰의 작은 액정으로도 똑똑히 보였다.
모두가 익히 아는 대흥시의 흔한 야산의 현재 모습이라고는 믿기지 않았다.
잠시, 그 액정에 시선을 고정한 채 말문을 잃었던 도훈이 입을 열었다.
“... 실장님.”
“네.”
“... 현장에 가봐야겠습니다.”
“위험하실 수도 있습니다.”
“현장에 가까이 가겠다는 게 아닙니다. 제가 직접 불을 끄겠다는 것도 아니고요. 하지만, 안전센터장님도 거기 계실 테니까 그분의 판단을 듣고, 우리가 어떤 지원을 해야 하는지 빨리 알아내 움직여야 할 것 아닙니까?”
주택이나 건물 화재가 아닌 산불이라지만, 저렇게 불길이 넘실대는 곳에 교육받고 숙련됐으며 장비를 갖춘 소방관이 아닌 일반인에게 물통이나 펌프를 들려 밀어 넣을 수는 없었다.
밤이고 바람이 거세다는 걸 생각하면 소방관도 위험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닌가.
“... 알겠습니다.”
“홍 주무관님과 다녀오겠습니다. 실장님은 여기서 상황을 총괄해주세요. 핸드폰으로 연락하죠.”
“네. 조심하십시오.”
도훈과 홍영진이 상황실을 빠져나갔고, 잠시 뒤 화장실에 갔던 영배가 돌아왔다.
“... 어라? 시장님은요?”
“홍 주무관님이랑 현장 다녀온다고 나가셨어요.”
“... 이런.”
“조 비서관님 괜찮으세요? 얼굴이 창백한데요?”
“속이 좀 안 좋아서요. 심한 건 아닙니다.”
정임에게 애써 웃어 보인 영배가 두진에게 시선을 돌렸다.
다시 누군가와 통화하던 두진은 핸드폰을 귀에서 떼고 영배를 다독였다.
“앉아서 정신 좀 가다듬게. 분명 긴 밤이 될 것 같으니까.”
“네, 실장님.”
의자에 앉은 영배가 창밖에 시선을 줬다.
저만치 가로등 옆에 서 있는 나무의 두꺼운 가지가 크게 흔들릴 정도로 바람이 세게 불고 있었다.
비가 보름 가까이 오지 않은 건조한 환경에 바람까지 강하게 부니 산불진압에 어려움을 겪을 건 당연지사.
거기에, 가뜩이나 장비도 인력도 부족한 상황에 소방헬기의 지원도 어려운 밤중이었다.
‘하필···.’
영배의 표정이 다시 어두워진 가운데, 거센 바람이 멈출 줄 모르고 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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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재 현장을 향하는 승합차 안.
홍영진이 운전에 집중하는 가운데, 도훈은 두진과 통화하고 있었다.
- 안전센터장과 의용 소방대장의 판단으로 관내 모든 의용소방대를 소집했습니다. 국도 건너 OO 시 소방대도 그쪽 화재 잡고서 지원하기로 했고, 금산 소방서와 대전 남부 소방서에도 지원 요청을 했답니다.
“... 불 끄는 게 쉽지 않은 모양이네요. 다른 건요?”
- 센터장하고 거기까지밖에 통화 못 했습니다. 현장 지휘에 정신이 없는 것 같아서요.
“나머진 제가 가서 확인하겠습니다. 다시 통화하죠.”
- 네. 조심하세요, 시장님.
뚝.
“불길이 보입니다, 시장님.”
도훈이 통화를 마치는 것과 거의 동시에 운전하던 영진이 말했다.
이미 멀리 보이는 산불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도훈이 얼굴을 굳히고 답했다.
“... 네, 저도 봤습니다.”
두 사람은 나란히 말문을 잃었다.
핸드폰 액정으로 확인한 불길도 맹렬했지만, 이렇게 멀리 떨어진 곳에서 보니 불이 타오르는 범위가 만만찮게 넓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불행 중 다행이라면, 산불이 난 야산이 다른 큰 산에 인접한 게 아니고 주변에 민가가 없다는 것이랄까.
높이 솟아오르지 않고 야트막하고 옆으로 넓게 퍼진 야산 주변에는 마을이 붙어있는 것도 아니고 논뿐이었다.
산불 외에 민가의 전깃불 같은 게 보이지 않는 걸 확인한 도훈은 영진에게도 물었다.
“제 기억에는 저 주변에 마을이나 집이 없는 것 같은데, 맞죠?”
“마을이 없는 건 맞을 겁니다.”
“다행이네요. 휴우.”
도훈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데, 영진의 말이 이어졌다.
“그런데 뭘 키우는지는 모르겠는데, 제법 큰 축사 딸린 농가는 한 채 있습니다.”
“... 진짜요?”
“네. 여기서는 안 보이죠. 야산을 돌아가면 있을 겁니다.”
“이런···.”
도훈의 얼굴이 일그러졌고 영진이 얼른 말을 이었다.
“설마 저 야단법석을 모르고 있지는 않겠죠.”
“그랬으면 좋겠네요.”
현장에 출동한 소방차도 경찰 순찰차도 사이렌을 틀었을 테니 분명 그 소리를 들었을 거라고 도훈은 추측했다.
‘그래도 확인은 해야지.’
도훈이 속으로 그렇게 다짐하는 사이에도 차는 빠르게 현장에 가까워졌다.
“여기서 멈춰야 할 것 같습니다.”
“네.”
끼익.
차가 멈추자 도훈은 뛰다시피 조수석에서 내렸다.
출동한 경찰관들이 저지선을 친 가운데, 소방차들은 포장되지 않은 농로를 통해 야산에 바짝 접근해 물을 뿌리고 있었다.
이미 화재가 시작된 국도 쪽 경사면의 불길은 사그라든 상태.
소방대가 끈 게 아니라 더는 탈 게 없어 불길이 잦아든 것이리라.
“센터장님!”
“아, 시장님.”
소방 순찰차에 달린 무전기로 현장을 지휘하는 센터장에게 도훈이 다가갔다.
“어떻습니까?”
“바람 때문에 불길이 거셉니다. 지금은 좀 바람이 잦아들어서 다행인데, 보시는 것처럼 야산 이쪽 경사면으로 번지는 걸 막는 게 한계입니다. 조금씩 산 위로 올라가긴 할 건데, 아무래도 빨리 진화하기는 어렵겠습니다.”
“저 산 반대편에 축사가 있는 농가가 있다던데, 혹시 알고 계세요?”
“네. 경찰관들이 알려주더군요. 혹시 몰라서, 순찰차 한 대하고 우리 펌프차 한 대가 갔습니다.”
“아, 네.”
안전센터장의 말에 도훈은 안도할 수 있었다.
야산에 불이 난 건 당장 어쩔 수 없다지만, 재산피해 혹은 인명피해는 줄이거나 막을 수 있을 테니까.
‘괜히 소방관이 아니지. 이럴 땐 가장 먼저 뭘 챙겨야 하는지 잘 아시겠지.’
도훈이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는데 센터장이 말을 이었다.
“지원 요청은 했는데, 밤이고 바람도 세서 헬기 출동도 어렵답니다. 아무래도 진화보다는 불이 다른 곳으로 번지는 걸 막는 데 주력해야 할 것 같습니다.”
“... 네.”
안타깝지만, 한눈에 봐도 산불은 이미 산 정상 가까운 곳까지 번진 상태.
아무리 야산이고 소방펌프차가 방수하는 물줄기가 멀리까지 나간다지만, 산 정상은 어림도 없었다.
다른 지역의 소방펌프차가 언제 도착할지 모르지만, 설사 이미 와 있다고 해도 당장 진화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전문가가 아닌 도훈이 보기에도 들지 않았다.
‘... 그래도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당장 진화할 수 없는 상황에서 아무것도 없는 야산이 불이 난 건 차라리 천행이라고 할 수도 있었다.
다만···.
‘그 농가가 문제겠지. 일단 펌프차가 갔다니까···.’
끼익.
금선면 의용소방대 차량이 도착한 걸 확인한 도훈이 말을 이었다.
“다른 지역 의용소방대도 곧 도착할 겁니다.”
“네.”
“저희가 또 뭘 도와드리면 될까요?”
“글쎄요. 일단 저희 소방대는 계속 여기 있어야 할 것 같으니까···.”
“소방관들이 몸을 녹일 수 있어야 할 테고, 야식도 필요하겠군요. 지원 오시는 분들도 고려해야 할 테고요.”
“네.”
“알겠습니다. 의용소방대 여성회장님과 상의해서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또 있을까요?”
“음, 일단은 그거면 충분할 것 같습니다. 차량 통제는 경찰에서 책임져 줄 테니까요.”
대흥시 의용소방대는 남성대와 여성대가 분리 편성되어 있었다.
남성대가 구급 및 화재 진압 업무를 보조하는 역할을 한다면, 여성대에는 ‘보급부’라는 부서가 있어 장시간 소방활동이 이어질 경우, 대원들의 간식이나 식사 같은 걸 책임졌다.
“필요하신 게 있으면 뭐가 됐든 아무 때고 말씀해 주세요.”
“네. 그러겠습니다.”
도훈에게 짧게 웃어 보인 센터장은 다시 무전기에 정신을 집중했고, 도훈은 현장 어딘가에 있을 당직근무자를 찾으려 움직였다.
그런데 아무리 찾아도 영상통화로 현장 영상을 보냈던 근무자가 보이지 않았다.
“저기, 혹시 여기에 시청 당직자 한 명이 나왔을 텐데 못 보셨어요?”
“봤죠. 그분 저희 순찰차로 저 야산 뒤편에 있는 농가에 가셨습니다.”
“아, 그래요. 고맙습니다.”
차단선의 경찰관에게 물어 직원의 행방을 확인한 도훈은 두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 불행 중 다행입니다.
“상황이 끝난 게 아니고 그 농가도 있으니까 아직은 그렇게 말하긴 이르죠.”
- 말씀하신 건 제가 여성회장님과 연락해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네. 그리고 여기 나온 당직자 전화번호 좀 알려주세요.”
- 네. 번호가···.
두진에게 번호를 전해 들은 도훈은 즉시 당직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 이상곤입니다.
“저, 시장입니다. 야산 옆 농가에 가셨다죠?”
- 아, 예. 지금 거기에 있습니다.
“곧 불길이 야산 너머로 넘어갈 것 같은데 상황이 어떻습니까?”
- 불길이 아직 직접 보이지는 않는데요. 소방관들이 방수 준비를 하고 있긴 합니다.
“대피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도훈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묻자 직원이 난처한 목소리로 답했다.
- 그게 당장은 좀···.
“네?”
- 당장 대피하기가 좀···.
휘이잉!
잦아들었던 바람이 다시 강해지며 소리가 난 때문에, 도훈은 직원의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다.
“어, 어!”
곁에 있던 영진이 놀라 소리를 냈기에 바람을 등지고 통화하던 도훈이 돌아섰다가 말문을 잃었다.
“......”
야산 정상에 불길이 솟구치며 불똥이 사방으로 날리는 게 보였다.
그 불똥이 떨어진 자리에 또 불길이 솟구쳤고, 산불이 빠르게 반대편 사면으로 퍼지고 있었다.
- 어! 너, 넘어온다!
전화기 너머 직원의 다급한 말이 들려오는 가운데, 딱딱하게 굳어진 도훈의 눈동자에도 불길이 비쳐 일렁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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