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 연말연시 - 1.
2018년 마지막 토요일 저녁, 도훈과 영배는 오래간만에 두진의 집에 와 있었다.
“사모님은요?”
“낮에 이거저거 만들어서 대전 작은딸한테 갔어. 아마 영화 보고 쇼핑하고 지금쯤 작은애 자취방에서 모녀가 술판을 벌이고 있을지도 모르지. 그 사람 나름의 기분 풀기에 멋 내기라네.”
“에이, 설마요.”
“설마는 무슨? 이따금 그러네. 지금 이 상에 올려진 음식은 자기가 싸 들고 가려고 만든 거 예의상 남겨두고 간 거야.”
“... 하하.”
두진의 말에 영배가 머쓱한 표정으로 웃었다.
상에 차려진 불고기에 잡채 등의 먹음직스러운 음식은 두진이 전자레인지에 방금 데운 것이었다.
도훈과 영배가 돕겠다고 말했지만, 손사래를 치며 아주 능숙하게 해내던 게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다 싶었는데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편히 드세나. 오늘은 마누라 없어서 눈치 볼 필요도 없으니까.”
“눈치요?”
“자네 말고, 김 시장.”
“아, 그거요? 큭큭큭! 사모님은 아직도 그 생각 하고 계십니까?”
“전보다는 덜해도 아직 미련이 있긴 있는 모양이야. 작은애가 자기한테 남자친구인지, 남자친구 후보인지 모를 놈이 있다고 했거든? 오늘 대전 간 것도 그거 캐물으러 간 게 분명해.”
“하하. 네. 받으세요, 실장님.”
도훈이 웃으며 막걸리병을 들어 두진과 영배의 잔을 차례로 채웠고, 영배도 웃으며 입을 열었다.
“실장님 댁에서 이러는 거 오래간만이네요.”
“그러게. 초창기에는 자주 이러고 마시며 얘기했는데. 허허, 우리 마누라가 하여튼 주책이야.”
“사모님 때문이 아니라요. 여기 와서 편히 시간 보낼 여유가 없었잖아요. 말은 바로 해야죠, 실장님.”
“쩝, 그렇게 생각해주면 고맙지. 하하, 자, 한잔하세나!”
툭.
사발을 가볍게 부딪친 세 사람이 단순에 막걸리를 비웠다.
“크으! 역시 막걸리는 동네 막걸리가 최곱니다.”
“맞아. 내 유명한 막걸리 제법 다양하게 마셔봤는데, 처음엔 ‘좋구나. 이래서 유명한가 보다.’ 싶다가도 꼭 마지막엔 이게 생각난단 말이지.”
“제가 학원 강사 할 때는 말입니다. 조용한 곳에 수더분한 막걸리 집 하나 차리는 게 꿈이었습니다.”
“수더분한 막걸리 집? 조용한 곳에? 아니 수더분한 막걸리 집은 이해가 가는데 왜 조용한 곳이야? 술 마시고 속에 쌓인 거 털어놓다 보면 시끄럽기 마련인데.”
“아, 그거요? 조용한 곳에 있어야 시끌시끌한 막걸리 집이 홍보가 잘 될 거 아닙니까.”
“... 하? 또 그 홍보 타령인가?”
“하하. 뭐가 됐든 홍보가 생명인 시대입니다. ‘김 모’라는 우리 시장은 괴짜라서 이상한 거고요.”
“괴짜는 맞지.”
너스레를 떠는 영배와 적당히 맞장구 쳐주는 두진을 보며 도훈은 빙긋 웃고는 다시 막걸리병을 집었다.
도훈과 두진의 사이도 처음보다 훨씬 끈끈해졌지만, 영배와 두진의 사이야말로 ‘끈끈’ 그 자체.
비서실장과 비서관이라는 특수성도 있겠지만, 워낙 친화력 좋은 영배는 공적으로는 철저히 상급자이자 사부로, 사적으로는 마치 아들이라도 되는 것처럼 두진을 살뜰히 챙겼다.
도훈도 두진을 배려하고 챙기는 건 마찬가지였지만, 영배가 두진을 대하는 거에 비하면 ‘살뜰함’이 부족하달까.
그건 두 사람의 기본적인 성향이나 성격의 차이로 인한 것일 테지만, 어쨌든 영배 덕분에 두진, 영진, 정임이 도훈과 쉽게 가까워졌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자, 한잔 더요.”
“그럼세. 안주도 먹어.”
“네.”
다시 잔을 비우고 제각기 안주를 먹은 뒤 두진이 입을 열었다.
“자, 본론으로 들어가세나.”
“네. 그러지요. 계약 연장하실 거죠?”
원래 두진은 6개월을 기준으로 비서실장직을 맡기로 했다.
협의해 기간을 연장할 수 있다고 했지만, 두진은 자신은 ‘시한부’라며 도훈의 비서실장을 하는 동시에 영배를 차기 비서실장으로 키우는 일도 하기로 했었다.
그래서 이런 식으로나마 ‘계약’을 이야기하기로 했던 것.
“... 흠. 해야 하나?”
“당연한 거 아닙니까?”
“왜, 뭐 때문에?”
“가장 먼저 실장님이 너무 잘하고 계신다는 거고요. 두 번째는 실장님도 일을 재미있어하시기 때문이고요. 세 번째는···.”
“세 번째는 뭔가?”
“... 대안이 없잖습니까.”
“......”
도훈에 이어 두진의 시선이 영배를 향했다.
“... 꿀꺽. 왜, 왜요?”
딴 생각하던 영배는 씹던 걸 삼키고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봤고, 도훈과 두진이 거의 동시에 폭 한숨을 쉬었다.
“아, 왜요?”
“아무것도 아닐세.”
“아무것도 아니긴요. 뭔데 그러세요?”
가만히 영배를 바라보던 두진이 쓰게 웃고는 입을 열었다.
“자네 어쩌려고 그러나?”
“저요? 제가 뭘요?”
“벌써 6개월 지났네.”
“그런데요?”
뭔 소린지 전혀 감을 못 잡는 영배에게 두진이 혀를 끌끌 차고 말을 이었다.
“쯧쯧, 계속 비서관만 할 거야? 원래 비서실장 해야 할 사람은 자네 아니었냐고? 난 시한부란 말일세, 시한부! 얼른 업무 능력을 키워야 실장 자리 넘길 거 아니냐고.”
“에이, 무슨 그런 섭섭한 말씀을. 그냥 임기 끝날 때까지 쭉 가시죠. 저는 그냥 비서관에 만족하렵니다.”
“예끼, 이 친구야!”
목소리는 높였지만, 두진은 화가 나거나 짜증 난 모습이 전혀 아니었다.
자기 말처럼 ‘시한부’를 예정하고 시작한 비서실장 생활이었지만, 도훈이 말한 것처럼 예상보다 훨씬 만족감 혹은 재미를 느끼는 게 사실이었으니까.
영배도 야근에 휴일 출근을 거듭해가며 실력을 쌓느라 열심이긴 했지만, ‘공부’만으로 업무능력이 쑥쑥 자라는 게 아니라는 건 본인 스스로가 진즉에 깨닫고 있었다.
물론, 지금도 비서 역할은 제법 훌륭하게 수행하고 있으나 비서실장은 전혀 얘기가 달랐으니까.
한 마디로, 도훈, 두진, 영배 셋 모두 ‘송두진 비서실장, 조영배 비서관’ 구조가 한동안 계속되리라는 건 암묵적으로 동의한 상태였다.
두진이 능청스럽게 웃는 영배에게 피식 웃어주고는 말을 이었다.
“김 시장이야 이제 내가 매번 봐주지 않아도 되지만, 조 비서관하고 항상 마주 앉은 내 입장도 좀 생각해보게. 이건 맨날 전진 2보에 후진 1보를 거듭하고 있으니···.”
“영배 형도 곧 혼자서 웬만한 건 알아서 할 수 있게 될 겁니다. 저도 초짜지만, 저 인간은 정말 초짜잖습니까.”
“쩝. 차이가 나도 이렇게 차이가 날 줄이야 알았나.”
자신을 두고 도훈과 두진이 나누는 대화에 영배가 말없이 입을 삐죽거렸다.
똑같은 초짜로 시작해 시정 자료, 행정과 관련된 사항을 공부한다지만, 지금 도훈과 영배는 제법 큰 진도 차이가 났다.
도훈은 혼자서 공부하다 간간이 두진과 의견을 나누는 정도지만, 영배는 아직도 홀로 소화할 수 있는 분야가 많지 않았으니까.
게다가 영배는 시간 대부분을 아직도 일상 업무와 관련된 것을 공부하는 데 쓰지만, 도훈은 금세 그걸 끝내고 더 깊이 있는 정책 자료를 보거나 구상을 하는데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었다.
한 마디로, 도훈은 어느새 번듯한 시장에 가까워지고 있는데, 영배는 ‘비서실장’에 가까워지지 못하고 있다는 이야기.
“제가 실장님께 ‘이 정도면 됐다.’ 소리를 듣기 위해서라도 죽으라고 공부할 겁니다.”
“제발 좀 그래 주게. 술 마실 핑계만 찾지 말고!”
“두고 보세요.”
“술 마시면서 할 얘기는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그럼, 마시지 마?”
“... 마셔. 많이 마셔.”
두진과 도훈에게 차례로 답한 영배가 다시 막걸리를 비웠다.
도훈도 두진도 그런 영배를 타박하지 않고 말없이 웃었다.
두진은 30년 넘는 경력이 있기에 무리 없이 비서실장 일을 해내고 있고, 몇 달의 공부와 실무로 그걸 따라잡을 수 없다는 건 두 사람도 잘 알았으니까.
더욱이, 비서실장을 기준으로 봤을 때 부족하다는 것이지 ‘비서관’으로서는 꽤 훌륭한 점수를 받을 수 있을 터.
“여하튼, 계약 연장하시는 거로 알겠습니다.”
“... 뭐, 그러세나.”
두진이 선선히 승낙하자 반색한 영배가 끼어들었다.
“자, 그런 의미에서 건배하시죠. 짠!”
“앞으로도 잘해보세.”
“잘 부탁드립니다.”
건배하고 잔을 비운 영배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참, 월요일에 고 주무관, 홍 주무관님과도 면담하겠다고 했다며? 무슨 얘기를 하려고 그래?”
“음, 비서실에 계속 근무하고 싶은지 어쩐지 확인하려고. 다른 부서에 비해 업무 강도가 센 건 사실이잖아.”
“뭐, 그렇긴 하지.”
두진이나 영배보다는 덜 하지만, 정임과 영진도 다른 직원들에 비해 야근이나 휴일 근무가 많았다.
비서실 분위기가 나쁘지 않고 두 사람이 일이 힘들다고 호소한 적은 없지만, 진짜 속내야 들어보지 않고는 모를 일.
“홍 주무관은 계속 근무하길 원할 것 같고, 고 주무관은 잘 모르겠군. 비서실 근무가 좀 오래되긴 했으니까.”
“아기도 있으니까요. 전 조금 더 있어 줬으면 하는데···.”
“뭐, 당사자와 잘 이야기해보게.”
“네.”
일 관련한 얘기를 그 정도에서 마무리한 세 사람은 본격적으로 술을 즐기기 시작했다.
“이번 반년은 내 생애 가장 빨리 간 것 같네. 정말 순식간이었어.”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빨리 가긴 갔는데, 한 일은 제법 많더라고요. 아마 가장 빨리 갔으면서도 가장 부지런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두진과 영배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었고, 도훈은 담담히 막걸리를 마셨다.
한동안 영배와 수다를 떨던 두진이 문득 생각난 것을 입에 올렸다.
“아, 참. 나도 그 평가서 써야 하나?”
“물론이죠.”
“응? 그럼 나도?”
“당연하지.”
두진이 말한 평가서란 지난 반년 간의 시정을 평가해달라고 도훈이 시청 전 직원을 대상으로 요구한 것으로, 그 어떤 불이익도 없을 테니 하고 싶은 말을 마음껏 하라고 익명으로 제출토록 한 것이었다.
“꼭 좋은 소리만 나오라는 법은 없는데···.”
“그러셔도 됩니다. 가감 없이 쓰시면 돼요. 실장님도 익명으로 쓰셔야 하니까요.”
“하하. 기대하게.”
“내 것도 기대해라.”
영배의 말에 도훈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익명인데 형 건 줄 어떻게 알라고?”
“아, 그러네. 그럼, 가장 혹독한 평가를 한 게 난 줄 알아.”
“... 기대된다.”
“그래 기대 많이 해라. 내 솔직담백하게 악평을 해 줄 테니까. 자, 그런 의미에서 또 짠?”
눈을 빛내며 잔을 내미는 영배의 모습에 도훈이 피식 웃고 잔을 마주 내밀었다.
“건배!”
“건배!”
그렇게 2018년의 마지막 토요일이 지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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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의 마지막 날이자 월요일, 도훈은 정임, 영진과 구내식당에서 점심을 함께했다.
두 사람이 요청해 그랬던 것인데, 나름 긴장하고 식당에 갔던 도훈은 아주 편안한 마음으로 시장실로 복귀할 수 있었다.
“저희는 안된다고 하실까 봐 긴장했다니까요.”
“하하, 저야말로 밥 먹기 전에 체하는 줄 알았습니다. 얘기는 하고서 밥을 먹었길래 망정이죠.”
정임도 영진도 당분간은 계속 비서실에서 근무하길 원했다.
임기 내내 부서이동을 안 할 수야 없겠지만, 최소한 1년은 함께 일하길 원했던 도훈으로선 다행이었다.
“어휴, 앞으로는 중요한 일은 식사와 병행하지 말죠.”
“네. 저도 그게 좋겠습니다.”
제각기 어딘가 긴장한 표정으로 나갔던 셋이 돌아오자 영배와 두진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세 사람을 맞이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가 아는 고 주무관이면 그럴 거로 생각했어. 앞으로 반 년간 또 잘 부탁해.”
“네, 실장님.”
“홍 주무관도 잘해보세.”
“하하. 네, 실장님.”
“아, 시장님. 직원들 평가서 아까 가져왔더군요. 책상 위에 놔뒀습니다.”
“알겠습니다.”
두진과 영배가 점심을 먹으러 나갔고, 커피를 탄 도훈이 사무실에 들어섰다.
책상 위에 작은 자루가 하나 놓여있었다.
철저히 ‘익명’을 보장하기 위해 아무것도 적지 않은 편지봉투에 평가서를 넣게 했고 자루를 부서마다 돌려 수거 했다.
누구는 애들 장난 같다고 할 수 있겠지만, 도훈은 직원들의 솔직한 얘기를 듣고 싶어서 진지하게 제안했던 것이라 실제 평가서를 대하니 좀 떨리기까지 했다.
- 욕만 잔뜩 쓰였을 수도 있다. 각오 좀 하는 게 좋을걸?
“직원들한테 메일 보낼 때 이미 각오는 했습니다.”
조상님이 이죽거렸지만, 도훈은 애써 태연한 척 답했다.
- 뭐하냐? 드디어 도착했는데, 얼른 안 열어보고.
“열어볼 겁니다.”
심드렁하게 답한 도훈이 책상에 앉아 자루에서 봉투를 꺼냈다.
그리고 진지한 표정으로 봉투에서 종이를 꺼냈다.
싱긋.
종이를 읽어내려가던 도훈이 해맑게 웃고는 미리 준비한 바인더에 종이를 잘 갈무리해 넣었다.
4년의 임기가 끝나도 챙겨갈 물질적인 건 그다지 없겠지만, 이 평가서들만큼은 오래 간직해야 할 것 같아서 미리 준비한 바인더였다.
한 장, 한 장.
직원들의 평가서를 읽어가던 도훈은 다양한 표정과 반응을 보이며 서류를 읽어내려갔다.
다 읽은 평가서들을 바인더에 넣을 때마다 그는 담담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는 누군가의 평가서, 아니 투서를 접하기 전까지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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