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 악성 민원인 - 4.
퇴근 시간이 조금 지난 시청 시장 사무실.
의자에 앉은 도훈의 시선은 창밖을 향해 있었다.
- 사람의 성격이 극단적으로 변하는 병은 주로 뇌와 관련이 있습니다. 당연히 가볍게 볼 수가 없죠. 뇌의 이상은 약물만으로 치료하기가 어렵거든요. 방사선 치료도 있지만, 우선으로 수술을 고려해야만 하는 게 뇌와 관련된 병입니다. 뇌수술, 말만 들어도 으스스한 감이 있잖습니까? 어쨌든, 성격변화가 증상으로 나타나는 대표적인 병은 먼저 치매가 있고 그다음 뇌종양 정도를 꼽을 수 있겠네요. 둘 다 가볍게 언급할 수 있는 병이 아닙니다.
치매와 뇌종양.
보건소장이 장난기를 거두고 진지하게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이해되는 질병들이었다.
치매는 고령화 사회로 접어들며 점점 심각하게 인식되는 병으로 현 대통령이 지난 선거 때 치매 환자를 국가적으로 관리하겠다며 공약으로 내걸기까지 했다.
뇌종양은 일찍 발견하고 악성이 아닌 양성일 경우 사망률이 많이 낮아졌다고 하지만, 가장 심각한 단계의 경우 발견 및 치료 시작 5년 후 생존율이 5%인 심각한 질병이다.
당연히, 두어 명에게 들은 정보만으로 그런 심각한 질병을 의심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도훈은 보건소에서 돌아오자마자 ‘서민우’라는 사람에 대해 잘 알 거나 혹은 서민우와 가까운 사람을 아는 이를 수소문했다.
- 정말 의외긴 한데, 그 서민우 씨 정말 주변 사람들에게 평판이 좋았다고 합니다. 제게 이야기해 준 사람은 도대체 시청에서 무슨 짓을 했길래, 그 착한 사람을 화나게 했냐고 두둔하더군요.
- 작년 어떤 송년회 모임에서 사소한 일로 화를 내서 대판 싸웠다고 합니다. 그 이후로 지금껏 그 모임 사람들과는 잘 연락도 안 한다네요. 그런데 원래는 그런 모난 성격이 아니라고 하더라고요.
- 사람이 확 변했다는데요. 놀부도 그런 놀부도 없다고 고개를 내젓더군요.
- 만나면 짜증만 내서 안 만난 지 몇 달 됐답니다. 무슨 사춘기 중딩처럼 사람이 변했다고 하네요.
- 대판 싸우고 연을 끊었다네요. 언제요? 올해 초에 그랬다고 했던 것 같습니다.
정보를 구할 때 그가 ‘병을 앓는 것일 수도 있다’는 얘기는 하지 않았다.
확인되지도 않은 민감한 얘기를 흘릴 수는 없었으니까.
그래서 여러 경로를 통해 전해지는 서민우에 관한 정보는 좀 중구난방이긴 했지만, 뚜렷한 게 두 가지가 있었다.
첫째, 원래는 정말 착하고 좋은 사람이었다.
둘째, 시기를 특정할 수는 없으나 성격이 짜증 많고 화를 잘 내는 것으로 변해 주변 사람들이 연락을 끊을 정도다.
다른 건 몰라도 ‘성격의 급격한 변화’라는 부분은 확인할 수 있는 정보.
그런 정보를 불과 몇 시간 만에 모아 서민우의 큰아들이 전화하기를 기다리는 도훈은 좀 난감한 고민을 하고 있었다.
- 뭘 고민해? 그냥 사실대로 말하면 되지.
“... 그럴 수밖에 없겠죠. 그런데, 좀 난감하고··· 여하튼, 기분이 그러네요.”
- 이해는 한다.
“... 쩝.”
‘당신 아버지가 아플지도 모릅니다.’
나이 지긋한 부모가 있는 자식이라면 누구든 듣고 싶지 않은 말일 터.
게다가 그냥 아픈 게 아니라 ‘치매’나 ‘뇌종양’을 의심해봐야 할 것 같다는 얘기를 듣는다면, 그것도 의사도 아닌 생판 모르는 사람에게서 듣는다면 자식의 기분이 어떨까?
더군다나 도훈의 추측이 맞아도 문제였고, 틀려도 그것대로 그냥 ‘죄송합니다’라는 한 마디로 넘길 수 있을까?
“에휴. 그래도 틀렸으면 좋겠다.”
도훈이 그렇게 중얼거리는데, 누군가 시장실 문을 노크했다.
똑똑.
“네.”
철컥.
“시장님, 서민우 씨 장남에게서 전화 왔습니다.”
핸드폰을 든 정임의 말에 도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애써 담담한 표정을 한 도훈이 정임에게 다가가 전화를 건네받았다.
“여보세요.”
- 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저는 대흥시 시장 김도훈이라고 합니다.”
- 서경식입니다.
조금은 지치고 짜증이 난 듯한 목소리였기에 도훈은 슬그머니 미간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상쾌하고 좋은 기분일 때도 듣기 좋은 소리가 절대 아닌데, 하물며 피곤하고 짜증 난 상황에서라면···.
‘... 이거 잘못하면···.’
그래도 어쩌겠는가.
“음, 저희가 왜 연락했는지 혹시 알고 계십니까?”
- 아버지 때문이라고 알고 있어요. 민원 넣는다고 민원실 직원 괴롭히신다고···. 대충 들었습니다.
심드렁한 상대의 반응에 도훈은 조금 더 조심스러운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저, 지금부터 제가 드리는 말씀은 대흥시 보건소장님께 자문을 듣고 하는 거라는 걸 잊지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
- ... 보건소장이요?
“네. 의사이시죠.”
- ......
의사라는 말에 놀랐는지 상대가 잠시 침묵했다.
도훈은 서민우의 아들이 잠시 진정할 여유를 준 뒤 말을 이었다.
“... 여보세요?”
- 아, 듣고 있습니다. 무슨 일 때문에 그러시는지 이제 말씀하시죠.
상대의 목소리가 조금 날카롭게 변한 걸 확인한 도훈은 짧게 심호흡하고 말을 이었다.
“... 실은 아버님이···.”
애써 담담한 표정으로 통화하는 도훈을 조마조마한 표정의 비서실 직원들이 숨을 죽인 채 지켜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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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마 진짜로 고소할까요?”
“... 모르지. 솔직히 나 같아도 그런 전화 받으면 굉장히 불쾌할 것 같으니까. 자네라면 안 그러겠어?”
“... 저도 그렇죠.”
“쩝, 우리는 좋은 마음에 그런 건데···. 흥분이 가라앉으면 그걸 좀 생각해줬으면 좋겠네.”
“... 네.”
비서실 소파에 앉아 담담히 이야기하는 영배와 두진.
어두운 표정의 영배가 저만치 책상에 앉아 서류를 읽는 도훈을 흘끔 했다.
문제의 민원인 서민우의 장남, 서경식과 통화한 건 바로 도훈.
그리고 자초지종을 전해 듣고, 그로부터 엄청난 욕설을 들은 것도 도훈이었다.
- ... 뭐라고 했습니까, 방금?
- 죄송한데, 아버님께서 병을 앓고 계실 가능성이 있는 것 같다고 말씀드렸습니다.
- ......
- 다시 말씀드리지만, 저희만의 추측이 아니고 이런저런 상황을 놓고 의사 선생님이 판단하신 겁니다.
좀 불퉁거리던 서경식은 자기 아버지가 석 달 넘게 자기 건물 수도관 고쳐달라고 민원실을 들락거리며 폭언을 했다는 것을 몰랐던 듯 좀 놀랐다.
그래서인지 도훈이 행사장 한가운데 많은 사람이 지켜보는 자리에서 고추장 물로 물벼락을 맞은 얘기를 들을 때까지는 어이없고 면목 없다는 태도였다.
그러나 아버지가 아플 것 같다는 얘기, 심지어 의사인 보건소장이 치매 아니면 뇌종양을 의심한다는 얘기에 대한 반응은 전혀 달랐다.
- 너, 이 새끼! 지금 말 다했냐? 어? 지금 네 아버지 아니라고 그딴 얘기 하는 거냐? 야, 이 망할 자식아! 이 거지 같은 새끼야! 치매? 뇌종양? 우리 아버지가 어떤 양반인데, 뭐가 어쩌고 어째? 우리 아버지가 아니라 내가 너희들 고소할 거다! 방송국에 알리든, 신문사에 알리든 내가 너희들 일 알려서 전부 다 무릎 꿇고 사과하게 할 거다!
도훈과 비서실 직원 모두가 스피커폰으로 듣는 가운데 버럭버럭 고함을 치고 욕을 하고는 전화를 끊어버린 서경식은 이후로는 아예 전화를 받지도 않았다.
그래서 도훈은 정임이 아닌 자신의 업무용 핸드폰으로 그에게 ‘기분은 이해하지만, 흥분 가라앉으면 신중히 생각해보시길 바란다’는 내용의 메시지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게 지금으로부터 두 시간 정도 전의 일.
이런 반응을 걱정하긴 했지만, 말하지 않을 수도 없었기에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
부디, 흥분이 가라앉은 서경식이 이쪽의 입장을 헤아려주길 바랄 뿐.
“... 그렇게 안 먹어도 될 욕을 먹어놓고도··· 저 녀석은 참 한결같네요.”
영배가 담담하게 서류를 읽는 도훈의 모습에 작게 중얼거렸고, 두진이 비슷한 크기로 말했다.
“그러니까 내가 비서실장 하는 거야. 자네 친구가 무슨 일을 겪어도 중심을 잃는 법이 없으니까.”
“... 쩝.”
“오늘 일도 그래. 김 시장이 사람이 아플 수도 있다는 얘기를 듣지 않았다면, 그 얘기를 과연 했겠나?”
“안 했을 겁니다.”
“그래. 그런 마음으로, 얘기를 꺼내면 십중팔구 욕을 먹을 거로 생각했음에도 감수한 거지. 티는 잘 안 나지만, 사람이 어질어.”
“다 들립니다.”
여전히 서류에 시선을 고정한 도훈이 입을 열었기에 두 사람은 쓰게 웃었다.
“서류가 눈에 들어오냐, 지금?”
“안 들어올 건 또 뭐야?”
“아니, 아버지한테 물벼락 맞은 것도 기분 나쁜데, 당신 아버지가 아플 수도 있다는 얘기 했다고 욕먹었잖아.”
“통화하기 전부터 그럴 수도 있다고 예상했잖아. 그리고 난 목소리 듣고 욕먹을 것 같다고 확신했었어.”
“왜?”
“뭔가 컨디션이나 기분이 안 좋은 느낌이었거든. 그 사람한테는 엎친 데 덮친 격이랄까? 이해가 가.”
“... 하, 정말···.”
도훈의 담담한 말에 영배는 기가 찬다는 듯 고개를 내둘렀고, 두진이 소리 없이 웃었다.
도훈의 업무용 핸드폰이 울린 것은 그때였다.
위이이잉!
액정을 보고 모르는 번호임을 확인한 도훈이 전화를 받았다.
“김도훈입니다.”
- 아, 안녕하세요. 저는 서경식 씨 아내 되는 사람인데요.
“아, 예. 안녕하십니까.”
- 먼저 사과부터 드릴게요. 우리 남편이···.
- 사과는 무슨 얼어 죽을! 그쪽에서 먼저···.
- 닥치고 있어요, 당신은! 장남이라는 사람이 아버님 건강 걱정해주시는 분한테 막말이나 하고!
- 아니, 당신도 아까 다 들었···.
- 시끄러워요!
- ......
“......”
수화기를 통해 서경식인 것으로 보이는 남자의 목소리가 잠깐 들려왔다가 사라졌다.
아마도 아내가 화를 내자 입을 다문 것일 터.
졸지에 ‘가열찬’ 부부싸움의 현장을 생생하게 전해 들은 도훈은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침묵할 수밖에.
- 어, 여보세요? 여보세요?
“... 듣고 있습니다.”
- 아, 네. 죄송합니다. 남편이 끼어들어서요.
“.. 네.”
- 조금 전에 남편이 시장님과 통화를 녹음한 걸 들려줬거든요. 제가 대신 사과드립니다. 남편이 폭언한 거요.
“아닙니다. 이해합니다.”
도훈의 말에 서경식의 아내가 푸념하듯 말을 이었다.
- 요즘 남편이 회사 일로 스트레스를 좀 많이 받았거든요. 너그러운 마음으로 이해해주세요, 시장님.
담담한 도훈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고, 어느새 도훈의 곁에 다가와 있던 영배와 두진도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최소한 고소나 고발을 당할 것 같지는 않았기에.
“괜찮습니다. 저도 아버님이 계신데요. 충분히 이해합니다.”
- 고맙습니다.
“... 그게 용건이시면 굳이 전화까지 하실 필요는 없었는데요.”
- 아, 사과도 드려야 했지만요. 저도 아버님 걱정되는 부분이 있어서요.
“네?”
이어진 서경식 부인의 말은 이랬다.
중견 기업 회사원이라는 서경식은 작년 여름부터 회사 상황이 어려워져 정신없이 바빠 아버지 서민우와 이따금 통화는 해도 명절에도 집에 내려가지 못했단다.
대신, 그사이 아내가 어린 딸을 데리고 대흥에 두 번 다녀갔는데 시아버지인 서민우가 좀 이상하고 정상이 아니라고 느꼈단다.
걱정은 해도 쉽게 남편에게 꺼낼 수 없는 말이었기에 혼자서 전전긍긍하고 있었는데, 서경식과 도훈의 통화 녹음을 들으니 혼자만의 지나친 걱정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었단다.
- 민원과 관련된 일도 예전의 아버님이라면 상상이 안 가지만, 저희 아버님이 우리 아이를 정말 예뻐하셨거든요. 애를 데리고 내려가면 ‘우리 손녀’, ‘내 손녀’ 하시면서 아예 업고 다니실 정도로요. 그런데 애가 잠투정하느라 우는 것까지 짜증을 내시는 거예요. 전에는 그런 적이 한 번도 없으셨는데 말이죠. 매사에 짜증이시고 화를 내시는데, 저야 같이 살며 모시는 게 아니라서 언짢은 일이 있으셨나 보다 했죠. 그런데 시장님 말씀을 들으니까 그냥 넘길 상황이 아닌 것 같아서요.
“... 네.”
어느새 서경식 아내의 목소리에 걱정이 스며들었고, 도훈도 씁쓸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 저희가 이번 주말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내려가서 아버님 모시고 병원에 가보려고요.
“... 네. 알겠습니다.”
- 걱정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시장님.
“아닙니다. 부디 제 걱정이 헛된 것이었으면 좋겠습니다.”
- 저도 그래요. 고맙습니다. 아버님 모시고 검사해보고 연락드릴게요.
“네, 알겠습니다. 들어가세요.”
- 네,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뚝.
통화를 마친 도훈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고, 두진과 영배도 덩달아 한숨을 내쉬었다.
복합적인 의미였다.
서경식과 통화해 그를 분노하게 한 일이 잘 마무리된 것 같아 다행이었고, 동시에 서민우가 정말 아플 수도 있겠다는 안타까움이기도 했다.
영배도 같은 심정이었는지 복잡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렇게 말하는 게 좀 이율배반적이긴 한데, 그 민원인 아저씨가 아무렇지도 않았으면 좋겠다.”
“... 그러게.”
도훈과 영배는 각자의 아버지와 부모님을 떠올리며 말했고, 그런 마음을 이해한 두진이 담담히 말했다.
“계실 때 잘하게.”
“... 네.”
“... 그래야죠.”
두진은 소파로 돌아가 앉아 서류를 집어 들었고 도훈은 개인 핸드폰을 챙겨 시장실로, 영배도 핸드폰을 챙겨 비서실 문을 열고 복도로 나갔다.
창가에 가 걸음을 멈춘 도훈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고, 곧 상대가 전화를 받았다.
- 왜?
“... 그냥요.”
- 실없기는, 뭐야?
“... 정말 그냥요.”
- ... 용건 없으면 끊···.
“끊지 마세요, 아버지. 잠깐 저랑 수다나 좀 떨죠.”
- ......
잠시 침묵하던 도훈의 아버지가 말을 이었다.
- 너, 뭔 일 있냐?
“아무 일도 없어요. 정말 그냥 전화한 겁니다.”
- ... 흠.
“요즘 어떠세요?”
도훈의 시선이 창밖 하늘을 향했고, 어둑해진 밤하늘의 달을 눈에 담았다.
그렇게 시장실과 시청 복도에서 두 아들이 ‘그냥’ 각자의 아버지와 통화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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