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 당신의 … 를 응원합니다 - 1.
도훈이 고르고 세경이 얼마간 다른 걸 권유하다 못 이긴 척 동의한 음식은 맛있었다.
후루룩.
“와, 저 이런 콩국수 처음 먹어봐요.”
“... 저도 마찬가집니다. 기가 막히네요.”
국물을 한 숟가락 떠먹어보고 눈을 휘둥그레 뜨며 감탄한 두 사람은 다른 손님들처럼 이내 음식에 집중했다.
후루룩.
후루루룩.
대기하는 사람이 많아 좀 기다리긴 했지만, 기다린 보람이 있는 맛이랄까.
강정문이 개인 카드를 줬으니 훨씬 비싼 걸 먹어도 될 테지만, 당장은 그 어떤 비싸고 호화로운 요리도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어우, 맛집은 맛집인데?”
“기다린 보람이 있네!”
“죽인다!”
연신 감탄하는 손님들의 말에 구석에 앉은 두 사람도 공감했다.
“담백한데 진짜 진해요. 여기 오길 잘한 것 같아요.”
“네. 비싼 거 마다한 보람이 있네요.”
“저도요. 시장님 말 듣길 잘했네요.”
“하하, 감사합니다.”
도훈과 세경이 제법 양이 많은 콩국수를 한 그릇씩 뚝딱 해치우는 데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후아, 이렇게 만족스러운 식사는 정말 오래간만이에요.”
“저도 그렇습니다.”
줄을 서서 기다리는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나온 두 사람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정말 훌륭한 콩국수이긴 했는데, 아깝지 않으세요, 시장님?”
“뭐가요?”
“출연료도 기부하기로 하셨으니 오늘 고생하신 대가는 이게 전부인 거나 다름없잖아요. 거기에 도지사님 골탕 먹일 기회이기도 한데.”
친척이기도 하고 실제로 친하기도 해서, 세경은 강정문과 도훈 관계의 ‘핵심’을 알고 있었다.
강정문은 들이대고 도훈은 뒷걸음질 치는 그런 핵심.
“반나절 쩔쩔맨 것치고 이 정도 대가면 훌륭하죠. 뭐, 도지사님 골탕은 좀 그렇고 깜짝 놀라게 못 한 건 유감이긴 하네요.”
담담히 웃으며 말하는 도훈에게 세경이 답했다.
“다음에는 꼭 비싼 것으로 드세요.”
“하하, 다음이 있다면 그러겠습니다.”
주차장을 향해 나란히 걷는 두 사람의 입가에는 비슷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4월 말, 오늘따라 하늘이 돕는지 하늘도 쾌청해 살살 부는 바람이 산뜻하게만 느껴지는 날씨.
꽃이 흐드러지게 핀 단둘만 있는 예쁜 산책길이라면 더없이 좋겠지만, 도훈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걷는 것만으로 세경의 가슴은 콩닥콩닥 뛰고 있었다.
도훈도 휴일에 대흥시를 벗어나 유유자적한 시간을 보내는 게 정말 오래간만이었다.
거기에다 맛있는 걸 먹고 봄 햇살과 봄바람을 느끼고 있으니 기분이 좋았다.
당연히 두 사람 사이에 훈풍이 불 수밖에.
한동안 그렇게 걷다 세경이 입을 열었다.
“요새 시장님 얘기 사람들 사이에 꽤 유명한데, 이상하게 알아보는 사람이 없네요?”
“하하, 제가 생각하기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게 뭔데요?”
“제가 예전 선거 직후에 방송에 출연했을 때 스타일하고 지금은 차이가 꽤 나니까요. 또 지금은 정장 안 입었잖습니까.”
“그렇긴 해도요.”
촬영은 정장을 입고 했어도 끝난 후에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도훈이었다.
동안까지는 아니지만, 늙어 보이지는 않는 도훈이 격식 없는 옷차림을 하고 있으니 직장인보다는 학생의 느낌이 강하게 났다.
“그리고 요즘은 전혀 방송 출연에 응하지 않아서 온라인에 나도는 제 사진이라고 해봐야 선거 때 프로필 사진이 대부분이더라고요. 제가 봐도 그 사진은 제 사진 같지 않은데 당연히 큰 관심 없는 사람은 알아보기 어렵죠.”
“하긴, 연예인에게 관심 두는 것과는 좀 다르니까요. 연예인이라면 얼굴부터 확실히 기억하는 법이지만···.”
“네. 전 아니죠.”
도훈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세경이 문득 생각난 걸 입에 올렸다.
“그나저나 개운한 음식을 먹어서 그런지 커피나 차 생각이 안 나네요. 안 그래요, 시장님?”
“네, 정말 그렇습니다.”
담담히 미소 짓는 도훈과 마주 웃던 세경은 뒤늦게 ‘아차’ 했다.
식사 대접을 핑계로 찾아왔고 맛있게 콩국수를 먹었으니 이제 용건은 끝났다.
원래 계획했던 대로 자연스레 차를 마시는 ‘코스’로 이어져야 도훈과 더 시간을 보낼 수 있는데, 제 입으로 커피나 차 생각이 안 난다고 무의식중에 말해 버렸던 것이다.
‘... 이, 이게 아닌데···.’
당황한 세경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열심히 머리를 굴리고 있는 순간, 도훈이 입을 열었다.
“밥만 먹고 바로 헤어지기 아쉽네요. 음···, 저 서점에 갈 건데 혹시 괜찮으시면 같이 가시겠습니까?”
“서점이요?”
“네.”
깜빡, 깜빡.
담담한 도훈의 말에 세경은 일순 멍해질 수밖에 없었다.
의도가 무엇이든, 도훈이 먼저 세경에게 ‘동행’을 제안한 건 처음이나 다름없었으니까.
- 호오? 네가 웬일이냐?
‘... 저도 최소한의 매너가 뭔지는 압니다.’
- 그래? 신통하네. 아닌가? 제 살길 제가 찾는 건가?
‘... 그런 거 아닙니다.’
- 뭐가 그런 게 아니야? 그러면 좀 어때서? 휴일에 데이트, 적극적으로 추천하는 바이다.
‘......’
조상님의 말에 도훈은 뭐라 대꾸할 말이 없었다.
딱히 ‘살길’ 혹은 ‘데이트’를 생각해서 꺼낸 말이 아니었기에.
하지만, 아무리 당장은 세경을 연애 대상으로 보고 있지 않다고 해도, 밥 먹었다고 곧바로 안녕히 가시라고 하는 게 예의는 아니라는 걸 모르지 않았다.
게다가 오래간만에 큰 서점이 있는 대전에 왔으니, 이런저런 책을 둘러보고 싶기도 했다.
“오래간만에 휴일에 시내에 나오니까 서점에 가고 싶네요. 보고 싶은 책도 좀 있고···.”
“좋아요!”
세경이 급히 답했고 말이 끊긴 도훈은 멈칫했다가 가만히 웃었다.
“가시죠. 제가 가끔 가는 서점은 안에 카페도 있습니다. 책 구경하다가 목이 마르면 커피도 마실 수 있어요.”
“호호, 좋네요. 아, 커피값은 제가 낼게요. 아니, 도지사님이 내실 거에요.”
“좋으실 대로요.”
두 사람이 나란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 좋은 날이고 좋을 때다.
조금 떨어져 뒤를 따르는 조상님이 중얼거리며 피식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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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도훈의 집.
위이이잉!
느지막하게 일어난 도훈은 아침 겸 점심을 간단히 때우고 청소를 하고 있었다.
“순심아, 비켜 봐라.”
시끄러운 진공청소기 소리에도 불구하고 방 한가운데 누워 자던 순심이는 도훈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야.”
툭.
도훈이 청소기 끝으로 가볍게 건드렸지만, 살짝 눈을 떴다가 감을 뿐인 순심이.
“... 어휴. 이 녀석이 요즘 진주네 집에서 준수한테 떠받들다시피 지내는 시간이 많아지니 주인 말을 무시하네.”
투덜거린 도훈이 조심스럽게 순심이를 안아 들고 이미 청소를 끝낸 거실로 옮겼다.
들어 올리기 전의 자세 그대로 뉘어주자 순심이가 잠시 꼬리를 살랑거리다 멈췄고, 도훈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엎드려 절받기네.”
위이이잉.
순심이를 밖으로 옮기고 난 도훈의 청소가 이어졌다.
얼른 청소를 끝내고 어제 사 온 책을 볼 생각에 흥얼거리는 도훈에게 조상님이 말을 걸었다.
- 좋냐?
“네.”
- 휴우.
“... 왜 그러세요?”
- 너 하는 짓이 한숨 나오게 하잖아.
“제가 뭘 어쨌다고요?”
도훈이 묻자 조상님이 눈을 가늘게 뜨고 타박했다.
- 이 좋은 주말, 모처럼 쉬는데 방구석 청소하고 책 읽을 생각에 콧노래를 부르고 앉았으니···. 이건 뭐···.
“... 제가 이렇게 된 데에는 조상님 책임이 크다는 건 알고 하시는 말씀이죠?”
후손의 반격에 조상님이 움찔했다.
도훈의 말은 백번 옳은 말이었으니까.
- 커, 커험!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인마! 꽃다운 처녀가 뭐할 거냐고 묻는 게 무슨 뜻인지 몰라?
“모르니까, 혹은 궁금하니까 물어본 거겠죠.”
- 어휴! 이 답답아!
어제 도훈의 서점 방문은 제법 오래 걸렸다.
오래간만에 서점에 간 도훈이 여기 기웃거리며 책을 읽고 저기 둘러보며 책을 찾느라 바빠서.
세경은 간만에 서점에 와서 들뜬다는 도훈의 말에 웃더니, 한동안 도훈과 함께 돌아다니다 책을 한 권 골라 사고 카페에서 커피를 한 잔 마신 뒤 먼저 서점을 떠났다.
책을 고르기까지 도훈과 30분이 넘게 걸렸고 또 비슷한 시간을 카페에 앉아 대화했지만, 연애 감정을 가진 남녀의 대화라고 하기는 어려운 얘기가 대부분이었다.
그때까지 도훈이 보던 책이나 그녀나 고른 책이나 업무와 관련된 분야였기에.
어쨌든, 카페에서 헤어지기 직전 그녀와 도훈의 마지막 대화는 이랬다.
- 혹시 내일도 출근하세요?
- 아뇨. 이번 주는 쉬기로 했습니다. 모처럼 날씨 좋고 공기 맑은 주말이라길래 다들 가족에게 봉사하라고 했죠.
- 음, 그럼 시장님은 뭐하실 건가요?
- 늦잠 좀 자고 청소한 다음에 책 읽으려고요.
도훈의 말에 세경은 담담히 웃으며 좋은 주말 보내라는 인사를 하고 떠났고, 혼자 남은 도훈은 한 시간 정도 더 서점에서 책을 골라 산 뒤 집으로 돌아왔다.
“뭐, 민 과장이 제게 호감이 있는 건 알 것 같기도 합니다만···.”
- 응? 알 것 같아? 그러고도 그냥 그렇게 보냈어?
도훈의 말에 조상님이 눈을 휘둥그레 크게 떴다.
“... 처음에는 몰랐는데, 몇 번 마주치다 보니 감이 오대요. 하지만, 아무래도 좀 신경 쓰이는 게 있어서요.”
- 뭐가? 뭐가 신경이 쓰여?
“제 임기가 아직 3년 넘게 남았다는 거하고, 민 과장이 도지사 친척이라는 거요.”
- ... 허, 내 별···. 그래서 싫다는 거냐?
조상님이 묻자 도훈이 뒤통수를 긁적이고 세경을 떠올렸다.
분명 미녀에 성격도 좋고 능력도 있는 데다가 ‘희한하게도’ 도훈에게 호감을 보이는 사람.
도훈도 남자니, 그런 세경을 여러 번 만나며 끝내 무감하기만 했던 게 아니다.
하지만···.
“그런 건 아닌데··· 좀 조심스럽습니다.”
- 쯧쯧쯧.
조상님이 혀를 세게 찼다.
이런 거 따지고 저런 거 따지는 후손의 소극적 모습이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원래 사랑이란 게 번갯불에 콩 구워 먹는 식이라지만, 세경은 몰라도 도훈은 그런 스타일이 아니었다.
자주 어울리다 접점이 늘어나면 상대에 대한 감정이 풍부해지거나 질적으로 변화한달까?
강렬했던 첫사랑도 그랬고 존재감 흐릿한 이후의 연애도 그런 식이었다.
연애 고자로 몇 년을 지내던 후손 앞에 혜성같이 나타난 세경의 존재는 조상님으로서도 반가울 수밖에.
그런데 넙죽 절하고 감지덕지해도 모자랄 상대임에도, 당사자가 미리 저렇게 스스로 경계하고 있으니 될 일도 안 되기가 십상이 아닌가.
불만스런 표정으로 후손을 바라보던 조상님이 입을 열었다.
- 네가 아직 간절하지가 않은 게지.
“... 솔직히 그런 것 같기도 하고요.”
- 너 그러다 버스 지나간 다음에 후회한다.
“... 쩝.”
할 말이 없어진 도훈이 머쓱한 표정으로 뺨을 긁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위이이잉!
발신자를 확인한 도훈이 심드렁하게 전화를 받았다.
“어, 왜?”
- ... 도훈아.
“왜?”
- 난 네가 정말 목석인 줄 알았다.
“... 뭐?”
- 그런데 네가 목석이 아니었어. 정말 자랑스럽다!
“... 뭔 헛소리야?”
- 하하하!
미간을 찌푸린 도훈이 물었지만, 영배는 한참을 웃기만 했다.
“아, 뭔 헛소리를 하는 거냐고?”
- 너 어제 민 과장이랑 콩국수 먹었냐?
“응. 그걸 형이 어떻게 알아?”
- 콩국수 먹고 서점에 갔구나?
멈칫.
- 책 고르면서 다정하게 이야기도 하고, 그러다 카페에 마주 보고 앉아서 수다도 떨었네. 그렇지?
“......”
- 이야. 아주 다정한 연인이네. 난 네가 목석이나 연애 고자가 된 줄 알고 걱정했는데 아니었어. 지금처럼만 해라, 인마. 아주 좋다!
영배가 진심으로 기쁘다는 듯 말했지만, 도훈은 전혀 거기에 호응해주고 싶은 기분이 아니었다.
“... 형 나 미행했어?”
- 미행? 내가 왜 그딴 걸 하냐?
“... 그런데 내가 민 과장이랑 했던 일을 어떻게 그렇게 다 아는 건데?”
- 기사로 봤지. 사진도 함께.
“... 뭐? 뭘 봐?”
어안이 벙벙해진 도훈의 귓가에 영배의 말이 들려왔다.
- 너 열애설, 아니 이건 아니고···.
“......”
- 너 연애하는 것 같다는 기사가 떴어. 폭로나 고발기사가 아니고, 서민적으로 데이트하는 모습 보기 좋다고 잘 되기를 바란다는 말까지 있다.
“... 뭐?”
- 아, 이 자식이 귀가 먹었나. 네가 묘령의 여인과 아주 소박하고도 다정한 데이트를 하는···.
어벙한 표정으로 굳어진 도훈에게 영배의 말은 더는 들리지 않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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