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 간만의 서울 - 3.
“태워다 줘?”
“아니. 지하철이 편해. 괜히 막히기라도 하면 지각할 거 아냐.”
“토요일 아침에 출근하면서 지각까지 걱정하고, 너무 직장에 충성하지 마.”
“직장에 충성하는 거 아니야. 그냥 내 일에 열중할 뿐이지.
당차게 답하는 동생의 모습에 씩 웃은 도훈이 말을 이었다.
“알았다. 아침 잘 먹었어. 건강 잘 챙기고 나는 됐으니까 아버지께는 연락 자주 드리고.”
“응. 조심해서 내려가.”
“오냐.”
“영배 오빠도 잘 지내요!”
“어, 김 기자 수고해.”
조수석에 앉은 도훈, 운전대를 잡은 영배와 인사한 도연이 몸을 돌려 지하철역 쪽으로 빠르게 멀어졌다.
어제 근사한 한정식을 대접받고 맥주도 호탕하게 마신 뒤, 도연이가 사는 여성전용 원룸 인근 모텔에서 잠을 잔 도훈과 영배.
이른 아침, 도연이를 만나 해장국집에서 아침을 함께 먹었다.
웬만하면 그냥 전화로 인사하고 말았겠지만, 도연이가 밥은 먹여서 보내야 한다며 꼭 아침을 함께 먹을 걸 고집해서였다.
“출발한다.”
“응.”
도연이가 더 보이지 않자 영배가 차를 출발시켰다.
조금은 느릿하게 시내를 빠져나온 차는 한강 변을 따라 얼마간 달린 끝에 고속도로에 올랐다.
영배는 운전에 집중하고 도훈은 생각에 빠져 내내 조용했다.
- 사실, 그 토론회의 중립 패널은 셋이 아니라 둘로 좁혀질 확률이 높아요.
어제 임지희 의원이 했던 말을 되새기는 도훈.
계획안에는 여당 2, 보수 야당 2, 중립 3으로 되어 있었는데, 실제로는 중립도 둘로 줄여 균형을 맞추려 할 것 같다는 얘기였다.
현재를 기준으로 국회의원 5명 이상이 소속된 정당은 다섯.
여당과 보수 성향인 대자당은 100명 이상씩의 의원이 소속되어 있고, 보수와 중도가 혼재된 제2야당, 호남 기반에 여당과 성향은 비슷한 제3야당, 마지막이 5명이 소속된 진보평화당이다.
국회의원 의석수 1, 2위 정당이 둘씩, 나머지가 1명씩 패널을 내보내면 원래의 기획에 딱 맞지만, 중립을 둘로 줄일 확률이 높다니 세 당 중 하나는 제외되는 셈.
그런 상황인데도 임지희는 도훈이 섭외에 응하길 바라고 있었다.
- 이런 토론회는 준비 단계에서부터 각 당이 조건이나 구성을 놓고 완강하게 요구하고 잘 물러서질 않아요. 그래서 최종적으로 어떻게 조정될지는 나도 확신이 안 서요. 1, 2당이 둘씩이 아니라 하나씩으로 조정될 수도 있고, 여하튼 마지막까지 복잡할 거에요. 단, 김 시장님의 섭외는 변함이 없을 것 같더군요.
- 그럼 전 더더욱 거절해야겠군요.
- 아뇨. 출연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 그런데도 제게 출연하라고 하시는 겁니까? 저 때문에 임 의원님의 기회가 줄어들 수도 있는데요?
도훈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되묻자 임지희가 담담한 미소를 머금고 답했었다.
- 시장님은 자신을 정치가가 아니라 행정가라고 생각한다고 하셨던 거 어느 인터뷰에서 봤어요. 그 말, 진심인가요?
- 네, 진심입니다.
- 그렇다면 설사 저를 대신하는 한이 있더라도 출연하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국민들은 지금 정치를 신뢰하지 않고 있으니까요.
- ......
- 정치가가 아닌 행정가의 눈으로 포착한 정치의 문제점을 얘기해 주세요. 분명 제가 말하는 것보다 더 큰 무게가 있을 테고 영향도 클 테니까요.
- ......
잠시 아무 말 없던 도훈이 진지하기 이를 데 없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 제가 무슨 말씀을 할 줄 아시고요? 의원님의 예상과는 다른 얘기를 할 수도 있습니다. 전 진평당 당원도 아닌데요.
싱긋.
도훈의 말에 싱긋 웃고 난 임지희의 말은 이랬다.
- 당연히 저와는 생각이 다를 수 있겠죠. 하지만, 정치가가 아닌 행정가라고 자임하는 진보적 성향의 현직 시장의 시각과 말은 우리 국민이나 정치인들이 들을 가치가 있을 거로 생각해요.
- ... 그게 무슨···?
- 세력에 기대지 않고 기득권과 타협도 하지 않는, 쉽지 않은 길을 선택한 사람의 말일 테니까요.
- ......
- 우리가 오늘 처음 만났지만, 난 꽤 오래전부터 김 시장님의 행보에 관심을 두고 지켜봐 왔어요. 감탄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에요.
- ... 의원님.
- 난 김 시장님이 나와 같거나 비슷한 얘기를 할 거로 생각해서 출연하라 권유하는 게 아니에요. 뭐가 됐든, 김 시장님의 이야기가 가치가 있을 거로 판단할 뿐이죠.
도훈이 임지희 의원의 권유에 가타부타 답하지 않은 채로 짧은 만남은 끝났다.
도훈의 일행이 기다리고 있다는 걸 안 임지희는 다음에 좀 길게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하고는 곧 자리를 떴으니까.
불과 5분도 안 걸린 짧은 만남.
시간은 짧았지만, 임지희가 건넨 말은 귓등으로 흘려들을 것들이 아니었다.
- 너도 잘 알겠지만, 어제 그 여자 처음부터 끝까지 진심이었다.
도훈의 생각을 읽은 조상님의 말에 도훈이 가만히 답했다.
‘... 네, 저도 압니다. 그래서 좀 혼란스럽고요.’
- 뭐가 혼란스러워?
‘임 의원이 도대체 왜 그렇게 절 과대평가했는지를요.’
- 글쎄. 좀 띄워주긴 했다만, 과대평가라고 하긴 좀 뭐하지 않냐?
‘그 사람 경력 아시죠?’
- 알지.
‘그런 사람이 이제 마흔도 안 된 초짜 기초단체장을 그렇게 높이 평가하는 게 상식적인가요?’
- 상식적이라고 할 수 없지만, 어차피 네가 시장이 된 것부터가 상식적인 상황은 아니었지.
‘......’
도훈이 대꾸를 못 했고 조상님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 그냥 네가 임 의원 마음에 무척 들었구나 생각하면 되겠지. 아주 예쁘게 본 신인에게 그 정도 칭찬은 할 수도 있지 않겠냐?
‘... 글쎄요.’
도훈이 시장이 되고 훌륭하다는 칭찬을 처음 듣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닭살 돋는 말을 당사자 앞에서 했던 이들은 대개 노리는 게 있었다.
‘영입’ 혹은 ‘포섭’ 같은 것들.
그 수위가 좀 낮았던 강정문 도지사의 경우에도, ‘친하게 지내자’는 목적이 있었지 않은가.
도지사의 경우에, 굳이 어떤 이득을 보려고 그랬던 게 아닌 걸 알았기에 끝까지 거부하지 않았을 뿐.
하지만, 어제 임지희 의원은 뭔가를 노리고 도훈을 높이 평가한 게 아니었다.
‘굳이 노렸다고 해봤자 내 출연인데···. 그걸로 자기 출연 가능성이 오히려 줄어들 텐데도···. 나를 그렇게 띄우고 진평당으로 영입? 이건 너무 나간 것 같고···. 하, 참.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돼?’
아무리 임지희라고는 해도 그녀 역시 정치인.
정치인을 신뢰할 수 없는 상대로 여기는 도훈에게 불과 10분도 안 되는 짧은 만남과 말이 제대로 해석되질 않고 있었다.
“야, 뭐해?”
“응?”
갑자기 들려오는 영배의 말에 도훈이 퍼뜩 정신을 차리니 차가 고속도로 휴게소 주차장에 멈춰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길래 불러도 듣지도 못해?”
“아무것도 아냐.”
“아니긴? 너 어제 누구 만난다더니 그거 때문인 거 아니냐?”
“... 나중에 얘기해 줄게. 여기서부터는 내가 운전할게.”
“그러든지.”
심드렁하게 답한 도훈이 차에서 내리더니 커피 자판기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뭐야, 대체?”
뒤를 따르는 영배가 아리송한 표정으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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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야?”
“응.”
대흥에 도착한 도훈과 영배는 시청을 들렀다가 곧바로 퇴근했고, 저녁에 도훈의 집에서 다시 만나 마주 앉았다.
양반다리를 하고 앉은 도훈이 다리 위에 드러누운 순심이를 쓰다듬으며 한 말에 놀란 영배가 눈을 휘둥그레 크게 떴다.
“... 정말 임지희 의원님을 만났다고?”
“어, 단 5분 정도였지만.”
“... 그리고 그 양반이 네게 TV 토론에 출연하라는 얘길 했다고?”
“그랬다니까.”
“네가 나가면 자기가 못 나갈 수도 있는데도 불구하고 말이지?”
“... 그래. 그랬어.”
깜빡, 깜빡.
영배가 잠시 현실감 없는 표정으로 눈을 깜빡이고는 말을 이었다.
“와, 네가 시장이 맞긴 맞나 보다.”
“...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너랑 같이 다니다가 국회의원도 보고 도지사도 봤었잖아. 그리고 스치듯이 만났지만, 현직 장관도 있었고.”
“그랬지.”
“그중에 오늘이 제일 놀랍다. 임지희 의원이라니.”
“......”
“하긴, 시장이라고 그 사람들 다 만나는 건 아닐 테니. 네가 뭔가 튀고 있는 건 확실하구나.”
“......”
영배의 성향도 도훈과 비슷하다 보니 현실에서의 영향력이야 도지사나 장관이 더 하겠지만, 진보정당 역사의 산증인인 사람이 더 놀랍게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어쩔 생각이야?”
“아직 잘 모르겠어.”
도훈의 답에 영배가 고개를 끄덕였다.
도훈과 영배가 공히 높이 평가하는 사람이 권했다고 하지만, TV 토론 프로 출연은 덜컥 승낙할 일이 아니었으니까.
정치인, 방송, 정치적 발언 등 도훈이 대놓고 싫어하거나 꺼리는 게 몇 가지나 모여 있질 않은가.
“길게 고민할 필요도 없이 이성적으로 판단하면 거절하는 게 맞아. 안 그래?”
“... 글쎄.”
“그날 그 자리도 그렇겠지만, 그 방송에 출연한 뒤에도 별의별 얘기가 다 나올 테니까. 아마, 그렇게 듣게 될 이야기 중에 우리가 일하는 데 도움이 될 건 거의 없을 테고.”
“... 흠, 그건 틀린 얘기가 아니네.”
“그래. 이성적으로 판단하면 즉시 거절하는 게 맞는데···.”
“맞는데 뭐?”
“임지희 의원이 한 말이 좀 신경 쓰이는 거지.”
“.. 흠.”
이해가 간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영배와 눈이 마주친 도훈이 가만히 한숨을 내쉬었다.
“내 기억에 최 기자가 언제까지 답해달라는 얘기 안 했던 것 같은데, 그렇지?”
“맞아. 급한 건 아닌 것 같았어. 연말특집이라니까 시간은 좀 남았지.”
“그럼 좀 천천히 생각할 여유는 있네.”
“형 말이 맞는데, 이게 가부를 가지고 길게 고민할 필요까지는 없을 것 같다는 거지.”
미간을 찌푸린 도훈의 말에 다시 고개를 끄덕인 영배가 상황을 정리했다.
“그러니까 임지희 의원의 말에 호응해주고 싶은 생각은 있는데, 굳이 그걸 TV 토론에 출연하면서까지 하고 싶지는 않다는 거지?”
“정확해.”
둘은 얼마간 말없이 생각에 잠겼다.
TV 토론에 출연하지 않으면서도 2019년의 여의도 정치를 평가, 비판하고 국민에게 ‘다음 총선 때 이런 걸 유념해서 후보를 고르세요.’라는 말을 하는 방법.
“어렵네.”
“... 그러게.”
“야, 이건 아무래도 집단지성의 힘이 필요할 것 같다.”
“집단지성?”
“그래. 월요일 비서실 조회 때 의견을 구해 봐.”
“... 흠. 그래 볼까?”
결국, 도훈은 고민을 해결하지 못한 채 월요일 아침 비서실 조회 마지막 안건으로 이 얘기를 꺼냈다.
“진짜요?”
“정말입니까?”
“... 와.”
먼저 들어 알고 있던 영배를 제외한 지연, 두진, 영진 모두가 ‘섭외’라는 단어만으로도 놀랐다.
공중파 방송국의 연말특집 2시간짜리 생방송 토론 프로그램에 패널로 섭외된다는 건 분명 대단한 일이니까.
“근데, 사실은 제가 거기에 별로 출연하고 싶지 않아요. 출연은 안 하고 싶은데 말은 전하고 싶고···. 그래서 고민인 거죠.”
“... 그건 또 무슨 앞뒤 안 맞는 얘기세요?”
“그러니까···.”
지연이 묻자 도훈은 금요일 서울에 갔다가 임지희 의원을 만났던 얘기까지 해야 했다.
“... 아무리 당선 못 됐다지만, 그분 대선후보였잖습니까?”
“그랬죠.”
“시장님, 점점 활동하는 스케일이 커지시는데요?”
“활동 아니고요. 잠깐 스치듯 만난 것뿐입니다. 10분도 안 걸렸어요.”
감탄하는 두진과 영진에게 도훈이 머쓱한 표정으로 해명하는 데, 뭔가를 생각하던 지연이 자신 없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건 어떨까요.”
“뭐가요.”
“그러니까···.”
지연이 자신이 떠올린 걸 짧게 설명했고, 모두가 긴가민가한 표정이 됐다.
“... 어떻게 보면 딱인 것 같기도 하고···.”
“그러게요. 저는 좋은 것 같습니다.”
“우리 생각에 좋으면 뭐합니까? 방송국에서 받아들여야지.”
“... 흠.”
고개를 갸웃거리는 도훈과 직원들을 향해 지연이 어깨를 으쓱하고는 말을 이었다.
“뭐, 어때요. 최소한 제안은 해볼 만하잖아요.”
“흠···.”
담담히 지연의 아이디어를 씹고 또 씹던 도훈이 결론을 냈다.
“얘기는 해보죠. 되라는 법이 없지만, 되지 말라는 법도 없으니까요.”
그렇게 도훈은 지연이 제시한 좀 묘한 해결책을 손에 들고 최승범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직 연말이라기에는 이른 10월 중순의 어느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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