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홧김에 시장 되다-168화 (169/279)

168. 오지랖 - 1.

21대 총선 선거 다음 날 점심 무렵, 도훈의 단골집인 중국관 홀.

“음, 저는 삼선짬뽕에다가 탕··· 아니, 잠깐만요. 조 비서관, 양장피 먹어도 됩니까?”

“... 짬뽕에 양장피까지요? 점심에 그걸 다 드신다고요?”

“오래간만에 점심에 포식하자는 강한 욕구가 드네요.”

“... 자기가 밥값 안낼 때만 드는 욕굽니까, 그건?”

“네.”

“... 에휴. 드세요.”

영배가 땅이 꺼지라 한숨을 내쉬건 말건, 도훈은 짬뽕도 아닌 삼선짬뽕에 양장피까지 시켰고, 두진이 피식 웃었다.

오늘 도훈의 밥값을 영배가 내는 건 총선 결과를 놓고 벌인 내기에 졌기 때문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내기할 걸 그랬네.”

“하시지 그러셨어요.”

작게 속삭이는 두진에게 도훈이 답했고, 두진이 고개를 갸웃하더니 말을 이었다.

“아니야. 다시 생각해 보니 안 하길 잘했어. 했더라면 자네에게 졌을 테니까. 아마 내가 조 비서관 밥값까지 내야 했을지도 몰라.”

“하하.”

총선 결과 내기에 응한 건 도훈과 영배뿐.

이 내기는 영배가 제안했는데 도훈 말고는 비서실 직원 아무도 응하지 않았다.

내기의 내용은 이랬다.

1. 여당이 국회 의석의 과반을 차지하느냐 못 하느냐.

2. 여당과 진평당, 다시 말해 범진보 쪽의 의석수는 모두 합해 어느 정도일 것인가?

3. 보수 야당들의 의석수는 얼마나 되겠는가.

첫 번째 항목은 도훈과 영배 모두 ‘못 한다’에 걸어 무승부.

두 번째 항목은 도훈과 영배 모두 ‘과반 이상’에 걸어 역시 무승부.

세 번째 항목은 실제 결과에 가까운 사람이 이기는 것으로 하고 숫자를 말했는데, 도훈이 더 가까웠다.

아주 근소한 세 석 차이로.

헌정 사상 최초로 ‘연동형 비례대표제’가 도입된 이번 총선의 전체 의석은 ‘지역구’와 ‘비례대표’를 포함해 총 330석.

민의당의 최종 의석은 142석, 진보정당인 진평당이 43석을 차지했고, 호남 기반 야당인 신민당이 8석을 얻었다.

신민당을 빼고도 범진보의 의석이 전체의 절반인 165석을 넘은 것이다.

나머지 두 보수 야당 중 대자당은 115석, 민국당이 22석을 얻은 상황.

보수 쪽은 과반 획득에 실패했으나 그건 이미 누구나 예상했던 결과였고, 생각보다 의석을 많이 얻어 ‘폭망’한 것은 아니라고 평가할 수 있었다.

진보 쪽은 여당이 단독 과반에 실패했지만, 살짝 애매한 신민당까지 포함해 200석 가까이 얻어 ‘절반의 성공’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진평당이 크게 약진했다는 것.

여당이 됐든 야당이 됐든 국회에서 법안 통과를 시키기 위해서는 진평당의 동의가 꼭 필요한 상황이 됐으니까.

더욱이 여당 입장에서는 정부를 입법으로 뒷받침하기 위해서 진보정당의 도움이 더욱 절실해졌으니 진평당은 이번 선거에서 유일하게 만족스러운 성적표를 받은 정당이라고 할 수 있을 터였다.

잘만 하면 정부의 정책을 더 진보적으로 견인할 수 있는 그런 위치를 잡았으니까.

“진평당이 아주 대약진했어. 나도 의석이 늘어날 거라고 생각은 했는데,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아마, 진평당 사람들도 깜짝 놀랐을걸? 그래도 그 정도 의석을 얻고도 남을 정도로 노력하긴 했지.”

정부 초기부터, 정부의 개혁정책에 찬성하며 때로는 힘을 실어주고 때로는 미진하다며 채찍질을 하는 등 초지일관 ‘개혁’의 기치를 놓지 않았던 진평당.

게다가 진평당의 얼굴이라고도 할 수 있는 임지희 의원이 국회 정치개혁특별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선거제도 개선을 이끌어 냈다.

거의 대놓고 선거제도 개혁에 반대하는 대자당이나 실속을 챙기려는 민의당 사이에서 임 의원의 고군분투는 눈물겨울 정도였다.

만약 선거제도가 바뀌지 않았더라면, 진평당의 약진도 불가능했을 것이고 민국당이나 신민당도 거의 의석을 얻지 못했을 터.

어쨌든, 임지희 의원을 필두로 한 진평당이 뚝심 있게 의정활동을 한 결과가 이번 진평당의 의석수라 도훈은 생각했다.

“식사 나왔습니다!”

점원이 각자 주문한 음식과 양장피를 테이블에 내려놨다.

김이 모락모락 솟아오르는 음식들을 만족스럽게 바라본 도훈이 영배에게 속삭였다.

“잘 먹을게, 형.”

“... 그래.”

“나도 잘 먹겠네.”

“맛있게 드세요, 실장님.”

세 사람은 푸짐한 점심을 즐겼고, 먼저 식사를 마친 도훈이 화장실에 다녀오며 중국관 뒷방 내실 앞을 지나치고 있었다.

“뭐야! 너 말 다했냐!”

우뚝.

내실에서 터져 나온 호통에 도훈이 자기도 모르게 걸음을 멈췄다.

“사장님, 고정하시고 대화를 하자고요.”

“대화! 네 할 말 다해놓고 뭔 대화!”

“아, 정말! 계속 이러시면 저는 그냥 갈 겁니다.”

“뭐! 너 인마! 당장 거기 안 서!”

“아, 몰라요.”

드르륵.

갑자기 문이 열리더니 뭔가가 도훈의 얼굴을 덮쳤다.

철썩.

“......”

도훈의 얼굴을 덮친 건 그냥 찬물이었다.

뚝. 뚝. 뚝.

도훈의 흠뻑 젖은 얼굴에서 물이 떨어졌다.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내실을 바라보는 도훈의 눈에 얼굴이 터질 듯 붉어진 어떤 초로의 노인이 들어오고 있었다.

-----

얼마 뒤.

“음. 제가 생각하기에 그건 사장님께서 잘못하신 것 같습니다.”

“이봐요, 시장 양반. 자동차 고치는 거 생각보다 위험한 일이에요. 우리가 그냥 정비소도 아니고, 사고 난 자동차에다 별의별 작업을 다 하는 공장이에요, 공장! 자르고 붙이고 용접하고 그런다고요. 잡념에 빠져 장비 잘못 건드리면 다칠 수도 있어요!”

“그렇겠지요. 하지만, 대뜸 호통을 치시지 말고 좋게 말로 하실 수도 있었잖습니까. 직원들이 어리다곤 해도 숙련된 분들일 거 아닙니까.”

“아, 직원 놈들이 나 길들이기 하는 거라니까요!”

중국관 내실에 들어앉은 도훈은 자기 얼굴에 냉수를 뿌린 노인과 마주 앉아 있었다.

손병근이라는 이름의 초로의 노인은 약 한 달 전, 유서면에 있는 공업사 하나를 인수한 사장님이었다.

그는 평생 자동차 수리를 해왔고, 50이 넘은 나이에 모은 돈으로 10명이 조금 넘는 직원이 있는 공업사를 인수하게 됐단다.

“사장님께서 회사를 사장님 원하시는 대로 운영하려는 건 알겠는데요. 직원들에게 그걸 좀 더 부드럽게 전하실 수도 있었습니다.”

“난 평생 그렇게 해왔단 말이오! 내가 전에 일하던 곳에서도 밑의 직원들 다 그렇게 대했어요! 거기서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고!”

“그때는 사장님이 아니고 경험 많고 엄한 선배님이었겠지만, 이제는 사장님이시잖아요. 그리고 거기 직원들은 사장님을 오래 겪었겠지만, 여기서는 이제 한 달 되셨다면서요? 당연히 같은 말도 받아들이는 게 다르지 않겠습니까?”

“... 흠.”

도훈의 말에 인상을 쓰면서도 뭐라 반박하지 못하는 손병근.

그는 일할 때만큼은 다른 데 한눈팔지 않고 집중하자는 주의라는데, 그의 ‘주의’가 문제가 아니라 그 생각을 직원들에게 좀 ‘험한 말’로 했다는 게 문제였다.

공장을 인수한 새 사장이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자기 마음에 안 드는 모습을 볼 때마다 그런 식으로 나오니 직원들이 반발했단다.

“요즘이 어떤 시대인지 사장님도 모르시지 않죠?”

“나이 많다고 무조건 대접받는 시대가 아니라는 건 나도 아오만, 좀 너무하잖소! 대뜸 노조 만들고 파업하겠다니 말이오.”

새 사장이 자신들을 대하는 태도가 불만인 직원들은 이의 시정을 요구하며 그렇지 않으면 노조를 만들고 집단행동에 나서거나 단체로 그만두겠다는 얘기를 했단다.

오늘 그 얘기를 듣고 벌컥 화를 내자 대표로 나선 직원이 자리를 뜨려 문을 열었고 직원을 겨냥해 손 사장이 뿌린 물이 도훈의 얼굴에 날아들었던 것.

“노조를 만들고 단체행동을 하는 건 직원들의 당연한 권리라는 건 아시죠?”

“알죠. 나도 젊어서 공장 다닐 때 파업해 봤는데.”

“그런데 왜 그걸 너무하다고 생각하세요?”

“아, 노조나 파업 얘기를 하기 전에 나한테 ‘그러지 마라’, ‘고쳐달라’고 얘기할 수도 있는 거 아니오? 내가 직원들하고 친해지려고 술도 여러 번 마셨는데, 그런 자리에서는 가만히 있다가 갑자기 이러니 너무하다는 마음이 안 들겠어요? 나 우습게 보는 거 아닌지, 사장이라지만 굴러온 돌이니까 자기들 식을 따르게 하려는 게 아닌지 별의별 생각이 다 듭디다.”

전에는 대전에 살던 손병근 사장은 한 달 전 공업사를 인수하면서 대흥시로 이사를 왔다.

대흥시에는 친척도 아는 사람도 없는데, 급매로 나온 공업사가 마침 손 사장이 가진 돈에 간당간당하게 맞아 떨어졌다나?

공업사를 인수하느라 대전의 집을 팔고 대흥에서 전셋집을 살게 된 그는 공장의 성공에 목숨을 걸다시피 하고 있었다.

사람은 나빠 보이지 않는데, 아무래도 그런 의욕이 지나쳤던 모양이었다.

- 심성이 나쁘거나 탐욕스러운 사람 아니다. 좀 ‘단무지’ 과인 것 같긴 하다. 성격도 좀 있고 말이야.

조상님이 손병근 사장을 평했던 말이었다.

조상님이 그렇게 평가했기에 도훈이 그래도 좀 일을 해결해보겠다고 손 사장과 마주 앉았지 그렇지 않았다면 그냥 대충 사과만 받고 말았을 터.

“화가 나시는 건 이해할 수 있는데, 그 화를 좀 다스리기도 하셔야죠.”

“... 휴우.”

도훈이 다독이듯 말하자 손 사장이 한숨을 내쉬었다.

대흥시에 아는 사람이 없다는 손병근.

집에 가서 가족에게 직원들이 말 안 듣는다고 얘기할 수도 없었을 테고, 그렇다고 하소연할 지인도 없으니 답답함이 쌓이기도 했을 터.

쌓인 걸 털어놔서 그런지 조금은 화가 누그러진 그의 모습을 바라보던 도훈이 말을 이었다.

“제가 사장님 도와드릴 분을 하나 소개해 드릴게요.”

“날 도와요?”

“사장님만 돕는 게 아니고, 사장님도 돕고 직원분들도 도울 수 있는 그런 분입니다.”

“내 편이 아니고요?”

“일을 좋게 해결하고 싶으시죠? 그럼 양쪽 얘기를 공정하게 듣고 얘기를 풀어가게 도울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죠. 일방적으로 사장님 편을 들 사람이 필요한 게 아니고요.”

“... 끄응.”

“제가 직접 도와드리면 좋겠지만, 이래 봬도 제가 시장이라 이리저리 얼굴 비치고 다닐 곳이 많거든요.”

웃으며 얘기하는 도훈을 빤히 바라보던 손병근 사장이 피식 실소를 흘리더니 말했다.

“그 시장이란 자리, 아무나 못 하겠소.”

“왜요?”

“난데없이 물벼락 맞고서 화도 못 내고 오히려 물 뿌린 사람 화를 달래주고 있잖소.”

“하하.”

“오지랖이 아주 넓어야겠어요.”

“뭐, 저도 원래 이런 건 아니었습니다.”

도훈이 웃으며 말하자 손 사장이 다시 실소를 흘리고는 말을 이었다.

“시장님이 말한 사람 소개해 줘요. 어떻게든 좋게 풀어야지.”

“잘 선택하신 겁니다.”

대화를 마무리하고 손병근의 연락처를 받아 든 도훈이 홀로 나왔다.

기다리던 두진, 영배와 함께 중국관을 나서 차를 향해 걸음을 옮기던 도훈이 물었다.

“어땠어요, 그쪽은?”

“얘기해봤는데, 사장님이 너무 의욕적이고 말을 험하게 하는 게 문제 같더군. 그거 말고 다른 불만은 크게 없다더라고.”

도훈이 손 사장을 상대하는 사이, 두진과 영배가 손 사장과 마주 앉았던 직원 대표를 상대했다.

“공업사 직원들이 대부분 나이가 어린 것 같더라고. 그러니 안 그래도 어려운 새 사장님의 말투가 좋게 보였을 리가 없지.”

영배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도훈은 운전을 영배에게 맡기고 조수석에 앉아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 안녕하세요, 시장님.

“안녕하세요, 신 의원님. 혹시 지금 통화 괜찮으세요?”

- 네, 말씀하세요.

도훈은 대흥시 시의원 중 진평당 소속인 신길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진평당이라 그에게 연락한 게 아니라 공업사가 그의 지역구에 있기도 했고, 그는 자기 얘기를 잘하기보다 남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사람이라는 평을 들었으니까.

“의원님 지역구에 생긴 일 좀 부탁드리려고 전화를 들렸습니다.”

- 일이요?

도훈은 담담히 손 사장과 직원들 사이의 일을 이야기했다.

설명을 들은 신길영이 웃으며 물었다.

- 일은 일인데 굳이 제가 나설 필요가 있겠어요? 그 사장이란 양반이 좀 진정되면 어렵지 않게 풀릴 것 같은데, 그렇지 않더라도 시장님이 시민 모임 찾아가시는 장소를 그 공장으로 잡아도 해결될 것 같고요.

“제가 요즘 바빠서 그럽니다.”

- 흠, 글쎄요. 알겠습니다. 제가 오후에 연락하고 찾아가 보겠습니다.

“괜한 일을 부탁드리는 건 아니죠?”

- 괜한 일은요. 뭐가 됐든, 지역주민 애로사항 해결하라고 있는 게 시의원인데요. 그런 말씀 마세요.

“그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통화를 마친 도훈이 시간을 확인했다.

아슬아슬하게 점심시간이 끝나기 전에 시청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 오지랖이 아주 넓어야겠어요.

문득, 손병근 사장이 했던 말이 떠오른 도훈.

“... 오지랖이라···.”

“뭐라고?”

“아무것도 아냐.”

피식.

영배에게 답한 도훈이 실소를 흘리고 있었다.

며칠 뒤.

“... 네?”

“정말 서운하다고요.”

“......”

난데없이 찾아온 누군가의 말에 도훈이 말문을 잃고 있었다.

# 170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