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홧김에 시장 되다-170화 (171/279)

170. 오지랖 – 3.

‘유권자와 접촉면이 넓으면 넓을수록 좋다’는 말은 정치인에게 상식에 가깝다.

‘선출’된 사람은 웬만하면 ‘재선’을 꿈꾸기 때문에 이런저런 활동을 통해 성과도 내야 하지만, 다음 선거를 대비해 자신을 선출해 준 유권자와의 관계도 좋게 유지해야 하는 건 틀림이 없는 말일 터.

대통령이나 국회의원, 자치단체장 등 유권자의 분포가 넓고 숫자도 많은 이들은 한계가 있겠으나 기초의원의 경우는 ‘발품’으로 해결될 수 있는 경우가 많다.

돌아다니면서 선거구의 주민과 만나는 것도 좋지만, 그중 일부라고 해도 주민과 지속적인 관계를 맺을 기회가 있다면 그걸 마다할 정치인은 거의 없을 터.

대흥시 시의원 차혜진 역시 다수에 속했다.

- 갑자기 개는 왜요?

“저번에 의원님이 제게 말씀하셨던 것과 관련된 겁니다. 시민의 애로사항 해결이요.”

- ...음. 지금 키우지는 않지만, 제가 개를 무척 좋아하긴 해요.

“그럼, 제가 잠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눈치 빠르게 답한 차혜진에게 도훈은 공원에 모인 시민들의 이야기를 전했다.

그리 규모가 크지 않은 공원에 반려견과 산책을 오는 서른 가량의 시민이 있는데, 이들이 ‘반려동물 공원’ 지정을 요청한다는 것.

“여기 시청 앞 아파트 단지 있잖습니까? 거기서 좀 더 가면 있는 작은 공원입니다. 크기가···.”

- 아, 저기 어딘지 저도 알아요. 운동장 반 정도나 하나? 그리 크지 않은 곳이잖아요. 벤치도 몇 개 없는 것 같던데요?

“네. 거기 맞습니다. 여기 평상시에 사람이 거의 찾질 않는다고 하네요. 제가 오늘 그 공원에 산책을 왔다가 지금 그분들 중 몇 분과 함께 있습니다. 여길 반려동물 공원으로 만드는 게 어떠냐는 얘기를 하시네요. 그분들과 이야기를 해보시는 건 어떨까 싶어서요. 어떠십니까?”

- 좋아요. 해보겠습니다.

“그럼 제가 연락처를 알려 드리···.”

- 아뇨, 제가 바로 갈게요.

“... 지금 여길 오신다고요?”

- 네. 쇠뿔도 단김에 빼라는 말이 있잖아요. 거기 주민들이 마침 계시다니 바로 가겠습니다.

“... 네. 그러세요.”

이 공원은 남가동에 있으니 유서면-남가동을 선거구로 하는 차혜진의 ‘구역’이기도 했다.

‘마음이 급하긴 급했나 보네.’

전화를 끊고 중얼거린 도훈이 시민들과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길 얼마.

고급 승용차가 한 대 저만치 도로에 멈추더니 차혜진이 등장했다.

“안녕하세요!”

편안한 옷차림으로 등장한 차혜진은 화사하게 웃으며 시민들과 인사하더니 곧 시민들과 이야기를 시작했다.

좀 걱정하는 마음이 있었던 도훈이 마음 놓고 자리를 뜰 수 있을 정도로 친근한 모습.

“저는 가보겠습니다.”

“아, 또 봬요, 시장님.”

“네. 여기 오면 또 뵙게 되겠죠.”

인사하고 차를 향해 걷던 도훈이 슬쩍 뒤를 돌아봤다.

시민들과 열심히 대화하는 차혜진을 확인한 도훈이 다시 걸음을 옮기며 중얼거렸다.

“걱정할 필요 없겠네.”

여전히 따스한 햇볕이 내리쬐는 가운데, 도훈이 기분좋은 표정으로 걷고 있었다.

-----

며칠의 시간이 지났다.

안전총괄과 회의에 참석한 도훈이 잠시 쉬는 틈을 타서 옆에 앉은 과장과 대화를 나눴다.

“일기예보는 어떻습니까?”

“... 내일모레와 그 다음 날에 걸쳐 비가 온답니다. 전국적으로 올 거고 예상 강수량도 많을 테니 가뭄 해소에 큰 도움이 될 거라네요.”

“다행이네요.”

지난겨울, 날씨는 추웠어도 눈이 많이 내리지 않았었다.

봄비가 몇 번 내리긴 했으나 강수량이 가뭄을 해소할 정도로 충분하지 않았는데, 내일모레 비가 온다는 얘기에 사람들의 기대가 컸다.

이는 단지 가뭄으로 인해 농사에 지장을 줄 게 걱정되어서만이 아니었다.

“산불감시 순찰은 열심히 하고 계시죠?”

“물론입니다, 시장님.”

“며칠만 고생하면 그래도 안심할 수 있겠네요.”

“저희도 잘 알고 있습니다.”

“비 온 다음에 다 모여서 회식 한 번 하죠. 아니, 그냥 비 오는 날 할까요?”

“하하, 그거 좋은 생각이십니다. 산불감시 활동도 비 오는 날은 쉬어야죠.”

늦가을, 초겨울도 그렇지만 가뭄이 닥친 초봄도 산불 위험이 크다.

도농 복합형 도시인 대흥시는 농토와 임야가 제법 넓어서 이 시기만 되면 산불감시에 신경을 많이 써야만 했다.

시청과 동사무소 직원뿐 아니라 경찰관, 소방관에 민간인마저 ‘산불감시 대원’으로 위촉해 감시활동을 해야 할 정도로.

“날은 언제라도 좋으니까 과장님이 준비 좀 해주세요. 경찰이나 소방서 쪽도 함께하면 좋겠는데 그쪽 사정도 있을 테니까요. 만약에 어렵다면 제가 따로 회식비를 보내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위촉된 시민들은 주민센터 단위로 식사를 함께하는 것으로 하면 되겠습니까?”

“그게 좋겠네요. 전부 다 모이면 인원이 너무 많을 것 아닙니까.”

대화를 마무리한 도훈이 안전총괄과 사무실을 나서 복도를 걷다가 다른 부서 팀장 하나와 마주쳤다.

도훈을 본 팀장이 반가운 표정으로 말했다.

“시장님, 내주에 주민 장터 기획안 올릴 겁니다.”

“아, 기획 마무리됐습니까?”

“네.”

운계면 새 주민센터 착공을 기념해 시작했던 주민참여 장터는 시 차원에서 정례화하기로 했다.

무슨 ‘잔치’나 ‘축제’ 같은 이름만 거창한 행사가 되는 걸 막기 위해 장터라는 이름으로 상, 하반기에 한 번 정도씩 하는 것으로.

딱히 주민이 참여하는 대중적인 행사가 없었는데, 투입 예산과 행사 규모는 작아도 주민이 다수 참여하는 방식이라면 꾸려가는 데 큰 문제는 없을 듯했다.

안 그래도 요즘 운계면으로 주민들 만나러 가면 ‘장터 또 안 하느냐?’고 묻는 이들이 이따금 있었다.

“작년 행사보다 좀 발전된 면이 있겠죠? 비슷한 정도라면 주민들이 실망할 수도 있습니다.”

“하하, 물론입니다!”

“그래요? 기획안 기대 하겠습니다.”

자신 있게 답하는 팀장을 뒤로하고 걷는 도훈은 이번에는 복도에 멍하니 선 민원봉사과 팀장 한 명과 맞닥뜨렸다.

그런데 민원실 소속이라 항상 친절한 미소를 머금은 그의 표정이 좀 이상했다.

“손 팀장님, 무슨 일 있어요?”

“아, 시장님.”

도훈이 부르자 팀장이 얼른 표정을 수습하고는 도훈을 향해 섰다.

“무슨 일입니까? 민원실에 또 혈기왕성한 분이라도 다녀가셨어요?”

‘혈기왕성하다’는 건 시청 직원들의 은어로 민원실에 나타나 소리를 지르거나 고압적인 자세를 보이는 이들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그게 아니라··· 조금 전에 민원실에 차혜진 의원이 어떤 여자분이랑 같이 왔다 가셨는데요.”

“그런데요?”

“저기 아파트 단지 지나쳐서 작은 공원 있잖습니까. 거기를 반려동물 공원으로 지정하자고···.”

차혜진과 주민들을 만나게 주선한 게 나흘 전의 일.

일이 이렇게 빨리 진척됐다는 건 얘기가 잘 되었다는 뜻일 텐데, 팀장의 그 표정은 뭐였을까?

팀장의 짧은 설명을 듣고 난 도훈이 물었다.

“논의는 해봐야겠지만, 듣기에는 별로 문제는 없는 것 같은데요. 왜 그런 표정을 하고 계셨어요?”

“... 이게 제안서인데, 한번 직접 보세요.”

팀장이 손에 든 서류를 넘겼다.

다섯 장으로 된 제안서를 차분히 확인하던 도훈의 표정은 점점 일그러졌다.

결정적인 건 서류의 네 번째 장 마지막 부분이 눈에 들어온 순간.

“... 초기비용이 유, 육천?”

도훈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리자 옆에서 보고만 있던 두진이 눈을 휘둥그레 크게 떴다.

“반려동물 공원에 육천이요? 진짭니까?”

“... 직접 보세요.”

두진에게 서류를 건네고 난 도훈이 한숨을 내쉬었다.

문제의 그 공원은 애초에 거의 비용 투입이 없이 키 큰 나무가 좀 있는 공터에다 벤치를 가져다 놓고 공원 사방에 작은 울타리를 친 게 전부였다.

주택가와 좀 거리가 있어 이용하는 사람이 적으니 굳이 뭔가 시설을 설치할 필요가 없었으니까.

화장실도 없고 식수대도 없으며 조경수도 그다지 심지 않아서 지금껏 관리비용이 거의 들어가지 않은 그런 곳이었다.

월요일 출근한 뒤, 그런 부분을 확인했기에 잘하면 반려동물 공원으로 만들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랬는데···.

“... 초기비용 육천에 연 관리비 오백이라니, 이건 좀 과합니다, 시장님.”

“좀 과한 게 아니죠. 많이 과한 거죠”

두진의 말에 도훈이 쓰게 웃으며 답하고는 말을 이었다.

“우리 시에 있는 그 어떤 공원도 비용을 그만큼 들인 곳은 없을 겁니다.”

“아마 그럴 겁니다. 공원 아닌 시설물도 그 정도의 예산을 투입하는 경우가 많지는 않지요. 하하, 차 의원이 통이 크네요.”

“커도 너무 크니까 문제죠.”

통 크다고 ‘좋게’ 말하는 두진이나 도훈이나 어이없다는 표정인 것은 마찬가지.

대흥시가 아무리 ‘시’라고는 해도 작은 반려동물 공원에 초기비용 육천을 쓸 만큼 재정이 넉넉하지는 않다.

설사, 넉넉하다고 해도 예산을 투입한다면 ‘다수’의 시민에게 혜택이 가는 일이 먼저여야 한다.

반려동물을 키우는 이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고 사회적 인식도 달라지고 있다지만, 그에 따른 예산 투입도 ‘적정’ 수준이어야 하는데 이건 지나쳐도 한참 지나쳤다.

‘주민들 요구는 절대 이 정도가 아니었는데···.’

도훈이 기억하기로 지난 일요일 차혜진이 오기 전 시민들과 대화를 나눴을 때, 시민들은 ‘반려동물 공원’으로의 지정을 원했지 이런저런 시설이 설치되는 것까지 바라지는 않았다.

도훈 역시, 예산이 많이 들어가게 되면 분명 반대 목소리가 커져 오히려 일이 안 풀리기 쉬울 것이라고 시민들에게 말하기도 했었다.

그 자리에 있던 이들은 도훈의 말이 맞는다며 공감을 표했었다.

다른 이들의 반대에 앞서, 육천은커녕 육백만 원을 쓰는 일에도 무척 깐깐한 게 도훈이었다.

어떤 사업이 됐든, 예산을 투입하기 위해서는 그에 합당한 근거와 주민의 요구가 있어야 했다.

이를테면 반려공원 지정을 요청하거나 공원으로 산책하러 다니는 시민이 한 3백 명쯤 된다거나.

그런데···.

“허허, 민원인이 열이 채 안 되는군요.”

“... 휴우.”

두진의 말에 도훈이 다시 한숨을 쉬었다.

제안서 마지막에 차혜진과 함께 민원을 제기한 사람의 연명부가 있었는데, 여덟 명에 불과했으니까.

공원을 이용하는 이들이 서른 정도라고 했는데 나머지는 어떻게 된 걸까?

두진에게 다시 서류를 받아든 도훈이 팀장에게 물었다.

“너무 황당해서 표정이 그랬던 겁니까?”

“그렇기도 합니다만, 사실 차 의원이 이거 시장님도 관심 있게 보고 있는 일이라고 으름장을 놓고 가서···.”

“제가요?”

“... 차 의원은 그렇게 말했는데, 지금 보니 아닌 것 같습니다.”

“......”

일순, 도훈은 말문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차혜진에게 이 일을 넘기면서, 자신은 시청에 ‘공원지정’과 관련한 제안이 들어와도 논의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을 거라고 미리 못을 박았었다.

그런데 차혜진은 그런 도훈의 말을 귓등으로 들었던 모양.

말문을 잃었던 도훈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을 이었다.

“저도 개 키우는 사람이니 관심이 있는 건 맞는데, 이런 방향은 절대 아닙니다.”

“아, 네.”

“여하튼 이건 저한테까지 올라올 필요가 없을 것 같네요.”

“알겠습니다.”

서류를 팀장에게 돌려주고 걸음을 옮기는 도훈은, 지난 일요일 주민들의 연락처를 알아놓을 걸 하고 후회했다.

며칠 새 무슨 일이 생긴 건지 알아보고 싶었으니까.

차혜진의 제안서에 이름을 적은 이들은 연락처가 있었지만, 그들에게 묻는 건 왠지 꺼려졌다.

‘이거 주말에 또 공원에 가봐야겠네.’

그렇게 속으로 중얼거린 도훈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번 주말, 날씨가 괜찮다면 지난 주에 못한 데이트를 하기로 세경과 약속이 되어 있었으니까.

‘세경 씨한테 뭐라고 한담?’

시장실을 향해 걸음을 옮기는 도훈의 표정에서 짜증이 뚝뚝 묻어나고 있었다.

# 172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