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 첫 행사 – 2.
진평당 대전·충남 지역 신입 청년 당원 연수는 6월 첫 주말에 이틀에 걸쳐 열렸다.
같은 지역 민의당 지역위원회에서 축전을 보냈고, 대흥시 시의회도 마찬가지로 축전을 보냈다.
서울에서 진평당 당 대표를 비롯한 수뇌부가 다수 내려왔고, 국회의원도 다수 참여했다.
다시 말해, 생각보다 행사가 거창했다.
“생각보다 행사가 크다, 도훈아.”
“그러게.”
외부에서 대흥시를 찾은 이들의 숙소는 나란히 서 있는 두 채의 모텔.
모텔 앞 도로변에 차를 세운 도훈과 영배가 내렸다.
1박 2일 예정인 연수의 오늘 저녁 일정은 조별 토론에 이은 회식이라는데, 도훈은 강연이 아닌 진평당 당 수뇌부에게 인사를 하려고 찾아온 터였다.
도훈이 한적한 도로변에 덩그러니 솟은 모텔 건물 두 채를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저 모텔들이 거의 다 차는 건 처음 있는 일이 아닐까 싶은데 말이야.”
“아마, 그럴걸? 그러니까 숙박비를 반으로 깎아준 거겠지.”
“꼭대기 특실들이 넓어서 조별 토론도 할 수 있다니 다행이긴 한데, 도대체 요즘 모텔은 어떻게 생겼길래 한 방에 수십 명씩 들어가는 거지?”
“특실이라잖아.”
대흥시에 이사 온 뒤 모텔에 가본 적이 없는 도훈이고 영배도 마찬가지여서 모텔 구조를 잘 몰랐다.
어쨌든, 모텔 특실들에 모여 조별 토론을 하고 두 모텔 중 한 곳의 포장되지 않은 주차장에서 바비큐로 저녁 식사를 하기로 했다니 연수는 꽤 본격적이라고 할 수 있었다.
둘 중 오른쪽에 자리한 모텔의 주차장에 들어서자 저녁 식사를 준비하고 있는 심남진 의원과 진평당 사람들이 보였다.
“아, 시장님.”
“안녕하세요, 부의장님.”
“아이고. 부의장 소리 좀 하지 마시라니까요.”
“하하, 익숙해지셔야죠.”
“어휴, 진짜.”
푸념하는 심남진에 이어 다른 사람들과 인사한 뒤 도훈이 물었다.
“아직 조별 토론 안 끝났나 보죠?”
“네. 좀 길어지네요.”
진평당 지도부는 전부 조별 토론에 참여해 신입 청년 당원들과 함께했다.
도훈은 조별 토론 마감 시간에 맞춰 도착했는데, 아직 토론을 마치고 내려온 이들이 하나도 없었다.
도훈이 판이 벌어진 모텔 주차장을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밥을 직접 지으셨어요? 번거로우셨을 텐데.”
“하하, 지금은 아니지만, 저도 예전에 농사를 지어서 그런지 웬만하면 손님에게 밥을 해 먹이는 습관이 있어서요.”
“네.”
“그래도 오늘만입니다. 내일은 식당에서 해결할 거에요. 아무래도 저녁에 술 마시면, 내일 아침은 해장 음식이 필요할 테니까요. 도시락은 일회용품을 너무 많이 쓰기도 하니까 이렇게 하기로 했어요.”
“어디서 식기도 빌려오셨네요? 이만큼 많은 식기를 빌려줄 수 있는 곳이 흔치 않을 텐데.”
“의용소방대에다 손 좀 벌렸죠.”
“아, 거기라면 가능하죠.”
도훈과 영배가 심남진 및 진평당 사람들과 잡담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 중 도훈을 알아보는 이들이 있었다.
“어? 대흥시 김도훈 시장님이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시장님. 악수 한 번만 해주세요.”
“하하, 네. 반가워요.”
정당 당원이 될 정도로 정치에 관심이 있는 젊은이들이라서 그런지 도훈을 알아보고 인사를 청하는 사람이 많았다.
“시장님, 내일 강연하시는 것 맞죠?”
“네. 오늘은 손님들께 인사하러 잠깐 들린 겁니다.”
“같이 저녁이라도 하시죠.”
“그랬으면 좋겠지만, 다른 일이 있어서요. 미리 약속되어 있던.”
“에고, 아쉽습니다.”
청년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진평당 지도부 사람들도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우리 대흥시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시장 김도훈입니다.”
“반갑습니다, 시장님.”
당 대표를 비롯한 몇 사람과 인사를 나누고 있는데 아는 얼굴이 나타났다.
“오래간만에 뵙습니다, 임 의원님.”
“네. 반가워요, 김 시장님.”
도훈과 악수하는 임지희 의원의 얼굴은 밝았다.
개인적으로 다시 국회의원에 당선된 것도 있겠으나, 지난 총선 결과도 그렇고 오늘 연수 행사도 그렇고 진평당이 밝은 분위기에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는 게 그녀의 표정에서도 드러났다.
“요즘 활약은 뉴스로 잘 전해 듣고 있습니다.”
“호호. 활약이라고 할 것까지는 아니죠. 아직 멀었어요.”
지난 총선 이후, 민의당과 진평당은 전략적 연대를 계속 논의하고 있었다.
두 당 소속 의원을 합하면 국회 의석의 반이 넘게 되니 두 당 협력으로 법안 통과가 가능해진 상황.
아직 논의가 마무리되지는 않았지만, 총선 이후에도 두 당이 합의해 통과시킨 법안의 수가 적지 않았다.
여전히 보수 야당들이 반대 목소리를 내고 있었지만, 과반 의석으로 절차적 정당성마저 확보한 두 당의 협력은 아직 굳건했다.
더불어, 정부 여당의 개혁정책 추진이 좀 더 과감해지고 각종 사업과 정책이 더욱 진보적으로 견인되고 있어 진평당의 존재감은 과거 그 어느 때보다 높았다.
도훈과 영배가 임지희와 이야기하고 있는데 40대로 보이는 남자 하나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저도 인사 좀 시켜 주십시오, 의원님.”
“아, 그럴까요? 인사하세요, 시장님. 이 분은 이번에 대전에서 당선된 진승일 의원이에요.”
“안녕하십니까. 진승일입니다.”
“안녕하세요. 김도훈입니다.”
도훈이 진승일과 악수했고 임지희가 말을 이었다.
“진 의원이 오늘 연수 준비위원장이에요.”
“아, 그럼···.”
도훈은 뒷말을 삼켰다.
초면의 상대에게 ‘당신이 날 이 일에 끌어들인 원흉이냐?’고 물을 수는 없었으니까.
그런데, 상대의 반응이 의외였다.
“하하, 제가 시장님 모시려고 김용진 의원에게 밥 여러 번 샀습니다.”
“... 김용진 의원이요?”
“네. 그나마 시장님과 친하게 지내는 분이 도지사님하고 김 의원님인 것 같던데, 제가 도지사님과는 친분이 전혀 없거든요.”
“... 네.”
“시장님 모시는 건 성공했으니 다행인데, 시장님께 미움받을 건 걱정이네요.”
“미움이라뇨?”
“아닙니까? 김 의원님이 그러던데요. 시장님, 이런 행사에 참여하고 강연하는 거 정말 싫어하실 거라고요.”
“......”
“제가 원흉인 건 맞는데, 저 너무 미워하지 말아 주십시오.”
“......”
도훈은 아무런 대꾸 없이 진승일의 손을 놓고 다른 사람들과도 인사를 나눴다.
인사를 청하는 사람이 많아 한참 시간이 걸린 뒤에야 도훈은 자리를 벗어날 수 있었다.
“내일 강연 잘 부탁해요, 시장님.”
“너무 기대하지 마십시오, 의원님. 저 이런 거 잘못합니다.”
“호호, 잘못하긴요? 예전에 모교에서 했던 강연이 대인기였다는 얘기 나도 들었어요.”
“그때야···. 쩝, 아무것도 아닙니다.”
“호호. 어쨌든 내일 봐요.”
“네.”
도훈이 임지희와 인사하고 차로 걸어가는데, 진승일이 배웅하겠다며 뒤를 따랐다.
차에 다다르자 진승일이 영배를 흘끔 하고는 입을 열었다.
“시장님, 잠깐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 하시죠.”
“단둘이서···.”
“제 비서관과 공유하지 못할 얘기라면 별로 듣고 싶지 않은데요.”
담담한 도훈의 말에 멈칫한 진승일이 영배를 다시 보고는 씨익 웃었다.
좀 까칠한 도훈의 태도가 마음에 안 들 수도 있을 텐데, 다행히 진승일은 그걸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그냥 말씀드리죠.”
“네.”
“조만간 검찰에서 시장님 찾아갈지 모릅니다.”
“네?”
“검찰 수사관이 시장님 찾아갈 수도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
도훈은 말없이 진승일을 바라봤다.
갑자기 뜬금없는 얘기를 꺼냈으니 ‘설명’이 필요하다는 눈빛.
하지만, 진승일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말을 이었다.
“더 말씀드리면 좋겠지만, 지금 제가 아는 건 거기까지뿐입니다.”
“......”
“내일 뵙겠습니다.”
“네.”
진승일은 도훈의 담담한 표정을 빤히 바라보다가 몸을 돌렸고, 영배가 황당 반 당황 반의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뭐야, 저 사람? 뜬금없이 검찰 수사관은 무슨 얘기야?”
“그러게 말이야.”
“넌 왜 그렇게 담담해? 검찰이라는데, 뭐 아는 거 있어?”
“있을 턱이 있냐?”
“하긴···. 그러면 이거 뭐지? 네가 뭔가 잘못한 건 없을 텐데, 우리 모르게 뭔가 일 저지른 직원이라도 있는 건가?”
“그랬으면 우리가 허수아비라는 얘기겠지.”
“그렇지? 기획감사실 감사팀이 일 잘하고 있는 것 같던데 도대체 뭐지? 정말 우리 시청일일까?”
“왠지 그쪽은 아닐 것 같아.”
“뭐? 그걸 어떻게 알아?”
영배가 묻자 도훈이 멀어지는 진승일 턱짓으로 가리키고는 답했다.
“저 사람, 검찰 어쩌고 말하는 폼이···.”
“폼이 뭐?”
“호의도 아니고 악의도 없는 것 같고, 무슨 장난치는 듯한 눈빛이었거든.”
“야, 장난칠 게 따로 있지.”
영배가 의아해했지만, 도훈이 담담히 말을 이었다.
“두고 보면 알겠지.”
“어휴, 차라리 장난이었으면 좋겠다.”
도훈과 영배의 시선이 다시 진승일을 향했다.
빠르게 멀어지는 그의 모습을 도훈이 담담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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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정오가 가까운 시간, 대흥시의 한 중학교 대강당.
100여 명의 사람이 경청하는 가운데 도훈이 강의에 이은 질의·응답을 마무리하고 있었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라는 미국 사람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어른들은 자신들이 가치 있는 삶을 사는 데 실패했음에도, 자신이 더 경험이 많으니 다시 말해, 실패를 통해 쌓아 올린 연륜이 있으니 더 현명하다고 착각한다.”
담담히 청년들을 바라본 도훈의 말이 이어졌다.
“그래서인지 어른들이 젊은 사람들에게 하는 말은 대개 이래선 안 된다, 저래선 안 된다는 게 많습니다. 하지만, 세상의 변화가 빠른 것처럼 우리의 생각도 빠르게 변합니다. 과거에 안 되었던 것, 어른들이 안 될 거라고 하는 말이 다 틀린 건 아니겠지만, 다 옳은 것도 아닙니다. 점점 더 옳은 게 줄어들 테고요.”
도훈의 눈에 뒤편에 앉은 진승일이 들어왔다.
그가 아주 흥미롭다는 듯 눈을 반짝이고 있었지만, 도훈은 이내 그를 지나쳐 다른 이와 시선을 맞췄다.
“정치가 됐든 행정이 됐든, 앞으로 청년의 역할이 커져야 한다는 건 확실합니다. 저는 부디 여러분이 윗세대의 연륜이 아닌 여러분 자신의 성공과 실패를 통해 여러분만의 지혜를 쌓아나가기를 바랍니다. 이상으로 마치겠습니다.”
짝짝짝짝짝!
30분 정도로 예정되었던 강의가 한 시간 가까이 진행됐지만, 일방적인 강의라기보다는 문답을 통해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식이라 지루해하는 사람이 없었다.
“강의 좋았습니다.”
“고맙습니다.”
“또 해주세요.”
“레퍼토리가 없어요. 하하.”
청년 당원들과 인사하고 지도부 사람들과도 시간을 들여 인사한 도훈은 함께 식사하자는 권유를 공손히 사양하고 영배와 함께 밖으로 나와 주차된 차로 향했다.
“잘했다.”
“잘하긴? 어휴, 힘들었어.”
“야, 너 강의 좀 더 하지 않을래? 관내 학생들에게 강의해도 좋을 것 같은데?”
“애들한테 이렇게 딱딱한 얘기 하면 참 좋아하겠다.”
“그러려나?”
여하튼, 강의를 무사히 마친 도훈과 영배가 그렇게 대화하며 걷는데 뒤에서 누군가 도훈을 불렀다.
“시장님!”
두 사람이 돌아보니 진승일이 다가오고 있었다.
“왜 그러십니까?”
“......”
두어 걸음 앞에 선 진승일은 도훈의 질문에 답도 하지 않고 잠시 빤히 바라보더니 갑자기 고개를 푹 숙였다.
“제가 사과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
국회의원치고 젊다지만 진승일의 나이는 도훈보다 열 살 가까이 많았다.
연상의 국회의원이 뜬금없이 미안하다고 고개까지 숙이니 도훈이나 영배나 당황할 수밖에.
“죄송합니다, 시장님.”
“......”
도훈과 영배가 당황한 표정으로 고개 숙인 진승일을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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