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 첫 행사 – 3.
“죄송합니다, 시장님.”
고개 숙인 진승일을 가만히 바라보던 도훈이 입을 열었다.
“도대체 뭐가 죄송하다는 건지도 모르겠는데요, 저는. 그리고 고개 들고 이야기하세요. 제가 부담스럽네요.”
“그러죠.”
고개를 든 진승일이 머쓱하게 웃더니 말을 이었다.
“제가 장난을 좀 쳤습니다. 시장님을 시험해 보려고요.”
“장난? 검찰이 찾아올 거라는 게 장난이었다는 겁니까?”
“그건 그냥 사실이고요. 그 이유를 말씀드리지 않은 게 장난이었죠.”
“......”
도훈은 담담한데, 옆에 있는 영배의 표정이 싸늘하게 가라앉았고 진승일은 그런 영배를 흘끔 하고는 더 머쓱한 표정이 되어 말을 이었다.
“제가 직업병이 있어서 사람을 잘 못 믿습니다.”
“그런데요?”
“임지희 의원님이나 김용진 의원님이나 우리 당 대흥시 당원들도 시장님을 칭찬 ‘만’ 하더라고요.”
“... 그래서요?”
“지역도 마침 가까우니 시장님과 잘 지내보라고 다들 권하길래, 살짝 시험을 해봤습니다. 대체 어느 정도 되는 분이길래 다들 그러는지요.”
“......”
진승일은 늦깎이 검사 출신 변호사.
충남 지역 국립대를 나와 직장생활을 하다 뒤늦게 사법시험에 도전해 합격, 검사가 됐고 이후 대전, 충남에서만 검사 생활을 10년 가까이 한 사람이었다.
그가 검사를 그만둔 건 약 1년 정도 됐는데 변호사 개업을 한 뒤 ‘전관예우’를 받을 수 있는 사건은 일절 맡지 않았단다.
검사 출신 변호사가 민의당도 아닌 진평당 당원이 된 것도 특이한데 그 이유가 가관이었다.
- 진평당이 수권정당이 되면 이쪽이든 저쪽이든 나쁜 놈들은 하나도 봐주지 않고 잡아넣게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이 당에 가입했다.
어제저녁 진승일과 ‘검찰 어쩌고’하는 대화를 한 뒤, 도훈은 여전히 대전에서 근무하는 아버지 후배 여서진에게 전화해 평을 들었다.
아무래도 경찰과 검찰의 관계라는 게 있으니 좀 자세히 들을 수 있을 것 같아서.
- 우리가 보기엔 소신 있고 화끈한 검사였는데, 검사들이 보기엔 ‘무대포’에 ‘돌아이’였겠지. 힘 있고 돈 있는 나쁜 놈들과는 타협이나 봐주기 같은 거 안 하기로 유명했어. 그러니 윗사람이나 동료들이 좋게 보질 않았지. ‘왕따 검사’였다는 게 딱 맞는 말일 걸? 조직에서 워낙 겉돌다 보니 혼자 노느라 장난기가 심하다는 얘기가 있더라.
도훈은 그런 서진의 평을 듣고 진승일이 자신에게 했던 말을 머릿속에서 지웠다.
악의가 있어서 한 말로 생각되지 않았고 ‘장난’은 아닌 무언가가 있을 것으로 추측되었기에.
‘장난이 아닌 시험이라···.’
진승일에게 시선을 고정한 도훈이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는데, 진승일이 말을 이었다.
“웬만한 사람은 검찰 얘기가 나오면 평정심을 잃거든요. 내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무슨 잘못을 했나 그것도 아니면 나 모르게 주변 사람이 어떤 일에 휘말려 들었나 하고 확인하느라 집중을 못 합니다.”
“... 그렇겠네요.”
“그런데 시장님은 전혀 흔들리지 않으시더군요. 어제도 그리고 오늘도요. 그 얘기를 제게 직접 들은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침착하게 강연을 하시더라고요. 자신도 그렇고 주변도 그렇고 검찰의 수사대상이 될만한 일은 벌이지 않았다는 확신이 있다는 뜻이겠죠.”
“......”
말없이 바라보는 도훈에게 진승일이 어깨를 으쓱해 보이더니 ‘졌다’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저는 다른 건 몰라도, 자기 관리나 조직 관리를 못 하는 사람은 공직자 자격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들 하도 시장님을 추켜세우길래 제 나름대로 시험을 해봤는데, 시장님은 그 부분에 확신 같은 게 있으신 것 같네요. 주변 평가보다 더 대단한 분이었어요.”
“제가 아무런 확신도 없이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는 것일 수도 있잖습니까?”
“하하. 시장님이 타고난 배우라면 몰라도 제가 경험한 대단하다는 사람들도 그렇게까지는 못하더라고요. 갑작스러운 검찰 얘기에도 우리 당원들과 그리 차분하게 질의·응답 주고받는 건 아무나, 아니 아무도 못 할 거로 생각합니다.”
아주 매끄러운 진승일의 설명에 영배의 화난 듯한 표정이 어이없다는 것으로 변했다.
진승일이 그런 영배를 향해 능글맞은 미소를 보내는데, 일체의 표정 변화 없이 담담함을 유지한 도훈이 질문했다.
“그러면 시험에 합격한 겁니까?”
“하하. 합격은 무슨. 제가 초면에 주제넘은 짓을 했습니다. 아무리 나이는 어려도 정치입문은 선배신데 말이죠.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시장님.”
머쓱한 표정으로 답하는 진승일의 모습에서 가식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서 도훈은 그에게 화를 낼 마음이 들지 않았다.
대신에···.
“이젠 제 차례인 것 같네요.”
“네?”
“아시다시피 제가 사람 사귀는 걸 좀 가려서 합니다. 그것도 정치인들은 좀 더하고요. 김용진 의원님이 그런 말씀은 안 하시던가요?”
“아, 예. 드, 듣긴 들었습니다.”
“저도 수더분하게 사람 사귀는 걸 잘못하는 터라, 진 의원님이 어떤 분인지 좀 두고 보겠습니다.”
“... 하, 하하. 겁나는데요.”
“설마요.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시험까지 하시는 분이 그렇게 간이 작을 리가 없죠.”
“......”
진승일의 얼굴에 당황함이 스쳐 지나가는 걸 확인한 도훈이 몸을 돌리는데 진승일이 다급히 말을 걸었다.
“저기 시장님. 한 가지 꼭 말씀드릴 게 있는데요.”
“... 뭡니까?”
“검찰 수사관이 곧 시장님 찾아갈 거라는 건 진짭니다.”
“그래요?”
“네. 다만, 시장님이나 시청 직원들이 뭔가를 잘못해서 그러는 게 아니고요. 누군가와의 관계를 물으러 찾아가는 걸 겁니다.”
“누구 때문인 건데요?”
진승일이 도훈의 곁으로 다가와 귀에다 대고 사람 이름 하나를 속삭였다.
이름을 들었지만 그게 누구인지 곧바로 떠오르지 않은 도훈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그게 누군데요?”
“설마 모르세요?”
“들어본 적은 있는 것 같은데 바로 얼굴이 안 떠오르네요. 별로 저와 관련이 없는 사람인 것 같은데요?”
“... 하, 하하.”
다시 머쓱한 표정이 된 진승일이 어이없는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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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일?”
도훈은 진승일이 귀띔해 준 이름을 시청 집무실에 돌아와서야 영배에게 말해줬다.
“응.”
“와, 이건 또 무슨 어이없는 상황이지?”
영배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고, 곁에 있던 두진이 또 다른 의미의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도훈을 바라보고 있었다.
“왜 그렇게 보십니까?”
“정말 기억 안 나나?”
“어디서 들어본 것 같다는 것 빼고는···.”
“자네 차 바꿔 준 그 대전 변호사잖아.”
“......”
“김형일 변호사 아들한테 죽을 뻔했잖아, 자네.”
“... 아.”
김형일의 아들이 도훈의 차를 폐차시켰고, 김형일은 운전자를 아들에서 아들 친구로 바꿔치기하려다 들켜 포기했던 일이 있었다.
그 뒤로, 대흥시의 무기계약직 공무원 노조에 강연을 와서 한 번 만난 일이 있었다.
도훈은 그에 관해 관심을 가져본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김형일은 지난 총선 때 대전에서 기어코 민의당 지역구 공천을 받아내어 선거에 나섰으나 아슬아슬한 차이로 패배했다.
“... 내 기억이 확실하다면 그 김형일 변호사가 진승일 의원의 지역구에서 출마했었네.”
“그랬습니까?”
“그래. 이 친구야.”
두진의 말이 맞는다면, 진승일이 김형일의 일을 안 것은 검사 출신이라서가 아니라 사건 관련자이기 때문일 가능성이 컸다.
그리고 둘이 경쟁했다는 사실에 비추어 공범이 아니라 ‘피해자’일 가능성이 더 크다고 여겨졌다.
‘... 그렇다면 십중팔구 선거와 관련한 거라는 얘긴데···. 그 방면으로는 나는 아무런 관련이 없잖아?’
아무리 생각해도 김형일과 자신의 접점을 발견할 수 없었던 도훈은 이쯤에서 더는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신경 안 쓴다고?”
“응.”
“야, 아무리 그래도 검찰에서 계속 들쑤신다는 건···.”
“그게 속 편하겠네.”
신경 안 쓰겠다는 도훈의 말에 걱정하는 영배의 말을 자른 건 두진.
“괜찮을까요, 실장님?”
“김형일 변호사와 김 시장과 접점이 전혀 없잖나. 아들 음주운전 건도 이미 한참 지난 일이고 말일세.”
“그건 그런데···.”
“김 시장이 거리낄 일이 전혀 없는데 괜히 신경 써서 뭐하겠나? 그리고 혹여 조금이라도 관련이 있다면 진 의원이 절대 그걸로 장난치지 않았을 거야.”
“흠.”
영배가 두진의 말에 생각에 잠겼고 도훈은 공감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도훈에게 두진이 다른 화제를 꺼냈다.
두진의 이야기를 들은 도훈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반문했다.
“... 네?”
“왜 그러나? 이미 다 알고 있을 거라고 하던데.”
“설마 거기도 행사를 우리 시에서 할 거랍니까?”
“그럴 계획이라고 하더군.”
“......”
도훈과 영배가 진평당 행사에 강연하러 다녀온 사이 두진이 혼자 시장 집무실을 지키고 있었는데, 김용진 의원 사무실에서 연락이 왔단다.
민의당 지역위원회가 총선 이후 재정비를 해오다가 조만간 그 과정을 마치고 당원 행사를 할 건데, 와서 강연 좀 해달라고.
대흥시가 포함된 지역구의 민의당 지역위원장은 김용진 의원.
그 민의당 지역위원회의 당원대회를 조만간 대흥시에서 개최한단다.
김용진 의원의 지역 사무실은 대흥시가 아닌 논산시에 있는데도 말이다.
말문을 잃은 도훈에게 미소를 보이는 두진.
도훈이 한숨을 내쉬고 말을 이었다.
“... 휴우. 민의당 지역위원회 행사는 언제쯤 한답니까?”
“다음 달 안으로 할 것 같다고 하더군.”
“... 하하.”
오늘 정치권 행사에 처음 참여해 강연이란 걸 했는데, 벌써 다음 행사가 예약됐다고나 할까?
‘민의당 시의원들이 진평당 행사에도 가고 우리 당 행사에도 오라고 얘기하더니, 설마 이거 계획적이었던 건가?’
미간을 찌푸린 도훈이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는데, 두진이 말을 이었다.
“허허, 그렇게 싫은 티 내지 말게. 어차피 대자당이나 민국당 같은 곳에서는 혹여 우리 시에서 전국 대의원 대회 같은 행사를 열어도 자네 안 부를 테니까.”
“... 다행이네요.”
도훈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답하는데, 두진이 뒤늦게 떠올린 걸 말했다.
“아, 깜빡한 게 있네.”
“뭡니까?”
“그때 아마 도지사도 축사하러 들를 거라고, 도지사하고 김 의원하고 함께 저녁 식사하는 건 어떠냐는 얘기를 했어.”
“아주 뽕을 뽑겠다는 얘기로 들리네요.”
도훈이 푸념하듯 투덜거렸다.
이건 거절할 수가 없는 강연에 식사 제안이었으니까.
‘이 양반들이 나를 점점 더 꿰뚫어보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건 착각인가?’
속으로 투덜거리는 도훈의 뇌리에 다시 김형일이라는 이름 석 자는 사라지고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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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뒤.
도훈은 정말로 대전지방검찰청에 소속된 수사관들의 방문을 받았다.
그들은 도훈을 조사하는 게 아니라 도훈에게 물어볼 게 있다며 찾아와 ‘김형일’과의 관계를 질문했다.
도훈은 담담하게 김형일의 아들이 저질렀던 사고, 그리고 그 처리 과정에서 있었던 ‘바꿔치기’ 시도를 얘기했다.
이후 노조 강연에서 만난 적은 있지만, 딱히 공적으로나 사적으로 연관된 적이 없다는 것도.
이미 상당 부분을 알고 있었다는 듯, 수사관들은 도훈에게 몇 가지 가볍게 확인만 하고는 자리를 뜨려 했다.
그러나.
“왜 제게 찾아와 김형일 변호사의 일을 묻는지 이유는 알아야겠습니다.”
도훈의 요구에 난색을 보이던 두 수사관 중 선임이 담당 검사에게 전화를 걸고 뭐라 통화하더니 입을 열었다.
“그 누구에게도 이 사실을 알리시면 안 됩니다. 만약에 이 사실을 유출하시면 수사정보 유출로 형사기소 되실 수도 있습니다.”
“비밀 지키죠.”
그리고 이어진 수사관의 말.
“김형일 변호사는 자기 주변에 이용가치가 크거나 경쟁상대가 될 수도 있는 이들을 뒷조사해 개인정보 파일을 만들어 가지고 있었습니다.”
“... 정말입니까?”
“네. 그중에 김도훈 시장님의 파일도 있었습니다.”
황당하다는 표정이 된 도훈이 말을 이었다.
“내용이 뭡니까?”
“고향 및 가족관계, 학력, 아주 친한 친구들 몇 그리고 개략적인 경력이 전부더군요. 아마 조사를 해도 나오는 게 없었던 것 같습니다.”
“......”
도훈이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자 후배 수사관이 덧붙였다.
“혹시 조금이라도 심각한 내용이 있었다면, 같은 참고인이라고 해도 저희가 찾아오는 대신 검찰청으로 오시라고 했을 겁니다. 그 내용도 다 보여드렸을 거고요.”
“......”
“실제로, 이름을 밝힐 수 없는 다른 분들은 대개 검찰청에 모셨습니다.”
“... 어이가 없네요.”
도훈의 소감은 그랬지만, 두 수사관은 왠지 동의하지 않는다는 듯한 표정.
“파장이 클 것 같습니까?”
“글쎄요. 김형일 변호사가 가진 파일에 이름이 오른 다른 분은 몰라도 시장님은 관련 없으실 거라는 건 확인해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희가 말씀드릴 수 있는 건 이 정도입니다. 비밀 꼭···.”
“... 지킬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믿겠습니다.”
수사관들이 떠나고 시장실에 혼자 남은 도훈은 창밖에 시선을 준 채 중얼거렸다.
“민폐도 아주 큰 민폐를 끼치게 되겠네.”
민의당 총선 후보가 불법 선거운동으로 수사를 받다가 불법으로 개인정보를 수집해서 갖고 있다가 발각됐다.
전국적 쟁점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지역에서는 제법 큰 충격을 줄 만한 사건이었다.
느낌상, 민의당 쪽 사람들도 아직은 모르고 있는 듯했다.
“... 그 양반들, 태평스럽게 나랑 밥 먹을 생각이나 할 때가 아닌 것 같은데···.”
강정문과 김용진의 얼굴을 떠올린 도훈이 그렇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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