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홧김에 시장 되다-184화 (185/279)

184. 거창할 필요 없는 – 1.

“이 위원회에서 결론 나올 때까지 시장할 거야?”

“......”

도훈은 윤 교수의 질문에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시장 재선에 도전할지 말지 아직 결정하지 못한 상태였으니까.

재선에 도전한다는 건 곧 정치(그간 계속 행정적인 측면이 크고 실제로도 그렇게 믿고 있는)에 제대로 임한다는 것에 다름없었기에.

“네가 아무리 ‘똘끼’가 있는 놈이라고 해도, 아무 생각도 없는 건 아니지?”

“... 쩝. 고민 중입니다.”

“흥. 내 그럴 줄 알았다.”

도훈을 딱하다는 듯 바라보던 윤 교수가 다시 커피로 입을 축이고는 말을 이었다.

“네 성격상 의도치 않게 시장이란 직책을 수행하게 되었다고 해도, 일단 저지른 일에 책임을 지려 노력은 했을 거다. 내가 여기 내려오기 전에 인터넷으로 너에 관한 기사나 정보를 열심히 찾아봤다. 나름대로 열심히 했더구나.”

“하하, 교수님도 참.”

“웃지 마, 인마. 칭찬하려고 한 말이 아니니까.”

“... 네.”

머쓱하게 웃는 도훈을 윤 교수가 침묵시켰다.

“내가 알아본 것도 있고 오늘 오후에 나 데리고 다녔던 조영배라는 친구에게 들으니 대충 감이 잡히더라. 이 시장 일을 계속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 중이라고.”

“......”

“좀 넓게 이야기하면, 어쩌다 정치판에 발을 들였는데 계속해야 하나 관둬야 하나 고민하는 거겠지. 맞지?”

“크게 틀리지는 않네요.”

“그래? 틀린 건 뭔데?”

“저는 시장 일이 정치보다는 행정에 더 치우친 일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그럴 테고요. 사실 기초단체장이 정치할 일은 많지 않거든요.”

“많지는 않겠지만, 없지도 않겠지. 요즘, 정당 행사에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며?”

“... 찾아다닌 건 아니고요. 요청받은 걸 끝내 뿌리치질 못했던 겁니다.”

“그거나, 그거나.”

“쩝. 그런데 어떻게 아셨어요?”

윤종일이 아무리 뛰어난 인물이라고 해도, 1주일 정도 기사와 정보를 찾고 영배와 반나절 같이 다니며 이야기한 것으로 도훈이 ‘고민 중’이라는 걸 알아채는 건 무리라고 여겨졌다.

그런데, 윤 교수는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어렵지 않았지. 내가 시민운동 하면서 지켜본 사람이 좀 많냐? 거기서 뭔가 열심히 하다가도 끝내 정치계로 나가는 사람들은 대부분 공통점이 있어.”

“... 그게 뭡니까?”

“확고한 자기주장이 있고 그걸 어떻게든 실현하고 싶어 하지. 그리고 그 주장에 동의하는 사람을 계속 늘려간다는 거지.”

“... 네?”

“뭘 그리 얼빠진 표정을 하냐? 보수 쪽에서 신인을 어떻게 발굴하는지는 모르겠다만, 이쪽에서는 나중에 어떻게 타락하든 최소한 처음에는 열정과 소신이 있어야 돼. 그리고 말과 행동으로 사람들을 점점 더 설득해 나가는 거고 말이다.”

“... 그게 나쁜 건 아니잖습니까?”

“누가 나쁘대? 난 정치가 나쁘다고 생각 안 한다. 나쁜 정치를 하는 놈들이 나쁜 거지. 정치라는 것 자체는 기본적으로 생산적일 수 있는 활동이야.”

“......”

“타락하지 않고 좋은 정치인으로 남는다는 걸 전제로 말하는 건데, 정치가 나쁜 게 아니야. 나쁜 정치를 배우고 따라 하다가 끝내 나쁜 정치인이 되는 게 안타깝긴 하다만.”

“......”

윤 교수가 커피를 마시려다 잔이 빈 걸 확인하고 카운터로 가 리필을 해왔다.

다시 커피를 마시며 윤 교수가 말을 이었다.

“넌 시장이 된 지 2년이 됐는데, 주변에 네 사람을 만들지를 않았더구나.”

“아예 없는 건 아닌데요. 비서실에···.”

“그 정도는 없다고 봐도 무방하지. 정치인은 지지자 늘리는데 목숨을 거니까.”

“... 저도 시민들 꽤 열심히 만나···.”

“넌 그걸 지지자 늘리려고 하는 게 아니잖아. 시장이 해야 하는 일이고 할 필요가 있으니까 하는 거지.”

“......”

“뭘 모르는 사람들은 열심히 한다고 하겠지. 사실, 틀린 말도 아니야. 하지만, 넌 그런 노력의 결과를 ‘네 것’이라고 여기지 않는다는 게 다른 것 같더구나. 보통은 자랑하든 안 하든, 어떻게든 결과를 내고 성과를 만들려고 안달하거든.”

“......”

“아마, 그래서 좋은 시장이라는 평가가 더해지는 것일지도 모르겠고 말이야.”

“... 하하.”

도훈은 쓰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모두 맞는 건 아니지만, 윤 교수의 말이 실제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걸 모르지 않았으니까.

“그렇게 노력하고 더 욕심내지 않고 물러나는 것도 나쁘지 않아.”

“......”

“하지만, 네가 노력한 결과는 다음 시장이 어떤 사람이 되느냐에 따라 더 좋은 시정의 밑거름이 될 수도 있고 물거품이 될 수도 있어.”

“......”

“쉽게 이렇게 생각하면 될 테지. 네 다음에 안준식 의원이 시장이 될 때와···.”

끄덕, 끄덕.

생각만 해도 기분 좋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던 도훈은 이어진 윤 교수의 말에 떨떠름한 표정을 할 수밖에 없었다.

“... ‘서 뭐시기’라는 의원이 시장이 될 때를 상상해 보면 되겠지.”

“......”

도훈이 똥 씹은 표정을 하게 만든 서 교수는 빙긋 웃고는 말을 끊고 잠시 커피를 즐겼다.

도훈은 곧 표정을 회복하고는 입을 열었다.

“상상만 해도 끔찍하네요.”

“그러냐? 그럼 내 걱정이 이해가 가겠네.”

“걱정이요?”

“네 임기 동안은 위원회가 제대로 굴러가겠지. 그러니까 내가 한 번 힘써볼 마음이 생긴 거고.”

“... 그런데요?”

“그런데 그렇게 공들인 조직이 나중에 변질되지 않을까 걱정이 되겠냐 안 되겠냐?”

“아, 예.”

도훈은 윤 교수의 우려를 이해했다.

만약 이권에 관심 많은 누군가가 차기 대흥시장이 되면 도시발전계획 논의 위원회라는 건 부동산이나 건설 쪽과 관련된 ‘작전센터’ 같은 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그렇게 변질하지 않게 할 자신 있어?”

“......”

“날 써먹으려면 그 정도 보장은 해줘야 하는 거 아니겠냐?”

“... 쩝.”

틀린 말이 아니었고, 정당한 요구이기도 했다.

“고민 중이라니까 채근하지 않겠다. 아직 임기가 2년 가까이 남기도 했고.”

“... 네.”

“하지만, 위원회라는 게 변질하지 않을 보장이 없다고 판단되면 난 그 즉시 손 뗄 거야.”

“네. 알겠습니다.”

도훈이 담담히 답하자 윤 교수가 피식 웃더니 몇 마디를 보탰다.

“내가 너한테 이런 말을 하는 날이 올 거라고는 상상도 해본 적이 없다만, 그냥 시장 한 번 더 해.”

“네?”

“시장 한 번 더 하라고.”

“......”

“너, 웃기게도 시장에 잘 어울려.”

“... 예?”

“그리고 더 웃기게도 제법 잘하고 있어.”

“......”

얼빠진 표정의 도훈에게 윤종일 교수가 잔잔히 웃으며 속삭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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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라가서 커리큘럼 수정해서 내려보낼 테니까 그런 줄 알아라. 그리고 너도 공부 열심히 할 각오는 미리 해 두고.

윤종일 교수는 토요일 점심에 부인과 함께 대흥시에 와서 도훈과 점심을 먹은 뒤 서울로 올라갔다.

대전과 충청남도의 발전계획을 살피고 커리큘럼을 확정하겠다는 그의 의욕적인 모습에 부인이 살짝 도훈에게 감사를 표할 정도.

- 저 양반이 요새 사는 낙이 없다고 맨날 투덜거렸는데, 이렇게 도훈 군 덕분에 활기가 돌아요. 고맙게 생각해요.

부부를 배웅하고 시청에서 일하던 도훈은 오후 느지막한 시간에 도착한 세경과 함께 진주의 집으로 향했다.

오래간만에, 진주가 솜씨 발휘하겠다며 친구들을 초청했고 도훈은 이 자리에 세경을 동행해도 되겠냐 얘기했다가 단번에 승낙을 받았던 것.

도훈과 세경이 도착하자 진주는 먼저 들어서는 도훈을 지나쳐 세경에게 달려가다니 덥석 손부터 잡았다.

“와, 세상에 이런 날이 오긴 오네. 반가워요, 세경 씨. 얘기는 더러 들었어요.”

“안녕하세요.”

“내 친구지만, 김도훈이란 남자 정말 멋대가리 없는데 어쩌다가 엮였어요?”

“야!”

목소리를 높이는 도훈의 모습에 세경이 웃었고, 진주는 도훈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세경의 손을 끌고 소파에 가 앉았다.

“영배 오빠한테 살짝 귀띔받긴 했는데, 자세한 스토리는 모르거든요? 도대체 어디가 마음에···.”

“진주 너, 적당히 해라.”

“여자들끼리 할 얘기가 있으니 넌 좀 빠져줄래?”

“허? 너 이렇게 나오면 나 그냥 간다. 나만 가냐? 세경 씨도 간다.”

도훈이 그렇게 으름장을 몇 번이나 놓고서야 진주는 세경 곁에서 떨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영배네 가족도 도착했고, 오래간만의 회식이 시작됐다.

“오늘 같은 날 축하주가 빠질 수 없잖아? 자, 건배하자고요.”

“오, 그래. 축하사는 내가 하마. 제발 좀 평생 봅시다, 세경 씨도 포함해서요. 건배!”

“건배!”

쨍.

좋은 분위기에서 식사가 이어졌고, 여느 때처럼 아이들은 먼저 배불리 먹고 순심이를 데리고 빠졌다.

도훈이 뜻밖의 질문을 던진 건 그렇게 어른들만 테이블에 남았을 때였다.

“... 나 시장 한 번 더 하는 거 어떻게 생각해, 다들?”

“엥?”

“뭐?”

느닷없는 말에 모두의 시선이 도훈에게 집중됐다.

조금 전까지 모두의 관심을 한몸에 받고 있던 세경의 시선도 역시.

“드디어 결심한 거야?”

“결심한 건 아니고···, 그냥 물어보는 거야.”

영배에 이어 진주가 질문을 던졌다.

“지금까지는 아무 말 없다가 이렇게 우리에게 의견을 묻는 계기라도 있어?”

“... 음, 있지.”

“그게 뭔데?”

도훈은 어제저녁 윤종일 교수에게 들은 얘기를 해줬다.

- 각오와 결심이라는 게 필요하긴 하겠지. 하지만, 네가 국회의원에 출마해 본격적인 정치인을 지망할 것도 아니고, 솔직하게 말해 네가 사는 작은 도시 시장하는 거잖아. 행정이 우선이라며? 너 사는 도시를 잘 꾸리고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겠다는 결심 정도면 나쁘지 않지 않냐? 지금처럼 잘하면 너도 좋고 시민들도 좋은 거 아니냐고. 본격적인 정치? 그딴 건 좀 더 나중에 고민해도 돼. 네가 젊다고 주목을 받긴 했다만, 애당초 중소도시 시장 한 번 했다고 해서 대단한 정치적 재목으로 인정받는 것도 아니잖아. 그냥 가능성 있는 유망주 중의 하나일 뿐인 거 아니냐?

내심, 윤 교수의 말과 비슷하게 생각이 정리되고 있던 도훈이었다.

여러 사람이 ‘정치’라는 것에 대해 도훈에게 조언했고, 도훈은 느릿느릿 고민을 진전시켜 왔다.

그중 가장 먼저 내린 결론은 ‘지금 하는 만큼은 할 수 있다.’는 것.

지난 2년간 시장직을 수행하면서 공부하고 설득하고 분노하고 사과하는 등 ‘했던 만큼’은 문제없이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좀 생겼다고나 할까.

그 자신감이 남들 보기에 어떤지 물어보기로 했고, 마침 오늘 이 자리에 모인 이들은 그런 질문을 부담 없이 할 수 있는 사람들.

“... 그런 이야기를 하시더라고. 내 생각도 비슷해서 얘기를 꺼내는 거야.”

도훈이 윤종일 교수의 말을 옮기자, 가장 먼저 반응한 건 세경이었다.

“좋은데요? 그 정도면 시작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싶어요, 저는.”

“그래요?”

“네. 호호! 다른 사람들은 시장이 아닌 상태에서 하는 결심이겠지만, 도훈 씨는 시장으로서 재선에 도전한다는 게 다른 거겠죠.”

세경에 이어 진주도 입을 열었다.

“나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 솔직히 너 당선되고 나서는 과연 제대로 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됐는데, 지금의 넌 노련한 정치인보다 더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거든.”

“... 칭찬하는 거냐?”

“그래, 칭찬이야. 게다가 너 말고 다른 사람이, 특히 전 시장이나 전전 시장 같은 양반들이 다시 시장하는 거 상상하기도 싫어.”

“흠.”

진주에 이어 입을 연 것은 영배.

그런데 영배는 자기 생각이 아닌 다른 누군가의 말을 옮겼다.

“정임 씨 얘기를 드디어 전하마.”

“정임 씨?”

“그래, 인마. 정임 씨가 너한테 꼭 이 이야기 전해달라고 했다.”

“... 뭔데?”

“4년간 살짝 간만 보고 내빼지 말고, 시야도 키우고 능력도 키워서 더 멋진 재선 시장 꼭 하라고.”

“정임 씨가 언제 그런 얘기를 했는데?”

살짝 어이가 없어진 도훈이 묻자 영배가 심드렁한 표정으로 답했다.

“주민센터로 나간다고 환송식 할 때.”

“... 하하.”

“정임 씨는 진즉부터 네가 재선에 별 관심이 없다는 걸 눈치채고 있었던 모양이더라고. 그래서 내게 신신당부했었어. 재선 고민하면 꼭 도전하라고 말하라고.”

“... 그렇게 예전에? 왜 여태 얘기를 안 했어?”

도훈이 묻자 영배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답했다.

“너 지금껏 정치할까 말까 고민했지. 재선에 도전하느냐 마느냐 하는 얘기는 한 적 없었다.”

“......”

“정임 씨는 네가 시장 한 번 더했으면 좋겠다고 한 거지. 정치하라고 권한 게 아니니까.”

“하하.”

도훈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었고, 영배가 말을 이었다.

“재선에 도전하는 건 나도 찬성이다. 다만, 난 요구사항이 있다.”

“... 뭔데?”

“떨어지면 소용없는 거다만, 혹시라도 재선에 성공하면 나 월급 올려줘.”

“......”

영배의 옆에 앉은 영배 부인 선아가 말없이 ‘당연하지’라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고 도훈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결심 한 번 더럽게 늦네.”

“그러게.”

“누가 도훈 씨 아니랄까 봐 그랬나 보죠.”

“호호. 반응이 아주 이채롭네요.”

진주, 영배, 선아, 세경이 한마디씩 하고는 다시 자신들끼리 이야기를 이어갔다.

어쩌다가 저렇게 멋대가리 없는 김도훈과 엮였냐는 이야기.

나름 진지하게 재선 도전에 관한 질문을 던졌던 도훈이 예상 못 한 무척 쉽고도 짧은 찬성과 지지랄까.

- 꼭 거창할 필요가 있냐? 이것도 좋네, 뭐.

말문을 잃은 도훈의 등 뒤에서 조상님이 히죽거리며 평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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