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5. 가뭄에 단비? - 3.
도훈은 고심 끝에 VH 그룹 기획실장과 만나기로 했다.
협상 대표인 중년인이 이민상이 단순한 기획실장이 아닌 오너 가문의 직계라며 그룹 고위층과의 만남에서 파격적인 결정이 내려질 수도 있다 말하는데 끝까지 거절할 수가 없었다.
다만, 상대가 원한 것처럼 조용한 곳에서의 저녁 식사가 아닌 시청 청사 앞 카페에서 만나는 걸 고집했다.
즉, 보는 눈과 듣는 귀가 있는 그런 곳이었다.
양측 동행인은 따로 자리했기 때문에 도훈은 그룹 회장의 손자, 즉 창업주의 3세라는 이민상과 단둘이 마주 앉았다.
형식적인 인사를 건네고 잠시 아무런 말이 없던 두 사람 중 먼저 입을 연 것은 이민상.
“여기 커피도 나쁘지 않네요.”
“입맛에 맞으십니까?”
“그럭저럭요. 하지만 가격을 보니 적당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민상이 마시고 있는 아메리카노의 가격은 2천 원.
원두커피치고 어디를 가도 싸다고 할 수 있는 그런 가격이었다.
“그래서 시청 직원들이나 인근 사무실 직장인들이 가장 많이 애용하는 곳이죠.”
“그럴 것 같습니다.”
도훈보다 세 살이 어리다는 이민상.
VH 그룹이 대단한 재벌까지는 못 된다지만, 회장 일가의 재산이 일반인의 그것에 비할 바는 아닐 터.
당연히 그들의 생활도 일반인보다는 호화스러울 게 분명했다.
그래서 이런 서민적인 카페에 상대가 익숙하지 않을 거로 생각했던 도훈은, 담담한 이민상의 반응이 조금은 의외였다.
그런 생각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도훈이 입을 열었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시죠.”
“네. 그러시죠. 제가 먼저 설명해 드려야겠군요.”
“듣겠습니다.”
이민상이 그리 크지 않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VH 엔지니어링이 공장 이전지를 찾고 있는 건 사실.
그리고 남양주시와 이야기가 잘 진행되다가 무산되기 직전인 것도 사실이란다.
남양주시와의 협의가 중단된 이유는 VH가 세우려는 공장의 규모가 시의 예상보다 작아 고용 창출이나 지역 경제 연관 효과도 작을 것으로 추정된 때문이란다.
남양주시에서는 그런 이유로 원래 제시했던 각종 혜택을 축소할 수밖에 없다고 했고, VH는 그렇다면 굳이 남양주시일 필요가 없다는 내부적 결론을 내렸단다.
“... 그래서 새 후보지를 물색 중인데,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공장 유치를 통해 좋은 인연을 맺는 건 어떠냐는 제안이 내부적으로 있었습니다.”
“... 좋은 인연이라는 게 해당 지역 단체장과의 관계를 말하는 겁니까?”
“네. 아무래도 협상 단계에서는 물론, 이전이 완료되고 본격적으로 운영하면서 단체장님과 만날 기회가 종종 있을 테니까요. 또한, 새로 공장을 유치하는 건 그 지역 단체장의 치적이 아니겠습니까? 서로에게 득이 되는 일을 하면서 친분도 맺으면 일거양득이 아닌 일거삼득 아니겠습니까? 하하하.”
VH 엔지니어링의 의향서에 따르면 공장이 들어서게 될 경우, 그 공장에 근무하게 될 인원이 최소 5백.
이 공장의 협력업체까지 생각하고 공장과 협력업체 직원의 가족까지 계산하면 아무리 보수적으로 생각해도 1천 이상의 인구 유입을 예상할 수 있었다.
그로 인한 플러스 효과는 만만치 않을 터.
단체장이라면 이런 공장을 유치하는 게 분명히 자신의 치적으로 자랑할 만한 일이었다.
“사실, 저희 입장에서는 대도시가 아닌 소규모 지자체에서 받을 수 있는 지원은 대동소이합니다. 대도시는 여러 가지 환경이 좋긴 하지만, 토지 비용 등이 높다는 부담이 있고요.”
“... 그리고 그런 대도시 단체장이 크게 신경을 쓸 정도로 공장의 규모가 크지도 않고 말이죠?”
“하하. 예, 솔직히 그렇기도 합니다.”
신규 업체가 생기면 인근 지역이 그로 인한 영향을 받는 건 마찬가지겠지만, ‘지역’이 어떤 곳이냐에 따라 무게감이 달라질 터.
막말로 인구가 이미 수십만, 수백만이 되는 도시에 1천을 추가하는 것과 몇만뿐인 곳에 추가하는 것은 전혀 다른 얘기니까.
후자의 경우, 단체장이 적극적으로 나서거나 매달릴 수도 있을 테고.
이민상의 얘기는 이왕이면 ‘더 대접을 잘 받을 수 있는’ 곳을 찾는다는 뜻이었다.
“오늘 제가 협상 자리에 나가지 않아서 스텝이 꼬였다는 얘기는 뭡니까?”
“지금 저희가 접촉 중인 여러 지자체의 조건에 순위를 매기자면 대흥시의 조건은 솔직히 중간 이하입니다. 다만, 대흥시에 무게가 실린 건 시장님과 인연을 맺을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가 있기 때문이었죠.”
“흐음.”
“시장님보다 어린 제가 말씀드리는 게 좀 그렇습니다만, 젊은 나이로 훌륭히 시정을 펼치고 계시고 앞으로가 더 기대된다는 평가를 받고 계시잖습니까.”
“... 그러니까 오늘 협상 자리에서 우리 시가 내건 ‘조건’보다 저를 살피고 싶으셨다는 얘기입니까?”
“솔직히 그랬습니다.”
순순히 인정한 이민상이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는 말을 이었다.
“저희 나름으로는 시장님이 어떤 분인지 알기 위해 실무자 미팅 준비를 열심히 했습니다.”
“......”
“그런데 시장님이 참석하지 않으셨으니, 저희가 준비한 것처럼 논의가 풀릴 수가 없었던 겁니다.”
“......”
“저희 대표로 참석했던 팀장이 결과보고를 하는데, 시장님이 안 계셨고 원래 계획했던 것처럼 미팅을 가져가지 못했다더라고요. 결과적으로 분위기가 싸했다고 해서 아차 싶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시장님과의 저녁 식사 자리를 만들어보라고 했죠. 그런데, 얘기가 잘 안 풀리는 것 같아서 제가 시장님과 통화하게 됐고요.”
“......”
“결국에 이렇게 부랴부랴 내려와 찾아뵌 겁니다.”
이상민은 ‘내가 당신에게 이 정도로 성의를 들이고 있다’는 걸 말하고 싶은 듯했지만, 도훈은 전혀 마음에 와 닿는 게 없었다.
도훈의 침묵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모르겠지만, 이민상이 좀 머쓱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저희는 그냥 시장님과 친분을 맺길 원하는 겁니다. 부정적인 의미의 스폰서 같은 게 아니라요.”
“... 그렇습니까?”
“네. 요즘이 어떤 시댄데요.”
“......”
“시대는 점점 좋아지고 있다지만, 기업인이나 정치인이나 인맥이 중요한 건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저희는 시장님과 좋은 의미에서 탄탄한 인연을 맺길 바라는 것뿐입니다.”
“......”
이민상이 담백한 태도로 말하고 있었지만, 도훈은 그의 말이 곧이곧대로 들리지 않았다.
말이 실무 협상이지, 자신을 평가하기 위해 실무 협상이라는 걸 이용했을 뿐임을 인정하질 않았던가.
‘황당한 것도 정도가 있지.’
허울뿐인 실무 협상 때문에 엉뚱한 사람들 고생시킨 건 논외로 한다고 치자.
애초에 기업인이라는 사람들은 ‘이익’을 최우선으로 할 터.
입으로야 ‘좋은 의미의 친분’을 언급하고 있지만, 그 친분의 목적도 결국에는 자기 기업에 ‘이익’이 되기를 바라는 것 아니겠는가.
도훈이 묵묵히 생각을 정리하는 사이, 이민상은 듣기 좋은 소리를 몇 마디 더 한 후 도훈에게 질문을 던졌다.
“시장님 생각은 어떠십니까?”
“... 제 생각이요?”
“네.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거니까요.”
“......”
도훈이 잠시 이민상을 가만히 바라봤다.
담담한 표정이면서도 기대감에 반짝이는 눈빛.
그 기대를 무색하게 하는 말이 도훈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아무 생각도 안 드는데요.”
심드렁한 표정으로 답하는 도훈의 모습에 잠시 얼떨떨해하던 이민상의 눈빛이 일순 사나워지더니 눈가가 살짝 떨렸다.
그래서 그런지, 도훈은 뒤이어 하려던 말을 굳이 입 밖에 내지 않았다.
‘너무 황당해서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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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각할 시간을 좀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저희도 생각할 시간이 좀 필요할 것 같습니다.
이민상은 그런 말을 남기고 돌아갔다.
인구 5만도 되지 않는 작은 도시 시장에게 심드렁한 대접을 받은 게 제법 마음이 상한 듯했지만, 그걸 대놓고 티 낼 정도로 인내심이 부족하지는 않은 모습.
이민상이 떠나자마자 저만치 앉아 기다리고 있던 영배가 얼른 합류하더니 속삭였다.
“뭐래?”
“... 친하게 지내자네.”
“또?”
“앞으로 더 친해지고 싶다네.”
“... 뭐야, 그게 다야?”
“어.”
“이게 뭔 황당한 소리야?”
어이없어하는 영배에게 도훈이 조곤조곤 설명했다.
오늘 실무 협상은 ‘조건’을 따지고자 청한 게 아니고 도훈을 ‘간’ 보려는 자리였다고.
그런데 그런 자리에 당사자가 나타나지 않아 저쪽의 스텝이 꼬였고 분위기가 싸해지자 황급히 ‘수습’을 하려고 그룹 기획실장이 나타나 ‘본심’을 얘기한 것 같다고.
“아니, 그렇게 공장 유치할 테니 앞으로 친하게 지내자고 하면 다른 단체장들은 친하게 지내준대?”
“그런가 봐.”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그 기획실장이라는 작자가 마지막까지 ‘왜 이 좋은 기회를 안 잡는 거지?’하는, 도통 날 이해 못 하겠다는 표정이었으니까.”
“... 하하.”
허탈하게 웃는 영배의 등을 떠밀어 카페를 나온 도훈은 저녁 일정을 마치고 9시가 다 되어서야 귀가했다.
끼잉.
“그래, 그래.”
진주네 집에서 찾아온 순심이를 내려놓고 잠깐 놀아주고 있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 네, 의원님.”
- 통화 괜찮죠?
“네. 말씀하세요.”
전화를 걸어온 사람은 김용진 의원.
VH 그룹 기획실장이 직접 내려온다는 말을 듣고, 김용진에게 연락해 간략하게 사정을 설명하고 혹시 VH 그룹에 대해 알아봐 줄 수 있냐고 부탁했었다.
아무래도 본격적 정치인이고 지역구 국회의원인 그의 도움을 받는 게 제일 무난할 것 같아서.
처음에, 김용진은 알아본 결과 그룹 자체는 특별히 문제가 없다는 말을 하더니 도훈과 이민상의 대화 내용을 전해 듣고는 뜻밖의 얘기를 했다.
- 예전 남양주 지역 국회의원이 그 그룹이랑 친했다는 얘기가 있었는데, 그게 아무래도 사실이었던 모양이네요.
“이미 친한 정치인이 있다고요? 그런데 왜 저를···.”
- 지난 총선에서 떨어졌어요, 그 사람.
“... 아.”
- 아무래도 그 사람을 대체할 수 있는 사람을 찾는 모양인 것 같네요. 내 생각이 맞는다면, 김 시장 말고 여러 사람 찔러보고 있을 겁니다.
“... 제가 잘 몰라서 그러는데, 이런 일이 흔합니까?”
- 하하, 김 시장은 본격적인 기업인 만난 게 처음이죠?
“그런 셈이죠.”
도훈이 그간 만나본 기업인이라고는 시 관내에 크고 작은 사업체를 운영하는 이들이 전부.
기업체라고 해봤자 대흥시에 정규직 직원이 100명이 넘는 회사가 단 하나뿐이니 대부분 아주 소소한 규모였다.
- 아니라고 말하고 싶지만, 심심치 않게 있다고 말하는 게 맞아요. 다만, 그 VH 그룹 기획실장이라는 사람은 접근하는 방식이 무척 어설프네요. 하하.
도훈은 김용진에게 질문을 던졌다.
이럴 때 ‘일반적인’ 정치인이나 자치단체장은 어떻게 반응하냐고.
- 케이스 바이 케이스죠. 기업 유치가 급한 사람은 간이라도 빼줄 듯한 시늉이라도 할 테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적당히 선을 그을 테고요.
“네.”
- 하지만, 어떤 경우에든지 상대와 진짜 친분을 맺을 거라는 기대는 안 할 겁니다. 서로 적당히 이용하는 관계가 되는 거죠.
“... 네.”
- 일부 지역 기업들은 아주 노골적으로 정치인과 편을 먹고 후원을 하거나 정치자금을 편법으로 기부하는 등의 행위를 하지만, 그건 좀 악랄한 경우인 거고, 정치인 치고 기업인과 유착까지는 안 해도 안면도 안 트고 지내는 사람은 없을 거예요.
“... 네.”
- 김 시장이 받은 제안은 그 정도 이상인 것 같은 느낌인데···.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 뭐, 공장 유치한 다음에 적당한 선을 유지하는 방법도 있겠고···. 이건 친하게 지내느냐 아니냐보다는 ‘관리’의 문제거든요. 김 시장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저쪽의 태도가 달라질 테니까요.
“흐음.”
- 공장 들어오면 지역 경제에 좋은 건 확실하고, 김 시장이 대흥시장에 머무르지 않고 더 큰 꿈을 갖게 된다면 그런 인맥이 필요할 수도 있을 겁니다. 여하튼, 이것저것 잘 생각해서 답하는 게 좋겠네요. 물론, 지역구 국회의원으로서 내 입장은 짐작하시죠?
“네, 의원님.”
김용진과 통화를 마친 도훈은 순심이를 쓰다듬으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 인맥이라···.’
대한민국은 인맥이 사회생활의 성패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나라.
그리고 꼭 우리나라가 아니라고 해도 인맥이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나라는 거의 없을 터.
그 인맥을 중요도에 따라 분류한다면, 그룹을 운영하는 오너 가문과의 인맥은 분명 상위 중의 상위에 속할 터였다.
한참, 이런저런 생각을 이어가는데 순심이가 낑낑댔다.
끼잉.
“응? 아, 미안. 내 잠깐 엉뚱한 데 정신이 팔렸다.”
다시 순심이를 쓰다듬던 도훈이 불현듯 뭔가를 깨달았다.
“... 그러네. 이미 결론이 난 문제네.”
업무용 핸드폰을 집어 든 도훈이 누군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조금 뒤, 핸드폰이 윙윙거리기 시작하자 발신자를 확인한 도훈은 핸드폰을 엎어 버렸다.
“순심아, 우리 산책갈까?”
왈! 왈왈!
산책이라는 말에 반색하는 순심이를 데리고 도훈이 집을 나섰다.
위이잉! 위이이잉!
조용한 도훈의 집 방바닥에서 핸드폰이 한참을 진동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