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9. 자기 PR - 3.
“... 이날 친선경기장에서는 이색적인 풍경이 벌어지기도 했다. 선수로 참가한 대흥시 김도훈 시장과 OO 시 조민구 시장이 생활체육 지원에 대한 이견으로 논쟁을 벌인 것이다. 논쟁이라지만, 시종 차분한 대화가 오갔으니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시민이 대거 참여하는 행사에 대한 아낌없는 지원을 주장한 조민구 시장과 한정된 예산을 사용하는 것이니 엄격한 기준에 따라야 한다는 김도훈 시장의 토론은 점심시간에 10여 분간 이어졌으며···.”
“끝까지 다 읽을 겁니까?”
“... 안 그래도 이만 하려고요.”
도훈의 타박에 영배가 기사를 소리 내어 읽던 걸 멈췄다.
월요일 조회 직전의 티 타임.
영배는 자기 커피가 식는 건 신경도 쓰지 않고 핸드폰 액정에 정신이 팔려있었다.
입가에 아주 진득한 미소를 머금은 채로.
“... 그렇게 좋나?”
“좋고 말고요. 기사가 제법 잘 나왔지 않습니까? 실장님도 읽어보셨죠?”
“봤지. 나쁘지 않더군.”
토요일 친선시합은 별다른 사고 없이 잘 끝났다.
대흥시 동호회는 예전과 거의 다르지 않은 성적을 거뒀다.
친선시합을 치른 OO 시 동호회는, 등록하고 활동하는 회원의 수에서 대흥시 동호회보다 세 배는 더 크다.
그리고 OO 시에는 그 동호회와 비슷한 규모의 동호회가 두 개나 더 있다.
대흥시에도 도훈이 속한 동호회 말고 다른 동호회가 하나 더 있긴 했지만, 모두 다 합해도 동호회 회원 숫자에서부터 상대가 안 됐다.
아무리 생활체육인이라고 해도, 그렇게 판이한 환경에서 운동하다 보면 실력의 차이는 어쩔 수 없을 터.
다만, 남자단식에서 도훈이 3위를 차지했고 남자복식에서도 4위를 했다는 게 전과는 다른 결과였다.
전에는 5등 안에 대흥시 동호회 회원이 들어간 적이 거의 없었으니까.
“저는 회원들이 기뻐했던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는데요.”
“아, 그것도 좋았죠. 우리 회원님들이 시장님 SNS 계정에다가 인증샷 주루룩 달아주셨잖아요.”
핀잔하듯 말하는 도훈에게 영배가 웃으며 답했다.
친선시합이었지만, 기념이 되어야 할 건 있어야 한다며 우승, 준우승은 싸구려 트로피와 기념품, 3위에서 5위까지는 상장과 기념품을 줬다.
그래서 도훈은 두 개의 상장과 기념품을 받았는데 지금 그 상장은 시청 옆 체육관 탁구동호회 사물함 앞에 아주 멋들어지게 진열되어 있었다.
영배가 언급한 회원들의 인증샷은 그 앞에서 찍은 것을 말하는 것이었다.
“시장님 경기하는 ‘짤’도 돌아다니고 있던데요?”
“아, 그래요? 어디서 봤어요?”
“누가 보내줬는데, 보실래요?”
“네.”
지연의 말에 반색하는 영배.
그가 주장했던 ‘홍보’가 제대로 되고 있다며 희희낙락하는 모습에 도훈이 피식 웃었고, 차를 마시던 영진이 입을 열었다.
“회원들이 인증샷이나 영상 공유하는 것도 홍보에 도움이 되겠지만, 이 기사도 나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런가요?”
“제가 보기엔 그렇더라고요.”
“그럼 다행이네요.”
토요일 점심, 동호회에서 마련한 천막 아래 테이블에서 도훈은 조민구와 잠시 논쟁을 했다.
시민이 많이 참여해 즐길 수 있는 행사니까 지원하는 게 뭐가 나쁘냐는 조민구와 엄격히 말해 동호회 간의 친선경기에 지원이 지나친 거 아니냐는 도훈의 논쟁.
논쟁이라기엔 좀 심심했던 것이, 주위 사람을 의식해 고성이 오가지 않았고 차분한 대화로 이어지다 과열되기 전에 끝냈다.
“조 비서관 말로는 시장님이 이겼다던데, 기사엔 그런 얘기는 없더군요.”
“논쟁에 승패가 어디 있습니까? 그리고 그런 거 따질 분위기가 아니었어요.”
영진의 말에 도훈이 얼버무리는데 두진이 피식 웃으며 끼어들었다.
“그래도 그쪽 동호회 회장단이 공감했으니 시장님이 이겼다는 게 틀린 말은 아니죠.”
“... 뭐, 그렇긴 했죠.”
그 짧은 논쟁의 승자는 도훈이라 할 수 있었다.
심판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판정단을 둔 것도 아니었지만, 두 시장의 논쟁을 옆에서 지켜보던 OO 시 동호회 회장단이 도훈의 지적에 일리가 있다고 수긍했으니까.
천막 치고 식사할 자리를 만들고 음식 마련하기 위해 시 지원금이 100만 원이 넘게 투입된 것뿐만 아니라, 다른 명목으로도 지원금과 거의 비슷한 액수의 시 예산이 쓰였다는 얘기를 하면서 좀 찔리는 게 있었다나?
- 솔직한 말로, 그게 다 세금 아니겠어요? 우리 행사가 풍성해지는 건 좋은데 그게 다 세금이 그렇게 들어가서 그렇다고 생각하니까 뭔가 가슴 한쪽이 묵직하더라고요.
논쟁을 마치고 시합장으로 가는 도훈의 곁에 어느새 따라붙은 OO 시 탁구동호회 회장의 말.
- 그러셨군요.
- 그럼요. 우리 조 시장님께서 이번에 통 크게 지원해주신 건 정말 감사한데, 생활체육이 탁구만 있는 게 아니잖아요. 시민들이 즐길 수 있는 다른 것들이 하나, 둘이겠어요? 그런 쪽도 당연히 지원이 필요하겠죠.
- 네. 사람의 기호는 무척 다양하니까요.
- 그렇죠. 하하.
- 우리 대흥시나 여기 OO 시나 재정자립도가 아주 낮습니다. 저는 그 재정자립도를 높이려고 시 사업의 효율성 재고에 무척 신경 쓰고 있습니다. 방만한 부분은 없는지, 예산을 아끼면서도 사업 효과를 극대화할 방법은 없는지 말입니다. 물론, 꼭 써야 하는 것까지 안 쓰면 안 되죠. 고려해야 할 사항이 많기도 하고 쉽지도 않습니다. 그렇게 아낀 예산의 액수가 대단하지도 않아요. 하지만, 그 금액을 꼭 필요한 사업에 더 배정할 때만큼은 무척 기분이 좋더라고요. 그래서 예산을 세울 때나 집행할 때 더욱 깐깐하게 행동하게 됩니다.
- 어휴, 공직자가 그래야죠. 김 시장님 말에 일리가 있어요. 저희도 오늘 한 번이니까 이렇게 하는 거지. 다음부터는 원래대로 조촐하게 할 겁니다.
- 제 걱정을 선선히 이해해주시니 감사합니다.
도훈이 날 선 태도로 비판하지 않고 담담히 ‘우려 섞인 지적, 혹은 걱정’을 했기에 가능했던 일일 터.
도훈의 지적을 인정하지 않은 조민구야 기분이 나빴겠지만, 조민구를 설득하는 게 도훈의 목적이 아니었다.
행사 주체인 동호회 회장단이 도훈의 ‘우려 섞인 걱정’을 수긍했으니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런데, 그 논쟁을 지켜보던 사람이 여럿 있었고 그중에 인터넷 뉴스의 시민기자가 있어 생각지도 못한 기사까지 나오게 됐다.
- 훈훈한 동호회 친선경기장에서 벌어진 지원금 논쟁.
조민구나 도훈 중 한쪽을 비판하기 위한 기사가 아니었다.
친선경기가 화기애애하게 벌어졌으니 그 분위기를 전하며 이견을 가진 시장들이 가볍게 토론을 했다는 정도랄까?
기사를 쓴 시민기자는 양측의 핵심 논점을 전하며 둘 다 일리가 있다는 태도였다.
거기에 도훈의 경기 결과까지 소개하며 생활체육인치고는 실력이 뛰어나다는 평까지 적었다.
조민구가 미리 준비시킨 것인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영배가 의도한 ‘홍보’에 도움이 될 것은 분명했다.
“하하, 친선경기에 출전한 게 이렇게 효과가 좋을 줄이야. 그래서 말인데, 이번엔 우리 시 시민 탁구 대회를 개최해 보는 게 어떨까요?”
영배의 말에 도훈이 살짝 미간을 찌푸리고 물었다.
“진심으로 하는 말이에요?”
“당연하죠. 효과가 좋을 것 아닙니까?”
“무슨 효과요?”
“그야 물론, 홍보···.”
주저 없이 답하려던 영배가 멈칫했고, 도훈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홍보하자고 대회를 열자고요?”
“... 아.”
“동호회 행사 가볍게 지원하는 것도 아니고 시가 자체적으로 대회를 열면, 그 재정적 감당을 다 우리가 해야 해요. 대회 진행이야 동호회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분명 우리 직원들이 처리해야 할 일도 생길 테고요.”
“......”
“지금 ‘홍보’ 때문에 그걸 하자고 하는 거 맞죠?”
“......”
“휴우.”
“... 죄송합니다.”
도훈이 한숨을 내쉬었고, 영배가 기죽은 목소리로 사과했다.
두진과 지연, 영진이 동시에 킥킥거렸고, 지연이 영배에게 핀잔했다.
“조 비서관님은 흥분하면 안 돼요. 흥분하면 꼭 안 해도 되는 말을 하시거든요. 평소라면 안 그러실 텐데 말이에요.”
“... 쩝. 네, 제가 좀 흥분했네요.”
머쓱하게 웃는 영배의 모습에 도훈도 표정을 풀었다.
정말로 홍보 효과만 노리고 대회를 열자는 게 아니고 ‘홍보’에 너무 집중해 말이 앞서 나왔다는 걸 아니까.
“그놈의 홍보 두 번만 성공하려고 했다가는 전국체전 유치하자는 얘기도 하겠습니다?”
“... 하하. 주, 주의하겠습니다.”
“주의까지는 필요 없고, 좀 냉정해지세요. 다른 건 안 그러면서 왜 그놈의 홍보 얘기만 나오면 이성을 잃어요?”
“... 쩝. 네.”
영배를 진정시킨 도훈이 두진을 향해 말했다.
“자, 조회 시작하시죠.”
“네, 시장님.”
그렇게 다시 한 주가 시작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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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뒤 저녁, 도훈의 단골집인 중국관.
“자, 건배합시다. 다들 잘 먹고 잘살자고! 건배!”
“건배!”
중국관 주인의 선창에 사람들이 일제히 외치고 잔을 비웠고, 그중에 도훈과 몇몇 시청 직원도 있었다.
도훈의 일행을 제외한 다른 이들은 모두 대흥시 중소상인회 회원.
도훈은 오후 늦게 이들과 함께 회의하고 중국관으로 저녁 겸 뒤풀이를 하기 위해 온 터였다.
저녁 장사를 위해 빠진 이들이 더 많았지만, 20명 가까운 상인들이 아직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시장님, 제 잔 한잔 받으세요.”
“아, 네.”
“아까 제가 했던 말 너무 섭섭하게 생각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물론입니다. 힘드시니까 하셨던 말씀일 텐데요.”
“휴우, 네. 계속 그러네요. 사실, 시장님 책임이 아니라는 것도 잘 아는데··· 우리 같은 사람이 기댈 수 있는 가장 가까운 사람이 시장님이잖아요.”
“네, 저도 잘 압니다.”
빈 잔을 채워주며 하는 상인의 말에 도훈은 정중히 답했다.
중소 상인들과의 회의 주제는 어려운 형편인 그들을 ‘어떻게 지원할 것인가’였다.
취임 이후, 여러 차례 중소 상인들과 만난 도훈이었는데 이 주제만 논의한 적은 없어도 단 한 번도 논의 주제에서 빠진 적이 없었다.
전체적인 경기는 아주 완만하게 상승하고 있다고 하지만, 지방 소도시인 대흥시에서 그걸 체감하기는 쉽지 않은 상황.
상인들 역시 이 문제가 도훈의 책임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시에서 제시한 여러 방법이 ‘미흡하다’고 목소리를 높였었다.
그중 도훈 앞에 앉은 상인이 제일 큰소리를 냈었고, 그는 그걸 사과하고 있었다.
도훈이 묵묵히 듣고 있자, 옆에 앉은 상인이 분위기를 바꾸려는지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시장님 탁구 참 잘 치시대요.”
“아, 탁구요.”
“네. 누가 동영상 보여줘서 봤는데 선수에 못지않던데요?”
“그 정도는 아닙니다, 하하.”
“아니긴 뭐가 아니에요. 탁구채는 평생 잡아보지도 않은 내가 봐도 멋있던데.”
“.... 하하.”
도훈이 머쓱한 표정으로 웃는데, 마주 앉은 상인이 질문을 던졌다.
“혹시 시장님, 공은 좀 차요?”
“축구 말씀하시는 겁니까?”
“네.”
“음. 이렇게 말씀드리면 쉽게 이해하실 것 같은데, 군대에서 제 바로 선임이 축구를 정말 좋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그 선임 제대하는 날까지 이름 대신 ‘똥발’로 불렸고요.”
“하하하.”
“조기 축구회 때문에 말씀하신 건가요?”
“네.”
중소 상인들의 친목을 위한 조기 축구회가 있었고, 바쁜 와중에도 정기적으로 운동한다는 건 도훈도 이미 알고 있었다.
“우리 제수씨가 탁구동호회 회원이거든요. 엊그제 동생네 부부랑 같이 밥 먹었는데, 시장님 자랑을 그렇게 하더라고요. 무척 부럽더라고요.”
“하하, 네.”
“우리도 시장님이랑 같이 운동 한번 해보고 싶더라고요.”
“저도 그러면 좋죠. 하지만 제가 워낙에 ‘똥발’이 되놔서.”
“어휴, 우리가 무슨 프로도 아니고 재미로 공차는 건데 그러면 어때요. 열심히 뛰어다니기만 하면 되지.”
“뭐, 그거라면 자신 있죠.”
“그럼 다음에 모임에 한 번 나오실래요?”
“2주에 한 번씩 하시죠? 다음이면···.”
“다음 주 일요일 새벽이죠.”
“불러 주시면 나가야죠.”
도훈이 담담히 웃으며 답하는데, 등 뒤에서 누가 끼어들었다.
“어? 축구에서 벌써 섭외한 거야?”
“그렇게 됐어.”
도훈이 고개를 돌리니 뒤 테이블에 앉은 상인이 아쉬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도훈과 시선이 마주친 그가 말을 이었다.
“시장님, 야구는 할 줄 알아요?”
“할 줄은 알죠. 잘못해서 그렇지.”
“하하, 야구 잘하면 선수 해야죠. 제가 아마추어 야구를 하거든요.”
“네. 동호회가 있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거기서도 시장님 초청해서 경기 한 번 하자는 얘기가 있었어요. 안 그래도 제가 그 얘기하려고 했는데.”
“하하, 불러 주시면 가야죠. 대신, 못 한다고 욕하시기 없습니다.”
“약속한 겁니다?”
“하하, 네.”
졸지에 조기 축구회에 이어 야구 동호회 모임에도 초청받은 도훈이 웃는데 또 다른 상인이, 아니 상인‘들’이 끼어들었다.
“시장님, 배드민턴은 당연히 할 줄 알죠?”
“어이, 기다려 봐. 시장님, 족구는 어때요?”
“우리 시장님이 탁구공은 잘 치던데 당구공은 좀 치나?”
“시장님 볼링 해봤어요?”
“......”
갑자기 몰려든 사람들이 앞다투어 묻는 바람에 도훈이 잠시 말문을 잃었다.
‘... 이, 이거 참.’
머쓱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던 도훈의 시선이 저만치 앉은 영배의 그것과 우연히 마주쳤다.
‘... 후우.’
얼른 전부 다 승낙하라는 듯 반짝반짝 눈을 빛내며 열심히 고갯짓하는 영배의 모습에 도훈은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