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홧김에 시장 되다-216화 (217/279)

216. 한 번 해보자는 소리 - 2.

“아직도 연락이 없어요?”

“네.”

“......”

“다른 전화는 왔었지만, 시청에서는 전화 없었어요.”

“......”

일요일 낮 차혜진의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기대감 어린 표정으로 차혜진이 물었으나 돌아온 대답은 ‘No’.

분명 시청 담당 부서나 시장실에서 접촉해올 거로 생각하고 주말에 출근해달라고 지시받은 보좌관은 좀 짜증스러운 표정이었다.

기대했던 전화는 안 오고, 나오지 않았더라면 받지 않아도 될 항의 전화에 시달려서였다.

“... 도대체 무슨 생각이지?”

불만스럽게 중얼거리는 차혜진을 딱하다는 듯 바라보던 보좌관은 사무실을 차혜진에게 맡기고 점심을 먹으러 나갔다.

기초의원에게는 보좌관 급여가 한 푼도 보조되지 않지만, 당선 직후 초선이고 대자당 소속 현역이 그녀 하나뿐인 걸 염려해 당 지역위원회에서 추천한 이를 채용해 아직 같이 일하고 있었다.

“... 하, 이런.”

책상에 앉아 보좌관이 전화 응대를 하며 메모해 놓은 걸 확인하던 차혜진이 인상을 썼다.

- 똥고집도 적당히···.

- 시민들이 얘기하면 귀담아들어야···.

- 서명운동 지지부진한데도 여론이 어떤 건지 모르나?

아마 보좌관은 이 메모를 차혜진이 볼 거로 생각하지 않고 작성했을 터.

하지만, 차혜진은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거 일부러 나 보라고 그런 거겠지?”

보좌관은 진즉부터 ‘어린이 도서관’을 포기하라고 충고했었다.

애초에 도서관 설립이 진짜 목적이었던 게 아니고 그걸 빌미로 동생의 유치원 확장을 무산시킬 계획이었기에, 차혜진도 웬만하면 그러려고 했다.

‘고 얄미운 게 점점 더 기어오르는 게 마음에 안 들었단 말이지. 그렇다고 그렇게 미친년처럼 덤벼들 줄은 몰랐지.’

그런 애초의 생각이 달라진 건 차혜은 원장이 사무실에 난입해 깽판을 친 게 큰 영향을 끼쳤다.

살가운 사이는 진즉부터 아니었지만, 차혜은이 언니인 차혜진에게 그렇게 대서고 나선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자신을 노렸다가 사람들의 만류로 뜻을 이루지 못하자 집기를 망가뜨린 동생의 행동은, 차혜진을 당황하게 하는 걸 넘어 분노하게 하였다.

서명운동까지 하며 어린이 도서관 건립을 주장한 건, 그런 동생의 유치원 매입 계획을 완벽히 무산시킴과 동시에 도서관 건립에 대한 진정성을 보이기 위함이었다.

그 때문에 시민 여론이 이렇게 급격히 나빠지고 학부모들과 마찰이 생긴 동생이 유치원 직원들까지 데리고 또다시 사무실에 난입할 건 예상 밖의 일.

아니, 예상했던 것보다 여파가 빠르고 컸다고 할 수 있었다.

“... 요새 되는 일이 없어서 속상해 죽겠는데, 공 보좌관이 점점 더 마음에 안 드네.”

취임 초기에는 보좌관의 존재가 무척 유용했다.

광역의원 보좌관으로 일한 경험이 있는 그에게 듣는 조언 덕분에 ‘초짜 티’를 내지 않을 수 있었으니까.

시의원 활동에 점점 익숙해졌지며 그의 조언이 더는 필요치 않게 되었어도 계속 보좌관으로 둔 이유는, 그가 정책 해석이나 개발 등에 있어서 어느 정도 능력이 있어서였다.

또한, 차혜진 본인이 그냥 적당히 시의원 한두 번 하고 그만두는 게 아니라 그 이상으로 성장할 꿈을 꾸고 있었기에 그랬기도 했고.

“... 이참에 확···.”

그렇게 중얼거리던 차혜진은 당장 급한 일이 그게 아니라는 것을 곧 깨달았다.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지. 아니, 시장은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거지?”

금요일 오후 늦게 반영 요청안을 네 번째로 들이민 차혜진.

요청안 대부분은 두 번 이상 퇴짜를 맞은 내용이었고, 상당수 세 차례에 걸쳐 거절당한 것도 있었다.

그리고 다시 제안했다고 모두 받아들여질 거라는 기대도 없었다.

‘... 요즘 그게 유일한 낙이었는데···.’

반영 요청안을 내고 그걸 협의하는 자리에는 예산팀장이나 비서실장, 혹은 시장 본인이 나왔다.

요즘 이래저래 난처한 지경인 차혜진에게 그 ‘퇴짜맞는 자리’가 유일하게 쌓였던 스트레스가 해소되는 시간이었다.

시장과 시의회가 합의한 ‘협의 기간’인 때문에 사안마다 ‘왜 안 되는지’를 조곤조곤 설명하고 양해를 구하는 방식이기 때문이었다.

동생이 유치원 직원들까지 데리고 사무실에 다시 난입했을 때 차혜진은 자신의 목표가 완벽히 달성됐다는 걸 깨달았다.

이제 서명운동도 중단하고 도서관 건립 주장을 철회할 마음도 먹었지만, 동생에게 다시 당한 일로 스트레스가 치솟았었다.

그런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 의례 예산팀장이나 시장이 다시 그런 자리를 만들 것으로 생각하고 뭉텅이로 반영 요청을 했다.

예상과 다른 것은 시청의 반응이 전혀 없다는 것.

“김 시장은 어제에 이어 오늘도 출근했다던데···. 아직 내 차례가 아닌 건가?”

고개를 갸웃거리던 차혜진의 시선에 우연히 보좌관의 메모장이 다시 스쳤다.

탁.

메모장을 엎어버린 차혜진이 투덜거렸다.

“예산안 통과되고 나면, 공 보좌관 대타를 구해야겠어.”

조용한 사무실에 차혜진의 목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

몇 시간 뒤, 시청 3층 시장 비서실.

“... 어렵겠습니까?”

“부의장님, 재차 요청하셨길래 어제 낮에 제가 직접 가봤습니다.”

“아, 그러셨어요? 그러면···.”

“보수하면 괜찮겠던데요? 부의장님 요청하신 것처럼 완전한 재시공을 할 필요까진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 하하.”

“저만 그렇게 생각한 것 아닙니다. 어제 저와 함께 간 건축사도 동의했으니까요.”

“건축사까지 부르셨어요?”

신길영이 살짝 놀란 표정을 하자 도훈이 쓰게 웃으며 푸념하듯 대꾸했다.

“워낙 의원님들이 여기저기에 보수, 재시공 요청을 많이 하셔서요. 제가 무작정 안 된다고 하면 수긍을 못 하실 것 아닙니까? 그래서 대전에서 활동하는 건축사 한 분을 어렵게 섭외했습니다.”

“... 하하.”

“윤종일 교수님 통해서 소개받은 덕분에 비용은 많이 깎을 수 있었죠. 아무튼, 건축사도 보수하면 괜찮을 거라고 하니까 보수로 만족하시죠?”

“... 쩝.”

신길영이 입맛을 다시고는 고개를 끄덕였고, 도훈이 기지개를 켜며 후련하다는 표정을 했다.

“끝났네요.”

“죄송합니다, 시장님. 일요일에도 나와서 고생하시게 해서요.”

“예산안이잖습니까. 그리고 의원님은 그나마 다른 분들에 비해 사안이 많지 않아 오래 안 걸렸습니다.”

“하하, 그렇습니까?”

“네. 어제 장민호 의원님은 정말 오래 걸렸습니다.”

금요일로 조정 요청 시한이 마감됐고 어제부터 도훈은 의원 하나하나와 최종 면담에 들어갔다.

이미 조정이 끝나 면담할 필요가 없는 안준식을 제외한 나머지 의원 전원과 면담을 해야 했는데, 어제 의장인 심남진과 두어 시간, 오늘 부의장인 신길영과 두어 시간 정도 걸렸다.

송지은의 경우는 오늘 오전을 꼬박 할애했고, 장민호는 어제 오전부터 초저녁까지 가장 오랜 시간이 걸렸다.

“장 의원이 좀 집요한 구석이 있죠.”

“... 하하.”

도훈은 그냥 쓰게 웃고 말았지만, 옆에 있던 두진은 어제 일을 생각만 해도 진저리가 나는 듯 정색하고 답했다.

“그분이 집요해서 오래 걸린 게 아니라 떼를 쓰듯 무조건 해달라고만 해서 오래 걸린 겁니다.”

“하하, 상상이 갑니다. 저도 경험한 적이 있거든요.”

서류를 챙기며 이런저런 잡담이 오갔고 배석했던 예산팀장이 자료를 챙겨 먼저 자리를 떴다.

팀장의 등에 시선을 고정한 신길영이 차혜진을 입에 올렸다.

“이제 한 명만 더 거치면 완전히 끝나시겠네요.”

신길영은 조금만 더 고생하라는 뜻으로 한 말이었는데, 전혀 의외의 답이 돌아왔다.

“글쎄요.”

“설마 두 명인 겁니까?”

“... 아뇨. 부의장님이 끝입니다.”

“네? 차혜진 의원 아직 면담 안 했다고 알고 있는데요?”

“그분과는 세 번이나 면담했죠.”

“아, 그거 말고 최종 면담이요. 금요일 마감 직전에 다시 반영 요청을 했다고 들었는데요.”

차혜진이 처음 요청했던 것과 거의 같은 양의 요청을 다시 했다는 얘기는 이미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시청과 시의회 사람들의 절대다수가 어이없어하는 가운데, 일부 극소수는 그럴 수 있는 그녀의 ‘패기’에 혀를 내두르기도 했다.

“잠깐 고민했는데 안 하기로 했습니다.”

“... 안 하신다고요?”

“네.”

정작 신길영에게 답하는 도훈은 담담했는데, 옆의 두진이나 저만치 자기 자리에 앉은 영배는 쓰게 웃고 있었다.

“시장님, 혹시 차 의원이 그렇게 또 뭉텅이로 요청해서 화나셨습니까?”

“... 안 나게 생겼습니까?”

“... 하하.”

무표정한 도훈의 답에 신길영도 쓴웃음을 흘렸다.

‘제명 처분 무효’ 소송 중인 서태기를 제외한 여섯 시의원 중, 건수로 가장 많은 요청을 한 게 차혜진이고 세 번이나 면담한 것도 차혜진뿐이었다.

어제 도훈과 두진, 영배, 예산팀장을 질리게 했던 장민호도 협의 기간에 두 번 면담했고, 어제 세 번째이자 최종 면담을 했다.

매번 ‘뭉텅이’로 들이밀었다가 뭉텅이로 거절당하는 차혜진을 보며 시의원들조차 말은 안 해도 혀를 내둘렀기에 도훈의 결정이 전혀 이해가 안 되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괜찮으시겠습니까? 차 의원 성격에 가만히 있지 않을 것 같은데요.”

“그래서 제가 눈 딱 감고 또 한 번 고장 난 레코드플레이어가 되어볼까 고민하긴 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아닌 것 같아서요.”

도훈을 비롯한 시 집행부가 판단하기에, 차혜진의 조정 요청 중 수용할 수 있는 부분은 진즉에 다 수용했다.

거절당한 요청을 살짝 명분을 바꾸고 명목을 바꿔서 다시 요청하는 걸 일일이 설명하는 것도 지쳤다.

더군다나···.

“아무리 생각해도 차 의원님은 그 요청을 무슨 일이 있어도 관철해야겠다는 생각도 없으신 것 같아서 말입니다.”

“그래요?”

“네. 건마다 이건 이래서 어렵다, 저건 저래서 안 된다고 말씀을 드리면 공들여 반박하시는 경우가 거의 없었습니다. 그냥 ‘정말요?’ 아니면 ‘한 번 더 생각해주세요.’ 정도로 한 마디하고 못 이기는 척 수긍하셨죠.”

“그랬습니까?”

“네. 작년에는 차 의원님과 논쟁을 좀 했었는데, 올해는 첫 면담 때를 제외하면 그런 적이 거의 없었습니다. 거의 저나 예산팀장이 설명하고 차 의원님은 듣고만 계시는 식이었거든요.”

“흐음, 그건 몰랐는데요.”

“저희가 굳이 그런 건 말 안 했고 차 의원님도 말 안 하셨을 테니까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던 신길영이 말을 이었다.

“시장님이 화를 내실만 하네요.”

“저도 저지만, 예산팀장님이 머리끝까지 화나셨어요. 모욕감을 느끼신 것 같았습니다.”

“그건 저도 들었습니다. ‘안 부처님’이 기어이 이를 꽉 악물고 말았다는 거요.”

“저도 저지만, 예산팀장님을 생각해서 내린 결정이기도 합니다.”

얼마간 더 대화를 이어가던 신길영이 비서실을 나가는데 도훈이 말을 걸었다.

“아, 부의장님.”

“네.”

“제가 차 의원님이랑 최종 면담 안 하기로 했다는 건 비밀로 해주실 수 있을까요?”

“비밀로요?”

“네.”

도훈을 바라보던 신길영이 가만히 웃으며 말을 이었다.

“시장님도 짓궂게 행동하실 때가 있네요.”

“글쎄요. 짓궂다고까지 생각되지는 않은데요.”

“뭐, 알겠습니다.”

차혜진의 행동을 생각하면 그리 대단한 부탁도 아니었길래 신길영은 선선히 승낙하고 자리를 떴고, 도훈은 허리를 돌리고 몸을 틀며 굳어진 몸을 풀며 두진과 영배에게 말했다.

“퇴근하시죠.”

“괜찮으려나 모르겠네.”

걱정스러운 표정의 두진에게 도훈이 담담히 말을 이었다.

“제가 이 결정하기 전에 한 가지 무척 후회하는 게 있었는데, 그게 뭔지 아세요?”

“뭔가?”

“차 의원과 면담할 때 그걸 영상으로 찍어놓거나 녹음을 해놓을 걸 그랬다는 겁니다. 몇 번이고 재요청을 해도 그걸 편집해서 보내주면 답변으로 충분할 것 같거든요.”

“흐음. 틀린 말은 아니네만··· 요즘 차 의원 형편이 그리 좋질 않잖은가? 이런 때 우리까지 자극하면, 엉뚱하게도 우리에게 불똥이 튈 수가 있어.”

“괜찮습니다. 차 의원 말고 다른 의원들과는 협의가 끝난 데다가, 무엇보다도 차 의원이 요구한 것 중에서 수용할 수 있는 건 다 수용했으니까요. 협의를 네 번이 아니라 사십 번을 해도 마지막에 들이민 뭉텅이는 절대 수용 못 합니다.”

“그렇긴 하네만···.”

두진이 찜찜하다는 표정으로 말끝을 흐리는데 자기 짐을 다 챙긴 영배가 끼어들었다.

“일단 오늘은 이만 들어가시죠. 어차피 예산안 제출까지 이틀 더 여유가 있으니까요.”

“... 쩝.”

“그리고 설사 차 의원이 화가 나서 시장실에 달려오더라도 저나 실장님께 뭐라고 하겠습니까? 김 시장에게 달려들겠죠. 그러려고 예산팀장에게 그런 말을 했겠죠.”

도훈은 차혜진과 최종 면담을 안 하기로 한 뒤, 혹시나 그쪽에서 연락이 오면 ‘차 의원님 건은 시장실에서 알아서 하신다고 했다.’고 답하라고 지시했다.

혹여 예산팀장에게 화살이 돌아가는 걸 막기 위해서였다.

“차 의원은 이걸 도발로 여길 수도 있네.”

“... 도발이요?”

“그래.”

가방을 챙기며 하는 두진의 말에 도훈은 정색하고 답했다.

“먼저 한 번 해보자고 나온 사람이 도대체 누군데요?”

“... 쩝.”

입맛을 다신 두진이 가방을 챙겼고 정리를 마친 세 사람이 비서실을 나섰다.

탁.

마지막으로 나서는 도훈이 비서실의 불을 껐다.

같은 시간, 차혜진이 사무실에서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시간을 보내고 있었지만, 도훈은 그녀나 그녀의 요청에 관해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