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1. 내가 선 자리 - 1.
대흥시 시청과 주민센터, 보건소 등의 시 직속기관, 상하수도 사업소와 같은 산하 공공사업소에 대한 감사원 감사는 2주 동안 진행됐다.
감사원 직원들이 감사를 마무리하고 철수하는 날, 도훈은 다시 책임자를 만나 인사하는 시간을 가졌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저희 일인 걸요. 시장님 이하 시 공무원들이 감사받느라 고생하셨죠. 본의 아니게 대흥시에 당혹스런 상황을 만든 것 같아서 죄송하네요.”
“신경 쓰지 마세요. 다 지나갔잖습니까. 피차 그런 해프닝까지 일일이 신경 쓰면서 일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지난주에도 그랬지만, 다시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마음이 한결 편하네요.”
“하하. 그럼 다행이고요.”
자극적인 기사 제목이 갑자기 쏟아졌던 걸 ‘해프닝’일 뿐이라고 말하는 도훈.
시청에 파견된 감사원 직원들은 그 일에 전혀 관련이 없으면서도 시청 직원들로부터 유감 가득한 시선을 받아야 했으니 곤혹스러웠을 터.
일이 벌어진 직후, 도훈이 ‘해프닝’일 뿐이니 신경 쓰지 말고 감사에 협조하고 업무에 집중하라고 직원들을 다독인 건 감사원 직원들에게도 고마운 일이긴 할 터였다.
“가보겠습니다, 시장님.”
“네. 수고 많으셨습니다.”
감사원 책임자와 자치행정과장이 나갔고, 시장실에는 부시장 전경완과 비서실장 두진이 남았다.
두진이 한시름 덜었다는 듯 입을 열었다.
“... 그래도 이렇게 웃으며 헤어질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
“그러게요.”
최종 감사 결과 보고서가 공개되려면 좀 더 있어야 하겠지만, 현장책임자가 자치행정과장을 통해 전해준 얘기가 있었다.
- 문제가 전혀 없는 건 아닙니다. 단순 실수라고 볼 수 없는 것들도 있습니다. 다만, 그런 굵직한 문제는 현 시장님 임기 전의 것들이고 현 시장님이 취임하신 뒤에 대다수가 개선되거나 바로잡아졌더군요. 근래 3년은 그런 문제들이 발견되고 수정되고 다시 재수정되는 과정이라 봐도 좋을 것 같다고 저희끼리 일단 결론을 내렸습니다. 가벼운 지적사항조차 전혀 없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만, 이렇게 깔끔한 감사 결과는 저희로서도 아주 오래간만의 일입니다.
입에 발린 얘기일 거라고 생각되지는 않는 게, 처음에는 매우 기계적으로 행동하던 감사원 직원들이 감사의 끝이 다가올수록 웃음이 많고 자연스러워졌다는 말은 도훈도 영배를 통해 들은 바가 있었다.
감사 결과에 큰 문제가 없으니 대흥시청 직원들을 대하는 태도가 부드러워진 것.
시청 직원들도 눈치가 있어 그런 감사원 직원들의 태도 변화를 알아채고 그 이유를 유추해냈다.
다만···.
- 아마, 시장님께 ‘시정 권고’ 한 건이 분명히 내려지긴 할 겁니다.
“휴우. 앞으로는 회식비 지원하는 거나 격려금도 카드로 긁어야 한다니···.”
“하하. 그렇게 하시면 되죠. 그게 뭐 문제라고요. 사실, 그게 맞는 방향이기도 합니다.”
“틀린 말씀은 아닌데···. 받는 사람의 기분이 좀 덜 살지 않을까 싶어서요.”
“어휴,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 쩝.”
도훈은 모든 공금 사용에 아주 까다롭게 굴지만, 직원들 회식이나 경찰관, 소방관 등을 챙길 때 종종 소액의 현금을 격려금으로 내밀곤 했다.
총액은 아주 소소할 뿐이지만 감사원 직원들은 이 부분을 고치는 게 좋겠다고 콕 짚어서 얘기했다.
받는 사람의 ‘기분’을 생각할 때 항변하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는 건 아니었지만, 도훈은 이미 수용하기로 한 상태였다.
“... 그런데 지난 언론보도 건, 더 알아보지 않아도 괜찮겠습니까?”
“해프닝으로 넘어갔잖습니까.”
“... 시장님.”
“이미 지나간 일입니다.”
도훈이 전경완의 질문에 담담히 답했다.
감사 개시 당일의 보도 이후, 별다른 움직임은 없었으나 그 날의 언론보도는 분명 ‘의도를 가진 누군가’가 힘을 쓴 결과라는 것에 의심이 없었다.
도훈은 그 ‘누군가’를 파헤치는 등의 대응을 일절 하지 않았고 지금도 그럴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그 일은 분명히···.”
“부시장님이 뭘 걱정하시는지 모르지 않습니다.”
“......”
“하지만, 지금은 그 일의 배후를 찾는 것보다 우리 스스로 단단해지는 게 더 중요합니다.”
“네?”
“... 아마 지난번 일이 끝이 아닐 테니까요.”
“... 그게 무슨···?”
“지난번 언론보도 건은 이를테면 ‘간 보기’에 불과한 겁니다. 슬쩍 한번 건드려 본 수준이죠. 분명 더 폭넓고 치밀한 공격이 있을 겁니다.”
“......”
전경완이 얼마간 담담히 도훈을 응시하다 입을 열었다.
“시장님께서는 지난번 일의 배후가 누구인지를 아시는군요.”
“......”
도훈은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답했다.
“... 네.”
“......”
일순, 눈이 번쩍인다 싶을 정도로 강한 눈빛을 내뿜은 전경완 부시장.
“도대체 그게 누굽니까?”
“......”
도훈이 담담한 표정으로 전경완과 시선을 마주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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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저녁, 두진의 집.
집 안이 아닌 두진의 집 마당 평상 위에 도훈과 두진, 영배가 둘러앉아 막걸리를 마시고 있었다.
도훈은 자기 무릎이 아닌 두진의 무릎에 아주 편하게 드러누운 순심이를 향해 어이없는 표정을 하고 있다가 문득 생각난 걸 입에 올렸다.
“사모님은 또 대전에 가신 겁니까?”
“아침에 나 출근하는데 그런다고 하더라고. 이건 우리 안주하라고 만든 게 아니고 딸한테 갖다 주려고 만든 것 중 모양이 나쁜 것들일 뿐이라네.”
“하하. 그래도 이렇게 맛있는 전이나 부침개를 얻어먹는 게 어딥니까? 저는 이것만으로도 감지덕지 입니다.”
“자네야 그렇게 말할 수 있겠지만, 남편인 나는 다르지.”
“에이, 사모님이 둘째 따님께 놀러 가셔서 이것저것 즐기며 기분도 푸시고 그러신다면서요. 그 정도는 이해해 주셔야지요.”
“이해 못 하는 게 아니라 왜 난 내팽개쳐두고 자기만 가냔 말이야. 나라고 못 즐길 것도 없잖나.”
두진이 푸념했고 도훈과 영배가 소리 없이 웃었다.
없는 자리에서는 저렇게 말하지만, 정작 두진은 부인에게 꼼짝도 못 한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었다.
순심이를 쓰다듬으며 두진이 말을 이었다.
“그나저나 전 부시장이 많이 서운한 눈치던데···.”
“그래도 어쩔 수 없습니다.”
두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도훈의 표정에 아쉬움은 없었다.
오히려 영배가 좀 아쉽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냥 얘기하면 안 되는 거냐? 부시장님이 오정민이가 원흉이라는 걸 안다고 선을 넘을 분은 아닌 것 같은데.”
“그런 분은 아니지. 하지만 그분의 위치를 고려하면, 그렇게까지 자세하게 아는 게 오히려 울화만 부추길걸?”
“그럴까?”
“난 그렇게 생각해. 누군가 날 노리고 뭔가 일을 꾸민다는 정도면 충분해. 그 정도는 알아야 부시장으로서 조직을 단속하고 추스르는 데 좀 더 신경 쓰시겠지. 하지만, 원흉이 오정민이라는 걸 안다고 해서 부시장님이 뭔가 나서서 할 수 있는 일이 없어. 증거가 있는 것도 아니니까.”
“그렇겠지.”
“그런 상황에서는 성질만 더 나지 않겠어?”
“... 흐음.”
영배는 묘한 신음을 흘렸지만, 두진은 도훈의 말에 동의한다는 표정으로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낮에, 도훈은 전경완에게 지난 언론보도 사건의 배후가 누구인 줄 안다고 답했다.
하지만, 그게 누구인지를 밝히지 않았고 오히려 말해달라 재촉하는 전경완을 진정시켰다.
- 누구인지 물으시는 부시장님의 마음이 어떤 것인지는 알겠습니다만, 차라리 모르시는 게 더 좋습니다.
- 시장님!
- 조금만 진정하고 생각을 해보시면 왜 제가 이렇게 말하는지, 말할 수밖에 없는지 부시장님도 이해하실 겁니다.
- ......
담담한 도훈의 말에 멈칫한 전경완은 한참이나 끙끙대다가 끝내 도훈의 말을 받아들였다.
다만, 이성으로는 이해해도 감성으로는 그렇지 못한지 자기 사무실로 돌아가는 그의 표정에는 아쉬움이 짙게 배어 있었다.
만약, 배후가 누구인지 도훈이 몰랐다면 ‘함께 배후를 캐내자’는 전경완의 말을 두고 잠깐 고민이라도 했겠으나 배후를 아는 이상 그럴 필요도 없었다.
시장을 음해하려 한 것이니 시청 차원에서 대응해도 되겠다 생각할 수 있지만, 자칫하면 엉뚱한 이들이 피해를 볼 수도 있으니까.
‘어공’과 ‘늘공’의 차이라는 것도 있지만, 상대가 여당 소속 3선 국회의원이질 않은가.
시장인 도훈이 아니라 그 누구라도 쉽게 어쩌지 못하는 권력자가 아닌가 말이다.
“그나마 다행인 건, 오정민 쪽에서 우리가 이 사실을 짐작하고 있다는 걸 모른다는 거지.”
“... 그렇지.”
문서가 유출되어 도훈에게까지 전해진 것을 오정민 의원은 모르고 있었다.
그 문서를 봤기에 도훈도 지역 언론의 ‘제목 테러’가 터졌을 때 냉정함을 유지할 수 있었다.
아니었다면, 분명 조상님이 출동해 힘을 써야 했을 터.
“앞으로도 다른 방식의 흔들기가 있겠지?”
“저는 그럴 거로 생각합니다. 제가 아는 오정민 그 사람, 머리도 좋고 능력도 있습니다만, 무엇보다도 무척 집요한 사람입니다.”
“흐음. 겉으로는 전혀 그래 보이지 않는데···.”
“자기 관리···, 그건 아니군요. 자기 이미지 관리에는 매우 철저했었습니다. 일반인일 때도 그랬는데 국회의원인 지금은 과거보다 더하겠죠.”
도훈과 두진의 대화를 듣고 있던 영배가 탄식했다.
“... 쩝. 그런 사람이 상대인데···.”
그런 막강한 힘을 가진 이를 상대로 이쪽에서는 우군을 함부로 늘릴 수도 없는 게 안타깝다는 뜻일 터.
도훈 모르게 아주 막강한 우군을 확보한 영배였고 그 사실은 두진도 알고 있었지만, 그 우군은 함부로 ‘소환’하거나 꺼내 들 수 있는 패가 아니었다.
그러다 보니, 주변의 친숙한 인물 하나라도 더 아쉬운 마음이 든달까?
“아무튼, 좀 고민해 볼 게 있네. 부시장이나 비서실 직원 등을 이 일에서 제외하겠다는 자네의 판단에 나도 동의했고 지금도 동의하네만, 우리 셋에 여자분 셋만으로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어.”
“흐음.”
“이번에는 슬며시 흔들어보고 말았으니 망정이지, 본격적인 공격이 들어온다면 우린 제대로 대응도 못 하고 지켜만 보고 있을 수밖에 없을걸?”
“......”
“아무리 생각해봐도 시청 외부에 자네를 도울 수 있는 조직이 있어야 해. 크고 버젓한 조직일 필요 없어. 소수정예라도 좋아. 일단 외부에서 자네를 적극적으로 도울 수 있는 이들이 있어야 해.”
“......”
“나도 실장님 말씀에 동감이야.”
고개를 열심히 주억거리던 영배의 말에 도훈은 쓰게 웃고는 입을 열었다.
“저도 실장님 말씀에 동감은 합니다만, 그럴 사람도 없고 조직을 운영할 경제적 능력도 없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무엇보다도 뭔가?”
“머리로는 필요성에 동감하긴 합니다만, 심리적으로는 거부감이 강하게 들거든요.”
“... 흐음. 자넨 그쪽으로는 결벽증이 있으니까.”
“하하. 결벽증은 좀 심한 말씀이시고요.”
도훈이 항변하는데 두진과 영배가 동시에 말했다.
“난 절대 심하지 않다고 생각하네.”
“너 결벽증 맞아, 인마. 이렇게까지 정치적 모략에 공격당하는데 아직도 정치인이 아니라고 박박 우기잖아. 이젠 나도 편들어줄 말이 없어요.”
“......”
동시 공격에 할 말을 잃은 도훈은 막걸릿잔을 들어 막걸리를 단숨에 들이켰다.
“크으.”
도훈이 부침개 하나를 입에 넣고 씹어 삼킨 뒤 가만히 답했다.
“고민을 좀 해보죠. 어떻게 해야 할지.”
“그러세.”
“그렇게 나와야지.”
이 정도의 태세 전환이라도 반가웠던지 두진과 영배가 즉각 반응했고, 영배가 도훈의 잔을 채워졌다.
“... 하하.”
막걸릿잔을 잡으려던 도훈이 뭐가 생각났는지 좀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왜 그렇게 웃어?”
“... 그냥. 갑자기 우리도 선거 모드가 된 것 같아서.”
“뭐? 선거 모드?”
“... 그렇잖아. 공격에 대한 대응이니, 정치인이니 아니니, 외부조직이 필요하니 아니니···.”
“... 틀린 말은 아니네.”
영배가 묘한 표정으로 공감했고, 도훈이 피식 실소를 흘리고는 말을 이었다.
“... 난 이런 날은 절대 오지 않을 줄 알았는데···. 시장 재선은 얼어 죽을, 얼른 4년 임기가 끝나기만 바라고 있었는데···. 하하. 이런 날이 오긴 오네.”
혼잣말하며 웃는 도훈을 빤히 바라보던 두진이 물었다.
“그래서 후회되나?”
“그럴 리가요.”
“정말로 아니야?”
“절대 아닙니다.”
담담하게 답하는 도훈의 눈빛과 목소리에는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그럼 선거 모드라는 것도 제대로 하자고. 뭐가 됐든, 제대로 하고 나서야 좋은 결과를 바랄 수 있는 거라네.”
진지하게 말하는 두진에게 도훈이 차분하게 답했다.
“네. 그래야지요.”
어두운 밤하늘을 배경 삼고 막걸리와 조촐한 안주로 업무의 피로를 풀면서, 세 사람이 아주 진지하게 눈을 빛내며 뭔가를 다짐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