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8. 새우등 - 3.
회의가 시작되고 1시간 정도 지났을 때, 강정문이 잠깐 휴식하자며 회의를 정회했다.
여러 시장, 군수들과 짧게 인사한 강정문이 도훈에게 다가왔다.
“김 시장, 잠깐 따로 얘기 좀 할까요?”
“그러시죠, 도지사님.”
둘은 회의실을 나와 복도 끝으로 자리를 옮겼다.
창가에 선 강정문이 미안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조민구 시장이 김 시장에게 짜증 냈다면서요?”
“그랬죠.”
“... 미안해요.”
“왜 지사님이 사과하십니까? 당사자는 짜증 내고 회의도 참여 안 하고 가버렸는데요.”
“내가 회의 전에 불러서 좀 질책을 했거든요. 그래서 기분이 더 그랬을 거예요.”
“조민구 시장이 동대문에서 뺨 맞고 남대문에서 화풀이한 거죠. 그리고 뺨을 맞을 만한 일을 했다고 들었습니다. 지사님이 제게 사과하실 일이 아닙니다.”
“... 하하.”
도훈은 개략적이나마 민의당 OO 시 지역위원회 상황을 알고 있고, 조민구 시장이 공개적으로 비판을 당해도 할 말이 없다고 생각했다.
도지사인 강정문이 그런 조민구를 나무라는 것도 무리는 아닐 터.
도훈은 조민구의 일은 담담히 넘기고는 다른 화제를 꺼냈다.
“저는 다른 일로 항의를 좀 하고 싶습니다만···.”
“다른 일이요?”
“일부 직원의 업무 강도가 너무 세지 않나 싶습니다.”
“......”
“오늘 어떤 도청 직원과 점심을 함께했는데, 얼굴이 반쪽이 됐더란 말입니다.”
“... 아.”
강정문이 뒤늦게 도훈의 말뜻을 알아채고는 정말 미안한 표정이 된 순간.
“자칫하면 일 끝내기도 전에 사람이···.”
“지사님!”
저만치서 빠르게 다가오는 도지사 비서실장이 도훈의 말을 끊었다.
평소 어떤 상황에서도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고 있는 비서실장이었는데, 지금은 좀 달랐다.
그의 표정이 딱딱하게 경직되어 있었으니까.
“왜 그러나?”
강정문이 묻자 비서실장이 도훈의 눈치를 봤다.
“잠깐 조용히 드릴 말씀이···.”
“아, 그럼 저는 먼저 회의실로 가 있겠습니다.”
걸음을 옮기려는 도훈의 팔을 강정문이 붙들고 비서실장에게 말했다.
“1급 비밀 아니면 그냥 얘기하게. 김 시장이 어디 가서 떠벌리고 다닐 사람도 아니니까.”
강정문의 말에 비서실장의 시선이 도훈을 향했고, 도훈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입에 지퍼를 채우는 시늉을 했다.
비서실장이 입을 열었다.
“... 하긴, 김 시장님도 아시는 게 좋겠습니다.”
“네? 그건 무슨 말씀이세요?”
“들으면 이해가 가실 겁니다.”
도훈의 질문에 답한 비서실장이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조민구 시장의 일입니다.”
“조 시장이 왜? 그 사람 아까 돌아간 것 아니었나?”
“도청을 떠난 건 맞습니다. 그런데 중간에서 일이 생긴 모양입니다.”
“일이 생기다니? 자세히 얘기해 보게.”
“... 그러니까···.”
조민구는 시장, 군수 회의가 시작되기 전 도청을 떠났고, 그가 떠난 직후 도청 로비에서 침묵시위를 하던 민의당 OO 시 당원들도 철수했다.
그런데 홍성에서 OO 시로 돌아가던 중 휴게소에서 조민구와 당원들이 우연히 다시 마주쳤단다.
시청에서는 사람들의 눈이 무서워 시위하는 이들에게 아무 말 안 했던 조민구는 휴게소에서 마주친 당원들에게 화를 냈다나?
“조 시장이 같은 당 동지끼리 어떻게 이럴 수 있냐며 화를 냈고, 당원들은 그간 시장의 독선적인 모습을 다시 비판하는 등 말싸움을 하다가 감정이 격해진 모양입니다.”
“감정이 격해져? 그럼 말싸움으로 끝난 게 아니라는 건가?”
“... 네. 휴게소에서 당원 한 사람과 주먹다짐을 했다고 합니다.”
“... 뭐?”
강정문이 어이없다는 표정이 됐고, 그건 도훈도 마찬가지였다.
“... 그러니까 지금 조 시장이 당원이랑 치고받고 싸웠다는 거야?”
“조 시장이 먼저 주먹을 휘두르기 시작했고, 맞은 당원이 응수하는데 다른 이들이 두 사람을 말렸답니다.”
“... 휴게소라면 지켜보는 시민들이 있었을 것 아닌가?”
“그렇습니다. 영상이 올라왔습니다.”
“영상? 인터넷에 말인가?”
“네.”
질문에 답한 비서실장이 핸드폰을 내밀었고, 핸드폰을 받아든 강정문이 액정을 터치했다.
어느새 도훈도 강정문과 나란히 서서 핸드폰 액정을 바라보고 있었다.
중간부터 찍기 시작한 듯, 얼굴이 벌겋게 상기된 조민구와 다른 한 사람을 여럿이 붙들어 떼어놓는 장면으로 영상이 시작됐고, 시작과 동시에 큰소리가 들려왔다.
- 야, 이 빌어먹을 새끼들아. 김도훈이한테 뭘 얻어먹기라도 했냐? 그것도 아니면 걔가 너희들 편이라도 들어주디? 당원도 아닌 새끼를 맨날 그렇게 빨아주느라 거품을 물어? 그렇게 김도훈이가 좋으면 대흥시로 이사 가! 자기네 시장 말은 듣지도 않고 엉뚱한 놈만 싸고도는 너희 같은 것들은 나도 질렸어!
- 그게 지금 시장이라는 사람이 할 소립니까!
- 내가 무슨 심심하면 두들기는 스트레스 해소용이냐? 너희가 언제 나와 제대로 대화를 한 적이라도 있어? 처음부터 늙고 고리타분하다고 대놓고 무시했잖아!
- 언제 우리가 시장님을 무시했습니까? 철딱서니 없고 현실을 모르는 풋내기들이라고 무시하고 상대도 안 하신 게 도대체 누군데요!
- 이 망할 새끼가! 너 지금 말 다했어!
“... 아이고···.”
도훈은 자기도 모르게 신음성을 흘렸다.
예전부터 OO 시의 젊은 민의당 당원들이 조민구와 자신을 비교하며 조민구를 비판한다는 얘기는 얼핏 들은 적이 있었다.
그때는 그냥 그러려니 하고 웃어넘겼다.
그런데 조민구가 저렇게까지 흥분해 말하는 걸 보면 도훈은 웃어넘겨도 조민구는 그럴 수 없는 지경이었던 모양이었다.
주먹다짐하는 두 사람을 말리는 OO 시 당원들.
그런 난장판을 지켜보거나 핸드폰으로 찍는 시민들이 영상에도 여럿 보였다.
도훈이 강정문을 흘끔 하고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 전 도훈과 대화할 때 입가에 머금었던 미소는 싹 사라졌고, 눈빛도 아주 차갑게 변해 있었으니까.
충분히 그럴만한, 아니 그러고도 남을 일이었다.
현직 시장이 현직 시의원, 당원들과 말다툼에 이어 주먹질까지 했다.
시민들이 여럿 지켜보는 공개된 장소에서.
설상가상으로 그들이 전부 다 민의당 소속이었다.
강정문이 싸늘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거 언제 올라왔나?”
“10분이 좀 넘었습니다.”
“... 조 시장 연락되나?”
“제가 이걸 본 직후부터 계속 전화를 했는데, 조 시장도 비서실장도 전화를 안 받습니다.”
“... 당원들은?”
“그쪽과는 통화가 됐습니다. 조 시장에게 맞은 젊은 당원이 입안이 찢어져서 병원으로 가는 중이라고 하더군요. 영상이 올라왔다니까 무척 놀라고 당황하는 것 같았습니다.”
“... 휴우.”
강정문이 영상 재생을 멈추고 한숨을 내쉬었다.
핸드폰을 비서실장에게 돌려준 강정문이 품에서 자기 핸드폰을 꺼내면서 도훈에게 말했다.
“김 시장, 먼저 회의실로 돌아가겠어요? 난 전화 좀 해야겠어요.”
“알겠습니다, 지사님.”
도훈이 회의실 쪽으로 걸음을 옮겼고, 강정문은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분명 조민구일 게 뻔한 상대방은 끝내 전화를 받지 않았다.
-----
문제의 영상은 그날 저녁 방송국 뉴스에 보도됐고, 대다수 언론에도 실렸다.
- OO 시 시장과 시의원이 포함된 당원들, 국도변 휴게소에서 말다툼에 이은 주먹다짐 벌여.
- 시장과 당원들 사이에 무슨 일이? OO 시 시장과 당원들 주먹질까지 한 이유는?
- 대낮의 활극, 시장과 시의원들의 부적절한 행동!
일부 기사에는 그들이 ‘민의당’ 소속이라는 게 밝혀지지 않았지만, 대다수 기사에는 그들이 같은 민의당 소속이며 OO 시 지역위원회에 함께 소속되어 있다는 것도 실렸다.
시장과 시의원이 포함된 당원들이 공개된 장소에서 폭력을 행사했다는 것도 비난을 면치 못할 일인데, 같은 당 같은 지역위원회 사람들끼리 그랬다니 대중의 호기심을 더욱 자극했다.
게다가 조민구가 욕하는 와중에 도훈을 언급했던 것이 상상력을 이상한 쪽으로 자극한 모양.
- 대흥시 김도훈 시장이 다음 지방선거 때 OO 시로 옮기고 민의당 후보로 나오기라도 하나? 갑자기 이 대목에 왜 등장하지?
- 김도훈은 그럴 마음이 전혀 없는데, OO 시 당원들이 은밀히 추진하고 있을 수도 있지.
- 소설을 써도 좀 적당히 써라. 멀쩡히 현직 시장으로 어드벤티지가 있는 곳을 놔두고 그리 가겠냐, 너 같으면?
- 하지 말라는 법 있냐? ‘안 한다’에 네 손모가지 걸어?
- ... 키보드 워리어들 또 납셨네. 헛소리 그만하고 방바닥이나 긁어라.
기사의 댓글 대부분은 시장과 시의원을 비판하는 내용이었지만, 일부 도훈과의 연관성을 추측하거나 상상하는 것들이 있었다.
야당에서는 오만방자한 여당 정치인들의 수준을 그대로 보여주는 사건이라며 신이 나서 비판을 해댔고, 이 사건을 바라보는 국민의 시선도 아주 싸늘했다.
민의당 내부에서 조민구 OO 시장을 출당, 혹은 제명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빗발치는 가운데, 조민구는 사건 발생 사흘 만에 사과문을 발표하며 민의당에서 탈당했다.
- 당일, 점심 반주로 술을 좀 과하게 해서 술기운을 이기지 못하고 실수했다. OO 시 시민과 국민 여러분에게 엎드려 사죄드린다. 앞으로는 자숙하겠다.
OO 시 시민들 사이에는 조민구에게 당장 시장직에서 사퇴하라는 요구가 점점 더 커지고 있다는 뉴스가 쏟아지는 가운데, 뜬금없게도 도훈을 취재하려는 기자도 있었다.
“네. 이 일과 저희 시장님은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당연히 하실 말씀도 없으시죠. 그러니 인터뷰에 응할 이유가 없다는 판단이십니다.”
비서실에 걸려온 어느 기자의 전화를 받는 영배.
그런 영배를 소파에 앉은 도훈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가운데, 두진이 좀 묘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거 아십니까?”
“뭐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민의당 내부에서 시장님께도 불만을 표하는 목소리가 있다는 거요.”
“... 안 의원한테 얼핏 듣기는 했습니다.”
조민구가 당원들과 싸웠던 이유가 당원들이 오래전부터 조민구와 도훈을 비교하며 비판했기 때문이고, 최근에는 그 정도가 더욱 심했다는 건 민의당 내부에 널리 퍼진 이야기.
물론, 도훈은 이 사태와 전혀 관련이 없었으나 당내 일각에서 ‘하필 우리 당 소속도 아닌 사람과 비교해 사달을 일으킬 건 뭔가.’라거나 ‘도훈은 왜 우리 당에 가입도 안 하고 좋은 관계 유지하면서 꿀만 빨고 있나?’라는 얘기도 있다는 걸 안준식을 통해 들은 도훈이었다.
어처구니없는 그 귀띔에 대한 도훈의 반응은 이랬다.
- 정말 별꼴이네요.
도훈이 주변에 잔뜩 포진한 민의당 사람들, 도지사부터 시작해 지역구 국회의원, 시의원 등과 나쁘지 않은 관계를 유지하는 건 정치권 관계자라면 대개 다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건 도훈이 어쩌다가 운 좋게 그런 상황을 만난 게 아니고, 시종일관 ‘무소속’을 고집하면서도 협력할 때 협력하고 거리를 둘 때 거리를 둬서 가능했던 일.
즉, 도훈이 민의당과 ‘밀당’하며 이득만 챙긴다는 투의 말은 너무나 터무니없는 것이었다.
“... 우리 시 지역위원회에서도 시장님께 비판적인 주장을 하는 이들이 목소리를 키우고 있다던데요.”
“그러라고 놔두시고 신경 끄세요, 실장님.”
“그 목소리라는 게 선거 때 후보 내야 한다는 거니까 신경 쓰는 겁니다.”
“그러면 또 어떻습니까? 아닌 게 아니라, 여당이 시장 후보조차 못 내는 게 민망하긴 하죠.”
“지방선거 때 시장 후보를 전략 공천해 줄 것을 중앙당 지도부에 요청한다는 얘기도 있던데요?”
“그럴 수도 있겠죠.”
“......”
심드렁한 도훈의 반응에 두진은 할 말을 잃었다.
선거 때 후보를 내야 한다는 목소리가 민의당 대흥시 지역위원회에 분명히 있는 게 사실.
하지만, 그런 주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장에 출마하겠다고 운이라도 띄우는 사람은, 지난 지방선거 때 낙선하고 대흥시에 3년간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던 사람이 유일했다.
민의당 지역 당원 절대다수가 그의 출마를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일축하는 게 무리도 아니었다.
그런 판국에서 조민구의 정신 나간 짓 때문에, 다음 선거 때 중요한 변수가 생길 수도 있는 상황이 된 것이었다.
여당이 후보를 내느냐 못 내느냐는 도훈의 당락에 즉각적으로 영향을 끼칠 수도 있는 건데, 당사자의 반응은 ‘심드렁’ 그 자체.
두진과 영배는 그 얘기를 듣고 도훈이 이번 ‘시장 폭력 사태’의 엉뚱한 피해자가 될 수도 있음에 우려를 금치 못했는데 정작 당사자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모습이 아닌가.
‘... 이 정도에서 조용해져야지, 더 시끄러워지면 정말 문제가 복잡해질 수도 있겠는데···.’
담담한 표정으로 서류를 읽는 도훈을 보며 두진이 속으로 중얼거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