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1. 열혈… - 3.
뚜르르르. 뚜르르르.
“... 안 받아?”
“응.”
“그 양반도 눈치가 있겠지. 네가 무슨 일로 전화하는지 짐작이 가니까 안 받는 것 아니겠냐?”
“설마.”
“뭐, 아니면 말고. 바빠서 못 받는 것일 수도 있고 전화가 오는 걸 모를 수도 있겠지만, 내 생각은 그렇다.”
“... 쩝.”
상대가 여전히 무응답이자 도훈이 전화를 끊고 핸드폰을 테이블에 내려놨다.
핸드폰을 바라보며 팔짱을 끼는 도훈에게 두진이 말했다.
“식사부터 하게. 오늘도 늦을 것 같은데 말이야. 김밥도 김밥이지만, 이 잡채도 맛이 좋구만.”
도훈은 말이 없고 영배가 맞장구를 쳤다.
“그러게 말입니다. 예산팀 노지혜 주무관이 만들었다던데, 솜씨가 훌륭하네요.”
“그러게. 하하! 직원들이 해주는 음식 맛보는 재미도 쏠쏠해.”
“다음이 마지막이라는 게 정말 아쉽네요.”
“그러게 말이야.”
오늘 차혜진과의 예산 조정 미팅이 있었기에, 예산팀에서 김밥에 잡채를 해왔다.
지난번에 음식을 처음 얻어먹을 때 도훈이 하지 말라고 했는데, 팀장까지 네 명인 예산팀 직원이 한 번씩은 음식을 대접하게 해달라는 ‘강력한’ 요청을 받았다.
김밥은 팀장이 준비하고 나머지 세 직원이 한 가지 음식을 만들어 곁들이는 방식이라 세 번째인 다음이 마지막이었다.
“어이, 시장님아.”
“... 응?”
“저녁 안 먹어?”
“... 먹어야지.”
핸드폰에 시선을 고정한 채 딴생각을 하던 도훈이 그제야 젓가락을 집었다.
김밥을 집는 도훈에게 두진이 물었다.
“그렇게 신경 쓰이나?”
“... 조금 그렇습니다.”
“조금이 아닌 것 같은데?”
“......”
도훈이 말없이 쓰게 웃었고, 두진이 말을 이었다.
“보기 싫다고 해도 내일 봐야 하지 않나. 내일 다시 안 의원과 조정 미팅이 있으니까 말일세.”
“... 그렇죠.”
“차분히 기다리세. 전화기에 부재중 기록이 남을 테니 자기가 그걸 보고 연락을 하든지 아니면 내일 만날 것 아닌가.”
“......”
“안 의원이 말은 그렇게 하고 후회하고 있을 수도 있고,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을 수도 있겠지. 아무튼, 자네와 대화하기 전에 생각할 시간이 필요한 게 아닌가 싶네.”
“......”
도훈이 말이 없는데, 영배가 끼어들었다.
“네가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도 있는 것 같다. 이거 그냥 해프닝으로 넘어갈 수도 있는 문제야. 모든 사람이 다 자기 말을 100% 지키는 건 아니에요. 특히, 홧김에 뱉은 말은 더더욱. 그리고 웬만한 사람은 그런 상황을 이해해 준다고.”
“.. 형 말대로라면 좋겠네.”
“아무튼, 그 일은 나중에 생각하고 밥부터 먹어. 나한테 예산 시즌에 밥은 잘 챙겨 먹으라고 한 사람이 누구였냐?”
“... 그래. 그럽시다.”
도훈이 김밥을 씹고 잡채를 입에 넣었다.
꼬박꼬박 씹던 음식을 목구멍으로 넘긴 도훈이 중얼거렸다.
“맛있네.”
“그렇지? 이게 다음으로 마지막이라니 아쉽기만 하다, 나는. 시청 앞 도시락 가게 것도 맛이 없는 건 아닌데 좀 질리고···.”
“......”
도훈은 영배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묵묵히 젓가락을 놀렸다.
그러면서 오후에 송지은 의원에게 들은 이야기를 되새겼다.
- 안 의원님은 차인호 씨가 시장님 팬카페 가입한 건 개인적인 취향이고 선택인데, 그것조차 존중 못 하는 건 편협한 소견에서 나온 생각이라고 말씀하셨죠. 더군다나 차인호 씨에게 잘못이 있어서라기보다는 민심이 무서워 징계한 거고, 결국 그게 탈당으로 이어진 건데 그건 차인호 씨 잘못이 아니라고요. 그랬더니 장 의원님이 발끈해서 자기는 편협해서 그딴 행동 이해 못 한다··· 뭐, 이런 식으로 대꾸했어요. 본격적으로 한 판 붙은 셈이죠.
장민호 의원은 생각이나 정치성향이 시민단체에서 오래 활동한 안준식과 달리 보수적인 편이었고, 평소 언행에도 그런 면이 묻어났다.
또한, 출신 성분도 힘깨나 쓴다는 지역 유지에 가까우니 장민호와 안준식은 같은 민의당 소속 시의원이라는 걸 빼면 공통점이 거의 없다고 할 수 있었다.
그래도 지난 3년이 넘는 시간 동안 두 사람 사이에 별다른 다툼이나 의견 대립이 없었던 것은, 안준식이 전반기 의장이었다는 것과 장민호가 양상택, 서태기 두 사람을 졸래졸래 따라다니는 행동양식을 보였다는 데 이유가 있었다.
다시 말해, 다툼이나 의견 대립이 있어도 안준식 대 양상택 혹은 서태기 라는 구도로 이루어졌지 그 뒤에 있는 장민호가 도드라진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런 장민호가 최근에 좀 달라진 모습을 보이는 이유는···.
‘양상택이나 서태기가 시의회에서 사라진 지금, 그들과 친분이 있던 민의당 당원들에게 장민호 말고는 다른 선택지가 없지. 뭐, 그들로서도 장민호가 만족스럽지는 않겠지만···.’
까놓고 말해, 도훈이 보기에는 장민호는 말을 안 하고 가만히 있으면 시의원 ‘폼’이 사는 인물.
다시 말하면, 시의원이 갖추어야 할 지식이나 언변, 남의 말을 적극적으로 듣는 태도가 좀 부족했다.
후반기 의장 심남진이나 비례대표 송지은도 민의당 소속 시의원이긴 하지만, 그들의 성향은 장민호보다 안준식에 가까웠고 친한 것도 안준식과 더 친했다.
장민호 주변에 당원들이 집결하게 된 가장 최근의 계기는, 다름 아닌 다음 지방선거 때 민의당 독자적으로 시장 후보를 출마시켜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 그다음에 안 의원님이 뭐라고 했게요?
- ... 글쎄요. 상상이 잘 안 갑니다. 또 무슨 말이 오갔습니까?
도훈이 묻자 송지은이 쓰게 웃고는 말을 이었다.
- 나도 시장님 팬카페 가입할 의사가 있다. 200% 있다. 이렇게 맞받아쳤죠.
- ... 정말로요?
- 네. 안 의원님이 나 개인 자격으로 김도훈 시장 팬카페 가입할 테니까 징계위 열어서 자기도 징계하라고 으름장을 놓으셨죠.
- ... 하하.
- 안 의원님이 정말 진지하게 그렇게 말하니까 장 의원님은 더는 아무 말도 못 하셨고요. 말다툼은 그렇게 일단락됐어요.
- ......
잠시 아무 말도 못 하던 도훈이 말을 이었다.
- 송 의원님이 보시기에···.
- 안 의원님이 진심으로 시장님 팬카페에 가입할 생각으로 그런 말을 하신 것 같냐고요?
- 네. 어떻게 보셨습니까?
송지은이 싱긋 웃고는 답했다.
- 가입하고도 남을 기세였어요.
- ... 후우.
그리고 이어진 뜻밖의 말.
- 사실, 남들 눈치만 아니라면 저도 시장님 팬카페 가입해서 관계를 더 돈독하게 하고 싶은데요, 뭐.
말다툼과 관련된 얘기는 그쯤에서 끝나고, 조정 논의로 넘어갔다.
애써 안준식과 관련한 생각을 눌러놓고 있었지만, 드문드문 그가 정말로 팬카페에 회원가입 신청을 하면 어떻게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 내게 문제가 될 건 전혀 없지만···.’
사실, 안준식이 도훈의 팬카페 회원이 된다고 해서 도훈에게 문제가 될 건 크게 없었다.
하지만, 분명히 민의당 소속 시의원이고 전반기에 시의회 의장까지 했던, 주변에서 ‘능력 있고 열정적인 데다가 성과도 적절히 낸다’고 인정받는 안준식에게는 자칫 큰 문제가 될 수도 있었다.
‘... 설마 정말로 가입 신청을 하는 건 아니겠지.’
도훈이 생각하기에 안준식은 다방면에 수준 이상, 아니 아주 훌륭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가 감성적이지 않은 건 또 아니었다.
나름 풍부하고도 열정적인 감성을 갖고 있었기에 어렵고 힘든 시민단체 생활을 그리 오래 할 수 있었던 게 아니겠는가.
식사하면서도 그런 생각에 홀로 빠져있던 도훈의 팔을 누군가 툭 쳤다.
“뭔 생각을 그렇게 해? 불러도 반응이 없이?”
“... 그냥. 왜?”
“... 혜란 선배한테서 문자 왔다.”
“... 왜 갑자기 불길한 느낌이 들지?”
“봐봐.”
영배가 자기 핸드폰을 내밀었고 액정에 뜬 문자 내용을 확인한 도훈이 푹 한숨을 내쉬었다.
혜란이 보낸 문제 메시지는 이런 내용이었다.
- 영배야. 오늘 회원가입 신청 중에 안준식이라는 이름으로 신청한 게 있다. 혹시나 싶어 확인해 봤더니, 이 사람 진짜 안준식 시의원이야. 좀 당황스럽다. 이거 어떻게 해야 하니?
“... 후우.”
핸드폰을 돌려주며 도훈이 한숨을 길게 내쉬고 있었다.
-----
다음 날 오후, 시청 시장실.
예산안 조정 요구 논의를 위해 안준식이 시장실을 찾았고, 도훈은 두진과 예산팀장에게 좀 천천히 들어오라 말해 놓고 잠깐 안준식과 둘만의 대화 시간을 가졌다.
“... 그 얘기를 먼저 할까요, 아니면 나중에 할까요?”
“그 얘기 라뇨?”
“왜 모른 척하십니까? 팬카페 가입 신청하신 거요.”
“......”
“전화도 안 받으시더니 모른 척까지 하시고···. 의원님도 의외의 면모가 있으십니다?”
“... 흠. 굳이 시장님과 그 얘기를 해야 하는 이유를 모르겠는데요?”
“... 그 팬카페 제 팬카펩니다.”
“크흠.”
도훈의 시선을 슬그머니 외면하며 헛기침하는 안준식.
“의원님. 굳이 그렇게까지 하실 필요는 없잖습니까?”
“... 시장님께 해 되는 일은 아니잖습니까? 굳이 반대하실 이유가 있습니까?”
“즉각적으로는 제게 해가 되는 일은 아니죠.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장기적으로는 제게 해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아서 이럽니다.”
“... 장기적으로 해가 돼요? 무슨 뜻인지 모르겠습니다.”
어리둥절해 하는 안준식에게 도훈이 차분히 설명을 시작했다.
“의원님은 민의당 소속이고 저는 무소속으로 처지가 달랐고, 시장과 시의원이라는 입장차이도 있었지만 지금껏 별다른 문제 없이 협력해 왔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더 감사하게 생각하게 있고요.”
“시장님만 감사하실 일이 아니죠.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생각하신다니 다시 감사한데요. 어쨌든, 저와 그리 긴밀히 협력하시면서도 의원님은 그간 당내에서 별다른 비판을 받거나 하시는 일이 없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랬습니다.”
“하지만, 이번 일은 사정이 다를 수 있어요.”
“... 제가 욕먹을 거라는 말씀이신가요?”
“당연하죠. 그리고 그냥 욕먹고 끝난다면 모르겠는데, 선거를 앞둔 시기라 의원님의 당내 경쟁자들에게 구실이나 빌미가 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
시의원이 시장의 팬카페 회원이 된다는 것도 문제의 빌미가 될 수 있고, 민의당 소속인 그가 무소속인 도훈을 대놓고 지지한다는 표시로 받아들여져 문제가 될 수도 있다는 걸 굳이 도훈은 언급하지 않았다.
대꾸는 없었지만, 안준식의 표정은 담담했다.
그 정도는 다 생각해 봤고 감내할 만하다는 그런 표정이랄까?
“혹여나 그 때문에 의원님이 다음 선거에 불이익을 받거나 낙선하시면, 제게는 큰 마이너스입니다. 더는 그런 협력관계를 이어가지 못하니까 말입니다.”
“... 하하. 시장님. 마치 본인의 다음 선거에서의 승리를 기정사실인 것처럼 말씀하시네요. 자신 있으세요?”
“그런 거 아닙니다. 그냥 하다 보니 말이 그렇게 나왔네요. 물론, 저도 선거를 해봐야 알겠지요. 뭐, 그럴 수도 있죠. 의원님은 재선되고 저는 떨어지는 그런 상황이요.”
“네. 사람 일은 모르는 거니까요.”
“어쨌든, 저를 위해서나 의원님 본인을 위해서나 팬카페 가입 다시 생각해 주세요.”
진지하기 이를 데 없는 표정으로 말하는 도훈.
안준식이 그런 도훈을 빤히 바라봤고, 도훈도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어제 송지은이 ‘나도 그러고 싶다’는 말을 하긴 했지만, 안준식과 송지은의 판단에는 차이가 있었다.
안준식은 진심으로 도훈이 시장으로 있는 게 대흥시 시민에게 좋은 일이라 생각하고 하는 행동이고, 송지은은 그런 생각 반에 그게 자신에게도 ‘득이 된다’는 생각이 더해진 것이랄까?
도훈으로서는 안준식이나 송지은이나 자신을 좋게 생각해 주는 게 고맙긴 했지만, 두 사람의 언행에 차이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물론, 티를 내지는 않았지만.
“가입 다시 생각해 주세요. 제가 카페 회장님께 말씀드리면 어차피 가입 신청 거절됩니다. 그러니 스스로 철회하시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
도훈의 진지한 말에 안준식이 피식 웃고는 말했다.
“팬카페 회원가입에 영향을 끼치는 건 시장 권한이 아닌 것 같은데요?”
“시장 권한으로 하는 게 아니라 제 팬카페니까 하려는 겁니다. 그리고 카페 회장님도 동의하실 겁니다. 의원님이 가입 신청했다고 당황스러워하셨으니까요. 저와 비슷한 생각을 하시는 거겠죠.”
“... 흐음.”
“철회하시죠. 그게 좋겠습니다.”
도훈이 달래듯 차분히 말하자 담담히 웃고 있던 안준식의 눈빛이 달라졌다.
뭔가 속에서 조용히 끓어오르는 것이 눈이라는 창을 통해 그대로 전해지는 느낌이랄까.
형형하게 눈을 빛내는 안준식과 시선을 마주한 도훈이 일순 움찔할 정도였다.
안준식과 시선을 마주한 도훈의 눈빛도 차츰 강렬해지는 가운데, 시장실에 고요함이 이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