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홧김에 시장 되다-254화 (255/279)

254. 좋은 날 - 2.

“하하하! 안녕하십니까, 시장님? 오늘 참 좋은 날이네요, 하하하! 그렇지 않습니까? 하하하!”

“......”

과장되게 웃는 남자의 입가가 파르르 떨리는 걸 도훈은 놓치지 않았다.

눈이 금방이라도 쏟아질 듯한 흐린 날씨에 찬바람까지 쌩쌩 부는 날씨에 밖에서 도훈이 나오길 기다렸다더니 춥긴 추운 모양이었다.

“나, 날만 좀 덜 추우면 참 좋을 텐데요? 안 그렇습니까?”

“......”

도훈은 호들갑스러운 남자의 말에 일절 대꾸하지 않고 시선을 남자의 옆에 선 익숙한 여자의 얼굴로 옮겼다.

“이, 이건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자격으로···.”

“개인적인 자격이라면서 왜 카메라를 들고 있는 거지?”

“호, 호호. 이건 그냥 개인적인 소장용으로 찍을 생각으로···.”

“순심이 방구 뀌는 소리 하고 있네.”

“......”

심드렁한 표정으로 여자를 침묵시킨 도훈의 시선이 다시 남자를 향했다.

“기자님, 여기서 도대체 뭐 하시는 겁니까?”

“... 하하. 시장님 팬카페 오프라인 모임을 좀 취재할까 싶어서요.”

“우리 회장님이 그러시지 않던가요? 언론 취재는 일체 불허 한다고?”

“들었죠. 들었지만, 너무 욕심이 나는 취재라 이렇게 달려온 거 아니겠습니까?”

눈을 반짝이며 답하는 최승범과 그 옆에 고개를 푹 숙이고 선 도연.

“아무래도 저 녀석이 정보 출처이고, 기자님은 그런 후배의 등을 마구 떠밀어서 여기 오신 것 같은데···.”

“하하! 에이, 그 정도는 아닙니다.”

“아니면 뭐가 아닌가요? 우리 첫 만남 때도 윗사람 모르게 기자님 독단으로 제 동생 등 떠밀어서 나타나셨던 것으로 기억하는데요?”

“하하하! 이번에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팀장이 취재를 허락했거든요.”

“... 그 팀장이 설마···?”

“이야, 역시 눈치가 빠르시군요. 바로 접니다.”

“......”

“일단 취재 욕심에 오긴 왔는데, 솔직히 꼭 성사시켜야겠다는 욕심은 없습니다. 하하하.”

“......”

최승범 기자가 ITS 방송국 사회부 무슨 팀장이 됐다는 얘기는 도연에게서 들은 기억이 있는 도훈이었다.

도훈이 최승범과 도연을 번갈아 빤히 바라봤다.

뭔가 기대 어린 눈빛으로 눈을 반짝거리는 최승범과 이미 포기했다는 듯 고개를 푹 숙인 도연.

최승범은 자신이 안으로 들어오는 것보다는 도연을 들여보내는 게 목표인 듯했다.

도훈의 동생인 것도 있지만, 도연은 팬카페 준회원이질 않은가.

‘... 저것도 연기일 수 있어.’

도연이 제법 능수능란한 기자가 되어 가고 있다는 느낌은 진즉부터 받았던 도훈.

하지만, 아무리 능수능란한 기자라고 해도 오빠인 도훈 앞에서는 번데기 앞 주름잡기였다.

“취재는 허락 못 합니다.”

“... 휴우, 그렇습니까?”

“대신 잠깐 들어와 몸은 녹이고 밥은 먹고 가게 해 드릴 수 있습니다.”

“진짜요?”

“네. 도연이뿐만 아니라 최 기자님도요.”

“... 저, 저도요?”

“네.”

도훈의 말이 예상외였는지, 반색하는 최승범과 좀 놀란 표정인 도연.

“대신, 카메라는 놓고 들어가시고 핸드폰도 꺼내시면 안 됩니다. 여러분이 기자라는 것도 밝히지 마세요. 뭐, 옆에 감시인을 둘 테니까 엉뚱한 생각은 일절 마시고요.”

“... 그, 그럴 리가요.”

“아, 그리고 참가비는 내세요. 밥을 공짜로 드릴 수는 없거든요.”

“물론이죠!”

“흐음. 같은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과 재주껏 대화하시는 것까지 막지는 않겠습니다. 이 정도 조건이면 오늘의 일을 기사화하지 않고 조용히 밥만 먹고 가신다고 약속할 수 있겠습니까?”

“... 기사화하면 안 되는 겁니까?”

“네.”

“... 흐음.”

“싫으면 여기서 그냥 돌아가시···.”

“그렇게 하겠습니다!”

최승범이 얼른 답했고, 도연이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들어가시죠.”

입장을 허락하고 돌아서는 도훈에게 영배가 달라붙었다.

아무리 홍보를 중요시하는 영배라지만, 오늘은 팬카페 회원들과의 첫 만남 자리.

그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자연스러운 만남을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는 걸 영배는 모르지 않았다.

영배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속삭였다.

“야, 어쩌려고 그래?”

“다 방법이 있지. 2번 구역에 자리 남았거든? 거기에 앉혀. 그리고 형이 옆에서 감시 좀 해.”

“... 2번 구역?”

“응.”

식당 내부를 구역으로 나누어 분리해 놨고, 도훈이 앉은 메인 테이블과 가까운 곳에 2번 구역이 있었다.

거기에는 오늘 모임 참가자 중 가장 우대받아야 하는 이들이 앉아 있었다.

“... 와. 그런 수가 있었네.”

“잘 지켜봐. 알았지?”

“물론이지.”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최승범과 도연에게 시선을 주는 영배.

영배와 시선이 마주친 최승범과 도연이 마주 웃는 가운데 앞서 걷는 도훈도 피식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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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시간 30분쯤 뒤.

“자, 아쉽지만 이 자리는 이쯤에서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다 같이 박수!”

“수고하셨습니다!”

짝짝짝짝짝!

모임의 1차 자리가 마무리됐다.

운영진을 뽑고 회원들의 발언이 계속 이어지는 화기애애한 시간이었지만, 술은 가볍게 반주하는 정도로 절제한 자리.

술을 본격적으로 마시는 건 2차부터 하기로 예고해 놔서 1차를 마무리하는 걸 반기는 이들도 있었다.

“자. 너희들은 단 한 명의 예외 없이 모두 귀가야.”

회원들이 일어서는 가운데, 도훈이 2번 구역으로 와서 말했다.

“시장님, 2차 따라가면 안 돼요?”

“당연히 안 되지. 미성년자를 술집에 데리고 가서 어떻게 하라고?”

“히잉! 저 고등학생이라고요. 아빠가 주는 맥주도 마셔본 적이 있는데.”

“집에 가서 아빠한테 달라고 해라. 고딩은 미성년자 아니냐? 턱도 없는 소리 하지 마라.”

아쉬워하는 안준식의 딸 외에 다른 사람들은 선선히 수긍하고 있었다.

2번 구역은 미성년자 회원들과 그들의 보호자에게 배정된 곳이었고, 2차부터 본격적인 술판이 벌어질 것이기에 모두 귀가하도록 진즉 얘기를 해놨었다.

물론, 아쉬운 정도가 아니라 불만 가득한 표정을 한 사람도 있었다.

그것도 둘씩이나.

“시장님, 저희는 2차를 가도 괜···.”

“2번 구역은 단 한 명의 예외도 없이 귀가입니다.”

“......”

“식사 맛있게 하셨고 이야기도 많이 듣고 하셨잖아요? 이쯤에서 만족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훗날을 기약하시죠.”

“......”

말투는 친절했지만, 눈빛은 전혀 그렇지 않은 도훈.

훗날을 기약하라는 말이 ‘후환을 두려워하라’는 뜻으로 들렸다.

최승범과 도연은 그런 도훈의 눈빛에 불만을 숨기지 못하면서도 2차를 쫓아가겠다는 마음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밥은 맛있게 먹었고, 마이크를 든 회원들의 발언이나 분위기 같은 건 충분히 듣고 파악했다.

좀 더 심층적인 인터뷰 같은 걸 하고 싶었지만, 같은 구역에 있는 건 전부 아이들과 보호자들인지라 애초에 시도도 하지 않았다.

옆에 앉은 영배가 눈을 부라리고 있어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기지도 못했고.

“시장님도 많이 발전하셨네요.”

최승범은 어쩜 그렇게 사람을 감쪽같이 속일 수가 있느냐는 뜻으로 한 말이었지만, 도훈은 심드렁하게 답했다.

“당연한 일이죠. 한두 번 당하는 게 아닌데.”

“......”

“자, 일어나시죠.”

도훈은 최승범이 더 말을 이을 기회를 주지 않고 먼저 몸을 일으켰고, 아이들과 보호자들도 뒤를 따랐다.

영배마저 진득한 미소를 보이고 몸을 일으키자 최승범과 도연도 따를 수밖에.

다만, 도연은 분한 표정으로 영배에게 다가가 속삭였다.

“두고 봐요, 오빠.”

“우리 어부인께서 두고 보자면 무섭겠다만, 네가 두고 보자는 말은 전혀 안 무섭다. 하하.”

“......”

“네가 이해해라. 오늘은 첫 모임이라 동생이 아니라 와이프가 기자였어도 취재 허락 안 했을 테니까.”

“... 얄미워 죽겠어요.”

도연이 입을 삐죽이며 투덜거렸지만, 더는 어쩔 수가 없었다.

“계속 응원하겠습니다, 시장님.”

“고맙습니다.”

“또 봬요, 시장님.”

“네. 조심해서 가세요.”

“몸도 챙기세요. 어휴, 얼굴 상하셨어요.”

“하하. 곧 회복될 겁니다.”

1차만 참석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회원들과 일일이 인사하며 악수하는 도훈.

최승범과 도연도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말없이 도훈과 악수를 교환하고 사람들과 함께 멀어져갔다.

그렇게 근심거리 하나가 사라졌지만, 다른 문제가 생겼다.

“... 이거, 술집 하나 가지고 될까요?”

“... 그러게요.”

두진이 남은 회원들을 대충 훑고는 말했고 도훈이 맞장구를 쳤다.

1차를 마치고 반이 넘는 회원들이 돌아갔지만, 2차에도 가겠다는 사람은 얼핏 봐도 마흔 명이 넘어 보였다.

예상보다 훨씬 많은 숫자.

“포차로 가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무리겠죠?”

“그럴 것 같습니다. 손님이 아무도 없다고 해도 이 인원 다 들어갈 장소가 없잖습니까, 거기는.”

“어디 생각나는 곳 없어요?”

두진과 도훈, 혜란이 그렇게 대화하는데 중국관 사장님이 끼어들었다.

“차라리 우리 집으로 갈까?”

“괜찮으시겠어요?”

“첫 주문 말고는 안주 추가하기가 어려울 거라는 점만 빼면 괜찮을 거야. 주방장한테 첫 주문까지는 받아달라고 부탁할 수 있어. 이제 영업 마무리할 시간 다 되어가니까. 아, 음식값이랑 술값은 그대로 받아야 돼. 안 그랬다가는 마누라한테 혼날 거야.”

“그야 물론이죠. 다른 때처럼 추가 요금도 드릴게요.”

“그럼 나야 좋고.”

강정문이 대흥시에 와 중국관에서 늦게까지 술을 마실 때면 도훈은 의례 추가 요금을 냈었기에 문제가 될 건 없었다.

“자, 2차는 중국관에서 하겠습니다. 얼른 가시죠!”

“갑시다!”

날씨가 추웠기에 사람들은 빠른 걸음으로 중국관을 향해 몰려갔고, 이내 심상찮은 표정이었다가 자초지종을 듣고는 활짝 웃는 중국관 여사장님의 환대 속에 자리를 잡고 앉을 수 있었다.

여사장님이 카운터에 앉은 가운데 테이블마다 탕수육에 짬뽕 국물, 군만두 등의 안주를 주문한 뒤 술병이 돌았다.

그러자 사람들이 제각기 손에 소주병을 들고 우르르 도훈이 앉은 테이블로 몰려들었다.

“자, 한잔 받으세요, 시장님.”

“어허, 제 잔부터 받으세요.”

“제 잔도 받으세요.”

“......”

일제히 내밀어 진 빈 술잔을 바라보며 눈만 깜빡이던 도훈이 입을 열었다.

“이러다가 저 오늘 과음으로 저승 가겠습니다.”

“... 하하. 그, 그런가?”

“... 좀 많긴 하네요.”

“저승까지는 몰라도 술자리 시작하자마자 골로 가는 건 확실하겠네.”

“......”

도훈과 마주 앉은 중국관 사장의 말에 사람들이 머쓱해 하자 도훈은 빙긋이 웃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다들 앉으세요. 여러분 잔은 차례차례 받고 제가 먼저 따라드릴 테니까요. 본격적인 술판이라지만 취해도 천천히 취해야지, 시작과 동시에 취하면 안 되잖습니까.”

“그게 좋겠네요.”

어느새 맨 앞에 와 있던 차인호가 얼른 동의했고, 사람들이 제자리로 돌아갔다.

도훈은 테이블마다 돌아다니며 회원들의 잔에 소주를 채워주기 시작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많이 꾸짖어 주세요.”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정중히 인사하며 술을 따르는 도훈.

중국관 홀을 거의 가득 채운 사람들에게 모두 술을 따르고 다시 건배했다.

이번 건배의 선창은 도훈이 아닌 팬카페 기획 담당을 맡은 차인호가 했다.

“구호는 ‘오래오래’로 하겠습니다. 김도훈 시장님, 시장 오래오래 하십시오!”

“오래오래!”

“오래오래~ 에!”

“하하하!”

구호 뒤에 터진 웃음은 ‘오래오래’가 의미하는 게 뭔지를 다들 이해한다는 뜻일 터.

도훈 본인은 오늘 자리에서 내년 선거에 대해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회원들은 이미 도훈을 응원하고 있었다.

“자, 이제는 제 잔 받으세요. 오늘 정말 좋은 날입니다.”

“하하, 네. 감사합니다.”

도훈이 이 테이블, 저 테이블을 돌며 회원들과 술잔을 기울이며 이야기를 이어가던 어느 순간.

“저기 시장님.”

“왜요?”

“잠깐 저 좀 보시죠.”

영배가 살짝 술기운이 오른 얼굴로 다가와 도훈을 불러냈다.

구석으로 도훈을 데리고 간 영배가 도훈에게 속삭였다.

“엥? 진짜?”

“어, 진짜로.”

“......”

말문을 잃고 눈을 깜빡이던 도훈이 푹 한숨을 내쉬고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 좋은 날은 얼어 죽을. 아무래도 날을 잘못 잡았나 봐.’

사람이 없는 내실 복도 쪽으로 걸음을 옮기며 품에서 핸드폰을 꺼내는 도훈의 미간이 점점 더 찌푸려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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