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8. 운명의 그 날 - 3.
새근. 새근.
피곤했는지 어느새 곤히 잠든 세경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도훈.
“곯아떨어질 만도 하지.”
세경을 바라보는 도훈의 눈빛은 온화하고도 따뜻했고 자기도 모르게 입가에 담담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이곳은 세경의 본가에 있는 세경의 방.
식을 마치고 하객들이 모두 떠난 뒤 도훈은 세경과 함께 지금은 세경 어머니가 혼자 지내는 본가에 왔다.
도훈과 세경은 오후 내내 세경의 어머니와 담소를 나누고 저녁을 지어 먹고 맥주까지 가볍게 한잔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결혼식 내내 진주 아들 준수의 품에 안겨 구경만 했던 순심이조차 구석에 마련해 준 자리에서 곤히 잠든 상태.
아무리 간소한 결혼식이었지만, 눕자마자 잠들 정도로 세경이 피곤했을 것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 드디어 나도 여기서 잠을 자보는구나.”
희미한 조명이 밝혀진 세경의 방을 살짝 두리번거리며 도훈이 중얼거렸다.
도청 인근 오피스텔에 사는 세경이 한 달에 두어 번 정도 집에 오기에 그녀의 방은 깔끔하게 유지되고 있었다.
영광스럽게도 도훈은 세경의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그녀만의 ‘성역’에 든 최초의 남자가 된 것이다.
- 안 피곤하냐?
‘... 조금요. 하지만, 견딜만합니다.’
저만치 허공에서 말을 걸어온 조상님에게 답하면서도 도훈의 시선은 여전히 세경에게 머물러 있었다.
- 그렇게 좋냐?
‘... 솔직히 그러네요.’
- 쩝. 계속 좋아야 할 텐데 말이다?
‘... 이제 조상님까지 초를 치려고 하세요? 오늘 저한테 그런 얘기한 게 몇 명이나 되는지 아십니까?’
- 분명 열은 넘었지.
어른들은 덕담만 하고 말았지만, 도훈과 세경의 친구 중 이미 결혼한 이들은 도훈과 세경에게 ‘이제 너희들도 드디어 결혼이라는 탈출할 수 없는 정글에 뛰어들었다’며 놀려댔었다.
- 그 말, 크게 틀린 말은 아니다. 아직 네가 실감을 못 하는 것 같다만.
‘... 뭐, 결혼했다고 매사, 항상 좋을 거라고는 저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당연히 양지가 있으면 음지도 있겠죠. 그래도 지금은 왠지 좋네요. 저도 이런 제가 좀 낯설 정도로요.’
세경을 만나기 전까지 아니 세경을 만난 뒤로도 한참, 심지어 연애를 시작한 뒤로도 도훈은 결혼에 대해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
하겠다던가, 안 하겠다던가, 하고 싶다던가 등의 생각 자체가 없었던 것.
그랬던 자신이 결혼했고 이제는 아내가 된 세경의 잠든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좋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스스로 생각해도 상전벽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 뭐, 좋을 때 많이 좋아해 놔라.
‘그럴 생각입니다, 방해만 하지 않으신다면.’
- 방해? 하, 이 자식이 말하는 것 좀 봐라?
‘... 방해 맞잖습니까.’
- 허허. 나 원. 내가 이런 놈이 뭐가 이쁘다고 선물을 줄 생각을 했담.
‘... 선물이요?’
도훈의 시선이 그제야 조상님을 향했고, 조상님이 피식 웃고는 말을 이었다.
- 왜, 선물이라니까 이제야 관심이 생기냐?
‘... 아닌 게 아니라 그러네요.’
- 허허. 너 생각보다 속물이었구나?
‘속물이라서가 아니라 조상님이 선물이란 걸 언급하신 적이 없으니까 그렇죠.’
귀신인 조상님이 도훈에게 물질적인 선물을 줄 수는 없다.
당연히, 도훈은 수십 년 조상님과 어울리면서도 조상님에게 제사상을 수백 번 넘게 차려 대접한 적은 있어도 선물 같은 걸 받은 적이 없었다.
그래서인지 조상님을 바라보는 도훈의 표정은 좀 안 믿긴다는 그런 종류의 것이었다.
- 자식아. 표정 안 바꿔? 확, 주지 말까 보다.
‘... 뭘 주시려고요?’
- 가만있어 봐, 인마.
조상님이 침대로 다가와 도훈과 세경의 머리 위에 가볍게 손을 휘저었고, 뭔가가 미약하게 반짝이며 떨어져 내리더니 도훈과 세경의 몸 안에 스며들었다.
조상님이 이런 신묘한 광경을 만들어내는 걸 본 적이 없었기에 도훈은 눈을 휘둥그레 크게 떴다.
‘... 뭡니까, 이게?’
- 뭐긴 뭐야. 선물이지.
‘... 그러니까 그 선물이 뭐냔 말입니다.’
질문하는 도훈의 눈빛이 어느새 진지한 것으로 변해 있었기에 조상님도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우고 담담한 미소를 머금었다.
- 내가 생전에 가졌던 능력 중에 네게 도움이 될만한 것, 그리고 네 아내에게 도움이 될만한 것을 전수했다.
‘... 전수요?’
- 그래. 전수.
‘정말 전수 맞습니까? 조상님이 가지고 있던 걸 그냥 주신 게 아니고요? 아니, 그리고 이런 식으로 쉽게 전수가 되는 겁니까?’
- ... 주면 ‘감사합니다’ 하고 조용히 받을 일이지, 무슨 질문이 그렇게 많아?
‘제 질문에 답부터 해 주세요.’
- ......
도훈이 진지함을 넘어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무리 조상님이 귀신이라고는 해도 이런 식으로 해괴한 능력을 보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조상님 귀신에게 이런 능력이 있다는 걸 알지도 못했는데, 왜 지금 그 능력을 쓴단 말인가?
- 허? 그 눈빛 참 무엄하네?
‘... 조상님.’
- 쯧쯧. 네가 뭘 상상하는지 짐작은 가는데 그런 거 아니다. 나 당장 승천하거나 사라지거나 하지 않으니까 눈에서 힘 빼라.
‘......’
- 아, 얼른 힘 안 빼?
‘... 진짭니까?’
- 그래. 당장은···.
조상님의 말에 도훈의 굳은 얼굴이 풀리기는커녕 더 딱딱하게 굳어졌다.
당장은 아니라는 말은, 승천이 됐든 뭐가 됐든 조상님이 자신에게서 떠날 거라는 뜻임을 알아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왠지 지금 당장은 아닌 그 이별은, ‘조만간’이 될 것만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담담한 미소를 머금은 조상님을 뚫어지게 바라보던 도훈이 말을 이었다.
‘... 얼마나 시간이 있는 겁니까?’
- 아마 반년은 넘고 1년은 안 될 거다.
‘... 설마, 제게 그 전수라는 걸 하신 때문인가요?’
- 그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어. 내 능력을 네게 전해주지 않았다고 해서 내가 계속 네 곁에 머무를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 그럼 뭐와 관련이 있는 건데요? 도대체 뭐가 달라졌기에···.’
- 몰라서 물어? 네가 드디어 어른이 됐잖냐.
‘네?’
- 어른이 뭔지 몰라?
‘... 제 나이가 곧 마흔입니다. 어른은 진즉에 됐죠.’
- 쯧쯧쯧.
어리둥절해 하는 도훈에게 혀를 찬 조상님이 차분히 말을 이었다.
- 요즘은 안 그렇지만, 나 살던 때는 혼인을 해야 제대로 된 어른으로 쳐줬지. 열다섯 살 넘어 관례(冠禮) 올리면 성인 취급을 해주긴 했지만, 온전한 건 아니었어. 제대로 어른 대접을 받으려면 혼인을 하고 가정을 이루어야 했다.
‘......’
- 네 어미가 내게 한 간절한 부탁은 네가 어른이 될 때까지 잘 돌봐달라는 거였어.
‘......’
- 이제 혼례를 치름으로써 그 조건이 충족된 거지. 당장 가지 않는 건 네 녀석이 내게서 받은 그 능력을 잘 써먹나 확인하고 싶은 개인적인 욕심에서다.
‘......’
담담한 조상님의 말에도 도훈은 얼굴을 잔뜩 굳히고 말이 없었다.
- 나랑 헤어진다니 서운하냐?
‘... 네.’
- 허허허.
조상님이 흐뭇하다는 듯 웃었다.
때론 툭탁거리기도 하고 예전엔 갈군 적도 많았지만, 도훈과 오래 어울리며 정이 든 것이 사실.
어렸을 때는 그저 ‘네’, ‘네’하며 꼼짝 못 하던 도훈이 머리가 굵어진 뒤로는 좀 반항기 섞인 언행을 보이긴 했지만, 그건 도훈 나름의 친근감의 표현이라는 걸 모르지 않았다.
조상님이 어머니 대신은 되지 못했지만, 도훈의 성장과 인격형성 등 인생 전반에 큰 영향을 끼친 것은 절대 부정할 수 없는 사실.
존경해 마지않는 아버지가 있지만, 아버지에게조차 상의할 수 없는 일이라도 조상님은 다 알고 있었다.
그만큼 조상님 귀신은 도훈에게 중요한 존재가 아닐 수 없었던 것이다.
언제 어떤 상황에서든 의지가 되는 그런 존재라고나 할까?
영원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런 조상님이 곧 곁에 없게 된다고 하니···.
- 뭐가 그리 서운하냐? 귀신인 내가 너도 귀신 될 때까지 함께할 거로 생각한 건 아니지?
‘... 그건 아니죠.’
- 그리고 서운할 것도 없어. 너 요새 나랑 상의할 일도 거의 없잖아? 웬만한 건 다 알아서 고민하고 판단하고 있는데 내가 없다고 아쉬울 게 있어?
- ......
시장이 된 직후에는 조상님의 능력에 많이 의존했다가, 불현듯 뭔가를 깨닫고 스스로 해내고자 더욱 노력하게 됐던 도훈.
그러면서도 점검하는 마음으로 조상님과 나눴던 하루를 평가하는 대화나 반성의 토론도 이제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도훈이 원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조상님이 결과가 어쨌든 스스로 만족했으면 됐지 굳이 자기한테 확인받을 필요가 없다고 말했기 때문이었다.
취임 직후와 비교하면, 분명 도훈은 조상님에게 거의 의지하지 않고 시장의 일을 오롯이 자신의 노력과 직원들의 도움으로 소화하고 있었다.
- 인상 그만 써라. 뭐, 나도 아쉬움이 전혀 없다면 거짓말이겠다만, 더는 후손 안 챙기고 푹 쉴 수 있다니 후련한 마음이 든다. 아닌 말로, 사람이 죽었으면 영면에 들어야지. 귀신이 되어서까지 후손을 챙겨야겠냐? 내가 좀 ‘난 사람’이다만 나도 이제 세속을 벗어날 때가 됐지. 그런데 네가 그렇게 인상 쓰고 있으면 어디 마음 편하게 쉴 수 있겠냐?
‘......’
- 하여간, 넌 안 그래도 될 때도 지나치게 진지하다니까. 아, 당장 사라지는 것도 아니라는데 얼른 얼굴 안 펴?
‘... 알겠습니다.’
도훈이 억지로 굳은 얼굴을 펴고 애써 담담한 표정을 하고는 물었다.
‘... 제게 전수해 주신 능력이라는 건 어떤 겁니까? 아까 보니 제게만 주신 것은 아닌 것 같았습니다만?’
- 이제야 그게 궁금하냐?
‘... 조금요.’
- 쯧쯧쯧.
억지로 담담한 표정을 유지하는 도훈의 모습에 조상님이 마음에 안 든다는 눈빛으로 혀를 차고는 말을 이었다.
- 그게 얼마나 대단한 능력인데, 하는 말이 겨우 ‘조금요’? 허, 이걸 돈 받고 남에게 팔 수만 있으면 인류 최고의 부자가 될 수도 있을 텐데. 그렇게 못 하는 게 정말 아쉽다, 인마.
‘... 그렇게 대단한 겁니까?’
- 당연하지, 자식아!
‘......’
얼마나 대단한 걸 줬기에 저러는 건지 도훈은 감을 못 잡았다.
평소에도 ‘난 체’ 하기 좋아하는 조상님이었으니.
- 내가 너와 세경이에게 준 건 같은 것으로 모두 두 가지야.
‘두 가지나 됩니까?’
- 그래, 인마. 내가 살아있을 적에 얻은 거야. 얻으려고 노력해서 얻은 건 아니고, 어쩌다 보니 생긴 것들이다. 그렇다고 가치가 없다는 건 아니야. 오히려 내게는 그래서 더 가치가 있는 귀한 능력이다.
조상님이 생전의 굴곡지고 우여곡절 많은 삶을 통해 갖게 된 자신의 능력 중 도훈과 세경에게 준 것.
그것은 ‘혜안’과 ‘부동심’이었다.
- 무슨 뜻인지는 알지?
‘네.’
- 있으면 좋을 것 같지?
‘... 네.’
소중한 능력이고 자신에게도 있으면 좋을 것 같은 마음은 들었지만, 솔직히 어느 정도인지 감이 잘 오지 않아 별다른 느낌이 없는 도훈.
조상님은 그런 도훈의 무덤덤한 반응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 네가 지금 실감을 못 해서 반응이 그 모양이구나?
‘... 좀 그러네요.’
미간을 찌푸리고 후손을 노려보던 조상님이 피식 웃고는 말을 이었다.
- 훗! 두고 봐라. 그게 얼마나 대단한 것들인지, 금방 실감하게 될 테니까.
‘......’
- 인마, 나니까 그런 게 있고 너희에게 아낌없이 주는 거야. 자식아. 넌 나 같은 조상님을 둔 걸 영광으로 알아야 해. 시쳇말로 우리나라에 나만큼 이름난 옛날 사람 많지 않다?
‘... 그렇다고 해 두죠.’
- 그렇다고 해 두죠? 이걸 그냥 콱! 야, 아무리 나보다 더 유명한 분들이 있으면 뭐하냐? 나처럼 후손 보살피거나 능력을 전수할 수는 없는데. 이게 나니까 가능한 거지, 유명하다고 아무나 되는 게 아니라고!
으스대는 조상님을 말없이 바라보는 도훈.
이런저런 감정이 뒤섞인 복잡한 눈빛을 한 도훈의 눈동자가 가볍게 흔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