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1. 상반된 아침 풍경.
탁탁탁탁탁!
“루룰~ 루.”
일요일 아침, 도훈의 집 주방에서 들려오는 소리.
“어디 보자. 맛이···.”
후룩.
“된장을 좀 더 넣어야겠네.”
국의 간을 보며 혼잣말한 도훈이 보글보글 끓고 있는 시금치 된장국에 잘게 썬 파를 넣고 된장을 한 숟가락 더 집어넣었다.
“... 음. 이제 좀 그럴싸하네.”
시청에 나가지 않기로 한 날이니 이 시간이면 꿈나라에 있어야 할 도훈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일찌감치 일어나 밥을 새로 하고 국도 새로 끓였으며 계란찜도 만들었다.
“이 정도면 됐고···.”
된장국이 다 끓었음을 확인한 도훈이 가스레인지의 불을 끄고는 조심스럽게 침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 하하. 아직 한밤중이네.”
편안히 잠든 세경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한 도훈이 담담히 웃으며 중얼거렸다.
금요일 늦은 저녁에 도착해 어제 온종일 집에서 먹고 자고 한 세경이었다.
도훈이 나갔다 온 사이에 세탁기도 돌렸고 집 청소도 하긴 했지만, 잠깐 순심이랑 산책하러 나갔던 걸 빼면 계속 집에만 있었다고 했다.
요새 작년에 맡았던 프로젝트를 최종 보완하는 일을 하고 있어서 잔업이 많았다더니, 부족했던 잠을 보충하는 모양이었다.
“좀 더 자게 놔두자.”
방금 만든 음식이 더 맛있다는 건 ‘진리’지만, 부족한 잠을 보충하는 건 그보다 더 중요하다.
특히, 도훈은 잠이 부족한 일상을 너무나도 자주 겪기에 그 중요성을 더 잘 알았다.
침실 문을 닫고 테이블에 앉은 도훈은 가방에서 수첩을 꺼내 어제 첫 선거운동본부 회의 때 논의를 정리한 부분을 펼쳤다.
- 지난 4년간의 ‘김도훈식 시정’에 대한 객관적 평가서를 선거 전에 작성한다.
- 새로 도전하는 초심자처럼, 검소하고 겸손하게.
- 성과를 자랑하는 것보다 그 성과에 기반을 두고 꾸준히 노력하겠다는 마음으로.
- 개발 등의 구체적 공약은 필요한 것만 최소한으로.
- 주민자치, 시민참여 등의 공약을 구호로 그치지 않게 최대한 실체화한다.
1시간 정도 진행됐던 회의의 결론은 그다지 대단한 게 없었다.
도훈이 생각했던 ‘검소하고 겸손한 태도’로 선거운동을 하자는 계획이 다른 이들의 동의를 얻은 이후로는 어렵지 않게 술술 넘어갔다.
물론, 이견이 전혀 없었던 건 아니었다.
- 시장님, 아직 시장님 나이가 젊고 대중에게 신인으로 평가받고 있으니 ‘검소하고 겸손한 태도’를 유지하는 것, 그래서 참신함을 잃지 않으시려는 건 바른 판단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건 현재로써 유효하다는 말이지 계속 그렇지는 않을 수도 있습니다. 시장님이 어디까지 자신의 미래를 그리고 계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능력’을 강조할 필요가 있는 날이 분명 올 겁니다. 그때가 되면, 이게 훗날 시장님의 이미지 중 약점이 될 수도 있습니다.
차인호가 회의 끝에 사족처럼 덧붙인 말이었고, 장본인인 도훈은 물론 다들 공감했다.
‘참신함’은 분명 현재의 도훈에게 강점이겠지만, 그 참신함의 이면에는 ‘서투름’이 있었다.
지금이야 참신한 이미지가 도훈에게 어울리지만, 좀 더 경력이 쌓인 다음에는 능력과 완숙함을 강조해야 할 때가 분명 올 터.
일리가 있는 사족이긴 했지만···.
“... 지금의 나에게는 배부른 소리지.”
무소속인 도훈에게는 6월 선거에서 재선되는 것도 쉽게 생각되지 않았다.
특히나, 지역의 민의당 당원 일부가 ‘시장 후보 전략 공천’을 점점 더 강력하게 요구하는 작금의 대흥시 상황에서는.
“... 이건 순리대로 하면 풀려.”
차인호의 지적을 간과할 생각은 없지만, 검소하고 겸손하게 시장직에 임하면서도 꾸준히 견실한 성과를 낸다면 자연히 문제는 해결된다고 믿는 도훈이었다.
“담배나 한 대 피울까?”
수첩을 내려놓은 도훈이 믹스커피를 타 가지고 집 밖으로 나왔다.
전에는 베란다에서 창문을 열고 담배를 피웠지만, 세경이 집에 오가기 시작한 이후로는 집안에서는 담배를 아예 피우지 않기로 했으니까.
“후우.”
연기를 내뿜고 커피를 한 모금 마신 도훈.
“좋구나.”
해가 얼굴을 내밀었으나 1월 말 아침의 아직 춥기만 한 날씨 속에 찬바람까지 불고 있었는데도 도훈은 싱글거리고 있었다.
- 좋을 것도 참 없다. 겨우 색시 자는 얼굴 구경하고 싱글벙글 이냐?
“... 사소한 것에서 행복을 찾을 수 있어야 더 행복해질 수 있다는 말 모르십니까?”
- 처음 듣는데? 누가 한 말인데?
“... 제가 지금 막 생각한 건데, 누군가 이미 했을 것 같긴 하네요.”
심드렁하게 답하고 있었지만, 도훈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어제 회의가 끝나고 귀가하는 사이 조상님과 화해한 도훈.
며칠간 조상님의 말에 일절 대꾸하지 않았지만, 정말로 화가 나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애초에 조상님은 좋은 마음에서 자신과 세경에게 능력을 전수한 것이었고, 그 능력은 혼자 잘 써먹고 굳이 남에게 보여주지 않으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을 테니까.
조상님과의 대화를 피한 것은 끝을 모르고 이어지는 조상님의 ‘자뻑’ 신공을 피하기 위한 이유가 더 컸달까?
- 그나저나 색시 밥만 챙기지 말고 내 제사상도 좀 신경 써! 언제 차려줄 거야? 네가 괜히 나한테 심통 부리는 바람에 난 기운이 달린단 말이다!
“오늘은 세경 씨 때문에 안 됩니다. 내일 저녁에 차릴게요.”
- 어휴. 엎드려 절받는 것도 정도가 있지 정말! 너 인마! 네 어미가 이걸 보면···.
조상님의 잔소리를 귓등으로 흘리며 집에 들어오니 잠에서 깬 세경이 주방에 서 있었다.
“깼어요?”
“네. 이걸 다 언제 한 거예요?”
일절 꾸미지 않은 부스스한 모습이었지만, 그래서 더 사랑스럽게 느껴지는 세경.
“조금 일찍 일어나서 했어요. 잠이 부족한 것 같아서 그냥 이따가 먹으려고 했는데···.”
“저도 밥 생각이 별로 없었는데, 자꾸 맛있는 냄새가 나잖아요. 그래서 일어났어요.”
“하하. 자는 중에 냄새를 맡았다고요?”
“도훈 씨가 한 요리라 그런지 맡아지던데요?”
“하하하.”
도훈이 기분 좋게 웃는데 세경이 밥을 푸기 시작했다.
“바로 먹게요?”
“네. 갑자기 배고파요.”
“그럼 그냥 앉아요. 내가 차릴 테니까.”
“아니에요. 염치가 있지. 차리는 건 제가 할 테니까 도훈 씨가 그냥 앉아 있어요.”
세경이 밥공기를 식탁으로 나르고는 도훈의 손을 잡아끌어 억지로 앉혔다.
“흠흠~ 흠!”
콧노래를 부르며 상을 차리는 세경을 바라보는 도훈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머금어져 있었다.
- ... 어우! 닭살 돋아.
조상님이 팔을 벅벅 긁으며 투덜거리는 가운데, 신혼부부의 평화로운 일요일 아침이 시작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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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흥시에서 도훈과 세경이 한참 깨를 볶고 있을 무렵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의 한 의원실.
의원실 소파에 앉은 사람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후우. 교활한 사람들 같으니라고.”
심상찮은 말을 하는 사람은 민의당 소속 국회의원인 김용진.
그는 오찬 회동에 참여했다가 방금 모임을 끝내고 의원실로 돌아온 상태였다.
“... 얘기가 잘 안 되신 모양입니다?”
수석보좌관이 묻자 김용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래. 잘 안 됐네.”
“쉽지 않을 거로 예상하셨던 것 아니었습니까?”
“예상은 했지. 그런데 이렇게 뻔뻔하게 나올 줄은 몰랐지.”
김용진이 참여했던 오찬 회동은 6월에 있을 지방선거와 관련한 논의를 위한 것이었다.
대통령 선거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정신없이 바쁘지만, ‘선거’라는 건 중요하지 않은 게 없으니 미리미리 준비해야 하니까.
오늘 회동은 원내 대표의 제안으로 열린 것이지만 공식회동은 아니었다.
향후 공식적인 자리에서 지방선거를 논의하기 이전에 이견 조정을 위해 만들어진 자리였다.
“의원님 의견에 공감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던가요?”
“있긴 있었네. 경북의 원외위원장 한 명뿐이었지만.”
“경북이라···. 현실적 어려움이 빤히 보이는 지역이군요.”
“누가 아니라나.”
회의에 참석한 것은 김용진까지 모두 여섯.
그중 국회의원이 셋이었고, 국회의원이 아닌 원외위원장이 셋이었다.
논의가 쉽지 않을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김용진은 이견이 조율되지 않아서가 아니라 상대의 논리와 태도에 기분이 상해 있었다.
“가능한 모든 지역에 최선의 후보를 공천하는 것이 국정과 민생을 책임지는 여당의 올바른 자세라는 논리는 옳아. 하지만, 지난 총선 때는 그 사람들이 그걸 몰라서 그렇게 자기 계파 사람들을 노골적으로 챙겼던가?”
“... 당연히 아니겠죠. 그때와 지금은 처지가 다를 뿐이겠죠.”
“그러게 말일세. 특히 오정민 의원, 전에는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점점 더 이상하게 변해 가.”
3선인 오정민도 오늘 회의에 참석한 현역 국회의원 중 하나였다.
그가 주장한 것이 바로 ‘가능한 모든 선거구에 절차를 통해 선출된 여당 후보를 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원칙적으로 틀린 말이 아니었지만, 지난 총선 때 투명한 경선도 중요하나 그보다 앞서 당내 비주류를 배려해야 한다고 목청 높여 주장했던 게 바로 오정민임을 생각해 보면, 대통령 후보를 뽑는 당내 경선에서 자신의 계파 수장을 위해 온갖 정략을 기획하고 실행하던 오정민을 생각해 보면, 아무런 표정변화도 없이 그런 주장을 하는 오정민의 모습에 절로 눈살이 찌푸려지는 김용진이었다.
“... 정말로 김도훈 시장을 노리고 그런 주장을 하는 걸까요?”
“... 모르지. 오 의원은 김 시장은커녕 대흥시의 대자도 입에 올리지 않았어.”
서울의 3선 의원이 대한민국에서 세 번째로 작은 지방 소도시의 무소속 시장이 재선되는 걸 막기 위해 ‘모든 지역에 후보를 내야 한다’고 주장한다?
솔직히, 김용진 본인도 믿기지 않는 주장이었다.
오정민과 개인적으로 친한 건 아니었지만, 같은 당의 동료 의원으로서 보기에 오정민은 그가 속한 계파를 지나치게 챙긴다는 걸 제외하면 의원으로서나 정치인으로서 큰 흠이 없는 인물이었다.
다만, 오정민 의원을 잘 지켜보라고 언급한 사람이 문제였다.
- 오정민 의원, 앞으로 주의 깊게 지켜보시게.
- 오정민 의원이요?
- 그래.
- 지난 총선 때 공천 건으로 당 대표님도 유감을 가지셨다는 소문은 들었습니다만, 지사님은 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 자네 지역구의 한 시장 때문일세.
- 시장? 설마 대흥시 김도훈 시장 말씀하시는 겁니까?
강정문 도지사는 더는 설명하지 않고 ‘내 말 가벼이 듣지 말고 다른 사람 모르게 하라’고만 말하고 화제를 돌렸다.
하지만, 오정민은 김용진의 지역구 기초단체장 중 도훈이 아닌 다른 이들과는 일면식조차 없다고 알고 있는 김용진이었다.
당연히, 오정민과 도훈의 연관성을 의심할 수밖에.
아무튼, 강정문이 ‘다른 사람 모르게 하라’고 언급하기도 한 때문에, 이 사실은 김용진과 그의 수석보좌관만이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좀 더 두고 봐야지.”
오정민의 주장이 모든 선거구에 후보를 내자는 것이라면, 김용진의 주장은 검증된 훌륭한 후보와 ‘연대’할 수 있다면 굳이 독자 후보를 강행할 필요가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민의당 내부에서도 모두의 생각이 같은 것이 아니다.
다수파와 소수파로 분류되는 계파가 분명히 있다.
소수파의 영향력이 크지 않은 것은 현 대통령이 과거 당 대표이던 시절, 일부 계파가 정치적 이익 때문에 끊임없이 당 대표를 흔드는 걸 보고 분노해 당원이 된 이들의 숫자가 많고 목소리가 큰 때문이라 할 수 있었다.
‘분열은 곧 자멸’이라는 그 당원들의 문제의식에는 많은 사람이 동의했고, 최소한 대놓고 이에 거스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니까.
아무튼, 민의당 소속이냐 아니냐가 문제가 아니라 지방행정 과정에 연대하고 협력할 수 있느냐 그렇지 않으냐가 더 중요하다는 것이 김용진의 생각이었다.
평당원들이라면 이런 김용진의 생각이 ‘대의’라며 공감하는 이가 많을 테지만, 간부나 국회의원들은 대의에 앞서 ‘득실’을 따지는 게 일상이 된 이들이 아닌가.
다만, 지금은 똘똘 뭉쳐 사력을 다해도 부족한 대선을 코앞에 둔 상황.
생각은 다르다고 해도 그것을 공개적으로 드러낼 시기가 아니었다.
누가 김용진의 고민을 듣는다면 정권 재창출에 목숨을 걸어도 모자랄 시기에 한가한 고민을 한다고 타박할 수도 있었다.
그런 얘기를 들어도 반박할 수 없는 때라는 건 김용진 본인도 인정했고.
“나가서 일 보시게. 당장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 상황은 아니니까.”
“알겠습니다. 의원님도 너무 속 끓이지 마십시오.”
“고맙네.”
수석보좌관이 나갔고, 김용진이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어렵네.”
미간을 잔뜩 찌푸린 김용진이 담담한 도훈의 얼굴을 머릿속에 떠올리며 푸념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