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4.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위해 - 2.
- ... 보수 야권의 선거연대에 대응해 민의당, 진평당, 신민당 등도 얼마 전 선거연대를 결정한 것 시청자 여러분도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그 결정이 우리 지역에서도 현실로 구체화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드립니다. 어제, 대전-충남지역 민주, 진보진영 선거연대가 사흘 전 인사를 겸한 첫 회의에 이어 두 번째 대표 회의를 열었습니다. 충남지역의 민주, 진보진영 선거연대 논의가 본격화하고 있습니다. 이 소식을···.
“... 하하. 잔뜩 굳어 계시네요.”
“그러게요. 좀 웃으시지.”
“저럴 때 억지로 웃으면 더 이상한 표정 나와요. 차라리, 저렇게 담담한 표정이 나아요.”
비서실 TV에 시선을 고정하고 한마디씩 하는 영진, 지연, 영배.
그 옆에서 도훈도 TV 속 지역 뉴스 화면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 ... 여당을 필두로 한 선거연대가 보수 선거연대와 차이가 있다면 정당뿐만 아니라 일정 자격을 갖춘 개인도 포함된다는 겁니다. 그 실례로 어제 충남지역 선거연대 회의에는 무소속인 대흥시 김도훈 시장의 전 비서실장인 송두진 씨가 대리인 자격으로 이 자리에 처음으로 참석했습니다.
“오! 원샷!”
“단독 샷이네.”
화면 가득 두진의 얼굴이 클로즈업됐다.
기자들 카메라 앞에 여러 번 서봤을 정치인들의 접대성 미소와 비교되는 어색한 표정.
그래도 일평생 공직 생활을 했던 관록은 어디 가지 않는다는 게 카메라를 향한 두진의 차분한 눈빛에서 드러나고 있었다.
여권의 선거연대는 참여의 자격을 꼭 ‘정당’이나 ‘세력’으로 규정하지 않음으로써, 기본적인 원칙에 공감하고 선거연대의 규칙과 과정을 지킨다면 정당에 몸담지 않은 무소속 개인도 함께할 수 있다는 여지를 뒀다.
다만, 전국적으로 무소속인 단체장이나 기초, 광역의원은 그 수가 많지 않았다.
게다가 무소속인 이들 대다수는 정당에 속해 있다가 어떤 문제를 일으켜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당적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이들이었다.
때문에, 처음부터 무소속으로 출마해 당선된 데다가 견실하게 시정을 펼치며 인지도를 쌓은 도훈은 최소한 충남지역에서는 주목받는 단체장일 수밖에 없었다.
아무튼, 사흘 전 첫 회의에서 정당 대표들이 만나 도훈에 대한 회의 참여 자격을 인정해 어제 회의에 두진이 처음으로 참석했다.
구경꾼도 아니고 들러리도 아닌, 당당한 논의의 한 주체로 말이다.
“호호. 매일 봤을 때는 잘 몰랐는데, 실장님 얼굴을 TV로 보니까 좀 중후한 느낌이 나는 것 같아요.”
“저도 방금 그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 ... 어제 만남에서는 선거연대의 기본 원칙을 재확인하는 한편, 어떤 기준과 과정을 통해 후보 단일화를 풀어갈 것인지도 논의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중앙당끼리 합의한 선거연대의 기본 원칙이 있지만, 그 원칙을 깨지 않는 선에서 지역별 특성도 반영하기로 했기 때문에 지역마다 선거연대의 양상은 조금씩 다를 것으로 생각됩니다. 충남지역 선거연대 대표단은 이틀 뒤에 다시 회의를 열어 논의를 이어가기로 했습니다. 한편, 같은 날인 어제열린 보수 야권 선거연대 회의에서는 여권의 선거연대에 대한 격렬한 비난이 이어졌습니다.
민주-진보진영 선거연대의 발표 직후부터 야권의 비판을 넘은 비난이 쏟아졌다.
- 여권 선거연대에 보수 야당 격렬한 비난 성명 발표.
- ... 대자당 원내 대표, ‘소신이나 정치적 신념도 버린 채로 오로지 지방권력을 잡기 위해 눈먼 자들의 야합에 불과하다.’
- 민국당 공동대표, 여당의 엇나간 권력독점 욕구가 드디어 드러났다며 국민과 역사 앞에 사죄하라고 요구하는 성명서 발표.
- 보수성향 시민단체들, 여권의 선거연대에 대한 범국민 규탄운동 진행할 것을 공개적으로 천명.
대선을 치른 앙금이 아직 남아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지방선거 승리를 위해 전력을 다하는 만큼 보수 야권의 온, 오프라인 ‘총력전’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었다.
다만, 민주-진보진영의 선거연대와 활발한 움직임으로 인해 그 파급력이 줄어든 것은 사실이었다.
“그래도 여권 선거연대가 어느 정도 파급력이 있어서 다행이네요.”
“그럴 수밖에 없죠. 일단 방송이나 언론사에서 보도를 안 할 수가 없잖습니까. 당연히 야권 선거연대나 직권 남용 비판 기사가 예전만큼 쏟아질 수가 없죠. 그렇지 않은 분들도 많겠지만, 방송이나 신문기사를 챙겨보시는 분들은 그렇게 줄어든 기사의 양이나 새로운 화제에 관심이 쏠리게 되는 게 자연스럽죠.”
도훈의 말에 다들 가만히 고개를 끄덕여 공감을 표했고, 도훈은 시간을 확인하고는 몸을 일으켰다.
“회의 시간 다 됐네요. 갑시다, 실장님.”
그 말에도 반응이 없이 여전히 TV에 정신이 팔린 영배를 향해 도훈이 미간을 찌푸리고 말을 이었다.
“이봐요, 조영배 비서실장님.”
“아, 참. 제가 비서실장이었죠. 하하. 이거 아직 적응되질 않아서···.”
“사퇴날짜 며칠 안 남았으니 적응은 안 해도 되는데 정신줄은 좀 놓지 마요.”
“... 네.”
“나 원. 매번 사람을 두 번씩 부르게 만드니···.”
두진이 사퇴하고 영배가 비서실장이 된 지 열흘 가까운 시간이 흘렀지만, 영배는 아직 자기 직함에 적응을 못 하고 있었다.
이제 후보 등록일이 얼마 남지 않아 아무래도 영배는 비서실장 직함에 적응하기도 전에 사퇴하게 될 듯했다.
“갑시다, 실장님.”
“... 네.”
심드렁한 도훈의 말에 영배가 가만히 입을 비죽이며 뒤를 따랐다.
그런 두 사람의 모습에 영진과 지연이 소리죽여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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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훈이 시의회에 사퇴서를 제출했다.
선거까지 26일이 남은 시점이었다.
원래는 더 늦게 사퇴할 생각이었는데, 선거연대 대표단에서 워낙 성화였고 선본 사람들도 유권자 추천을 받는 것 등 이런저런 준비가 필요하니 조금 날짜를 당길 걸 요구해 그렇게 결정이 됐다.
“정말 퇴임식도 안 하실 겁니까?”
“안 그래도 바쁜 직원들인데, 뻔한 내용의 퇴임사 들으라고 오라 가라 할 필요 없잖습니까.”
“... 그래도···.”
“퇴임 기념사진은 시청 현관에서 간부들과 함께 찍으면 되고 퇴임 인사는 이미 조금 전에 전 직원에게 이메일로 보냈습니다. 그 정도면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사퇴서를 받은 심남진 의장은 아쉬운 표정이었지만 정작 당사자인 도훈은 담담하기 이를 데 없었다.
간부들에게는 어제 간부회의 때 인사했고 전경완 부시장에게 시장 권한대행으로서 잘 부탁한다며 당부도 전했다.
시청 각 부서를 돌며 직원들과 악수라도 한 번씩 할까 생각도 했지만, 하도 민감한 시기이다 보니 이메일로 인사를 대체하기로 한 도훈이었다.
누가 보면, 재선을 자신하는 오만한 행동이라고 할 수도 있겠으나 도훈은 재선 성공 여부와 관계없이 ‘식’까지 여는 건 오버라고 생각했다.
“건투를 빕니다, 시장님.”
“... 의장님도요.”
악수하고 시의회 의장실을 나온 도훈은 시청 청사 현관으로 향했다.
원래는 사진도 굳이 찍을 필요가 있냐는 생각이었지만, 기록에 남기기 위해서라도 사진은 찍어야 한다는 간부들의 강력한 주장을 물리칠 수는 없었다.
영배와 함께 시의회 건물을 나오던 도훈은 시청 현관을 바라보고 눈을 휘둥그레 크게 떴다.
“... 뭐야, 저건?”
“... 그러게.”
간부들이 업무에 지장 받지 않게 하려고 일부러 점심시간에 사퇴서를 제출하고 사진을 찍기로 했다.
도훈과 영배가 보니, 저만치 전경완 부시장을 필두로 시청 각 부서의 부서장들이 다 나와 있는 건 맞았다.
그런데 그 부서장들 말고도 무척 많은 숫자의 사람들이 도훈과 영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 모두가 지난 4년간 낯을 익힌 시청 직원들이었다.
그냥 무척 많은 숫자가 아니고 청사 내 전 직원이 다 모인 듯했다.
“... 뭡니까, 이건?”
장난기 섞인 웃음을 보이는 직원들 맨 앞에 선 지연에게 도훈이 물었고, 지연이 어깨를 으쓱하고는 답했다.
“저도 이렇게 많이 모일 줄은 몰랐어요.”
“......”
“시장님 선거운동하러 가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점심시간에 사진 찍고 가실 거라고 기획감사실 황민아 주무관에게 얘기했는데, 그 얘기가 돌고 돌아 이렇게 모였다네요.”
“......”
도훈이 어이없다는 표정이 됐다.
그냥 사퇴서만 내고 나오기는 서운해서 심남진 의장과 마주 앉아 한 10분 정도 대화를 나눴다.
도훈이 시청에서 나와 시의회로 갈 때는 점심시간 직전이라 현관을 오가는 사람이 거의 없었는데, 단 10분 정도 만에 시청 직원이 전부 몰려나온 듯한 모습이었다.
‘... 화재 훈련을 해도 이렇게 신속하게는 못 모이겠다. 하하.’
속으로 중얼거린 도훈의 시선은 저만치 떨어진 황민아 주무관을 향했다.
“시장님하고 같이 찍은 사진 한 장은 남겨야죠!”
“......”
“점심시간에 모인 거니까 업무에 지장 주는 것도 아니에요. 그러니까 뭐라고 하지 마세요!”
황민아 주무관의 외침에 뒤이어 다른 직원들도 말했다.
“맞습니다. 그냥 가시면 서운해요. 사진 찍고 가세요.”
“맞아요!”
“옳소!”
“그냥 가시면 정이 없는 겁니다! 시장님과 저희가 그 정도는 아니잖습니까!”
“우리에게 사진 찍을 권리를 달라!”
“와아아!”
“......”
잠시 말문을 잃었던 도훈은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이미 모여서 저러고 있는데 그냥 간부들과만 찍겠다고 고집할 수도 없는 노릇이 아닌가.
도훈의 시선이 사진기를 들고 웃고 있는 직원을 향했다.
“... 이 많은 사람이 다 함께 사진 찍을 수 있겠습니까?”
“찍을 수야 있죠. 얼굴을 알아보려면 현미경이 필요할 수는 있겠지만요. 하하하.”
직원이 유쾌하다는 듯 웃자 도훈도 쓰게 웃고는 말을 이었다.
“현미경은 각자 알아서 하는 것으로 하고, 찍죠, 사진.”
“와아아아아!”
도훈의 승낙에 시청 현관 앞 계단에 직원들이 일사불란하게 늘어서기 시작했다.
대흥시 시청 소속 공무원이 3백이 넘는다지만, 각 주민센터 및 외부 사무실에 근무하는 이들이 꽤 된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랄까?
“조금만 더 붙읍시다!”
“어우! 더는 못 붙어!”
“잠깐이니까 참아요!”
“밀착! 밀착!”
“그, 그만 밀어요! 어우, 사진 찍기도 전에 쥐포 되겠네!”
2백에 가까운 인원이 계단에 몸을 구기고 접어가며 서고도 자리가 모자라 일부는 계단 옆 화단에 들어가야 했다.
갑자기 벌어진 시청 공무원들의 소동에 시청을 오가던 일반인들이 핸드폰을 꺼내 촬영하거나 신기하다는 듯 구경했다.
계단 밑에 내려와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도훈이 피식 웃으며 가까이 선 직원들에게 말을 걸었다.
“여러분 점심은 먹고 이러는 겁니까?”
“지금 점심이 문젠가요?”
“맞아요.”
“어우, 좁아! 시장님, 표정관리 해야 하니까 말 시키지 마세요!”
“... 네.”
도훈을 향한 직원들의 태도는 그 어느 때보다 스스럼없었다.
다만, 도훈의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직원이 웃고 있었다.
이게 마지막이 아니라는 걸 확신한다는 듯.
도훈이 이리저리 직원들과 시선을 맞추며 중얼거렸다.
“... 뉴스에 나올 일이네.”
“... 그러게. 그리고 나올 것 같다, 야.”
“... 하하.”
영배가 주변에 늘어서 구경하거나 핸드폰을 촬영하는 시민들을 흘끔 하며 말했다.
그러는 사이, 모든 직원이 자리를 잡고 섰다.
하도 많은 사람이 찍어야 해서 사진기를 든 직원이 한참 뒤로 가 있었다.
“거기, 이상현 계장님. 얼굴 잘리십니다. 왼쪽으로 조금만 더 가세요. 김민우 주무관! 왼쪽 귀만 나와! 안으로 더 들어와! 어, 됐어! 지금 그대로!”
삼각대 위의 카메라를 통해 앵글을 보며 이것저것 지시하던 직원이 드디어 오케이 신호를 보내고는 고개를 들고 두리번거리다 옆에 선 남자에게 다가가 뭐라 속삭였다.
“뭐해! 빨리 찍어!”
“어우, 숨 막혀!”
직원들의 아우성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남자와 속삭이던 지휘관이 대열 맨 앞으로 냉큼 달려왔다.
“뭐하는 거야?”
“저도 찍어야죠!”
한쪽 귀퉁이로 가 냉큼 몸을 밀어 넣은 직원.
도훈을 비롯한 간부들은 그 대열 안으로 몸을 들이밀 엄두를 못 내고 맨 앞줄 한 걸음 앞 땅바닥에 일렬로 정좌 자세로 앉았다.
“자, 숨 참고 자세 잡으세요! 찍어요! 하나, 둘, 셋!”
찰칵!
시민의 손에 의해 찍힌 도훈의 퇴임기념 사진.
컴퓨터 모니터에 띄우고 확대해서 보지 않으면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을 구분하기도 힘든 사진.
직원들 번거롭게 하기 싫다는 시장을 직원들이 ‘정 없다’고 타박해 몸을 구기고 접어가며 찍은 이 한 장의 사진.
대흥시청에 근무하는 거의 모든 직원과 함께 웃는 도훈의 사진과 이 사진을 찍기 위한 즐거운 소동 영상은 영배의 예상처럼 이날 저녁 공중파 뉴스에 등장했다.
그렇게 도훈의 선거운동이 다시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