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홧김에 시장 되다-278화 (외전3) (279/279)

외전 - 3.

- ... 대통령님. 이젠 결정을 내리셔야 합니다.

“......”

- 더는 지체할 시간이 없습니다. 아니, 지체해서는 안 됩니다. 대통령님도 잘 아시질 않습니까.

금빛 무궁화와 봉황 휘장이 새겨진 벽을 배경으로 놓인 집무실 책상에 자리한 침중한 표정의 대통령.

전임자들과 비교해 많이 젊은 미중년 대통령의 귀에 안타까움이 깃든 목소리가 들려왔다.

“... 흐음.”

- 이 문제를 놓고 망설이시는 건 제가 오래 뵈어온 대통령님답지 않은 모습이십니다. 아무리 오랜 친구분이라고 하지만, 지금 그분은 국정에 큰 부담이 되고 있습니다. 본인도 그걸 알기에 사직서를 제출한 것이고요.

“... 그렇지만···.”

- ... 수뢰 혐의에 대한 진위는 향후 수사에서 가려질 겁니다. 죄가 없다면 자연히 의혹을 벗고 떳떳함을 되찾겠지요. 하지만, 그렇지 않은 상태로 세간의 의혹을 한몸에 받는 채로 장관직을 계속 수행할 수는 없습니다. 국민은 논외로 하더라도 당장 해당 부처 공무원들이 장관을 진심으로 따를 마음이 과연 들겠습니까?

말없이 스피커로 전해지는 말을 듣는 미중년 남자의 단정한 미간이 천천히 일그러졌다.

뭔가 단단히 억울하고 화가 난 표정.

작금 사태의 본질이 정치적 반대세력이 장관이 아닌 대통령인 자신에게 타격을 입히려는 것임을 알고 있기에, 끓어오르는 분노를 사력을 다해 참고 있는 그런 표정이었다.

- ... 대통령님.

“......”

대한민국 정치판은 ‘민의와 공익을 더 잘 실현하기 위함’이라는 명분 아래 돌아가는 곳이지만, 무수한 개인과 집단의 이해와 욕망이 활화산의 용암처럼 들끓는 곳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그 정치판에 뛰어든 정치인은 그 끓어오르는 용암 위 허공을 가로지르는 좁고 위태로운 다리를 걷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신세.

목표를 잃거나 제 선 위치를 잠깐이라도 망각하면 그 허술한 다리에서 곧장 용암의 바다로 떨어지기에 십상이었다.

만일 그런 일이 벌어지면, 목숨은 물론이거니와 존재를 증명할 그 어느 것도 남기지 못하고 사라지는 건 당연했다.

때로는 자신의 실수나 잘못이 아니라 타인의 악랄한 계략에 의해 다리에서 떠밀려진 사람이 있기도 했다.

지금은 좀 나아졌다지만, 한때는 그런 계략이 정치판에 흔하게 횡행했던 것도 그리 오래전의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유가 어찌 됐든, 다리에서 떨어진 사람이 세상에서 지워지는 건 마찬가지.

- ... 대통령님. 제발 부탁드립니다.

“......”

스피커 너머에서 상대가 독촉했다.

어감만으로는 독촉보다 차라리 호소에 가까운 말.

묵묵히 그 말을 한참 곱씹던 젊은 대통령.

용암 속에 빠져 정치적 생명을 잃고 사라져 버린 이가 얼마나 많은지 잘 아는 대통령의 분노 가득한 표정이 조금씩 변해 갔다.

분노를 밀어내고 그의 마음을 차지해가는 그 감정은 다름 아닌 고통.

자신과 정부를 지키기 위해, 수십 년 된 친구의 억울한 사정이 해명되길 더는 기다릴 수 없다는 걸 깨달은 그런 고통이었다.

“... 사직서, 수리하세요.”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눈을 감은 미중년 남자의 입이 열리던 순간.

“응애! 응애!”

툭.

갑작스러운 아기 울음소리에 도훈이 마우스를 클릭해 몰입해 보고 있던 동영상을 일시 정지시키고 벌떡 몸을 일으켰다.

“우리 영준이 깼구나.”

“응애! 응애!”

아기 침대로 가 우는 갓난아이를 안아 든 도훈의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했다.

이제 태어난 지 백일이 조금 넘은 갓난아이는 도훈의 아들로 이름은 김영준이었다.

도훈이 결혼한 뒤 ‘손자, 손녀’ 노래를 부르고 ‘할아버지 되고 싶다’며 아들을 재촉하던 도훈의 아버지가 고심 끝에 지었다는 평범한 이름.

“응애! 응애!”

“배고파? 아, 밥 먹을 때가 됐구나.”

침실에서 자는 세경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도훈은 아이를 데리고 서재에서 요즘 유행이라는 드라마를 보고 있었다.

생각보다 드라마가 재미있어서 어느새 아기에게 젖 먹일 시간이 됐다는 것도 모르고 몰입했던 모양이었다.

“잠깐만 기다려. 아빠가 얼른 밥 만들어 줄게.”

아이를 품에 안고 달래며 도훈이 속삭이자 울던 아기가 신기하게도 천천히 울기를 멈췄다.

그러자 도훈은 거실을 나서 소파에 아기를 조심스럽게 뉘어놓고 주방에서 분유를 타기 시작했다.

“루룰~ 루!”

도훈이 흥얼거리며 분유를 타는 동안, 순심이가 소파 위에 올라가더니 아기 옆에 보초라도 서는 듯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분유를 다 탄 도훈이 돌아서 그 모습을 발견하고 피식 웃고는 입을 열었다.

“그렇게 동생이 좋냐, 순심아?”

당연히, 순심이는 아무런 답이 없었고 도훈이 순심이 반대편 아기 옆에 천천히 앉으며 말을 이었다.

“네가 그렇게 행동하니까 준수가 영준이를 질투하지, 인마.”

영준이를 낳은 세경이 친정에서 몸을 어느 정도 회복하고 대흥시의 집으로 온 뒤, 도훈의 지인들이 잠깐 아기 얼굴을 보러 온 적이 있었다.

그 속에는 진주와 진주 아들 준수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준수가 평소처럼 순심이를 불렀을 때 순심이는 영준이 아기 침대 발치에서 꼼짝도 하지 않아 준수를 당황케 했었다.

이제 초등학교 고학년이 된 준수는 그런 순심이의 모습을 이해하는 듯하면서도···.

- 애들은 못 당하겠네. 갓난아기 얄밉다.

이렇게 말해 사람들을 웃게 했었다.

“자, 영준아. 맘마 먹자.”

온도를 재차 확인한 도훈이 영준이 입에 젖병을 물리자, 영준이가 분유를 힘차게 빨기 시작했다.

“아이고 내 새끼. 잘도 먹는다.”

아직 먹고 자고 싸는 게 전부인 아기일 뿐이었지만, 이 녀석의 존재만으로 인생이 행복해진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위이잉.

핸드폰이 울리자 영준이에게 분유를 먹이며 도훈이 메시지를 확인하고는 중얼거렸다.

“... 어김없네.”

- 오늘의 사진은 아직이냐? 얼른 보내, 인마.

메시지를 보낸 사람은 다름 아닌 도훈의 아버지.

손자를 병원의 유리창 너머로 처음 보는 자리에서 눈시울까지 붉혔던 이 분은, 요즘 하루에 한 번씩 도훈에게 아기 사진을 새로 찍어서 보내라고 성화였다.

덕분에, 도훈의 장모도 덩달아 ‘싱싱한’ 외손자 사진을 매일 전해 받고 있었다.

딸깍.

“일어났어요? 더 자도 괜찮은데···.”

“아뇨. 많이 잤어요. 영준이 분유 먹여요?”

“네.”

잠기운이 남은 얼굴로 침실에서 나온 세경이 다가와 도훈을 안더니 얼굴에 쪽 소리 나게 뽀뽀했다.

“배 안 고파요?”

“지금은 괜찮아요. 좀 있다가 같이 점심 먹으면 될 것 같아요.”

“그럼 한두 시간 더 자요. 주 중에는 마음 푹 놓고 잠자기 힘들잖아요.”

“호호, 이미 많이 잤어요.”

세경은 출산예정일 한 달 전부터 휴직계를 내고 일을 쉬고 있었다.

출근 전이나 퇴근 후 도훈이 아기 돌보는 거나 집안일을 많이 하긴 하지만, 출근한 뒤에 아기를 돌보는 건 오롯이 세경이 맡았고 도훈이 일 때문에 퇴근이 늦는 날도 많았다.

그래서 도훈은 주말 출근하지 않는 날에는 육아를 온전히 홀로 담당해 세경이 푹 쉴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었다.

어린 여동생을 키우다시피 했던 경험이 있어서인지, 도훈의 아기 돌보는 실력은 초보 엄마인 세경보다 오히려 윗줄에 있었다.

“아, 세경 씨. 영준이 사진 좀 찍어주세요.”

“아버님이 보내라고 하세요?”

“하하, 네. 하루도 빠짐이 없네요.”

“호호. 좋아서 그러시는 건데요, 뭐.”

세경이 도훈의 핸드폰을 받아들고 두어 걸음 물러섰다.

“자, 웃어요.”

“나도 찍게요?”

“그럼요. 아버님한테 손자만 보여드릴 게 아니고 아들도 잘 있다는 걸 보여드려야죠.”

“... 하하. 굳이···.”

“어허. 빼지 말고 웃어요, 도훈 씨.”

“... 네.”

“하하! 그게 뭐예요, 도훈 씨. 자연스럽게 웃어요.”

영준을 안고 선 도훈이 억지로 웃었고 세경이 좀 더 자연스럽게 웃으라며 몇 번 타박한 뒤 사진을 찍었다.

“하나, 둘, 셋!”

찰칵!

그렇게 도훈, 세경 가족의 행복한 휴일이 이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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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인 월요일 점심시간, 대흥시청 시장 비서실.

“어머? 실장님. 시장님이랑 같이 나가셨잖아요. 왜 혼자 들어오세요?”

“시장님은 자판기 앞에서 커피에 담배 한 대 피우고 사모님이랑 전화 한 통 하고 올라오신답니다. 좀 걸릴 거에요.”

“아, 네. 호호.”

“... 그 미묘한 웃음은 무슨 뜻일까요, 민아 씨?”

“아니 그게···. 시장님이 애처가이신 건 진즉부터 알고 있었는데, 영준이 태어난 뒤로는 더해지신 것 같아서요.”

여직원의 말에 영배가 푸념하듯 말을 이었다.

“그렇죠. 솔직히 저도 경험해봐서 하는 말인데, 첫애 태어난 직후가 와이프가 가장 예뻐 보인답니다. 아기도 아기지만 말이죠.”

“어머, 그래요? 다른 남자들도 그래요?”

“다는 안 그렇겠지만, 그런 사람 좀 될 걸요? 왜요?”

“왜긴 왜에요. 나중에 잘 써먹으려고 그러죠.”

정임, 지연에 이어 비서실에 합류한 황민아는 서른을 갓 넘긴 미혼으로 5년 정도 연애 중이고 결혼까지 생각하는 남자친구가 있었다.

이미 양가 부모님들도 서로 잘 아는 사이라서 식만 올리면 되는 몸인데, 조만간 식을 올리려는지 도훈과 영배의 결혼생활에 관심이 좀 많은 편이었다.

“정작 급한 얘기는 젖혀두고 저러니···. 누구는 결혼 안 했고 애 안 낳아봤나? 눈꼴시어서 원···.”

“급한 얘기라뇨?”

“그런 게 있습니다. 그런데 인호 씨는 어디 갔어요?”

“아, 차 비서관님 부인이 무슨 서류인지 물건인지 가져다준다고 해서 전화 받고 잠깐 나갔어요.”

도훈이 시장에 재선된 지 3년이 살짝 넘었다.

처음엔 비서관 일을 익히느라 정신이 없던 차인호도 이제는 완숙한 모습을 보였다.

단순히 비서관으로서의 일뿐만 아니라 도훈 주변의 핵심 인물의 하나로 당당히 제 역할을 다하고 있었다.

‘... 이놈이 혹시 도지사 선거에 나갈 마음이 없는 건 아니겠지?’

영배가 언급한 ‘급한 얘기’는 다름 아닌 1년 남은 다음 지방선거에서 충남도지사에 도전하느냐 안 하느냐의 얘기였다.

현 도지사인 강정문은 3선에 도전하지 않고 지방선거 1년 뒤에 있을 대선을 목표로 뛸 계획.

때문에, 거의 1년 전부터 강정문이 도훈을 충동질하고 있었는데 그다지 소득이 없자 영배에게 이 얘기가 전해졌다.

강정문이 그 얘기를 전했을 때 ‘민의당에 입당하면 도훈이 후보가 될 가능성이 무척 크다’고 귀띔했고 영배도 그 말에 동의했기에, 영배나 두진 등은 이 논의를 진즉부터 진지하게 하자고 도훈을 재촉해왔다.

하지만, 정작 장본인은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며 얘기를 미루더니 아기와 부인에게 푹 빠진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시장 일에는 전혀 소홀하지 않으니 딱히 잘못은 아니었지만, 도지사에 도전할지 말지의 논의가 어디 보통 중요한 일인가.

‘... 막말로 인구 5만의 대흥시와 200만이 넘는 충청남도의 차인데 말이지.’

수백이 넘는 기초자치단체장과 겨우 스물이 채 안 되는 광역자치단체장의 차이는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을 터.

하지만, 허튼 꿈이라고 할 수가 없는 것이 충남은 물론 전국의 기초단체장 중 도훈만큼 인지도가 높은, 그것도 좋은 쪽으로 잘 알려진 단체장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도훈의 정치적 성향은 분명 진보 쪽이었지만, 정치인의 이미지보다는 시민을 위해 항상 노력하는 개혁적인 살림꾼 시장의 이미지가 강했기에 그는 진보, 중도는 물론이고 일부 보수성향의 사람들로부터도 인정받고 있기도 했다.

때문에, 도훈은 물론이고 그를 믿고 함께 하는 여러 사람의 미래를 바꿀 수도 있는 논의이기에, 다들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는데 당사자가 만사태평의 모습이니 솔직히 김이 빠지는 기분이었다.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논의 일정을 잡아야겠어. 인호 씨랑 둘이서··· 아니, 둘이서도 안 되면 후원회장님을 모셔와서라도 일정을 잡아야지 더는 못 기다린다.’

영배가 그렇게 속으로 다짐하고 있는데 비서실 문이 열리고 도훈이 들어섰다.

철컥.

“... 뭐 좋은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좋아 죽겠다는 듯한 미소를 머금고 들어서는 도훈의 모습에 살짝 빈정이 상한 영배가 심드렁하게 묻자, 도훈이 소리 내어 웃으며 답했다.

“물론이죠! 하하하!”

“... 무슨 좋은 일인지 좀 같이 알죠, 시장님.”

“하하하! 당연하죠! 좋은 일은 나누면 기쁨이 더 커지는 법 아닙니까! 하하하하!”

“......”

연신 웃음을 터뜨리는 도훈의 모습에 영배가 한숨을 내쉬며 말없이 고개를 가로젓는데, 도훈에 뒤이어 차인호가 비서실로 들어섰다.

그런데 매사 침착한 표정을 유지해 별명도 ‘기계 인간 차 씨’인 차인호가 감격한 듯 얼굴이 붉어진 채 눈에 눈물마저 글썽이고 있었다.

“어머, 차 비서관님 무슨 일 있어요? 얼굴이 왜 그래요?”

“... 그, 그게 말이죠.”

황민아 주무관의 질문에 그답지 않게 버벅거리는 차인호.

버벅거리기보다는 뭔가 벅차서 말을 못하겠다는 듯한 표정인 그의 모습에 영배와 황민아가 어리둥절해 하는데 도훈이 대신 입을 열었다.

“조금 전에 청사 앞에서 차 비서관 사모님을 만났거든요.”

“... 그런데요?”

“사모님이 차 비서관에게 한 말 때문에 이러는 겁니다. 아주 기쁜 소식이죠.”

“......”

영배와 황민아가 말없이 차인호를 향해 눈길을 줬고, 차인호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 했대요.”

“네?”

“뭐요?”

황민아와 영배가 차인호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되묻자, 차인호가 가슴에 손을 얹고 두어 번 심호흡하더니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제 와, 와이프가 이, 임신했답니다!”

“어머! 축하드려요!”

“오! 축하해요, 차 비서관!”

황민아와 영배가 동시에 차인호에게 축하인사를 건넸다.

차인호 부부는 진즉부터 아이를 가지려 노력해왔던 것을 알고 있었기에.

“정말 축하드려요! 경사 났네요!”

“고, 고맙습니다.”

황민아가 다시 차인호에게 축하인사를 건네고 뒤이어 말하려던 영배가 뒤늦게 뭔가를 깨달았다.

‘... 아, 이런···.’

도지사 출마 여부 논의에 관해서는 전적으로 영배 편인 차인호가 저런 상태라는 건 오늘도 논의 일정을 잡기 글렀다는 뜻이라는 것을.

“... 추, 축하해요. 차 비서관.”

“네, 감사합니다, 실장님.”

“이럴 게 아니라 우리 이 소식 널리 알리죠. 기쁜 소식은 여러 사람이 알고 축하해줘야죠!”

“하, 하하. 그, 그럴까요?”

“물론이죠!”

황민아가 차인호에게 다가가 호들갑을 떨었고, 도훈은 그런 두 사람을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 오늘도 날 샜네. 아니지. 당분간 날 샜다고 하는 게 맞으려나?’

그런 세 사람을 한눈에 담은 영배가 한숨을 쉬며 속으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렇게 겹경사가 생긴 대흥시장 비서실에 오늘도 훈훈한 공기가 감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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