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한겨울밤의 고백-2화 (2/108)

<-- 로징턴에는 가시가 있었다 -->

“내…동생 카밀리아를요?”

내가 동의를 구하는 눈빛으로 그를 쳐다봤지만 그는 그저 땅을 보며 웃었다. 그리고 내 눈을 또렷히 바라보고 말했다.

“레이디 세실리아 로즈, 좋아합니다.”

“...지금 저랑 장난하자는 건가요?”

“아닙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고 가세요. 그리고 카밀리아는..”

“레이디께 정식으로 청혼할 겁니다.”

하, 헛웃음이 났다. 내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네, 공작님께서 저를 좋아하시는게 사실이든 아니든, 우리 오늘 처음 대화했어요.”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갑자기 발코니에 난입해서 청혼하는 건 좀 로맨틱하지 않으신 것 같네요. 그리고 보다시피 저는 이미 로드 릭포드와 약혼한 사이라는 걸 아셨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당신이 릭포드 경과 결혼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죄송하지만 저는 지금 혼자 있고 싶네요.”

발코니를 나가려던 걸 붙잡은 건 그의 목소리였다.

“고민했습니다.”

“........”

“어떻게 다가가야 할지, 말은 어떻게 시작할지. 접점이 없어서 늘 지켜봐오기만 했습니다.”

“.......”

“그리고 고민했습니다. 우리는....”

“같은 리그에 있는게 아닐테니까요.”

내가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는 머뭇거리다 고개를 두어번 끄덕였다.

“공작님, 공작님의 뜻은 이해하지만 저는 공작님의 청혼이 너무 갑작스럽고, 이해할 수 없습니다. 게다가, 공작님은 저를 제 동생으로 착각하신....”

“카밀리아 로즈 이야기가 아닙니다.”

“어쨌든. 안녕히 계세요. 다시 만날 일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발코니 문을 열었을 때, 익숙한 사람이 와인 잔 두 개를 들고 문 뒤에 있었다. 내 약혼남 앨런 릭포드였다. 눈이 마주치자 그가 당황한 듯, 나와 공작을 번갈아 보았다.

“오, 릭포드 경.”

그의 눈빛은 어쩐지 두려움에 물들어 흐릿했다. 나는 그의 시선을 끌으려 수줍게 미소지었다.

“어서 가요. 밤도 깊었고, 파티는 지루해요.”

“아…….”

“빨리요.”

나는 그의 팔에 내 것을 끼워 넣고 힘을 주어 당겼다. 그는 그대로 한 동안 그 곳에 서있더니, 내가 눈치를 주자 그제야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 그.”

그는 한참동안 말을 더듬더니 멈춰서서 나를 바라보았다. 인적이 한산한 어느 복도였다.

“공작 전하와는 무슨 사이이신지…….”

“오늘 처음 제대로 대화해 보는 걸요. 신경 쓰지 마세요.”

“실례하지만, 제가 방금 듣기로는 전하께서 레이디 로즈를 조, 좋아하신다고…….”

“그게 왜요?”

내가 묻자 그는 눈을 굴렸다.

“문제가 되나요?”

내가 그를 바라보자 그는 한참동안 눈을 굴리며 말을 꺼내지 않았다. 왠지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그는 연신 헛기침을 하더니 나를 바라보았다. 여태껏 보이지 않았던 차가운 눈빛으로.

“사실, 그렇습니다. 예, 문제가 되고말고요.”

“네?”

“레이디 세실리아 로즈.”

내가 그를 바라보자 그는 기어이 제 네 번째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빼냈다.

“죄송하지만 저는 이 일에는 연루되고 싶지 않습니다.”

“네? 그게 갑자기 무슨…….”

“공작께서 레이디를 사랑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그의 목소리가 짐짓 단호했다.

“그리고 오랜 격언에는, 코끼리들이 싸우면 고통 받는 것은 그 밑에 깔린 풀이라고들 하지요. 죄송하지만 레이디, 저는 방금 이 약혼이 공작의 미움을 사는 것보다 제게 더 가치 있는 것인지 의문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제 계산은 명백했지요.”

“그게 무슨…….”

“죄송합니다, 레이디 로즈.”

그가 내 손에 제 약혼반지를 쥐어주었다.

“약혼을 파기하겠습니다.”

“……하, 하지만, 괜찮아요! 공작께서도 진심이 아니셨을 거예요! 어, 어떤 돈 많고 부자에다가 저렇게 잘생긴 사람이 진심으로 저 같은 자작가 레이디를 좋아하시겠어요! 생각해보세요!”

“죄송합니다.”

그는 끝내 뒤돌았다.

“약혼은 없었던 일로 하겠습니다.”

나는 그의 모습이 점처럼 사라질 때까지 그 곳에 가만 서있었다. 상황이 대충 파악이 되었을 때, 눈물이 났다. 나는 내 손을 들어 그 위에 놓인 앨런의 반지를 보았다.

손부채로 화기가 어린 얼굴을 식히려 노력했다. 어떻게 이뤄낸 약혼이었는데. 입이 썼다. 그렇게 공들인 탑이 순식간에 와르르 무너져버리니 앞으로는 어떻게 또 시작을 해야 할지 감히 대책이 서지를 않았다. 이게 다 그 공작의 말도 안 되는 고백 때문이었다.

그리고 앨런. 소시민 남자가 취향이었는데, 내 안목은 너무나도 정확했던 모양이었다. 어떻게 공작의 말 한마디에 약혼같은 중대사를 그렇게 쉽게 깰 수 있는지 모르겠다. 나쁜 사람. 나는 그렇게 속으로 지껄이면서 내 손 위 그의 반지를 가만 바라보았다.

나는 한숨을 쉬었다. 손을 오므리며 차가운 금속의 촉감을 느낀다.

완벽했던 약혼이었는데. 이제 앨런과 함께 로징턴을 관리하며, 동생의 행복을 빌어주기만 하면 되었는데. 그 완벽했던 약혼이 이런 어이없는 이유로 날라갔다.

나는 계단을 내려가 화려한 파티장 안으로 내 자신을 들였다. 춤을 추고 싶어 하는 신사들이 눈길을 보내는 게 느껴졌다. 그 중 가장 용기 있는 사내가 먼저 들이댔다.

“저……. 레이디.”

나는 그를 그저 바라보았다. 공작도, 앨런도 아닌 이름 모를 사내였다.

그저 하룻밤을 보낼 여자를 찾는 듯한 탐욕어린 눈빛과, 정중한 미소. 나는 낯선 사내를 그리 정의내렸다.

그는 내 생각도 모른 채, 그저 보기 좋은 말들만 늘어놓았다.

“이렇게 아름다운 레이디를 눈물짓게 한 신사 그 분은 누구십니까. 자, 레이디. 제가 레이디를 미소짓게 하고 싶습니다. 레이디께 춤을 신청할 영광을 주시겠습니까.”

“죄송합니다.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나는 그를 재빨리 지나쳐 와인잔이 놓인 곳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한숨을 쉬며 와인이나 쉴 새 없이 들이켰다. 와인은 비쌌고, 본전은 뽑자는 마음이었다.

아무도 약혼남에게 어이없는 이유로 뻥 차인 불쌍한 레이디에게 관심을 주지 않았다. 그저 다들 각자의 이유로 바쁘게 움직이며 제 소기의 목적을 좇을 뿐이었다.

그게 이 파티의 전부였다. 나는 파티장 구석, 멀리 떨어진 곳에서 그 환한 빛무리를 관조하듯 바라보았다. 공허했다. 주어진 조건, 삶, 이름 아래 매번 똑같은 파티, 무도회, 춤.

그때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들었다. 발코니였다. 눈이 마주쳐서 몸이 순간 움찔했지만, 나는 지지 않으려는 독기로 그 사내를 가만 바라보았다. 제롬 화이트 공작이었다.

눈이 마주치자 그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시선을 빗겨, 다시 저와 대화하는 사내를 바라보며 웃었다. 그리고 은근히 다시 시선을 흘려 나를 바라보았다.

눈빛이 허공에서 강렬하게 마주쳤다. 나는 부러 쾅 소리나게 와인잔을 내려놓고 동생 카밀리아를 찾았다.

카밀리아는 파티장의 가장자리서 또래의 레이디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취기에 몸이 비틀거렸지만, 독기가 앞섰다. 나는 본능적으로 이 파티장을 가만 나가고 싶었다.

“카밀리아.”

나는 어지러운 머리를 짚으며 말했다. 카밀리아의 아름다운 벽안이 동그랗게 뜨인다.

“언니?”

그녀가 레이디들 사이를 가르고 내게 다가온다. 나는 그녀에게 쓰러지듯 기댔다.

“가자.”

그녀는 염려하는 얼굴로, 다른 말을 하지 않고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실례하겠습니다.”

카밀리아는 정중하게 인사하고는 나를 부축해 후문 쪽으로 걸어갔다. 그녀는 내게 아무 것도 묻지 않았고, 나는 굳이 말하지 않았다.

“언니.”

집으로 돌아가는 마차였다. 나는 마른 입술로 카밀리아를 물끄러미 보았다. 도대체 그는 무슨 생각으로…….

“언니 오늘 너무 예쁘더라. 신사들께서 언니한테 눈을 못 떼더라고. 그냥 내 추측이지만, 특히 제롬 화이트 공작께서 언니를 엄청 바라보셨어. 파티 시작부터, 끝까지.”

멍했다. 깨진 약혼, 카밀, 깨진 약혼, 공작, 깨진 약혼. 나는 그대로 마차에 몸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언니, 그 남자는 안 돼. 내가 왜 안 된다고 하는 이유도 물론 알고 있겠지만.”

“그래. 만날 일 없어.”

그리고 나는 정말 그와 다시 조우할 일이 없다고 분명 믿었다. 없다고.

그리고 정말 그렇게 되었어야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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