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로징턴에는 가시가 있었다 -->
내 '전' 약혼남, 앨런 릭포드를 만나러 응접실에 도착하자마자 그 미묘한 기류가 흘렀다.
나는 의자에 다소곳이 앉아, 이 침묵 속에서 그가 내 안부를 묻기 전에 바로 선수를 쳤다.
“안녕하세요. 그리고 저는 절대 당신이나, 당신 애인한테 사과하러 온 게 아님을 알아주셨으면 좋겠네요.”
“그…….”
“아, 물론 그리고 제발 소모적인 말은 하지 말아주세요.”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걸 손짓으로 막고 말했다.
“전 충분히 비참하니까. 아 네, 그리고 당신이 유감인 건 이미 그 표정에서도 보이네요.”
젠장. 내가 이래서 남자한테 인기가 없나 보다. 그러면서 나는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나는 앨런 릭포드가 무엇을 하러 여기에 있는 지는 대충 알고 있었다.
그건 앨런 릭포드같은 젠틀맨이 그의 레이디를 위해 할법한 일이었다. 대신 사과 받으러 오기. 바바라 마르커스가 시킨 게 아니라 그녀의 아랫도리가 시켰을 수도 있지만. 나는 속으로 작게 웃었다.
실제로 말하지는 말아야지. 앨런의 표정이 진중했다. 그는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손가락에는 바바라의 것과 같이 붉은 사파이어가 박힌 반지가 끼워져 있었으며, 전에는 나를 동료 쯤으로 바라보고 있었다면 이번에는 거의 원수 보듯 하고 있다는 게 달랐다.
“당신은 제 약혼녀를 모욕했습니다.”
그럴 줄 알았다. 내 심란함이 더블이 되었다. 내가 잘못한 것은 맞았다. 하지만 비참한 것은 내가 조금은 짝사랑했던 내 약혼남이 하루 만에 다른 사람의 것이 되어 나를 벌레 보듯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사람이 나를 모욕한 사람을 위해 무려 이곳까지 왔다.
“당신의 약혼녀가 저를 먼저 모욕했어요.”
“그렇다고 다 큰 숙녀가 돼서 애처럼 상스러운 말이나 내뱉었습니까? 모든 숙녀들이 있는 자리에서? 그리고 바바라는 당신을 모욕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좋은 티파티를 열어서 레이디의 기분을 좋게 해주려 했죠. 그게 어떻게 모욕이 되는 겁니까?”
“좋게 해주려고 했다,라니. 바바라 영애가 그렇게 말하던가요?”
“누가 말했는지 중요한 게 아닙니다.”
그의 목소리가 차가웠다.
“중요한 건, 당신이 제 레이디를 모욕했다는 것이지요.”
“....그래요.”
“당신이 아까 말했듯, 저는 당신에게 사과를 부탁하러 온 것이 아닙니다.”
내가 그제서야 그의 갈색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레이디 세실리아 로즈, 당장 바바라 양에게 용서를 구하십시오.”
그의 위협적인 목소리에 나는 거의 떨고 있었다. 그는 개의치 않는 다는 듯 박차듯 일어나 돌아섰다.
“그렇지 않으면 곧 로즈 자작가에게 결투 신청을 보내겠습니다.”
그리고 그가 뒤돌아서, 내 눈을 바라보며.
“제가 알기로 당신은 아버지, 남자형제, 그리고 용병을 고용할만한 돈이나 애인이 없으니.”
‘애인이 없으니’의 억양에 힘이 들어갔다. 망할 놈. 그는 애초에 내가 바바라의 티 파티에서 위대한 뻥을 친 것을 이미 다 알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만일 제 요청에 거부하신다면, 스스로 검을 드셔야 하실 겁니다.”
“저…….”
“대답으로 아니오는 듣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그는 떠났다.
고모 루이지애나 카터께선 사교계에서 유명한 남작부인이셨다. 그리고 고모 루이지애나가 언제 내게 말하길, 얘야 사교계에서 사과라는 말을 함부로 하면 안 된단다.
그건 단순히 실수에 대해서 미안해나, 잘못했어 라고 말하는 게 아니라고. 그냥 사회적으로 그 사람에게 무릎을 꿇고 사교계에서 한 수 접고 들어가겠다는 말이나 마찬가지라고 했다. 그리고 내 전 약혼남은 바바라 마르커스에게 내가 그렇게 하기만을 바라고 있다.
내가 바바라한테 심한 말을 한 것은 맞았지만, 그건 순전히 그녀가 사람들 앞에서 내게 망신을 줬기 때문이었다.
상상해보라. 네 원수가 네 전 약혼남을 주워, 굳이 너를 티파티에 초대한 뒤 사람들 앞에서 제 새 애인을 과시한다면 그건 의도가 분명한 것이 맞았다.
그런 그녀의 죄가 명백한데, 아무 이유 없이 그녀에게 굽히고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바바라 마르커스는 힘있는 자작 영애였다. 가진 땅도 넓었고, 그녀의 뒤에 있는 백작부인들이 많았다. 게다가 머리는 푸들같이 생기긴 했지만 남자들을 끌어당기는 특유의 색기가 있었다. 집안은 말 하면 입 아프다.
그녀가 수백번 돌려 말하길, 근본이 없는 내 집안과는 달리 그녀의 아버지의 직책은 오랫동안 세습되온 노오오블한 지위라고들 한다.
그러니까 애초에 사과할 생각이 없었더라면 이 싸움은 내가 참았어야 했는 거였다. 유서깊은 자작 가문의 영애와, 어디서 굴러먹다 온지 모르겠는 근본모를 어느 여자애. 애초에 싸움이 되지 않는 경기였다.
세상 모든 일이 동화처럼 행복하게 오래오래 끝나지 않는다. 그리고 이번 일도 내 자존심으로 다 망쳐 놓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내 가슴에 철이라도 얹어 놓은 것이나 다름없이 무거웠다. 참았어야 했다. 바바라가 내게 어떤 방식으로 망신을 줬던.
이제 어떡하지. 남자를 빌려달라고 공작에게 갔더니, 그가 거절했다.
그 다음엔 기사를 빌려달라고 공작에게 가면, 그가 또 거절할 것이 틀림없다.
그러고 보니 공작은 항상 제 감정만 중요했다. 저만 좋아하고, 저만 사랑하고, 저만 화내고, 저만 성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현명했다. 딱 귀족인 그의 방식대로였다.
나는 가난한 용병의 딸로 태어나서 그런 귀족스러운 건 딱 몰랐다. 예의차리는 것도, 격식인 것도, 다 모르겠다. 내게 중요한 것은 그저. 내가 놓인 이 상황뿐이었다.
나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화장대 앞에 앉았다. 그러니 그 앞에는 세실리아 로즈가 있었다. 로징턴의 가시라고 사람들이 불러대는, 그 여자.
머리카락은 아버지를 닮아 갈색이고, 두 눈동자도 와인 빛이 조금 섞인 갈색, 그리고 이목구비는 또렷한 편이었지며 인상이 화려하다.
카밀리아처럼 사교계서 미녀로 쳐주는 금발에 벽안, 수수한 미소와는 먼 외양이었다.
공작은,
‘아마도 레이디가 모르시는 당신을 제가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
라고 했다. 내가 보지 못하는 그런 아름다움이 그에게만 보이나? 그 고백이 그저 사내들 사이의 내기였던 걸 인정하기 싫은 건 아니었는지. 나는 한숨을 쉬었다.
어쨌던 그는 트루 러브나, 사랑을 이야기할정도로 부유했고, 잘생겼고, 여유로웠고, 앞으로도 항상 그럴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와는 다르다. 하루 빨리 더 늙기 전에 결혼을 해서, 카밀리아의 결혼을 도와야 했고 로징턴의 기반도 더 튼튼히 해야 했다. 하여튼 가난한 자작가 장녀랑, 공작은 사회적으로 해야 할 일이 달랐다.
창가에는 비가 오고 있었다. 아주 쏟아질 듯 내리고 있었다. 나는 공작저에 다녀오느라고 온 오전과 오후를 보냈고, 이미 지쳐있었다.
하지만 그제서야 불현듯 정신이 들었다. 쏟아지는 비가 내 머릿속을 싹 씻어 내리기라도 한 듯이.
우리는 달랐다. 공작과, 나는. 그럼에도 그가 나를 좋아하던 말던은 애초에 처음부터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나는 내 실수에서 항상 배운다. 아직 아는 것이 적지만 그렇게 지켜온 자작가였고, 동생이었다. 나는 이미 한번 내 말에 걸려넘어졌다. 바바라 마르커스의 도발에 응함으로서, 그리고 이렇게 고통받지만.
이제 사실이던 아니던, 우리 고귀하신 공작님께서.
……제가 뱉은 말에 걸려 넘어질 차례가 되셨겠다.
그는 나를 사랑한다고 했다. 어떤 사람이 제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기사 한 명 못 빌려주겠는가? 그의 말이 사실이건 거짓이건, 나는.
마치 그래, 근본없는 자작가 레이디의 방식으로 그가 뱉은 말을 이용할 준비가 되어있었다.
이틀이 지났고, 나는 바바라 마르커스에게 사과를 하지 않았다.
바바라 마르커스가 사과를 하면 받아줄 의향이 있다는 듯한 말을 수백번 돌려 말한 편지도 그동안 집에 왔지만 화로에 버렸다.
루이지애나 고모가 언젠간, 한걸음 물러서면 다섯 걸음 더 물러서게 되있다는 말을 해 준적이 있다.
그리고 나는 바바라 마르커스에게 그 한 걸음을 양보할 생각이 없었다.
나는 다시, 공작의 집무실에 와 있었다. 그는 여전히 바빴다. 내가 알기론, 젊은 공작인 그는 처리할 서류가 국왕보다 더 많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럴 법도 했다.
저번과는 다르게 나는 내 자신을 최대한 꾸며보았다. 내가 화장을 더럽게 못해서 보다 못한 카밀이 도왔다.
그리고 다시, 현실이었다.
“오랜만입니다.”
이번에 말을 시작한 쪽은 물론, 우리 공작 전하셨다.
“마지막으로 본지 이틀밖에 안 지났어요.”
“제게는 충분히 긴 시간이었습니다.”
그가 웃었다. 그의 웃음은 항상 속내를 가리는 가면 같아서 더 그를 모르게 한다.
“이번엔 무슨 용건이십니까.”
“기사가 필요해요.”
“역시, 필요할 때만 저를 찾으시군요.”
“저는 바바라 마르커스처럼 웃으면서 살랑거리는 건 못하니까요. 기사가 필요해요.”
그의 웃음이 멈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