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로징턴에는 가시가 있었다 -->
“안녕 바바라.”
나는 이 상황에서 철저한 약자였다.
“네 애인의 뜨거운 안부인사정도는 잘 받았어.”
“아, 앨런이 내 명예를 위해 네게 결투 신청을 보낸 거 말이지? 잘 받았다니 다행이다.”
그녀는 내 어깨를 치고 지나가며 말했다.
“그럼, 축제 재밌게 즐겨.”
나는 그 자리에 꼿꼿이 서 있었다. 문득 카밀리아를 파티에 데려오지 않은 게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의외의 복병은 있었다.
“당하고만 있다니, 정말 정말 실망인데?”
아그니스 카터, 루이지애나 고모의 딸이자 내 사촌이었다. 그녀는 어둠처럼 새까만 사틴 드레스를 입고 있었는데, 그녀의 까만 머리카락과 금빛 눈동자가 도드라졌다.
아그니스는 유능한 기사이자, 정말 아름다운 레이디이기도 했다.
“애초에 네가 기사가 필요했다면, 난 너를 위해 기꺼이 싸웠을 거야.”
“고마워, 아그니스.”
물론 앨런이 결투를 신청했을 때, 그녀를 생각하지 않았던 건 아니었다. 그녀는 유능한 기사이자, 내 가족이니까. 그럼에도 가족이어서, 나는 그녀를 잃고 싶지 않았다. 결투에서 진 기사의 댓가는 목숨이다. 나는 아그니스가 져서 죽을 거라는 1%의 가능성도 만들고 싶지 않았다.
“대단한 허풍을 치셨다며? 바바라한테 죽여주는 애인이 있다고 말했다며.”
“사실 완전 허풍은 아니야.”
“아?”
“나를 위해 싸워줄 기사님이 곧 오고 있으니까.”
그녀는 입을 쭉 찢어 시원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잘됐네. 유능한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아, 분명 그럴 거야.”
나는 으쓱했다.
“여기는 왠일이야, 아그니스?”
“엄마를 조르고, 졸라 초대장을 겨우 받아냈지 뭐야? 바바라 대 세실리아라. 내가 분명 옆에서 도와줘야 한다는 생각이 직감적으로 들었지. 친구 뒀다 뭐에 쓰게?”
“고마워. 혹시 여기 숀도 있니?”
“아. 네 바로 뒤에 오네.”
나는 순간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숀 킹. 붉은 머리에, 붉은 눈을 한 주근깨 사내가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그 큰 손을 흔들었다.
“내 사랑 세실리아.”
그는 내가 평민 소녀였을 때 동네에서 나를 놀리고 도망가던 순박한 시골 소년이었다. 그는 전사한 제 아버지를 대신하여 기사 작위와 작은 영토를 받아 현재 준남작 쯤 되는 인사이다.
입에서는 몇 년은 찌든 맥주 냄새가 나고, 턱수염은 다듬지 않아서 거칠었다. 다혈질이라서 화가 나면 누구든 꼭 불구로 만들고서야 싸움이 끝난다는 게 그의 특징이었다.
내가 성인이 되자, 그는 내게 고백했다. 나는 그를 친구로밖에 생각한 적이 없어서 거절했지만, 그는 끈질겼다.
“역시 서방님 만나니까, 부끄럽긴 한 가 보구나? 세시일, 얼굴 좀 보자니까.”
“숀.”
“네 애인님한테 어서 안기지 않고 뭐 하니?”
“애인?”
“그럼, 네 애인이 어디에 있겠냐? 그러니까 이 숀님을 두고 말하는 게 당연하다, 이거 아닌가? 내가 그 앨런이라는 놈을 부숴 줄 테니 어서 안겨.”
그가 늠름하게 말해보았다. 내가 피식 웃으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숀, 몇 번을 말했지만 넌 내 취향이 아니야. 게다가, 넌 그냥 친구라니까.”
“두 번은 레이디의 미덕이지만, 말야. 나도 인내에 한계가 있으니까 이만 결혼해 줘.”
“됐네요. 세상에 남자들 다 얼어 죽어도 너는 아니야.”
“쳇.”
그는 순박하게 제 머리를 긁적였다.
“야. 저 여자가 너 괴롭히냐?”
그의 손가락이 바바라를 가리켰다.
“그런데요. 어쩌시게?”
“뭐……. 내가 도울 건 없냐?”
“아이고, 됐네요. 가서 다른 여자나 알아봐.”
그가 고개를 두어번 끄덕이고는 털레털레 멀어졌다.
나는 난간에 기댔다. 그때 주위가 소란스러웠다. 나는 천천히 주위를 돌아보았다. 시선이 모두 문가에 쏠려 있었다. 그래, 아주 익숙한 얼굴의 인사가 걸어들어오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그가 비웃듯이 안경 뒤로 시리게 웃어 보인다.
앨런 릭포드. 내 전 약혼남이자, 현재 바바라의 약혼남 되시는 분. 바바라가 빠른 걸음으로 걸어와, 그의 목에 팔을 두르고 진하게 키스했다. 윽. 그것도 내 앞에서.
“가만히 있어 봐. 프리츠를 데려올게.”
아그니스는 서둘러 자리를 떴다. 프리츠라고 하면 아그니스의 오빠이자, 내 사촌 되시는 분이었다.
나는 멍청하게 그 자리에 가만 서있을 수밖에 없었다.
공작님은 왜 안 오시는 걸까. 나는 발만 동동 굴렀다. 다른 일은 몰라도, 결투만큼은. 앨런이 결투만큼은 오늘 밤 포기하게 만들어야 했다. 마음이 급했다.
앨런과 바바라는 똑같은 비웃음을 얼굴에 걸고 나를 지나쳐 멀어졌다. 나는 그 모습을 가만히 보고만 있어야 한다는 게 그 자체로 스트레스였다.
프리츠 카터, 아그니스의 오빠가 그 뒤로 아그니스와 함께 나타났다. 그는 아그니스와 똑같이 까만 머리카락에, 금빛 눈동자를 하고 있었는데 의지에 무관하게 끌려왔는지 얼굴에 어린 불만이 여간 대단한 게 아니었다.
“오빠, 빨리 세실리아랑 춤추고 와.”
“아그니스. 나 얘기하고 있었잖아.”
그러다가 그가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안녕, 세실리아.”
“프리츠.”
“미안. 이안 클레멘츠님과 같은 저명한 학자와 이야기할 기회가 또 드물어서. 너무 마음 쓰지 마. 어차피 그냥 대화였어.”
그는 내게 손을 내밀었다.
“오랜만이네. 춤추러 갈래?”
“됐어요.”
나는 그들에게서 뒤돌아 걸어나갔다. 내 꼴이 볼만 했다. 괜히 기대에 부풀어서는. 나는 한숨을 쉬며 난간 아래를 바라보았다. 바바라와 앨런은 행복한 커플인 것 같아 보였다.
그때 둔탁한 봉이 바닥을 강하게 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제롬 화이트 공작 전하께서 입장하십니다.”
순간 악기의 현이 삐걱이는 소리를 내며 음악이 멈췄다.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잦아들었다. 시선이 일제히 한 곳으로 쏠리고 있었다.
그는 아직 바깥의 차가운 공기가 묻은 까만 코트에, 정장을 단정하게 차려입은 차림이었다. 그가 만들어내는 분위기로 보았을 때, 그는 분명 이 곳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좀 좋은 쪽으로 말이다. 그는 고개를 돌려 누군가를 찾고 있었다. 시선이 마주치자 그가 단정하게 웃어보였다.
깔끔한 구두소리와 함께, 샘슨 부인이 재빠르게 걸음을 내달려 그에게로 향했다. 그녀의 까만 드레스에 달린 레이스가 그녀의 발걸음마치 빠른 물결처럼 흔들렸다.
“이, 이런 누추한 곳에 공작 전하께서 무, 무슨 일로.”
그녀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연회장 전체가 그의 말을 기다리는 듯 고요했다. 그는 태양처럼 환하게 미소지어보이며, 나를 바라보았다.
“내 파트너를 찾으러 왔습니다.”
“파, 파트너라니. 제 딸 레이첼 샘슨이 그러고 보니…….”
“멀리 가지 않아도 되겠습니다.”
그가 천천히 걸어 내게 다가왔다.
“제가 간절하게 찾던 제 파트너가 여기 있는데, 말입니다.”
그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모든 사람들이 그 순간 헉, 하고 숨을 들이마셨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레이디. 제가 감히 레이디의 파트너가 되고자 합니다.”
그가 와 주었다. 나는 주체할 수 없는 기쁨을 억누르고 말했다.
“늦어요. 다음부터는 조심하세요.”
그의 손 위에 내 것을 올려놓았다. 그의 미소가 더 밝아졌다.
“레이디의 너그러운 이해에 감사드립니다. 가시죠.”
나는 그의 에스코트를 받아, 모두의 시선을 즐기며 층계 아래로 내려갔다. 공작이 그 때, 악단들을 보며 말하길.
“훌륭한 밤입니다. 이런 무도회에 음악이 없어서야 되겠습니까.”
그들이 허둥지둥 다시 악기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지금, 그는 정말로 완벽한 내 왕자님이었다. 조심스러운 손이 내 허리를 잡고, 내 한 손을 잡아 올렸다.
나는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바바라의 표정이 정말로 궁금했다. 그의 레몬그라스 향기, 그리고 말끔한 섬유 냄새가 아주 완벽했다. 그는 이 세상이 내게 준 선물과도 같았다.
“누가 당신을 로징턴의 가시라고 하는 지 궁금하군요, 그 노란 드레스를 입고 있는 모습이 한 송이 장미를 닮아서 넋을 잃고 바라봤습니다.”
“그런 아첨이라면 수십년을 들어도 지루하지 않을 거예요.”
“그럼 제가 부디 그렇게 하게 도와주십시오.”
그가 열렬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오늘 밤 하는 거 봐서요.”
나는 부러 유혹적인 미소를 지었다. 그의 귓불이 조금 빨개졌다. 먹힌 건가? 그의 목울대가 그 말 이후로 긴장했는지, 가벼이 울렁였다.
나는 그의 리드에 따라 자리에서 빙글 돌아 다시 그의 손을 잡았다. 그때 내 드레스가 물결처럼 예쁘게 돌았는데, 그 순간이 짜릿했다.
아, 당신은 내 인생에 왜 이렇게 늦게 나타나고야 만 걸까?
“무슨 생각 합니까?”
그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만을.
“글쎄. 멋진 남자 생각이요?”
“저는 세실리아가 다른 사람 생각 하는 거 싫습니다.”
“당신 생각.”
내가 그의 볼에 입을 가벼이 맞췄다. 그는 낮게 한숨을 쉬었다.
“고마워요, 와 줘서.”
“레이디가 저를 필요로 해 주셔서 좋습니다.”
그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진중한 눈빛이었다. 나는 그 순간에 가슴이 조금 찔렸다. 어쩌면 이 사람이 알고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그를 사랑하지 않는 것을. 그저 그가 필요해서 그와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을.
사실, 이 사람은 내게 현실이라기보다는 환상에 가까웠다. 나를 딱하게 지켜보시던 미와 사랑의 여신께서 그녀의 아들을 보내 그의 가슴에 사랑의 화살을 꽂아 넣은 것만 같았다.
그가 내게 얼마나 미쳐있건, 이 현실이 너무나도 거짓말 같아서 곧 흩어질 모래를 바라보듯 지금을 너무 믿고 싶지 않았다.
나는 그의 진중한 태도를 무시하고 애써 쾌활하게 웃었다.
“음, 네. 그래요. 와인이나 마시죠.”
마침 음악이 끝났다. 나는 그의 손을 놓고 뒤돌았다. 그가 따라오지 않자, 내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그저 나를 슬픈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그가 웃어보인다. 내가 답례로 미소를 돌려주고는 다시 와인을 향해 걸어갔다. 느리게 뒤따르는 걸음걸이가 들렸다.
와인을 집어들었을 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세실리아 로즈.”
고개를 돌려보니 바바라 마르커스가 앨런을 대동하고 내게 걸어오고 있었다.
“너, 지금 제정신이야? 꼭 그래야 했어?”
“무슨 소리야?”
“네가 공작한테 몸까지 팔면서 그랬으리라고는 몰랐는데. 정말 대단하다.”
속에서 뭔가가 울컥 치밀어올랐다. 바바라를 둘러싸고 있는 여자들이 비웃음의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공작께서 나를 사랑한다고 하셨어.”
그러자 바바라가 입꼬리 한 쪽을 들어 올리며 되려 대꾸했다.
“공작이 미쳤다고 너 같은 여자를 좋아하니?”
“그렇다는데.”
“거짓말!”
“내가 그 날 말했잖아. 죽여주는 애인 있다고.”
그때 뒤를 돌아보니 제롬 화이트 공작이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바바라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눈을 두어 번 깜박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공작께서, 세실리아 대신으로 검을 들겠다는 게 사실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