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로징턴에는 가시가 있었다 -->
“왜 이렇게 늦으시나 궁금하던 참이었습니다.”
그는 부드럽게 미소지어보였다. 그리고 사람들이 다 보는 앞에서 나를 꼭 껴안아 주었다. 탄식들이 터져나왔다. 나는 그저 아무 말 없이 그에게 안겨있었다.
“그냥, 바바라랑 할 이야기가 있었어요.”
“그렇군요. 더 추시겠습니까, 내 레이디?”
“아니요.”
나는 깔끔히 답했다.
“가요, 이젠. 카밀리아가 기다리니까.”
“아, 당신 동생 말입니까?”
“네.”
나는 그저 답했다. 그는 무언가 더를 바라는 표정이었지만, 내 얼굴을 보고 곧 수긍했다.
나는 사실 이 곳에 더 이상 있을 이유가 없었다. 앨런이 결투를 포기하게 하겠다는 목표는 이미 달성했다.
“그럼, 갑시다.”
“에스코트 해주시겠어요?”
“기꺼이.”
나는 그의 팔짱을 끼고 유유히 무도회장을 나섰다.
아쉽다는 사람들의 웅성임이 들려왔다. 하위 귀족으로서 제롬 공작을 보기가 쉬운 일이 아닌데, 그들은 성미 급한 나 때문에 분명 좋은 기회를 놓쳤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내가 우선이었다. 그래서 그들에게 제롬을 더 구경시켜주기보다는 집에 가고 싶었다. 그리고 나는 그렇게 했다.
빛으로 가득 차 있던 샘슨 부인의 성을 나서니 바깥은 온통 칠흑같은 어둠이었다. 그 어둠 속에서, 나는 묵묵히 제롬의 곁을 지켜 그와 마차로 향했다.
“레이디, 부디.”
나는 그의 도움을 받아 그의 마차에 탔다. 그리고 마냥 창 밖을 보며 생각에 잠겨있었다.
“정말 훌륭한 무도회이지 않았습니까.”
“네. 그러게요.”
정적.
“바바라 마르커스가 당신께 끔찍한 일을 저지르게 되어 유감입니다. 혹시 제가 당신께 줄 만한 도움이 있다면 부디 말씀해 주십시오. 제 힘이 닿는 데까지는 노력해보겠습니다.”
“음, 아녜요. 그러지 마요.”
또 정적.
“굳이 로즈블룸에 급한 일이 없다면, 제 저택에서 밤을 보내고 가는 건 어떻습니까? 좋은 와인도 있고, 음식도 있고, 그리고 노을은 없다마는…….”
그가 웃었다. 나는 힐끔 그를 바라보았다. 자고 가라고. 나는 가만 생각에 잠겼다.
그래, 뭐 그와 같은 잘생기고 유능한 사람이라면 나쁘지 않았다. 정말, 미안할 정도로 그는 내게 좋은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사람이 나를 원하고 있었다. 지금.
끝을 알았다. 그래서 응해서는 안되었지만 그래도 나름 아쉬움은 있어서 이 순간을 놓고 싶지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생각했다. 딱, 오늘 밤 까지만. 오늘 밤 까지만 그와 함께 있고 그 다음에는 그를 확실히 끊어낼 것이다.
“그거 좋네요.”
“예?”
“가자고요. 저택으로.”
그가 미소를 지었다. 나는 가만 창밖을 바라보다가 물었다.
“있잖아요, 공작 전하.”
“말씀하십시오.”
“그 무도회장에 있는 어떤 여자든, 당신이 말만 했다면 기꺼이 당신 따라갔을 거예요.”
“그 사람들은 제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렇겠죠.”
“세실리아.”
나는 그를 바라보았다. 뭐지? 왜 기뻐하는 건데. 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려있었다.
“네?”
“제가 다른 레이디들과 이야기했던 것이 세실리아의 기분을 나쁘게 했다면 다음부터는 조심하도록 하겠습니다.”
저 사람은 분명 내가 질투하는 줄 아나봐. 그건 아니었는데.
“아뇨, 음. 괜찮아요. 그런 건 아니고. 그냥.”
“예.”
“왜, 저예요?”
“말해드렸지 않습니까.”
그는 나를 바라보았다.
“진심으로 좋아하고 있습니다, 레이디.”
그 눈빛이 너무나도 진지해서, 나는 그대로 굳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래요. 좋아해줘서 고마워요.”
그가 원하는 답은 아니었는지, 그의 미소가 조금 옅어졌지만 나는 개의치 않았다. 그대로 마차는 한동안 정적 속에서 굴러갔다. 하지만 나도, 그도 서로의 감정 속에 매몰되어 굳이 서로에게 말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달콤한 잠에 들어 있었다가, 정신이 돌아왔다. 그리고 나는 내가 무언가 단단한 것에 기대고 있었다는 걸 느꼈다. 마차 벽면인가 싶어서 눈을 떠 보니 나를 바라보는 그와 눈이 마주쳤다.
“일어나셨습니까.”
아, 내가 여태껏 그 사람에게 기대어 잠을 자고 있었구나. 원래 내 반대편에 앉았던 사람이었는데, 그는 내가 잠에 든 뒤로부터 내 옆에 앉아 있었던 모양이다.
나는 눈을 여러 차례 깜박이고는 그에게 기대어 다시 눈을 감았다. 그냥 정신이 몽롱한 게, 그러고 있고 싶었다. 그러지 말아야 하는 거였는데도, 그냥 그러고 싶었다. 내 이기심이었다.
“더 잘래요.”
“거의 다 왔습니다.”
“그럼 나 안고 내려줘요.”
내 머리를 넘기는 그의 손을 느꼈다.
“너무 무거우려나?”
“당신은 깃털처럼 가볍습니다, 나의 레이디.”
나는 작게 웃고는 다시 쏟아지는 잠에 나를 맡겼다.
“공작 전하의 마차시다! 다리를 내려라!”
멀리서 병사들의 외침 소리가 들려온다. 도르래 내려가는 소리와 함께, 쿵. 하고 무언가가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아마 병사들이 성 문을 열어 다리를 놓는 소리일 것이다.
“진짜 거의 다 왔네요.”
내가 몸을 추스르고 일어나자 공작이 나를 바라보았다.
“아, 더 주무셔도 됩니다.”
“내가 깨어 있으면 공주님 안기는 포기해야 되나요?”
그가 웃었다.
“레이디가 편하신 대로 하십시오.”
“그래요. 난 지금부터 자는 척 할게요. 그게 레이디의 체통에 맞는 것 같아서. 공작님께서는 잠자는 레이디를 업고 들어가는 백마 탄 왕자님 해 주세요.”
“기꺼이 그러겠습니다.”
나는 그대로 그의 팔을 꼭 껴안고 눈을 감았다. 순간 그가 움찔하는 게 느껴져 눈을 떠 보니 그의 귓불이 조금 붉어져 있었다. 나는 피식 웃고서는 다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의 편안한 온기 덕에, 나는 마술같이 잠에 들어버렸다.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는 그가 나를 안아들고 어딘가로 걸어가고 있었을 때였다.
나는 그대로 숨을 죽이고 자는 척을 했다. 곧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폭신한 침대의 시트가 느껴졌다. 그는 그대로 내게 이불을 덮어 주고, 뒤돌아 나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한참이 지난 뒤에서야 나는 간신히 눈을 떠 보았다. 이곳은 그의 방이 아닌 게, 저번에 내가 이곳에 왔을 때 밤을 보낸 곳이 아니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그의 손님 방 중 하나인 것 같았다. 다시 발걸음 소리가 들려서 나는 다시 눈을 빠르게 감고 자는 척을 했다. 목소리가 가까워졌다. 문이 열렸다.
“춥지 않도록 장작을 떼어 놓고, 레이디의 복식이 불편할 테니 하녀들을 데리고 레이디의 시중을 들어 편히 주무실 수 있도록 해라. 내 귀빈이니 최고의 대우를 하도록. 레이디께서 필요한 게 있다면 어떤 것도 서슴지 말고 가져다주어라.”
“예, 전하. 가장 훌륭한 하녀들을 데리고 오겠습니다.”
그리고 문이 닫혔다. 나는 숨을 가만 죽였다. 곧 발걸음 소리가 가까워지고 노크 소리가 뒤이어 들렸다.
“레이디, 주무십니까. 들어가겠습니다.”
나는 몸을 일으켰다.
“들어와요.”
그리고 문이 열렸다. 몸을 일으키자 하녀들이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 중에서도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는 하녀가 엄숙하게 말했다.
“안녕하십니까, 레이디. 저희는 공작 전하께서 보내신 하녀들입니다. 레이디의 시중을 들러 왔으니 부디 필요하신 게 있으면 말씀해 주십시오.”
“아, 우선 목욕부터 하고 싶어요.”
그의 저택에는 항상 따뜻한 물이 나오고, 좋은 향료도 많아서 목욕을 하는 것이 즐거웠다. 나는 빨리 이 불편한 코르셋과 옷들을 벗어던지고 싶었다. 노곤하다 보니 부드러운 가운 속에서 드는 잠이 간절했다.
“물론입니다. 레이디. 브리젯과 앤이 목욕 준비를 하기 전까지 조금만 기다려 주시지요. 브리젯, 앤.”
두 하녀가 단정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방 끝에 있는 욕실 문을 열고 그 뒤로 사라졌다. 그 동안 나머지 하녀들은 장작을 뗐고, 나는 가만 침대에 앉아 있었다. 모두가 분주했다.
정말 이상했다. 만일 아버지가 돌아가시지만 않았어도, 나는 레이디의 시중을 드는 하녀 중 하나였을 텐데. 괜히 기분이 묘했다. 그때 두 하녀들이 젖은 앞치마와 함께 내게 다가왔다.
“레이디, 부디 저희를 따라와 주세요.”
나는 그들을 따라갔다. 욕실의 환한 빛무리가 가까워졌다.
고작 손님방에 달린 욕실임에도, 욕실은 내 방만큼 컸다. 그리고 그걸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무덤덤하게 바라보는 하녀들의 침묵이 내게는 더 경악할만한 일이었다.
“레이디, 목욕시중을 들겠습니다.”
그녀가 그러고서는 내 드레스에 손을 댔다. 옷을 벗기려던 모양이었다.
“아뇨, 잠시만요.”
순간 머리에 미친 생각이 났다. 아주, 미친 생각.
“그이보고, 지금 여기로 오라고 하세요.”
“네?”
“공작 전하요. 분명 내 말이라면 다 들어주라고, 그이가 말했을 텐데.”
“아, 예. 죄송합니다, 레이디.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두 하녀들이 고개를 조아리고 떠나갔다. 나는 한동안 욕조 귀퉁이에 걸터앉아 시간을 보냈다. 곧 발걸음 소리가 가까워졌다.
문이 조심스레 열리자, 그 뒤에 당혹스러운 눈빛을 한 그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태연하게 미소지었다.
“전하, 전하께서 제 목욕시중을 들어주셨으면 좋겠어요.”
“…….”
미친 짓이었다. 하지만 내 혈관에는 알코올이 흐르고 있었고 나는 그것만으로 미친 짓을 할 권리가 충분히 있었다고 생각했다.
“역시 힘드시겠나요?”
내가 고개를 틀며 묻자 그는 귀가 새빨개진 채로 그대로 서 있었다.
“레, 레이디. 그럼 옷부터 도와드리겠습니다.”
그가 천천히 내 뒤로 와 섰다. 그의 떨리는 숨결이 내 목덜미에 닿았다.
나는 숨을 조금 거칠게 몰아쉬고 있었다. 그가 천천히, 조심스레 내 목에 달린 드레스 끈을 풀어내기 시작했다.
드레스 다음으로는, 코르셋이었다. 그가 끝을 조심스레 풀어 당기자, 차가운 공기가 내 온 몸을 타고 스며들었다. 고요한 욕실에 그가 침 넘기는 소리만 가득했다.
“역시, 안되겠습니다.”
그의 입술이 내 목덜미에 닿았다. 살과, 살과의 접촉뿐일 텐데도 꽤나 야살스러웠다. 그가 내 목덜미에 제 입술을 박아내는 소리가 문득 야릇했다.
똑, 똑. 고요한 목욕탕의 수면에 떨어져 내리는 물방울. 그의 큰 손이 내 옷 사이로 파고들어 강렬히 내 살갗을 탐하고 있었다.
그는 내 몸 뒤로 거칠게 제 것을 치대며 제 욕망을 거짓 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나는 그런 그를 굳이 거절하고 싶지 않았다. 그냥 서로의 욕구에 따라 몸을 섞는 것 뿐이니까.
그뿐이니까. 그의 손이 아래로 내려가자, 내가 어색하게 웃으며 그의 손을 막았다.
“모…목욕 해야죠! 이젠…….”
“레이디.”
그는 나를 놓아주지 않은 채로, 내 뒤에서 나직히 나를 불렀다.
“저, 전하?”
“나의 레이디.”
그의 두 손이 나를 부서트리기라도 할 듯 내 허리를 강하게 감쌌다.
“나의 레이디.”
그가 두 번째로 그 말을 했을 때, 나는 더 이상 다른 말을 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