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로징턴에는 가시가 있었다 -->
“안녕하세요, 릭포드 영식. 무슨 일이신가요?”
빈정거릴 힘이 없었다. 공작은 나를 밤 새 재우지 않았고, 나는 지금 걷기조차 힘이 들었고 허리가 뻐근했다.
그래서 집에 오자마자 밀린 책이나 읽고 좋아하는 케익이나 잔뜩 사서 먹으려고 했다만 어째 집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앨런 릭포드였다.
왜일까. 그는 또 정조 어쩌고 하면서 나를 갈굴 텐데(갈 거면 곱게 가지). 나는 그가 말하는 그 ‘귀족’ 이 최소 4년 전까지만 해도 아니었고 그의 말은 내게 데미지를 주지 못했다.
그럼에도, 그는 존중받을 가치가 있는 인간 존재였기 때문에 나는 인내심을 택했다.
“솔직히 묻고 싶습니다만.”
그가 격식있는 비웃음을 입가에 걸고 말했다.
“어떻게 하셨습니까?”
노골적으로 위아래를 훑는 것은 덤.
나는 대답할 가치를 느끼지 못했다. 그리고 마음 속으로 생각했다. 루이지애나 고모라면 어떻게 했을까.
그녀는 언제나 나의 우상이었다. 분명 루이지애나 고모라면 저 치에게 좋은 일침을 날려줄 것이었다. 매우 우회적이고 귀족적인 방식으로 말이다.
나는 머리를 굴리려 애쓰다가 그냥 내가 저 인간의 조인트를 날리는 게 빠르지 않을까(그게 항상 내 방식이었다) 고민했다.
“뭘요?”
“제발, 로즈 영애. 어젯밤 무도회의 일에 대해 모르는 사람이 지금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말해주십시오.”
그는 차를 새침하게 홀짝 들이키며 말했다.
“공작께 약이라도 먹였습니까? 아니면 무슨 집시에게 밤기술이라도 배우셨…….”
달칵.
그는 눈을 찌푸리고 제 얼굴에 흘러내리는 차를(맹세코 식어 있었다) 느끼며 현실을 파악하려고 하고 있었다. 죄송해요, 루이지애나 고모. 역시 이 쪽이 제 방식입니다.
“그 사람이 저를 사랑한다고 했어요.”
그가 제 손수건으로 얼굴을 닦고 있을 때 내가 차분히 말했다.
“그리고 내가 말했잖아요. 애인 있다고.”
그는 한동안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런 모욕을 당했는데 문을 박차고 나가지 않는 것을 보면 용건이 있긴 한 모양이구나. 나는 생각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루이지애나 고모님을 기리며 그녀의 방식대로 그 요구를 거절할 백한가지 방식의 리스트를 만들고 있었다.
“약혼이 두 번이나 깨지면서, 제 아버지는 제게 실망하셨습니다.”
“그랬겠죠.”
나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그는 공작이고, 당신은 근본 없는 자작가의…….”
“죄송한데 바바라가 그렇게 말하라고 가르쳤나요? 그거 방금, 너무 바바라 같았어요.”
그가 나를 노려보았다.
“……영애입니다. 그것도 나쁜 명성의.”
“그렇죠. 그리고요?”
“그리고 당신도 알다시피 남자의 마음은 변할겁니다. 그는 게다가 공작이니, 당신 같은 여자는 곧 질리기만 해도 이별을 고하겠지요.”
그가 또다시 새초롬하게 차를 마셨지만 그의 축축한 앞머리 때문에 그 장면이 오히려 웃겼다. 나는 지금 마음을 온화하게 가라앉히고 왕국의 국가를 마음속으로 부르고 있었다.
“그러니까 저는 제 자비로운 관용으로, 당신의 부덕함을 포용하여 당신을 내 약혼녀로 다시 맞으려 왔습니다.”
차를 마시는데 사레가 들려서 나는 한참동안 켈록거렸다.
“저, 죄송한데.”
“말하십시오.”
“릭포드 경께서는 어젯 밤에 파혼당하셨어요.”
“당신의 부덕함보다는 덜 한 악명일 듯싶습니다만.”
“…….”
나 어떻게 이런 남자랑 결혼하려 했다더라?
결혼하기 전에 여행이라도 같이 가 보라는 다이애나의 조언이 기억난다. 다이애나를 신이 축복하사.
“거부하지 않으시면 승낙으로 알겠습니다.”
“…….”
어이가 없어서 말이 안 나왔다.
그는 제가 나한테 행하는 자비(?) 에 취해 있는지 스스로에게 자랑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공작을 뻑가게 한 당신이 정말 궁금하군요. 침대에서 당신의…….”
그리고 와장창 소리가 났다.
죄송합니다, 루이지애나 고모. 그건 저였어요.
나는 너무나도 기분이 더러웠던 나머지, 발로 작은 책상을 옆으로 밀어버렸다. 깨진 찻잔이 아쉽긴 했지만 어차피 앨런 릭포드가 쓴 찻잔이라면 재활용해서라도 쓰고 싶지 않았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고, 앨런 릭포드는 나를 벙진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당신은 내가 바바라를 모욕했다고 했어요.”
“…….”
“그리고 네. 그랬죠. 왜냐하면 저는 남이 면전에서 모욕하는데 있지도 않은 가문 명성 때문에 조용히 입닫는 년이 아니거든요.”
“로, 로즈 영애. 지금 당신이 판단력이 또렷하지 못해…….”
“아뇨, 들으세요. 경이 저와 파혼하고 바바라와 바로 약혼하셨다는 게, 저와 바바라의 명성을 동시에 깎아먹는 행위였다는 걸 모르시고 계시나요? 그리고 당신은 이제 와서야 똑같은 일을 또 저지르려고 하고 계시군요. 그리고서는 당신이 제 인생을 행복하게 만들어줄 사람이라고 하시고요.”
“이런 배은망덕한 계집 같으니라고!”
그가 분노에 차서 내게 손을 올렸다. 딱히 할 말이 없어진 사람의 근본없는 분노였다. 나는 이성을 찾고 떨지 않으려 노력했다.
“경께서 잊은 게 하나만이 아닌 모양이군요.”
그의 핏발서린 눈이 내게 향했다.
“로즈블룸은 제 성입니다. 그 말은,”
역시 조인트를 날리는 게 내 방식이었다. 그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제 무릎을 움켜쥐고 그대로 주저앉았다.
“이곳에 있는 모든 사용인들이 내 편이라는 것이죠.”
내가 눈짓을 보내자 시종인들이 그의 팔을 잡고 문 밖으로 끌어내었다. 나는 하녀가 새로 가져다 준 차를 음미하며 그 광경을 천천히 지켜보았다.
그날 오후에는 비상대책위원회가 열렸다.
내 우상인 루이지애나 고모의 딸, 아그니스와 내 절친 다이애나, 키티와 율리아가 왔다.
우리는 원 모양의 티테이블(나는 멋지게 이 탁자를 세실리아의 원탁이라고 불렀다.)에 둘러앉아 차를 마셨다.
“그래서, 그래서?”
“뭐, 처음에는 그 사람이 내게 기사들을 보여줬고, 나중에 어쩌다 술을 먹고, 그 다음에는 뭐.”
어깨를 으쓱하자 친구들이 환호했다.
“그랬지.”
“잘해?”
“어머, 세상에.”
키티가 부끄러운 듯 얼굴을 가렸다.
“그래, 말해줘봐.”
아그니스가 거들었다. 그리고 제가 가져온 와인의 코르크를 능숙하게 뽑아냈다.
“이럴 때 와인이 빠질 수 없지.”
“꺅!”
다이애나가 박수를 치며 아그니스에게 안겼다. 아그니스는 능숙하게 빈 잔들에다 와인을 부어댔다. 내가 이 시간을 얼마나 즐기고 있는지 당신은 모른다.
오랜만에 다 만난 친구들과, 와인을 마시며 보내는 평안한 오후. 지금 카밀리아는 가정교사에게 수업을 받고 있을 테니까 그런 대로 안심할 수 있다.
“몰라, 난 좋았어.”
“그리고?”
“그리고 뭐.”
“너도 그 사람 좋아하는거야?”
키티가 조심스레 와인잔을 잡고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나는 키티가 저런 시선을 내게 보낼 때를 안다.
키티는 골수까지 로맨스 소설광이었고, 나는 그녀의 〈공작님과 첫날밤〉 실사판이니 그냥 그 뒤가 궁금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나는 키티처럼 소설은 믿지 않았다. 소설은 소설이었고 현실은 현실이었다.
홀로 동생을 키우며 세상의 풍파에 이리 부딪히고, 가끔 앨런 릭포드 같은 남자들 만나다 보면 가끔 사람들에 대한 희망이 쉽게 꺼진다. 그러니 소설이 현실처럼 다가올 리가 없다.
그리고 공작도, 나를 사랑한다지만 결국 마지막에도 그가 나를 사랑할지는 나도 몰랐다.
사람의 마음은 너무나도 가변적이다. 쉽게 반하고, 사랑에 빠지고, 식는다.
그래서 나는 내 삶처럼, 그에게 기대를 걸기를 포기했다. 그러니까 한숨이 나왔다. 나는 내 전 약혼남 앨런 릭포드에게 어떤 종류의 욕도 다 할 수 있었지만 그가 겁쟁이라는 것만은 탓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나도 그런 겁쟁이였기 때문이다.
내 삶에 기대를 걸기를 포기하고, 공작의 마음을 진심으로 받아들이기를 포기하고(약속위반이었지만), 지금이 최악이 아님에 안도하고, 그리고 기대치를 낮추며 조용히 살아왔다.
“아니. 나는 그 사람을 사랑하지 않아.”
그래서 그게 내 대답이었다. 그리고 나는 와인을 한 모금 더 마셨다.
“이상하다, 보통 소설들에서는 점점 반하게 되는 쪽은 남자인데.”
키티가 조심스레 와인을 한 모금 마시고는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나는 피식 웃었다.
“그러게, 그러면 그가 내 백마 탄 왕자님은 아닌 모양이지.”
“그 사람도 그렇게 생각해?”
아그니스가 그 아름답고 까만 머리카락을 늘어트리며 물었다. 나는 한동안 잠잠한 와인 잔을 내려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글쎄, 그건 언젠가 알게 되겠지.”
허리는 아팠고, 머리는 띵했으며, 기분은 좋았다.
“일단 마셔.”
그렇다. 지금은 마시자.
친구들 너머로 건국제 날이 동그라미쳐진 달력이 눈에 들어왔다. 건국제. 이 어마어마한 사단이 난 뒤로 내가 참석해야 할 공식적인 사교 행사였다.
그게 벌써 일주일 뒤였나. 나는 아껴뒀던 돈을 머릿속으로 셈했다. 그래, 그정도 돈이라면 카밀을 위한 드레스를 살 수 있었다. 그래서 그저, 마음이 홀가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