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한겨울밤의 고백-14화 (14/108)

<-- 당신이 모르는 이야기: 제롬 화이트 -->

나를 사랑하지 않는 당신에게

햇살이 적당하고, 날씨도 선선했던 어느 날이었다. 제롬 화이트에겐 세실리아가 처음으로 그의 집에 방문했던 날의 다음날이기도 했다.

아직도 사랑이라는 단어는 제롬 화이트의 사전으로도 정의할 수 없는 그 무언가에 속했다. 그는 추상적인 것들을 믿지 않았다. 사랑이나, 행운이나, 신념이나, 그런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 무심했다. 그는 정돈되어있는 것, 그리고 증명할 수 있는 것을 좋아했고 삶이 제 생을 내린 것만큼 그에 충실한 삶을 살아오고 있었다.

그는 효율적인 것을 좋아했다. 삶은 그에게 선택의 연속이었고, 그는 그 순간순간마다 항상 최선을 택했을 따름이었다. 그리고 그 ‘최선’ 들은 항상 그에게 좋은 결과로 돌아왔다. 그의 부모가 그에게 물려준 부와, 노력으로 따낸 결과는 그를 최정상에 놓았다.

‘웨스트 체셔에서 보는 노을이 정말 아름답다고 했어요.’

그는 그 말을 했을 때의 그녀를 무엇보다도 선명하게 잘 기억하고 있었다. 아마도 그녀 자신보다 더 잘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그녀는 그녀의 피부를 닮은 흰색 드레스를 입고 있었고, 무엇보다도 그 적갈색 머리카락은 목을 타고 구불구불 흘러내리고 있었다. 눈은 그녀의 상상 속의 노을을 담고 있었고, 입술은 적당히 도톰하고 빨갰다. 그리고 그 목덜미에 새하얀 진주 목걸이가 걸려 있었었다.

사랑이란 정말 정의할 수 없는 특별한 이끌림이었다. 그녀가 주위에 있지 않을 때도 그녀의 생각이 났고, 그녀와 어떻게던 조우해볼 기회를 찾느라 일과표를 다시 한번 더 확인하고, 그녀의 미소는 어땠는지, 그녀의 향기가 어떤 빛깔이었는지 생각해보게 된다.

그는 흘러내린 제 앞머리를 거칠게 쓸어올렸다. 그녀, 그녀, 그녀. 세실리아 로즈.

세실리아 로즈.

그는 조용히 제 빈 잔에 와인을 따라냈다. 원래 술은 좋아하지 않는데, 그녀는 그러고 보니 항상 와인을 마시고 있었다.

‘와인을 마시고 있으면, 글쎄. 기분이 좋아요.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어서?’

그녀가 했던 말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씁쓸하게 웃으면서.

‘그래봤자 걱정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건 알아요. 그냥 걱정을 미루는 셈이죠. 그러니까 행복을 대출받아서 걱정을 미루는 셈이에요. 걱정이라는 게 빚이 되어 쌓이면 그땐 참 답이 없는데.’

그녀는 흐리멍텅한 눈으로 와인을 또 들이켰었다.

‘그래도 산다는 게 그런 거죠. 살아가는 거.’

걱정이라는 게 빚이라면 그녀는 항상 빚에 둘러싸여 사는 것만 같았다. 그야말로 그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것들이었다. 하루하루를 걱정하며 살아야 하는 것.

그는 집무실 창가에 서서 넘실거리는 노을을 바라보았다. 어둠이 점점 다가와 그의 그림자를 더욱 길게 만들고 있었고, 해는 느릿느릿 지평선을 넘어 곧 사라질 모양이었다.

새빨간 것을 보니 다시금 그녀의 붉은 드레스가 생각났다. 그는 와인을 들이켰다. 그야말로 그녀의 방식대로 그의 걱정을 미루는 것이었다.

집에 잘 들어갔다고 편지를 해 줄 수도 있었는데, 그녀는 역시 집에 돌아간 후로 통 소식이 없었다. 그러자 가슴에 멍이라도 든 듯 쓰라렸다. 원래 상처에서 난 고통은 몸만 괴롭히는데, 감정에 흠집이 나면 정신까지 혼미하다.

그는 그래서 고민을 미루기로 했다. 그렇게 다시 와인을 마시고.

그는 비틀거리며 복도를 걷는다. 하녀들은 떼를 지어 분주하고, 저는 혼자 복도를 휘적휘적 걸으며 오늘 처리한 업무 대신 유행가처럼 머리를 떠나지 않는 기억 조각들을 헤집는다.

그는 그렇게 방문을 홀로 조용히 연다.

빛을 아는 자들은 어둠을 깨닫고, 지식을 얻은 자들은 그 뒤에서야 어리석음을 깨닫는다. 누군가를 그린 뒤로부터 그는 외로움을 깨닫는다.

방은 화려한 파티장의 그것과는 달리 온통 싸늘하고 고요했다. 사람이 한명 있고, 그리고 없어졌을 뿐인데 방은 온통 마이너스였다. 그야말로 그의 상식이 부숴진 순간이었다. 1-1은 항상 0인줄로만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이 방에 없는 것만으로 그의 세상은 마이너스가 되었다.

가끔 그녀를 보면 애가 탔다. 저가 이렇게까지 제 마음을 내보였는데, 저를 보는 그녀의 눈빛은 항상 흐리멍텅했다. 그녀가 요부처럼 굴며 황금으로 만든 정원을 달라고 했으면 그녀에게 선물했을 것이다. 그녀가 왕관이 갖고 싶다면 반란이라도 일으켜 씌워 주었을 것이다.

그녀는 놀랍게도 저에게 원하는 게 없었다. 그랬기에 더 애가 탔다. 그녀는 마치 바람같은 사람이라, 어떻게 묶어 두려 해도, 잡아 두려 해도 항상 그와 엇나갔다.

그는 그대로 털썩 침대에 누웠다. 몸에 영 기력이 없었다. 그는 고개를 돌려 그의 텅 빈 옆자리를 본다. 그리고 조용히 한숨을 내쉰다.

‘최고가 되면 행복할거라고 생각하지 마라.’

그의 아버지가 언제쯤 말했다.

‘최고이면 최고인 만큼 네 주위에는 아무도 없을테니 말이다.’

그는 그래서 이 감정이, 외로움에서 오는 심적 동요라고 믿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그녀가 지나가면 그냥 시선이 간다. 그녀가 웃으면 혼자 그녀를 보며 그녀의 행복의 일부가 되고 싶어진다. 그녀와 어쩌다 시선이라도 마주치면 마음에서 온통 전율이 와, 그저 아무 일도 없었는데 기분이 깃털처럼 가볍고 마음이 따스해진다.

어째서일까. 왜? 아무런 자극도, 촉매도, 없었는데 그저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고, 그녀의 시선이 저를 담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기쁘다. 그에게 기쁨이란 성취를 통해 얻는 일종의 보상이었고, 그것은 그를 움직이게 한 동기였다.

하지만 성취가 없었음에도, 아무런 일도 없었음에도 그녀의 시선, 움직임, 미소는 그를 행복하게 한다. 그래, 행복함이다. 그녀와 함께 있으면 행복했다.

그는 이 시점에서야 사람들이 왜 사랑에 빠지고 싶어 하는 지 이해했다. 그 사람만으로 삶에 기쁨이 생긴다. 눈을 떴을 때, 깨어있음을 자각했을 때 그 사람이 이 세상에 나와 같이 숨쉬고 있다는 생각으로 기쁘고. 그 사람을 만날 수 있는 가능성이 몇 개나 있을까 그 무수한 가능성을 세느라 기쁘다. 그 사람과 비밀스럽게 눈이라도 마주치면 전율이 인다.

만일 최고가 되어도 행복해지지 못하는 것이라면, 내게 그 행복을 주는 그녀라는 존재는 얼마나 특별하고 소중한가? 그 사실을 자각하니 다시금 가슴에 작은 통증이 왔다.

그녀의 말에 기뻐졌다, 그녀의 눈빛에 마음이 덜컹 내려앉았다.

온통 단조로웠던 그의 일상에 그녀가 먼지처럼 내려앉았다. 가랑비처럼 내리는 줄도 모르게 그의 옷을 적셨다. 그리고 그의 정신을 갉아먹고 이성을 흔들어 미치게 했다.

그녀가 보고 싶었다.

여자를 안고 싶은 감정과는 다르다. 그 여자가 내게 줄 수 있는 육체적 쾌락 때문에 그 여자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런 쾌락이라면 이 세상 어떤 여자들도 줄 수 있었다.

그저 그 여자만이 제게 줄 수 있는 행복에 그는 미쳐가고 있었다.

그 여자는 그 날 밤, 예상치도 못했던 때 제 옆에 앉아 언제나 그랬듯 와인을 들이키고 제 목덜미에 그 팔을 감아 그를 끌어당겨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그녀의 체향과 술 내음이 섞여 정신이 온통 몽롱한 틈에, 좋아했던 사람이 제 혀를 감고 몇 번이고 입을 맞춘다는 사실에 온 몸에 전율이 일고 짜릿함이 밀려왔다. 그냥 키스였는데.

그때 그의 손에 잡힌 여체가 얼마나 부드러웠는지, 그녀는 그날 밤 그에게 여신과도 같았다. 마치 그를 홀리려 하늘에서 내린 여신이 있다면 그녀를 닮았을 것이다. 그런 그와 달리, 그녀의 눈빛에는 사랑이 없었지만 그는 그날 밤 그녀를 놓치기 싫었다.

그땐 그의 재력, 쌓아온 명성, 받아온 수많은 훈장 따위는 문제되지 않았다. 그냥 그 여자가 제 위에 있고, 저를 원하고 있다는 사실 그 하나만 또렷했다.

그녀는 제 쪽을 바라보며 잠이 들어 있었다. 숨이 들락날락하며 그녀는 색색 잠을 자고 있었다. 그가 항상 바라보던 눈은 굳게 닫혀있었고, 그녀만 갖고 있는 그 귀여운 코가 그 아래 자리했고, 그의 상상 속에서 언제나 붉었던 입술이 정말 탐스러웠다. 그리고 그녀의 목을 덮으며 녹아내리는 그 적갈색 머리카락에 그는 가만 입을 맞추었다.

누가 가르쳐주지도 않았고, 책에서 배운 적도 없지만 그는 그녀를 사랑했다.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었다.

남자가 여자를 사랑하듯 사랑하고 있었다.

여자가 필요해서 그녀를 안은 것이 아니라, 그녀와 더 깊이 교감하고 싶어서, 남들이 모르는 그녀를 알고 싶어서, 그녀가 좋아하는 것을 주고 싶어서 그녀를 안았다. 그는 애초에 저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소모적인 일은 하지 않았기에, 그리고 섹스에서 오는 쾌락은 불필요하다 여겼기에 굳이 여자를 안아오지 않았지만 그녀는 달랐다.

하지만 그녀는 저와 같이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그날 밤 제 침대를 덥힐 사람이 굳이 저가 아니어도 충분하다는 듯 굴었다. 그게 그를 내내 고통스럽게 했지만 내색하진 않았다.

정말 넓은 세상을 배워왔지만, 그가 아는 수많고 많은 언어중에서 ‘사랑’ 이라는 단어가 없는 언어는 없었다. 그렇게 이 세상 모두에게 사랑이 찾아와도 그에게는 다를 줄 알았는데. 사랑은 가난하던, 부유하건, 고귀하던 천박하던, 예외를 가리지 않고 감기처럼 그에게 와 있었다.

그는 그리고선 가만 생각했다. 이 세상을 아무리 뒤져도 그녀를 닮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가끔 내뱉는 혼자만의 블랙 조크나, 같은 빛의 적갈색 머리카락이나, 가끔 쓸데없는 일에 과하게 진중해지는 그 눈이라던가, 그렇게 진주 목걸이가 어울리는 여자는 또 없을 것이다.

99%를 닮아도 1%는 다를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녀를 놓친다면, 어느 여자를 보더라도 그녀와 얼마나 닮았는지부터 생각하게 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어떻게 해서라든지 그녀의 안부를 간접적으로나마 물을 것이었고, 그녀의 잔재를 곱씹을 것이었다.

밤이어서 그런지 미칠 듯이 그녀가 보고 싶었다. 원래 피로에 짓눌린 몸이라 이불에 들어가자마자 잠이 들기 일쑤였는데 오늘은 온통 그녀의 생각으로 온 하늘을 다 메울 것만 같다.

내일 업무라도 미리 처리해야겠다는 마음으로, 촛불이 담긴 램프를 잡고 일어났을 때 그는 그대로 자리에 멈춰섰다. 그리고 천천히 제 서재로 걸어갔다.

온통 우울했던 그를 기쁘게 한 것은 거꾸로 꽂힌 책, 그 한 권이었다. 다른 책들은 모두 그가 기억하는대로 단정하고 반듯하게 꽂혀 있는데. 딱 세실리아의 키 높이에 있는 한 권만이 다른 책과는 달리 거꾸로 꽂혀있었다.

그는 작게 헛웃음을 짓고는 책을 꺼내 어루만졌다. 그렇게 시계 초침 돌아가는 소리만 컸지만 그는 한동안 멍청하게 웃으며 그 자리에 가만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생각만으로 동이 텄다.

그 다음 다음날에 그는 오후 한참동안, 여러번의 편지를 쓰고 구겨버린 뒤, 다시 썼다. 일 처리가 완벽한 그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그는 어느때보다 더 오래 편지를 썼다.

편지를 보내는 것도, 저녁에 한꺼번에 몰아서 보낼 수 있었지만 따로 시종을 불러 그 편지를 보내고 오게 했다. 그리고 더 이상 그것에 신경을 쓰고 싶지 않았는지 그 뒤로는 일에 몰두했다. 하지만 그 중에도 하녀가 방문을 여닫는 소리에도 제 방문을 쳐다보았다.

“전하.”

그는 흠칫 놀라 제 앞의 하녀장을 바라보았다. 그는 그럼에도 동시에 그녀의 손부터 시선으로 탐색했다. 흰 봉투였다. 그리고 장미 인장을 보자 가슴이 쿵쿵 뛰었다.

“편지입니다.”

그는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 편지를 받았다. 그리고 기대하지 말아야지, 마음 속으로 되내며 페이퍼나이프로 천천히 편지를 뜯어내었다.

‘샘슨 부인이 파티를 연대요. 바쁘시겠지만 저는 당신이 꼭 필요해요.’

그는 쓴 미소를 지었다. 꼭 필요할 때만, 그 여자는 저를 찾았다. 그래도 괜찮았다.

그리고 편지를 쓰려 준비해두었던, 예쁜 흰 종이에 다시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수신인은,

‘나를 사랑하지 않는 당신에게.’

영원히 부치지 못할 편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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