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한겨울밤의 고백-17화 (17/108)

<-- 카드의 마술사 -->

그리고 오늘은 건국제가 열리는 바로 그 날이었다.

저택은 하루 종일 분주했다. 보통 파티가 있는 날은 다 그랬다. 지금은 세시였고, 파티는 일곱 시부터였기 때문에 나는 초조한 마음으로 카밀의 침대에 앉아 있었다.

나는 작년 건국제에서 입었던 그 빨간 드레스를 입고, 카밀이 제 생일 선물로 받은 드레스를 입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카밀의 새 드레스는 역시 더 비싼 드레스라 더 예쁘고 화려했다. 카밀은 어떤 드레스던, 언니가 주는 거면 다 좋다고 했지만 역시 바바라가 빼앗아간 드레스보다 이쪽이 더 취향인 듯 했다. 카밀은 기분이 좋은지 콧노래까지 부르고 있었다.

“나 어때?”

카밀이 나를 돌아보며 미소지었다. 나는 있는 힘껏 내 진심을 이야기했다.

“정말, 정말, 정말로 예뻐. 카밀.”

카밀이 배시시 미소지었다. 그녀의 손에는 그린힐 영식이 준 편지가 들려 있었는데, 아까부터 놓지 않고 있었다. 에드거 그린힐에 대해서 말하자면, 그 어마어마한 다이아몬드 광산을 상속받을 그린힐의 장남이자 다이애나의 오빠 되는 사람이었다.

그렇다. 다이애나와 내가 친해진 계기가 바로 그것이었다. 나는 내 카밀을 끔찍이 아꼈고, 다이애나는 제 오빠를 존경하고 가족으로서 깊이 아끼고 있었다. 나와 다이애나는 두 사람의 행복을 바란다는 똑같은 목적을 공유하고 있었고, 그래서 더욱 빨리 가까워질 수 있었다.

물론 다이애나가 처음에는 에드거와 카밀리아의 사이를 반대했지만, 둘의 마음이 진심인 것을 안 뒤에는 나와 절친이 되어 서로를 누구보다 열심히 응원해 주었다.

카밀리아와 에드거 얘기에 대해 궁금하다면, 둘 사이에 있었던 소설보다 더 로맨틱한 일화들을 나열해 줄 수 있지만 그만두겠다. 이미 두 번 말하면 입이 아프니 사교계에 있는 어느 영애라도 붙들고 물어보는 게 빠를 것이다. 모르는 사람이 없으니 말이다.

“그린힐 영식도 그렇게 생각하실거야.”

그러자 카밀리아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뭐, 저런게 사랑 아닐까.

카밀의 방 문을 닫고 나오면서 나는 낮은 한숨을 쉬었다. 카밀리아의 화장대에는 수북히 파트너를 요청하는 편지들이 싸여 있었는데, 나에게는 하나도 오지 않았다.

원래 그래도 세네개씩은 왔는데, 아쉼네. 나는 피식 웃었다.

그리고 내가 멈춰서 그대로 굳어버린 것은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니아!”

나는 하녀의 이름을 소리높여 불렀다.

“나 외출할거야. 내 말 준비해줘.”

그때 하녀장이 정갈한 걸음으로 내게 다가왔다. 그때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 손이 차가워졌고 식은땀이 났다. 아, 제발. 내가 하녀장에게 뭐라고 하기도 전에 그녀의 입술이 떨어졌다.

“아가씨.”

“으, 응?”

“로드 화이트께서 레이디를 만나고 싶어하십니다.”

그때 다리에 힘이 풀려서 나는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았다.

문을 열었을 때, 하늘은 점점 어두운 빛을 머금으려던 참에 문 앞에는 그 어둠을 등지고 선, 빛과 같은 그 사람이 있었다. 그는 노을을 배경으로, 선명하게 웃어보이며 떨리는 내 손에 꽃다발을 쥐어주었다. 나는 간신히 그것을 받고는 그대로 얼어붙어있었다.

그에게 친근하게 대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 거리감이 느껴지는 특유의 미소에서였다. 그건 예전처럼 나를 바라보던 단순한 순정이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짙은 감정으로. 오랫동안 가슴에 서려 있어 이미 어떻게든 곯아버렸을 형태로 그의 입가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는 마치 다른 사람 같았고, 나는 이 상황을 벗어날 수만 있다면 카밀이 관계된 것을 제외하고는 어떤 일도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오랜만입니다.”

그는 눈을 내리깔며 내게 말했다. 그의 푸른 벽안이 오늘따라 더욱더 선명하게 빛났다. 그는 다시 시선을 옮겨 나를 보았다.

“어째 당신에게는 항상 이 말만 하는 것 같습니다만.”

그의 미소와는 달리 그의 말은 꽤나 사무적이었다. 나는 이런 그가 어색했지만, 사람은 다양한 일들을 겪으며 변한다는 것을 보았을 때 그가 여태껏 그의 편지에 답하지 않았을 나에게 화내지 않으라는 법도 없었다.

그래서 그가 무섭냐고 내게 묻는다면, 아니었다. 나는 그의 지위와 가문을 무서워할 순 있었지만 그를 무서워할순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나를 사랑했기 때문이었다.

나의 행동은 그처럼 선한 사람이 사랑하는 나를 해칠 리 없다는 믿음에서부터 나왔다. 그의 푸르고 선한 눈을 들여다본 뒤로, 그와 대화한 뒤로 내 행동의 지지기반은 강력해졌다.

그리고 이 순간에도, 내가 그를 피해 두려움으로 도망치지 않는 이유는 단 하나.

저 착한 사람은 나를 해칠 리가 없다는 그 믿음이었고.

“바쁘십니까?”

나는 고개를 저었다.

“다행이군요.”

그는 그 말과 함께 문을 닫으며 제 자신을 들였다. 그때 계단을 내려오는 발소리가 들려서, 나는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카밀이 나와 공작을 번갈아 보더니 드레스자락을 들어 정중하게 인사했다. 나는 카밀과 공작과의 침묵에 침만 꼴깍 삼켰다.

“아, 그리고 저 레이디가 제가 익히 들어왔던 카밀리아…….”

내가 그의 팔을 급히 잡자 그가 옮기던 걸음을 멈추고 나를 뒤돌아보았다. 그의 눈빛은 벼린 칼처럼 날이 설어있었고, 또 그의 말에는 카밀리아를 저당 잡겠다는 은근한 협박적인 어투가 자리하고 있었다. 나는 그래서 애써 미소를 지으며 이 어색한 분위기를 무마하기 위해,

“카밀리아, 이쪽은 오늘 내 건국제 밤에 함께하실 파트너 제롬 화이트 공작님이셔.”

“반갑습니다.”

그제서야 표정이 빛처럼 환해진 그가 카밀에게 미소해보였다. 악의 없는 미소였다.

카밀은 제 방에 있었고, 나와 공작은 차를 마시고 있었다. 방금 공작이 내게 화를 낸 것에 대해 순간 기분이 욱했지만 나는 곧 내 마음속 작은 세실리아와 타협해 그를 용서하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그것은 그에 대한 특별한 감정이기보다는 동정이었다.

운명의 신이 그에게 웨스트체셔와, 부, 그리고 완벽을 주셨지만 옆에서 그걸 사랑의 신이 질투라도 한 듯 그는 나에게 사랑에 빠져버렸다. 그리고 그는 나를 잊어야 할 것이었다. 나는 그를 내 인생에, 일상에 추가할 용기가 없었고, 바바라의 말대로 사랑이 식어버릴 그를 감당할 용기가 없었다.

그러니 그동안 조금 마음 고생할 공작님에 대한 동정이었다. 그리고 그의 감정을 이용해 제멋대로 구는 나의 이기심에 대한 미안함이었으며, 그럼에도 내 동생과 동시에 내 자신을 불행으로부터 지키겠다는 특유의 완강한 고집이었다.

그러고 보니 우리는 첫만남부터 엇갈렸다. 그 발코니에서 그와, 나.

나는 그가 오랫동안 앓아왔던, 심사숙고했던 감정을 나는 내 마음속 상처를 방패로 거절했다. 저런 좋은 사람이 나를 좋아할 리 없다며.

그리고 그가 나를 진심으로 좋아했음을 깨달은 뒤에도 나의 편의를 위해 그를 밀어냈다. 나는 이기적인 사람이었지만 내 잘못을 탓할 생각은 없었다. 우리는 모두 다 이기적인 동물이지 않은가, 사람이.

그래서, 잘못한 사람은 없는데 아픈 사람은 있었다. 그러니 이것이 이 세상의 아이러니라고 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나는 차를 한 모금 마시며, 내가 읽었던 ‘멍청한 곰 이야기’를 떠올렸다. 곰은 여우가 처음 건네는 그 폭신한 신발에 안주하다가, 그것에 익숙해져 그 신 없이는 걸을 수 없는 나약한 다리와 텅 빈 곡식창고와 함께 이야기의 끝을 맞이한다.

나는 그래서 그의 사랑에 안주하고 싶지 않았다. 그의 사랑에, 부에 기대고 싶지 않았다. 나중에 상처받을 내가 불쌍해서라도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의 사랑에 너무나도 익숙해져버리면, 결국 털 신발 없이는 걷지 못할 그 곰처럼.

그의 존재 없이 내가 겪어왔던 것을 다시금 이겨내지 못할 나약한 사람이 되어버릴테니까. 다시 ‘그가 없었던 때’ 로 돌아가는 게 너무나도 무서울 테니까. 나는 그의 감정이 내 인생을 모두 담아낼 만큼 깊고 넓은지 모르니까.

내가 그를 사랑할 기회조차 내게서 박탈해버리고 그에게 최대한 나의 나쁜 모습만 보여줘, 그를 내 인생에서 지워버리려고 한다.

나도, 내 선택이 현명하지 않은 것만은 안다.

다만 안전한 방법이겠지만.

“죄송합니다.”

먼저 말을 꺼낸 것은 그였다.

“죄송하다 하지 마세요.”

내 말이 끝나자, 그는 나를 한번 살피더니 제 재킷 주머니에서 편지 뭉치들을 꺼내놓았다. 그리고 티테이블 위에 꺼내놓았다. 나는 탄식했다. 얼핏 보이는 그 편지 꾸러미의 수신인이 나, 인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아마 건국제에서 파트너가 되고 싶다는 영식들의 편지일 것이었다. 그것도 나에게 보낸.

“말도 안돼.”

“제가 실수했습니다.”

“.....”

그는 죄책어린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마치 판결만을 기다리는 순백의 죄수의 표정으로. 나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주저앉을 바닥이 있었으면 그대로 주저앉았을 것이다.

“당신의 한마디 말이면 다음부터는 이럴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잘생긴 얼굴로 나를 애절하게, 애타게 바라보았다.

“제발.”

그의 눈동자에 슬픔이 묻어 있었다. 마음고생한 쪽이 나만은 아니었던 모양이었나?

“레이디의 마음이, 저와는 같지 않은 겁니까?”

그리고.

드르륵, 의자가 긁히는 소리가 났다. 나는 그 편지꾸러미를 들고 일어났고, 그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천천히 화로로 다가갔다. 화로에는 불이 거세게 춤을 추고 있었다.

나는 그 편지를 화로에 던져넣었다. 그리고 뒤돌아, 그를 바라보았다.

“네.”

“......”

“공작님은 그냥 제 하룻밤 상대셨어요.”

“......”

“실망하셨나요? 저는 그날 밤 혼자 있기는 싫었거든요. 기사는 필요했고, 돈은 없었고. 그 다음 날도 마찬가지였어요. 당신은 모르셨겠지만.”

그가 상처받았다는 표정을 했지만 나는 외면해 편지들이 타는 것을 보았다.

“이제 앨런 릭포드가 성직자가 되겠다고 이웃나라로 갔으니, 전 당신이 필요…….”

“더는 듣지 않겠습니다.”

그는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동안 실례 많았습니다, 세실리아 로즈 영애.”

그는 그렇게 말했다.

“앞으로 보는 일 없을 겁니다.”

그리고 그는 걸어나갔다.

독한 년. 나는 그럼에도 울지 않았다. 그냥 입술만 짓물며 한참동안 편지가 타는 것을 지켜볼 따름이었다. 이상하지, 사람이 너무 마음이 아프면, 상당히 아프면 너무 아파서 비명도, 울음도, 생각도 터져 나오지를 않는다. 나는 그가 떠난 뒤에도 한동안, 그대로 편지가 다 타 없어질 때까지 난로 앞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나는 궁상맞게도 유행 지난 옛 유행가를 공허하게 불러댔다.

“당신은 내 햇빛……. 내 유일한 햇빛. 당신은 하늘이 흐릴 때…나를 행복하게 만들어줘요. 당신은 정말 모를거야…내가 얼마나…….”

그리고 나는 다음 가사를 차마 발음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리고 그때, 내 마음을 깨달은 바로 그때. 둑으로 막아놓았던 감정이 폭포수처럼 터져나와 더 이상은 외면할 수 없었던 그 때. 생각하기를.

내가 당신을 많이 좋아했구나.

나는 이미 그 멍청한 곰처럼, 감히. 당신의 미소와, 친절, 그리고 나만을 향했던 그 마음을 정말로, 정말로 좋아하고 있었구나.

“……당신을 사랑하는지.”

나는 유행가를 마저 불렀다.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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