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한겨울밤의 고백-22화 (22/108)

<-- 얼음 체스: 전초전 -->

백건

Team White.

창틈의 어둠 속에서는 그 장소의 유일한 광원이라고 할 수 있는 달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장소는 어두웠고, 시가 연기로 가득 차 있었다.

장소의 한 가운데에는 화려한 조명이 은은하게 빛났고, 그 아래는 새하얀 빛의 남자가 당구 큐를 잡고 있었다. 그의 손에는 견고한 까만 가죽 장갑이 자리해 있었는데, 그의 시선은 오롯이 그가 보고 있는 붉은 공으로만 향했다. 그리고 견고한 소리와 함께.

“나이스.”

다른 남자가 박수를 쳤다. 하얀 빛의 사내는 너털웃음을 지으며 큐를 내려놓았다.

“시가?”

“아니, 나 시가 안 펴.”

그리고 흰 빛의 남자, 제롬 화이트는 시가를 권한 남자의 옆에 다가가 앉았다. 그가 까만 가죽 장갑을 벗자 그 아래 견고하게 반짝이는 그의 은빛 약혼반지가 자리했다.

그는 그리고 벽에 제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았다. 정말, 지쳤다는 듯이. 야살스러운 조명의 빛이 그의 햇살처럼 밝은 머리에 부서져 떨어졌다.

“약혼 축하하네.”

“…….”

“그래서, 행운의 아가씨는 누군가?”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까만 머리의 사내는 조바심을 냈다.

“이봐, 온 왕국이 네 행보에 날을 세웠다고. 제국에서 제일 잘나가는 남자가 약혼했는데, 약혼녀가 누군지 몰라. 자네가 내 신문사 기 좀 세워주게 그러니까…….”

그는 쓰게 웃었다. 그리고 대답하지 않은 채로, 잔에 와인을 부어 마셨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돌려, 너털웃음을 지으며 젠킨스 일보의 주인, 제레미 젠킨스를 바라보았다.

제레미 젠킨스는 제롬 화이트의 푸른 눈동자를 보고 그대로 얼어붙었다. 그의 시선은 일을 할 때의 그의 모습처럼 차갑게 얼어붙어있었으며, 공허했다.

제레미 젠킨스는 마른 침을 꼴깍 삼켰다. 이 사람이 저런 표정을 지은 뒤에는 항상 일이 일어났다. 그가 이루고자 하는 것이 이루어졌고, 없애고자 하는 사람이 없어졌으며, 성과를 거두고자 하는 것이 제 손에 떨어졌다. 제레미 젠킨스, 백작가의 삼남은 제롬 화이트의 오랜 친우로서 그의 그 표정을 너무나도 잘 알아왔다.

제롬 화이트는 제 조끼 안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리고 그것은…….

“반지 케이스?”

제레미 젠킨스의 시선이 그 조그만 정사면체 통에 고정되어있었다. 제롬 화이트는 그 통을 열었다. 그러자, 그 안에는 세상에서 가장 정교하게 빚은 것만 같은.

제롬 화이트의 손가락에 끼워져 있는 반지를 닮은, 하지만 그의 것보다는 조금 더 작은.

반지가 꽂혀 있었다.

“난 약혼한 적 없어.”

“허어.”

“내가 그런 소문을 판 것이지.”

“그렇다면 그게…….”

그는 그 미소를 지었다. 눈은 확신에 차있었고, 입은 굳게 닫혀있었고, 얼굴은 야망이 배어 있었다. 일그러지지만 않았을 뿐, 그 아름다운 얼굴에는 짙은 소유욕이 배어 있었다.

그는 꿈을 꾸듯 눈을 감았다. 제레미 젠킨스는 헉, 하고 숨을 들이켰다.

“짜증나.”

“그게, 무슨…….”

“블랙잭. 풀 네임으로는 잭 제커시스.”

제롬 화이트는 태연하게 포도주를 마시다, 텅 빈 잔을 공허한 시선으로 허공에 날렸다. 잔은 예쁜 포물선을 그려, 그대로 바닥에 가만히 떨어졌다.

“자, 자네.”

“…….”

“그게, 설마 레이디 로즈에 대한 거…, 헉.”

제롬 화이트가 제레미 젠킨스의 멱살을 움켜잡고 있었다. 제레미 젠킨스는 겨우 숨을 쉬고 있었고, 제롬 화이트의 손에 배인 날카로운 핏줄이 그의 악력이 약해짐과 동시에 옅어졌다.

그는 거칠게 제 손을 거두고는 허공을 문득 바라보았다.

“이름 함부로 말하지 마.”

그리고 붉게 취한 얼굴로, 제레미 젠킨스를 보며 환하게 웃으며.

“그 여자 보고 싶잖아.”

“자, 자네.”

제레미 젠킨스는 떨리는 손으로 제롬 화이트의 손에 꽉 찬 와인잔을 쥐어주었다. 그가 화가 났을 때는 그의 마음대로 일이 잘 해결되지 않았을 때인데, 이럴 때에는 제레미 젠킨스가 그의 친구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란 그를 맘껏 취하게 하는 일밖에 없었다.

“그 여자는 내가 좋댔어.”

그는 잔을 제 손가락 사이에 끼고 마음껏 흔들어보였다. 그러자 와인잔 속의 붉은 와인이 넘실거리며 여자의 붉은 치맛폭처럼 춤을 췄다.

“들었거든.”

제롬 화이트는 상념에 잠겼다. 건국제날 밤, 혹시 몰라서 잭 제커시스와 세실리아의 뒤를 밟아 그들이 있었던 정원에 갔던 기억.

‘전하.’

교태로운 미소를 지었던 그의 파트너 레이디가 그의 팔을 잡았다. 이름은 기억나지 않았지만 어느 후작가 레이디라고 했던 것 같았다.

‘저 레이디는 누구인가요?’

아마 세실리아를 말하는 것이다. 제롬은 그녀의 말을 무시한 채 멀어지는 잭과 세실리아의 뒷모습만 가만 바라보고 있었다. 세실리아가 취했는지 발걸음이 여러 번 꼬였다. 잭은 그런 그녀를 사랑스럽다는 듯 바라보며 그녀를 거의 부축하다시피 하며 걷고 있었다.

제롬이 손을 말아쥐었다.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전하.’

제롬은 신경질적으로 제 파트너를 돌아보았다. 파트너의 눈이 놀라 동그래졌다 부드럽게 휘어졌다. 제롬은 그제야 상황을 인지하고는 표정을 갈무리했다.

‘저 레이디 분이 그 유명하신 세실리아 로즈님이신가요?’

‘예. 그렇습니다.’

여자가 작게 웃었다. 그리고 제롬의 팔을 놓았다.

‘소문이 사실이군요, 그럼.’

‘…….’

물론 제롬도 그 여자가 말하는 ‘소문’ 이라는 것을 모르지는 않았다. 다만 침묵했다.

몸은 이곳에 있었는데 마음은 이미 세실리아의 발걸음이 향한 곳으로 떠난 지 오래였다. 제롬은 상대 레이디와 대화를 오래 지속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지만 예의를 잊지는 않았다.

그때 제 옆에 서 있던 레이디가 곱게 미소지었다.

‘제가 오늘 밤 공작 전하의 악세사리였다는 것을 일찍 말해 주셨더라면 좋았을 텐데요.’

‘그런 것이 아닙니다.’

‘글쎄요.’

여자가 고개를 조금 틀며 기묘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제 여자의 직감이 그렇지 않다고 하는데.’

‘날이 춥습니다. 이만 같이 들어가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아뇨.’

그녀가 웃으며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공작 전하께서는 이만 가 보셔야죠.’

‘…….’

‘귀애하는 레이디 분께서 술에 취한 상태로 남자 분과 함께 어딘가로 사라졌는데. 만일 레이디의 마음을 돌리고 싶다면 지금이 마지막 기회이겠죠.’

여인의 눈이 총명하게 반짝였다. 제롬은 정중히 미소지어보였다.

‘실례했습니다.’

그는 그리고 등을 돌려 빠른 걸음으로 걷기 시작했다. 도착지는 정원이었다. 잭 제커시스와 세실리아의 뒤를 밟아 그들이 있는 정원.

수목이 우거진 곳에서 그는 제 모자를 벗어 제 가슴에 두고, 아름드리 나무를 등져 그들의 대화를 엿들었다. 그곳에서 그녀는 그를 좋아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게 그가 그녀를 포기할 수 없는 이유였다. 단 하나만의, 이유였다.

그때처럼, 그 여자는 항상 마른 가지에 매달린 마지막 잎새처럼 불안정했다. 그래서 그녀는 그를 밀어냈고, 그는 더욱 그녀를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

둘이 가지고 있는 마음속의 공백은 닮았기에. 그래서 그녀와 함께 만들어가는 세상은 두 불완전함이 만나 완벽할 것이었다.

환상에서 현실로 되돌아온 제롬 화이트는 낮게 웃었다.

“술은 고민의 부채라고 누가 언제 말했더라…….”

그가 알 수 없는 말들을 공허하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비가 왔다.

천둥이 치는 밤이었다.

흑건

Team Black.

폭풍우 치는 밤이었다. 하늘이 쏟아질 듯 비가 왔다. 아낙들은 창문을 걸어잠구고, 아이들은 두려움에 잠에 들었다. 그때 텅 빈 길거리를 내달리는 까만 준마가 있었다. 말 위에 탄 사람은 까만 망토를 뒤집어 쓴 채로 빠르게 말을 달리고 있었고, 거센 바람에 망토 바깥으로 조금 드러난 그의 까만 고수머리가 날카로운 빗발을 견뎌냈다.

“안녕.”

그가 멈춰선 곳은 낡은 주점이었다. 그의 이름이 유명해지고, 그의 사업이 최정상에 놓인 뒤로 그가 열심히 찾아 헤맨 좋은 술을 취급하는 인적이 드문 주점.

늙은 바텐더가 물이끼가 낀 낡은 잔을 손수건으로 닦아내고 있었다. 그는 비, 그리고 비 앞에 놓인 방문객을 눈인사로 맞았다.

늦은 시간의 방문객이 제 후드를 벗음과 동시에 빗속에서 천둥이 쳤다.

꽈광!

그가 번개의 번쩍임 사이에서 환한 미소를 지었다. 까만 고수머리, 어두운 피부색, 그리고 청명하게 빛나는 두 금빛 눈. 그 남자는 도시에서 ‘카드의 마술사’ 라고 불리는 뛰어난 승부사, 잭 제커시스였다.

“오랜만이군.”

“아, 영감. 내가 좀 바빠서 말이야.”

그는 바텐더 앞 롱테이블에 익숙하게 자리를 잡았다. 못생긴 바의 여직원이 그의 젖은 망토를 받아들었다.

“고마워 이쁜이.”

그는 그녀의 손에 빛나는 황금 금화를 쥐어주었다. 두툼한 여직원의 입술이 호선을 그린다.

“매일 먹던 걸로?”

“좋아.”

그는 탐스러운 반지 다섯을 낀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누군가?”

“흠?”

“자네가 그렇게 행복해 보인 적이 요 근래 없었던 것 같은데, 여자 아니겠는가.”

“영감은 정말 눈치가 빨라서 좋아.”

“늙은이의 지혜라네. 게다가, 혈기왕성한 사내놈이 방실거릴 일이면 보통 여자 아닌가.”

잭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누군가, 그래. 메리? 소냐? 제시카? 린지?”

그는 피식 웃었다.

“이 동네 계집애 아냐, 영감.”

“아냐?”

“나 사업 성공하고 나가 산지 꽤 됐잖아. 수도로.”

“흠. 그렇군. 그래서?”

“어느 귀족 여자애.”

그의 얼굴이 일순 붉어졌다. 그는 그게 제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는 독한 밀주 때문인지, 아니면 그녀에 대한 생각 때문인지 혼란스러웠다.

“아.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구먼.”

“영감, 내가 수십 번 얘기해주지만 나 이제 부자야.”

“그렇군.”

영감은 조용히 나머지 잔들을 손수건으로 닦아내기 시작했다.

“그래도 돈으로 고결을 살 수는 없지.”

“시대 바뀐 지가 언젠데.”

영감은 피식 웃었다.

“그래, 내가 이만 갈 때가 되었나.”

그리고는,

“그래, 그 여자는 어떤가. 이 늙은이가 물어 뭐하겠냐마는.”

롱테이블 위에 교차한 두 팔. 그 위에 제 턱을 올려놓고, 잭 제커시스는.

“아주 미치게 하지.”

피식 웃으며.

“수많은 도박을 해왔는데, 이번엔 내 인생을 걸 만큼 좋아.”

“그런 판이라면 나는 몸을 사리겠네. 너무 위험하지 않은가?”

“내 마지막이래도 좋아.”

그는 해사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낡아빠진 조명의 촛불이 위태롭게 흔들렸다.

잭 제커시스가 집에 도착한 것은 새벽의 일이었다. 그는 오랜 시간동안 말을 타고 빗속을 달려서 꽤나 피곤해있었고, 따뜻한 목욕이 간절했다.

그는 멀리서 관조하듯 제 대저택을 바라보았다. 집의 주인이 돌아오지 않아, 아직도 몇몇 방과 복도의 불은 켜져있었다. 어둠 속에 견고히 서있는 저택의 창에서 터져나오는 은은한 빛이 어둠 속을 뚫고 있었다. 그는 제 허리를 두 손으로 짚고 낮게 휘파람을 불었다.

그가 상속받은 것도 아닌, 그가 하사받은 것도 아닌.

그저 이룩해낸 인생의 고된 성과.

제 집이 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젖은 전신을 말리고 있는 그의 대저택을 관찰하듯 느리게 뜯어보았다. 이 시각에 문을 열었을 때, 침실에 저를 기다리고 있는 안주인이 있었더라면.

강단있는 그 여자라면 잘 해낼텐데, 생각하며. 그는 쓰린 속내를 감췄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넓은 실내는 언제나 공허하다. 그러면 끝없는 상념에 잠긴다. 집의 넓은 빈 공간만큼 새벽 기운을 받아 생각이 꽉꽉 들어찬다. 그는 대충 고갯짓으로 시종인들의 인사를 받으며 계단을 오른다.

‘도와 줄 거지, 잭?’

갑자기 쓸데없는 생각이 밀려들어 그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 이야기에 대해서는 지금 당장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지. 그는 고뇌했다.

‘정말 고마워. 정말이야. 일이 성공하면 다 네 덕분이야.’

그 선명한 목소리. 밀려오는 죄책감. 잭은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그래. 상념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었다. 그는 가만 침묵하고는 계단을 조용히 올랐다.

벽을 본다. 언제나 똑같은 붉은 벽지에 일정한 간격으로 늘어져 있는 촛대와 양초들. 그리고 어둠을 밝히는 고즈넉한 불빛. 그는 한숨을 내쉰다. 지쳤다. 따뜻하고 포근한 품이 간절했다.

층계를 올라가 제 방문을 열면 맞아주는 건, 나태하게 고개를 쳐드는 표범 한 마리뿐이었다.

“레오!”

그는 저를 반기는 표범의 턱을 가만 쓸어주었다. 길들여진 들짐승은 그저 제 주인의 서늘한 바짓자락에 제 나태한 얼굴을 비벼 애정을 표할 뿐이었다.

“너도 수놈이고, 나도 수놈이고. 사내놈끼리 이 야밤에 뭘 하는지 모르겠다.”

표범이 무시하고는 다시 제가 누웠던 바닥으로 돌아가 몸을 말았다.

“그 작가가 맞나봐. 재산 꽤나 있는 독신 남자에게 아내가 꼭 필요하다는 건 누구나 인정하는 진리이다. 그렇고말고. 나도 결혼해야 할 텐데.”

그는 공허하게 중얼거렸다.

“그랬으면 좋겠다.”

작은 웃음을 웃었다.

========== 작품 후기 ==========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 첫 장에 나오는 문구를 잭 제커시스의 대사에 인용했습니다.

'재산 꽤나 있는 독신 남자에게 아내가 꼭 필요하다는 건 누구나 인정하는 진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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