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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2.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하는 것들
The things we do for love.
누가 그랬지,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고.
그래. 그것처럼 하루가 지나가면 하루가 온다. 내가 슬프거나, 기쁘거나 따위는 이 거대한 세상에 아무런 흠 따위 주지 않는 듯 했다. 시간은 나의 슬픔을 배려하지 않고 무심하게 흘러간다. 모두에게 공평히.
요즘 불면증이 생겼다. 가끔 내가 아무 생각 없이 저지른 사교계의 행보들이, 나의 감정의 파국을 만들었지 않나 생각에 잠긴다.
물끄러미 창밖을 본다. 비는 그치지 않고 내린다. 나는 우울했다.
파문. 날카로운 빗발이 창문에 파문을 만든다. 하늘이 나 대신 울어준다고.
문이 천천히 열린다. 카밀의 발소리도 비에 젖었는지 눅눅하고, 미소는 비에 씻겨 없어졌다. 눈이 부운 것을 보니 밤새 운 모양이다. 나는 애써 카밀에서 웃어보이고,
“언니, 불렀어?”
“카밀.”
나는 테이블에 천천히 걸어가 앉는다. 카밀은 그나마 만들어낸 미소마저 차분히 지우고 내 앞자리에 앉는다. 우리 둘 다, 사랑을 잃었다.
세상에서 사람 하나가 지워졌는데 그 뒤로 홀로 남은 사람은 이렇게 힘들다. 아버지, 어머니, 그다음엔 우리가 사랑했던 남자. 이별은 몇 번을 해도 새로운 감흥으로 익숙해지지 않는다.
사람들은 흔히 말해, 사랑에는 무게가 있다고 한다.
그 보이지 않는 감정에, 무게라니. 웃기기도 하지. 하지만 때로는 보이지 않는 것들이 이렇게 다가와 우리의 어깨를, 머리를, 가슴을 짓누른다. 그래서 마음에도 병이 도진다고 하는 것이었나. 한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 온 몸에 힘이 없었다.
언젠가 미술 전시회에 가서, 어느 작가의 작품 〈기도하는 손〉을 본 적이 있었다. 우스꽝스러운 콧수염을 기른 미술관 직원이 내게 와서 말하기를. 같은 꿈을 공유하던 두 가난한 화가 중, 한 화가가 친구를 위해 평생 학비를 벌어 돈을 지원했다고.
‘그 친구의 도움을 빌어, 미술학교를 졸업한 유명한 화가가 드디어 친구를 찾았습니다. 마침 그 친구는, 그가 일하던 식당에서 친애하는 벗을 위해 기도를 하고 있었답니다.’
‘어떤 기도요?’
‘그가 말하길, 신이시여, 저의 친구가 열심히 공부해서 훌륭한 화가가 되게 해 주십시오. 그리고 당신의 영광을 위하여 많은 그림을 그릴 수 있게 해 주시고, 그의 앞길에 축복을 내리사. 그러나 저의 손은 이미 식당 일로 인하여 뒤틀리고 둔해져, 그림을 그릴 수 없게 되었으니 제가 할 몫까지 제 벗이 모두 할 수 있게 도와주십시오.’
그리고 기도하는 친구의 모습을 보았던, 그 유명한 화가가 친구의 손을 바라보는 그 때. 그는 형용할 수 없는 감정에 휩싸였다고 한다.
이미 부르트고, 갈라지고, 두툼해진 거룩한 두 손. 그는 친구의 두 손을 보고 즉시 스케치북을 펼쳐 제 벗의 기도하는 손을 그렸더랬지.
그리고 나는 그 이야기를 아직까지도 기억한다. 그리고 생각하기를, 저 사람은 참으로도 멍청하지. 제 꿈이고, 제 인생이 앞에 있는데 하나뿐인 인생을 제 친구를 위해 희생하다니. 그게 꼬꼬마 열세 살 때의 일이였다. 그때는 아무것도 몰랐을 나이.
사람은 태어나서 세상을 배우지만, 사람을 배우기도 하고, 감정을 배우기도 한다. 그러면서 조금씩 저런 것들을 마음에 새기고, 공감하고, 같이 눈물을 흘리게 된다.
그리고 희생이라는 선택지, 분명 이성적으로 생각했을 때 불합리할 길을 감정이라는 명목 하에 걷기도 한다. 친구를 위해 제 꿈을 희생한 화가가 바보라고 생각했던 열세 살짜리 소녀도.
이른 나이에 그리 많은 책임을 떠맡아야 할지 몰랐던, 그 열 세 살짜리 소녀도.
겪어 보니, 나는. 카밀만큼은 로징턴과, 가난, 혈통에 묶여 사랑을 잃지 않았으면 했다. 내가 겪어보니 하늘이 무너지고, 뭘 해도 재미없는 이 먹먹한 감정이라.
그래, 행복하던 카밀만큼은.
“이게 뭐야?”
나는 공작에게서 받은 수표를 카밀에게 내밀었다.
“네 지참금.”
“……언니.”
나는 웃어보였지만 카밀은 그렇지 않았다. 해맑아질 줄 알았던 카밀의 얼굴이 점점 어두워졌다.
“지금, 이게 무슨.”
그리고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발행인, 화이트 공작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네 지참금이야. 제롬 화이트 공작께서 자비를 베풀어…….”
“자비?”
카밀은 그대로 한참을 굳어있었다. 그리고 혼이 나간 얼굴을, 들어. 나를 바라보며.
“……언니, 지금 무슨 일을 저지른 거야?”
“아무 일도 없었어. 그냥 공작께서.”
“오, 그러니까. 이제 아무런 사이도 아닌 레이디에게 아무 조건 없이 3천 골드를 주셨다?”
“그래.”
나는 차갑게 가로막았다.
“네가 뭘 생각하든 아니야. 내가 말한 대로…….”
쫘아악.
나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카밀이 굳은 표정으로 수표를 두 조각으로 찢어낸 것이었다. 그녀는 내 표정을 바라보지도 않은 채로, 그 수표를 더 작은 조각으로 찢고 있었다.
사람이 너무나도 화가 나면 말이 나오지를 않는다는 걸, 인생 두 번째로 실감했다.
“카밀리아 아이레스 로즈!”
나는 그대로 책상을 박차고 일어났다. 너무 화가 나서 눈물이 새어 나왔다. 카밀리아는 내 눈을 바라보지 않았다. 그리고 찢어진 수표조각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너, 지금, 지금 그게 무슨 태도야? 어?”
분노가 터져나왔다. 곱게만 키우겠다는 카밀에게 내가 화를 내고 있었다.
“지금 뭐하는 거냐고 물었잖아. 대답 안 해?”
“뭐하는 거냐고? 수표 찢었잖아. 안보여?”
카밀리아가 악에 받혀 자리에서 일어났다.
“누가 이런 거 받고 싶대? 내가 그래서 공작 도움으로 결혼하면 언니 평판은 어쩔 건데? 사교계 사람들은 뭐라고 생각할거고! 게다가 내가 언니보다 먼저 결혼하면 안 되는 거라며! 난 그것도 모르고 있었어! 귀족 예법에 대해서 관심도 없었으니까!”
카밀의 눈에서 눈물이 새어나왔다. 나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내가 안하겠다고 했잖아, 결혼! 지참금 삼천 골드라니, 그게 말이 돼? 그런 집에 그 지참금 주고 가면 나는 행복할 것 같고? 그리고 언니는? 언니 그 사람 좋아하잖아…….”
카밀의 두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내 가슴이 미어졌다.
“그럼 그 사람한테 이런 빚을 지면 애초에 나중에 다시 시작하고 싶어도 그땐 동등한 관계가 아닐 텐데. 나는 그럼 언니가 그렇게 평생 힘들어하는 거 보고 살아야 돼? 빚지고 사는 거 평생 지켜만 봐야 돼? 왜 혼자 다 하려고 해? 왜? 언니도 조금 이기적으로 굴면 안 돼?”
나는 그대로 의자에 주저앉았다.
“생각해 봐.”
카밀은 그 말을 남기고 문 뒤로 사라졌다.
난 공허한 표정으로 내 팔만 가만 쓸었다.
시간이 흘렀다. 비가 그쳤다.
실내 공기는 텁텁했지만 문을 열면 차가운 공기가 내 뺨을 할퀸다. 곧 봄이 오려는 모양이겠지. 나는 이런 차가운 겨울 저녁 공기가 좋다. 시원한 공기를 쐬며 그대로 가만 앉아있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가끔 멍청한 판단을 한다. 그리고 그 결과가 잘못된 결과로 이어질 수도 있고, 그리고 우리는 결국 우리가 예상했던 곳에서 벗어나. 이상한 곳에 서있는 자기 자신을 발견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그래, 우리는 모두 사람이기에.
“하아.”
한숨을 내뱉으니 투명한 김이 창밖으로 뻗어나간다. 시간은 지나간다. 그리고 나는 이 무한한 시간 속, 무한한 가능성 속에 앉아 갈림길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
사람은 실수를 해 사람이지만, 그래도 그것을 고쳐 더 좋은 곳으로 나아갈 수 있기에 사람이다. 그래서 사람이 신과는 달리, 불완전하지만 동시에 아름다운 존재이고.
가끔 우리를 죽이지 않는 실수들은 우리를 더 강하게 만들어준다. 마치, 지금처럼. 나는 그대로 앉아있기보다는. 두려움에 떠는 세실리아 로즈의 세이프티 존에서 한 걸음 벗어나서.
“카밀리아.”
용기를 냈다.
“아까 너한테 언성을 높여서 미안해. 우리 얘기 좀 할 수 있을까?”
카밀리아가 기다렸다는 듯 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다음엔 그냥 여자들 이야기. 나는 카밀과 같이 침대에 누워 같은 천장을 보고 얘기하고 있었다. 우리 둘 다 또 막 엄청 울어서 눈은 붕어처럼 되어가지고.
그래도 내게 가족이란 이런 존재이다. 힘들 때 의지가 되고, 기댈 수 있는.
“그래서, 그 사람이. 막, 노을 속에서 내 기사가 되어주겠다고 하는 거야.”
그리고 여자들 끼리 모였을 때, 가장 재밌는 건 남자 얘기.
“그럼, 그때 반한 거야?”
“아니, 그냥 그때는 그 사람이 좀 예쁘고 기특하다고 생각했지. 뭐.”
“그 다음엔?”
“글쎄, 체스를 하는데 자꾸 그 사람이 이기는 거야. 한 번도 져주지를 않았지.”
“한 번도?”
“응. 그래서, 그냥 술은 들어갔고, 기분은 좋았고, 잔 너머에 있는 세상에서 제일 잘생긴 남자가 내 한마디에 쩔쩔매고 웃었다, 긴장하는 게 너무 귀여운데다. 내가 체스에서 한 번도 못 이겨본 게 화가 나서 그냥 그 사람을 침대에서 정복해버리고 싶었달까.”
카밀리아가 얼굴을 붉히며 꺄꺄거렸다. 나는 웃었다.
“뭐 어쨌던 다 지나간 이야기지만. 딱한 사람이야. 정말.”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럼 두 사람이 그렇게 뜨겁게 불타는데 못 만나는 이유가 뭐야?”
카밀이 말했다.
“언니는 적어도 결혼했을 때, 사악한 시어머니가 그 사람한테 있는 것도 아니고, 사교계의 꽃인 기 센 시누이가 있는 것도 아니고. 왜 둘이 잘 안됐는지 궁금한데.”
“어른의 사정이란다.”
나는 떫은 미소를 감추며 카밀리아의 코를 톡 건드렸다.
가끔 나처럼 등에 업은 게 많은 사람은 리스크가 많은 길을 걷고 싶지 않기도 하고. 영원에 기대어 인생을 걸고 올 인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내가 조금 더 다치기 전에,
여기까지만 하면 됐다고. 가슴에 화상을 입는 게 두려워 멀리 도망치는 건지도 모르지.
“우리 둘이 그럼 그냥 독신으로 늙을까?”
카밀이 말했다.
“뭐, 그러는 것도 나쁘지 않네.”
나랑 카밀은 그렇게 깔깔대며 웃었다. 정말 오랜만의 일이었다.
========== 작품 후기 ==========
이번 회차에는 뒤러의 〈기도하는 손〉 에 대한 일화를 인용해 상술하였습니다.
+) 수표는 현금이 아닙니다. 돈을 주는 자와 받는 자의 이름, 줘야 할 돈의 금액을 쓰고 돈을 받아야 할 사람에게 주면 수령인은 수표를 정산해주는 기관, 즉 어음교환소를 통해 현금을 받아가는 일종의 지불 수단입니다.
그래서 찢어도 공작님에게 경제적 손실이 가지 않습니다.
쉽게 말씀드리자면 세실리아가 은행에 수표를 들고가서 돈을 청구하지 않았기에 공작님 자산에서 손실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냥 세실리아에게 이런 돈을 주시오 하는 증명서가 두조각이 났다는 뜻이죠.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