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한겨울밤의 고백-24화 (24/108)

<--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하는 것들 -->

그 다음날 오후가 밝았다.

“난 에드거 경 따위 이미, 훠어얼씬 오래 전에 잊어버렸어.”

카밀이 티테이블에 놓인 비스킷을 하나 집어들어 물었다.

“세드릭 킹 왕자님이 세상에서 제일 최고야.”

세드릭 킹은 이 왕국의 왕자가 아니라, 요즘 제일 잘나가는 소설 〈왕자의 후원에 핀 장미〉 의 남주인공이었다. 그렇다. 나와 카밀은 오늘 오전, 식사를 하다가 똑같은 생각으로 눈이 마주친 것이었다.

쇼핑.

항상 슬픔을 씻어내는 쪽은 탕진의 즐거움이었다. 우리는 한가했고, 곧 생각을 현실로 옮길 수 있었다. 그래서 재빨리 식사를 마치고 대충 드레스를 입은 뒤 서점으로 향했다. 그리고 멜로 소설들을 (특히 가벼운 로맨스코미디) 바구니에 모두 쓸어 담았다.

‘여기부터, 저어기 끝까지. 다 마차에 넣어 주세요.’

가끔 인생은 이렇게 살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하고 싶은 것들에 과감하게 자신을 던져넣기. 아. 물론 내 가난이 책 가격을 감당할 수 있냐고 묻는다면, 우리 로즈 가문은 타 귀족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가난하다는 거지 책 여러 권 살 돈이 없다는 건 아니다고 답하고 싶다.

우리는 그래서 조용한 오후에, 책상에 간식들을 올려놓고 한껏 책에 취해 있었다.

“동감. 나는 빌헬름 공작님이 최고.”

창문을 타고 느긋한 햇빛이 방을 비추고 있었다. 오랜만의 휴식이었다.

그리고 늦오후에는 율리아가 찾아왔다. 율리아는 그녀가 좋아하는 노란색 드레스를 입고 있었고, 입술은 새빨간 색으로 물들였다.

“세실.”

그녀가 그 말을 뒤로 나를 꼭 끌어안았다.

“너 붕어가 다 됐구나.”

“응?”

“오늘은 남자 만나지 마. 눈탱이가 밤탱이가 됐어.”

그러면서 내 볼을 어루만졌다.

어제 좀 운 게 많이 티났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왜 티파티에는 안 나와?”

율리아는 좋은 친구였지만 호기심이 과하게 많았다. 마당발이었고, 입을 쉬게 두지 않았고, 그래서 뛰어난 영업 능력으로 제도에서 잘나가는 의상점을 하고 있었지만 가십의 신이라고 불릴 정도로 입이 가벼웠다. 그것 빼고는 좋은 친구다.

“어, 그게…….”

“아냐, 넌 말하지 마. 내가 말할게. 지금 남자 문제 때문에 마음 복잡한 거 맞지?”

“하하하.”

어색하게 웃었다.

“별 말을 하려고 하는 건 아니고, 내 의상점에 오시는 손님들이 네 소식을 많이 궁금해 해서.”

한마디라도.

잘못

하면.

죽음이다.

자, 세실. 호의적인 미소. 악의 없는 미소.

스마일. 액션.

“그래? 별 일 없었는데.”

“별 일 없긴 기집애, 지금 제도 여자들 다 너 이야기만 하고 있는 거 몰라?”

“아, 그……. 뭐?”

“당연한 거 아니야? 꼭 사교계에 세기별로 너 같은 애 하나 있으니까.”

“알아듣게 천천히 설명해 주면 안 될까?”

“공작 전하께서 약혼하셨는데, 그게 누군지 아직까지 사람들은 몰라.”

그리고 나도 모른다.

아니, 사실 율리아가 공작의 약혼녀가 누군지 모르면 이 제국에 그걸 아는 사람은 공작의 최측근 빼고는 없다고 보면 된다.

“뭐 이 나라 사람 아니면 타국 공주님이라도 되는 모양이지.”

이렇게 태연하게 말해놓고도 입이 좀 썼다.

“너 아냐?”

“아닌데.”

“그럼 말고.”

율리아가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사람들이 건국제 이후로 작년 유행 드레스들을 찾더라, 특히 빨간 거.”

“아?”

“그리고 이건 비밀인데, 다이애나도 빨간 걸 찾더라.”

“다이애나는 항상 파란색만 입잖아.”

“그렇지, 그리고 다이애나를 따라다니는 애들도 항상 파란걸 입는데, 어쩐지 다이애나가 빨간 건 없냐고 슬쩍 물어보더라고.”

잭 제커시스.

아마도 다이애나가 아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나는 좀 생각해봤는데, 네가 건국제에 입고 간 드레스가 빨강이었잖아.”

“그랬지.”

“그래서 그게 그렇게 유행인가 싶어.”

“우…연의 일치 아닐까?”

“그럴 확률이 좀 적어.”

율리아는 단호하게 이야기했다.

“그리고 이거.”

그녀가 가방을 뒤지더니 예쁜 연분홍 편지봉투를 건넸다. 그것을 받아들자마자 달콤한 향수 향기가 퍼져나갔다. 편지의 인장을 확인하자, 인장에 왕가의 마크가 새겨져 있었다.

순간 마음이 쿵 내려앉았다.

“야, 야. 나쁜 건 아니야. 그냥 샬롯 왕세자비께서 너를 보고 싶다고 했어. 나를 왕궁으로 친히 부르셔서 너한테 티파티 초대장을 전해줄 수 없냐고 물어보더라고.”

“나는, 왜?”

“왜긴. 네가 지금 화제의 중심이니까 말이지. 제국의 두 꽃을 양 손에 들고 있는 여자가 너니까 말이야. 나 같았으면.”

그녀가 책상에 놓인 내 책을 힐끔 바라보았다.

“지금 책이나 보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지는 않았을 텐데.”

로맨스를 꿈꾸는 율리아 슐츠다운 생각이었다.

율리아 로제니아 슐츠.

명망 높은 후작가의 첫째로 태어나, 위대한 부의 일부를 상속받아 제도의 중심. 그 노른자 땅에 부티크를 차린 율리아였다. 그리고 율리아의 사업은 대박이 났다.

다이아몬드 광산과 절대적인 부로 유명한 사교계의 꽃 다이애나, 잘나가는 부티크 슐츠 의상점의 율리아. 가끔 친구들이 너무 잘나서 곤란하다.

살아온 환경도 다르고, 인생도 다르고. 그래서 고민을 나누지 못할 때가 있다.

“고마워, 율리아.”

“네가 부럽다. 솔직히.”

율리아는 플라밍고처럼 목을 쭉 빼고는 겸연쩍게 말했다. 율리아는 자존심 하나만으로 제국의 정점이었다. 그래서 이렇게 율리아가 누군가가 부럽다고 말하는 게 나에게로서는 처음이었다.

“음, 그래. 고마워.”

“너네 동생도 말이야. 정말, 에드거 그린힐 그 사람 혼을 얼마나 쏙 빼놓았으면…….”

그때 층계를 오르던 발걸음 소리가 가까워졌다. 청각을 곤두세웠을 때 문이 거칠게 열렸다. 우리 둘은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갑작스러운 방문자를 바라보았다.

마스카라가 번져 눈물과 함께 흘러내리고 있는 다이애나 그린힐이었다.

“다이애나!”

“세상에, 기집애. 또 블랙잭에서 잃은 거야?”

다이애나가 눈물을 쏟아내며 고개를 저었다.

“우리 오빠, 에드거 그린힐이.”

우리는 숨을 헉 들이마셨다. 공기가 그대로 굳었다.

“술 먹고 말을 타다가 그대로 굴렀어.”

“그래서?”

내가 먼저 나섰다. 카밀이 이 이야기를 들으면 그대로 그 자리에서 쓰러질 터였다.

“아버지가 의사를 불러왔는데, 카밀리아와 결혼을 허락해주기 전까지는 치료를 받지 않겠대.”

“그래서?”

율리아가 눈썹을 말아올리며 재촉했다.

“내, 내가. 지금 갈 곳이 딱히 생각나지가 않아서, 흑. 오빠. 다쳐서 어떡해.”

나는 빠른 걸음으로 달려가 무너져내리는 다이애나를 안아들었다.

“세실, 내가 네 동생 불러올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지금 둘이 만나봐야 서로한테 도움 될 거 없어.”

“그럼 어떡한데?”

그때 다이애나가 나를 눈물이 가득 고인 눈으로 바라보았다.

“세실, 네가 대신 가서 오빠를 설득해줘.”

“내가?”

“도움이 될 지도 모르잖아. 제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마치 〈로제탐정단〉(내가 좋아하는 유명한 책 이름이다)의 미녀 삼총사처럼 다이애나의 마차로 향해 달리고 있었다.

아그니스가 지금 여기에 없어서 아쉬웠지만, 어쨌던 마차에서 마주치는 우리 셋의 눈빛은 무언가의 사명에 차 단단했다. 그리고 나의 미션은, 그리고.

언제나 그랬듯.

카밀리아의 행복이었다.

신이시여. 나는 기도했다. 부디 이번에 내가 이 미션에 성공하길.

어제의 비 오던 날씨는 환하게 개여, 하늘에서는 구름 뒤의 햇빛이 환한 햇살을 내보내고 있었다. 마차는 침묵 속에서 굴러가고 있었고, 나는 창문. 다이애나는 눈물. 그리고 율리아는 걱정으로 서로의 생각에 잠겨 있었다.

혹시, 살아가면서. 마음속에 작은 목소리가 당신을 간질여 본 적이 있는지. 길가를 서성이다, 문득. 아, 오늘은 좋은 소식을 기대해도 될 것 같은데. 라던가, 어느 날 갑자기. 오늘 저녁에는 왜 아무 이유 없이 케이크를 먹을 것 같지? 또는 좋지 않은 소식이 기다리려나…….

나는 지금 내 마음 속에, 조그마한 생각이.

이게 아마도 카밀리아의 행복에 있어서 그 시작이 되어줄 기회이진 않으려나.

다이애나는 아까부터 계속 내 옆에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나는 다이애나의 떨리는 손을 잡아주었다. 다이애나가 고맙다며 내게 기댔다.

내 동생과의 결혼을 반대하는 집에, 내 발로 걸어들어가다니. 평소 같았으면 정말 못했을 것이다. 아무리 나라도, 겁쟁이라 이런 일은 정말 딱 질색일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어제 결심하기를, 이 세상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용기를 내보기로 결심했다. 그것에 큰 용기가 필요한 건 아니었다. 왕의 목을 치거나, 바바라 마르커스에게 술을 먹고 나를 왜 그렇게 못 괴롭혀서 안달이냐고 따지거나……. 이런 것과는 다르게.

용기는 소소한 일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그것은 당신이 가진 소중한 것들에 정성을 다하는 것. 할 수 있는 일로부터 도망치지 말고 첫 걸음을 떼는 것.

마치 지금처럼 말이다. 다이애나의 저택으로 걸어들어가,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돌아오기. 나는 다이애나의 부드러운 손을 엄지로 쓸어주었다.

다이애나는 평소와는 다르게, 떨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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