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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울밤의 고백-35화 (35/108)

<-- 당신의 하루는. 오늘도, 흐림이었다. -->

와인을 좋아하지는 않는다. 그냥 귀한 사람들 접대할 때, 조금 비위 맞춰 마셔 준다던가. 아니면 가끔, 정말 가끔 파티에 나갈 때 분위기에 취해 마신다던가.

귀한 나으리들 취향은 정말 모르겠단 말이지. 잭 제커시스는 생각했다. 그냥 럼주 마셔도 괜찮을 것을 이게 뭐가 좋다고들 마셔댄다. 그는 2층 난간에서 환한 샹들리에 빛을 머금은 와인 잔을 조금 흔들어 본다.

“이야, 진짜 여기 있으니까 다 보이네.”

그러니까 그 여자가 왜 맨날 이곳에 올라와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 그는 웃었다. 이곳은 그녀가 제 동생을 감시하는 망루였던 것이다.

한참 즐겨도 좋을 나이인데, 세실리아는 항상 치열했다. 너무 노력했다. 노력하고는 안 되면 그대로 무너져서 일어날 줄을 모른다.

그게 저를 닮았다. 세상에 어울리지 못할 과한 노력가, 실패 메달리스트.

세상 사람들은 항상 잘해야 한다고 한다. 실패하면, 부진하면 그게 경험이라고 하며, 위로하고 격려하지만 결국 환한 빛나는 곳에 있는 사람은 꼭 성공한 사람들이었다.

그래, 그 환한 빛. 사업을 시작할 때의 자신은 마치 불에 뛰어드는 부나방이었다. 그 성공에 눈이 멀어, 빛나는 자리에 눈이 멀어. 항상 치열했다. 그게 정답인 줄 알았다.

그래서 쉬지 않고 달렸다. 게다가 노력이 보상받지 못할 세라면 제 자신을 자책했다. 한없이 무너트리고, 행복할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며 몰아붙였다.

하지만 그는 수많은 실패를 겪고, 처음으로 성공했을 때 제가 그동안 너무 성급했었다는 걸 깨달았다. 모두가 한꺼번에 잘 되는 것은 아니었는데, 주변 사람들의 성공에만 주목하기 급급해 모두가 제 속도가 있다는 것을 망각했다.

신데렐라는 왕자와 결혼하기 전까지는 저를 재투성이 엘라라고 생각했을 것이며, 어쩌면 이 파티장 속 세실리아 로즈 또한, 해피엔딩이 오기 전까지는 저를 '불쌍한 로징턴의 가주' 라고 생각하고 있을 지도 몰랐다. 항상 실패하면 스스로를 자책하며, 그 실패에 익숙해져 주위를 둘러볼 줄 모르면서.

그래서 여자만큼은 제가 한 실수를 똑같이 하지 않았으면 했다. 그 여자는 웃을 때 예쁘니까. 그냥 그 생각뿐이라서.

그녀가 일상의 소소한 행복에도 관심을 가지고. 좀 웃고, 항상 비틀어 생각하기보다는 더 좋은 시야로 세상을 보았으면 했고. 저는 옆에서 실패를 해도 괜찮아, 라고 말해줄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다.

우리는 모두 훌륭한 사람들이라서, 언젠간 다가올 해피엔딩만을 바라보고 지금을 불행하게 살기엔 이 시간들이 너무 귀하니까.

그는 제 손에 놓인, 줄기가 꺾인 장미꽃을 본다. 쓰리게 웃는다.

“이봐요.”

옆을 본다. 아는 여자다, 다이애나 그린힐. 세실리아 로즈의 친구였다.

“안녕하십니까. 레이디 그린힐.”

“나한테도 존대 안 써주면 안돼요?”

“그게 편하시다면야.”

“됐어요.”

그녀가 피식 웃는다. 잔뜩 취해서 미동에도 와인 향기가 훅 퍼진다.

“무슨 일이십니까?”

“그냥 알려드릴려고요.”

그는 그리고 와인을 또 마신다.

“나, 이제 당신 더는 안 좋아할거야.”

“오?”

“그래요. 나도 나 좋아하는 사람 만나서 행복 찾아갈거야.”

“이번 밤에 무슨 마법이라도 벌어진 모양이나 봅니다.”

“흠.”

그녀는 피식 웃으며 시선은 여전히, 파티장 바닥으로 고정해놓는다.

“내가 이렇게 멍청했을까, 문득 생각이 들어서.”

그녀는 공허하게 말한다.

“우리는 결국, 우리가 생각하는 그 사람일 뿐이에요. 그렇죠?”

“어쩌면요.”

잭은 어깨를 으쓱한다.

“어쩌면 우리는, 우리가 아는 자신보다 더 대단한 사람일 수도 있고.”

“…….”

“사람이니까 모르는거죠. 우리가 가진 가능성을 간과하고 살 수도 있는 거고.”

다이애나는 피식 웃는다.

“성공한 사람의 여유이죠?”

“아닙니다.”

“왜 그렇게 단언하시나요?”

“저도 수많은 시간동안 실패자였으니 말입니다. 성공이라는 일출이 일어나기 전에는, 우리는 모두 다 무언가에 실패하거나, 과거에 데인 사람이겠지 않습니까?”

“그래도 당신은 운이 좋네요. 부러워요.”

다이애나는 쓴 얼굴로 고개를 두어번 끄덕인다. 그리고는,

“당신 생각에 내 인생에도 그런 게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성공?”

“이미 충분히 부유하시지 않습니까?”

다이애나는 시선을 맞추지 못하고 눈을 내리깔았다.

“그래도 행복한 적은 없었는걸요. 그래, 배부른 소리다 생각하시겠죠. 당신은. 애초에 태생도 귀족이 아니었으니, 게다가 자수성가하셨으니 더더욱. 그런데 난 그러니까 정말 행복해 본 적이 없어요. 어렸을 때부터 나는 귀족 아가씨보다는 멋진 바다를 항해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그거 항해, 생각보다 낭만적이진 않습니다.”

“아, 내 말이 그게 아니잖아요!”

잭은 웃으면서 그저 그녀를 바라본다. 눈이 마주친다. 다이애나의 눈이 동그래진다.

“가끔 우리 주변의 한계를 인정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모두 인간인지라, 주어진 부, 환경, 능력, 운, 안에서 그저 최선을 다하고. 행복해질 방법을 찾는 거겠죠.”

“내가 오스카 슐츠의 아내가 되면 행복해질 수 있을까요? 항해사가 아니더라도?”

“…….”

“내게 확신을 줘요, 잭. 네?”

다이애나의 목소리가 떨렸다. 잭은 감히 그녀의 생각을 재단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그녀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도는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바로 그녀의 생각이 옳다고, 용기를 북돋워주는 것. 이미 이 대담한 레이디는 마음 속으로 결정을 내린 지 오래인 것 같아 보였다. 그는 조심스레 입을 뗐다.

“그곳에도 항해사의 길만치 행복은 있을 겁니다. 레이디께서 찾으려고 하면 말이죠. 게다가, 오스카 슐츠라면 정말 괜찮은 사람 아닙니까? 저는 레이디를 항해사보다는, 훌륭한 지략가로 알고 있을 텐데요. 당신은 그의 좋은 파트너가 될 겁니다.”

“내가 훌륭한 지략가인 건, 어떻게 알고요?”

“사람입니다. 성공의 열쇠 말입니다. 항상 제 주위에 있는 사람에 대해 아는 게 중요합니다.”

다이애나는 피식 웃었다.

“고마워요. 내가 듣고 싶은 말이었어요. 당신, 역시 좋은 사람이야.”

“감사합니다.”

“그래서 좋아했는데.”

“좋아해주셨어서 감사합니다.”

한숨을 쉰다. 그리고 다이애나는 남은 와인을 싹 다 들이킨다.

“어떻게 좋아하게 된 거에요? 그러니까, 세실리아를?”

“그러게, 제가 어떻게 그녀를 좋아하게 되었더라…….”

오랜만의 마실이었다. 업무를 끝내고 제도에서 과일을 좀 사고 있었는데, 주위가 소란스러웠다. 그는 그리고 피식 웃었다.

안에는 승마복을 받쳐 입고, 드레스를 걷어붙인 채 말을 타고 쏜살같이 어디론가 내달리는 아가씨. 그것도, 귀족 아가씨.

그는 그녀가 사라진 길거리로 걸어가 무언가를 주웠다. 모자였다. 하도 빠르게 달려서 제 모자가 날라간 건 안중에도 없을 것이다, 그 여자.

모자는 오래 썼는지, 조금 닳아 있었다. 그런 것으로 보아 부자는 아닌 모양이었다.

“누구래요?”

과일 가게 빌은 그저 허허 웃는다.

“그 유명한 로징턴의 가시, 세실리아 로즈 영애를 모르시는군요?”

“세실리아 로즈…….”

그는 모자를 손에 들고 공허하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건국제날 밤, 첫눈에 반했다. 정말. 그 여자의 옆에 서고 싶었다.

그냥, 완벽하지 않고, 어딘가 결여되어. 행복에서 필사적으로 저를 밀어내며. 행복할 자격 없다고 웅얼거리는 귀여운 여자. 그 여자한테, 행복을 찾아주고 싶었다. 저는 제 동화속 엔딩을 맞이했으니, 또 방법을 알고 있으니. 그녀에게 그 길을 보여줄 수 있었다.

“그냥, 첫눈에 반했습니다.”

그는 이야기한다. 그리고 사람들 사이에, 공작의 옆에 서 있는 세실리아를 본다.

어째서인지, 당신의 하루는 오늘도. 흐림이었다.

* * *

마르사 로렌스의 파티 하루 전 날 밤.

잭은 마르사가 준 예쁜 반짝이 초대장을 만지작거리며 로즈블룸의 문 앞에 있었다. 초대장은 예쁘게 흰 펄이 들어 있었다. 딱 마르사 같은 여자가 좋아할 것만 같은.

그는 초인종을 누르기 전에 목청을 한번 가다듬었다. 그리고 하늘을 보았다.

“예쁘다…….”

하늘은 정말 아름다운 새파란 빛이었다. 흰 달이 걸려있는.

그는 그리고 문고리를 두어번 딱, 딱 내리친다. 그리고 다시 크라바트를 정리한다.

“누구십니까?”

노쇠한 여인의 목소리였다. 아마 로즈블룸에서 일하는 하녀일 것이다.

“잭 제커시스가 왔다고 전해줘.”

“예.”

그리고 그 다음에 경쾌한 발소리, 문이 열린다. 하지만 그의 눈 앞에 있는 것은 정말로 아름다운, 금발에 푸른 눈을 한.

“언니는 지금 집에 없어요.”

카밀리아 로즈. 로징턴의 장미라는 소문이 무성할 정도로, 정말 아름답다.

“전해 드릴 거라도 있나요?”

“아, 아닙니다.”

그는 멋쩍게 머리를 긁적이며. 제가 들고 있는 꽃다발을 그녀에게 내민다.

“그냥, 세실에게 전해주십시오.”

“와아.”

카밀리아의 얼굴이 환해진다. 세실이 저 아이를 왜 그렇게 예뻐하는 지, 알 것만도 같았다.

“아, 맞다!”

카밀리아가 눈을 반짝인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그리고 경쾌하게 계단을 오른다. 곧 그녀가 돌아왔다. 손에 들린 편지와 함께. 잭 제커시스는 그 편지를 잘 알고 있었다. 제가 세실리아에게 보낸 것이었다.

“제 지참금이었죠? 이 편지.”

“아…….”

“훔, 훔쳐볼 생각은 없었어요! 언니 편지인데! 그런데 봉투에 너무 뻔하게, 부담 갖지 말고 동생의 행복을 위해 써 주십시오. 라고 적여 있잖아요. 그래서 제가 숨겼어요. 전 어차피 결혼, 안 할거에요. 가져가 주세요. 부탁이에요. 어차피 편지를 반송할 생각이었거든요.”

그는 그 편지를 조심스레 받아든다.

“정말, 이십니까? 어차피 제게는 별 의미 없는 돈입니다.”

“그건 공평하지 않은 거에요. 좋은 친구 사이에서.”

제 언니를 닮았다. 총명한 게, 아주 잘 키워냈다. 세실이. 대단한 사람이다. 카밀리아는 미간을 찌푸린다. 그리고 그에게 눈을 반짝이며 큰 비밀을 말하듯,

“있잖아요. 언니가 내일 밤에 열리는 마르사 로렌스의 무도회에 가요. 비밀인데, 거기 가면 우리 언니 있을거에요.”

그리고 주위를 둘러보며.

“제가 말했다고 하지는 마시고, 파트너가 없다고 했으니까 붉은 장미를 꼭 가져가세요!”

웃는다. 웃는게 세실리아를 닮았다, 누가 자매 아니랄까.

“감사합니다.”

그는 웃는다. 카밀리아가 고개를 끄덕인다.

닫힌 문 뒤로 뒤돌아 나와서, 그가 한숨을 쉬며 푸른 하늘을 본다. 그리고 웃는다. 마르사가 준 초대장을 만지작거린다. 그녀를 만나려면, 어서 빨리 준비를 해야 했다.

밀릴 일도 미리 처리해 놓고.

그는 달밤에 휘파람을 분다. 기분이 상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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