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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울밤의 고백-39화 (39/108)

<-- 새벽에서 아침까지 -->

방으로 돌아간 뒤, 그는 일찍 잠이 들었다.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이 내 앞에서는 저렇게 무방비하고 편한 얼굴로 천사같이 잠에 든다.

나는 그의 옆에 누워 그의 얼굴을 가만 바라보고 있었다. 굳게 닫힌 눈, 어떤 조각사도 감히 똑같이 빚어내지 못할 코, 부드러운 입술.

나는 그의 얼굴을 내 손으로 살짝 쓸어본다. 그 사람이 자다가 놀랐는지 미간을 조금 찡그린다. 나는 가만 내 손을 내려놓고 그를 바라본다.

한숨 쉰다. 나쁜 사람. 이 사람 덕에 쓸데없이 사람 보는 눈만 높아져서, 다음 연애는 누구를 만나야 행복할 수 있을지 감이 잡히지가 않는다.

나는 그를 바라보며 무거운 눈꺼풀을 몇 번이고 깜박였다. 정신이 젖은 솜처럼 무거워지고, 나른해진다. 눈을 감는다. 그의 볼에 내 손을 올리고, 완벽한 얼굴, 목 어깨를 가만 쓸어보며.

가지 마요. 생각한다. 가면 나는 혼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그는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 나는 그의 사랑이 영원할지 순간순간을 의심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서로를 사랑한다. 어쩔 수 없는 감정의 이끌림으로.

나는 가만 멀어지는 정신에 나를 내려놓는다. 잠이 든다.

***

눈을 떴을 때, 옆자리에 그이는 없었다. 그래. 바쁜 사람이겠지. 옷을 챙겨 입으려고 일어나자 그의 침대 옆 서랍 위에 못 보던 편지 봉투가 놓여있다.

‘나의 레이디께.’

나는 웃으며 편지봉투를 열어본다.

좋은 아침입니다.

옆에 있어주지 못해서 미안합니다.

그럼에도, 밀린 업무가 있어서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침대 옆의 줄을 당기면 시종인들이 올 겁니다.

앞으로 매일 당신께 이렇게 아침 편지를 적을 생각에 가슴이 벅찹니다.

-제롬 화이트.

나는 그 편지를 접어다가 다시 서랍 위에 올려두었다. 그리고 쓸쓸한 미소로 침대 옆에 있는 줄을 당겼다. 나는 대충 가운을 챙겨 입고 침대에 기대어 앉았다.

그리고서는 내 손가방을 뒤져 작은 약재 통을 꺼냈다. 내 배를 한번 쓰다듬어 보고서는, 그 약재 통을 두어번 만지작거렸다.

노크 소리가 들렸다.

“레이디, 아침시중을 들고자 합니다. 들어가도 될까요?”

“그래. 들어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녀들이 들어와서 내게 정중하게 고개를 숙인다. 그들은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몇몇은 장작불을 점검했고, 몇몇은 시트를 갈았고, 몇몇은 내 옷들을 주웠다. 나는 그 장면을 그냥 묵묵히 바라보고 있었다.

“레이디, 목욕시중을 도울…….”

“브리젯과 앤. 맞지?”

“예, 레이디. 기억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브리젯이 볼을 붉혔다. 나는 미소지었다.

“브리젯은 나를 따라오고, 그리고 앤은…….”

노란 머리 하녀가 나를 가만 바라보았다.

“따뜻한 물을 준비해줘. 티컵에 담아서.”

“마시는 물을 말하시는 건가요, 레이디?”

“응.”

“예, 알겠습니다. 레이디.”

앤이 빠르게 방문을 나섰다.

“저는 목욕물을 데워 놓겠어요.”

브리젯이였다. 나는 고개만 두어번 끄덕였다. 앤은 곧 내 분부대로 따뜻한 물을 찻잔에 담아 트레이에 받쳐 내게 가져다주었다.

“레이디가 부탁하신 따뜻한 물입니다.”

“고마워.”

“저도 브리젯을 도우러 가겠습니다, 그래도 될까요. 레이디?”

“그래.”

미소지어주고는, 약재가 담긴 통을 열어 티컵에 계량도 하지 않고 쏟아 부었다. 까만 약재가 수면에 잠겨 물 밑으로 가라앉거나 떴다. 나는 대충 잔을 흔들어 약재를 물과 잘 섞었다.

그 뒤로는, 호호 불며 바닥을 비울 때 까지 그 약물을 마셨다. 찻잔을 내려놓았을 때엔, 까만 물 한 방울만이 찻잔 아래에 남아 있을 뿐이었다. 나는 쓰게 웃었다.

그리고 다시 내 배를 두어번 쓰다듬어 보았다. 제롬이 그토록 원했을 아이였는데. 어쩌면 ‘우리’ 아이라고 부를만한 아이였을 지도 모른다. 남자였을 지도 모르고, 여자였을 지도 모를.

약재는 썼다. 나는 쓴 입을 몇 번이고 다셨다.

“레이디, 목욕물이 준비되었습니다.”

브리젯이 앞치마가 젖은 채로 뛰어왔다.

“그래, 고마워.”

나는 그들을 따라갔다. 그리고 다시 뒤를 돌아, 텅 빈 찻잔을 바라본다. 그리고 다시 앞을 보며, 브리젯의 뒤를 따랐다.

내가 한 선택이니까.

나는 슬퍼할 자격도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가운을 벗고 연기를 내뿜는 목욕물을 바라보았다. 그리고서는 발을 들어, 발가락으로 욕조의 목욕물을 콕 찍어보었다. 파문이 일며 뜨거운 물이 곧 고요해진다.

나는 조심스레 발을 담그고, 그다음에는 다리, 그 다음에는 다른 다리. 그리고 욕조에 천천히 앉았다. 온도가 익숙해지자 욕조에 내 몸을 뉘이고 눈을 감았다.

따뜻한 목욕은 항상, 너무 좋았다. 나는 이 온기에 내 자신을 내려놓았다.

“레이디, 따뜻한 물이니 부디 놀라지 마세요.”

머리에서 온기가 느껴진다. 적당한 온도의 물이 두피를 쓸며, 머릿결을 타고 천천히 바닥으로 떨어진다. 좋은 향료 향기가 풍겨오고, 내 머리를 조심스레 마사지하는 하녀의 손길이 느껴진다. 손에서 부드러운 스펀지의 촉감이 느껴진다.

“이름을 기억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레이디. 레이디 같은 좋은 분을 레이디 화이트로 모실 수 있어서 저는 정말 좋아요!”

“브리젯, 레이디께서 네게 묻지 않은 말은 삼가야지. 예의가 아닌걸.”

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천장에 위치한 예쁜 문양들이 천천히 눈에 들어온다.

“아냐, 괜찮아. 말해줘. 로드 화이트께서는 어떤 분이시니?”

“정말 좋은 분이세요.”

하녀가 할 법한 답변이었다. 당연했다. 제 주인이 모났건, 둥글건 하녀라면 필히 제 주인에 대해 사실대로 말하지 못할 것이었다. 그저 ‘좋은 사람이다’ 정도가 무난한 답변 아닐까.

“그렇구나.”

“정말 좋은 분이세요! 그런 분을 마스터로 모실 수 있어서 정말 감사한걸요. 그런데, 그런 분이 사랑을 하게 될 줄은 정말 몰랐어요. 항상 냉철하시고, 사무적이시고, 웃음이 적으신 분이셨는데, 레이디가 저택에 계실 때면 이 저택에도 빛깔이 생기는 것 같아요.”

마음 한 구석에 봄이 온 듯 따뜻해졌다. 나는 작게 웃었다.

“저는 그래서 너무너무 기뻐요! 그, 그러니까. 저택에 빛깔이 생겨서요. 레이디는 모르시겠지만, 마스터께서는 레이디가 오신 날이면 하루 종일 기뻐하세요. 자주 웃으시고요.”

“브리젯. 마스터에 대해서 함부로 얘기하는 건 좋지 않아.”

“괜찮아, 앤. 그 이가 싫어한다면 내가 이 이야기들은 비밀로 할게.”

나는 그러고서는 작게 웃었다. 내 팔을 닦고 있던 앤의 엄격한 얼굴이, 내 미소가 닿자 조금 부드럽게 풀어졌다. 나는 이 순간이 너무나도 편안하고 좋았다.

내가 정말로 레이디 화이트였더라면, 정말 좋았을 텐데. 하지만 이것도, 다 언젠가는 포기해 버려야 할 행복 같아서. 마음 한구석이 쓰라리다.

“고마워.”

나는 답했다. 아까 먹은 약재 때문에 속에서 쓰린 것이 올라왔다.

내가 욕조에서 나왔을 때에, 벌써 햇빛이 그의 큰 창으로 쏟아지고 있었고 새들은 오후를 노래하고 있었다. 나는 그림자가 진 거울 앞에 서서, 옷을 다시 차려입고 있었다.

“역시, 우리 레이디는 예쁘기도 하죠. 제가 수많은 레이디를 보아왔지만, 레이디가 가장 아름다우세요. 정말, 마스터께서 레이디를 아끼지 않을 수가 없다니까요.”

나는 브리젯의 칭찬에 옅게 웃어보였다. 브리젯이 내 뒤에서 리본을 매 주며 작게 미소지었다. 나는 거울로 그녀의 미소를 가만 바라보다가 손에 끼워진 반지를 보았다.

“레이디, 오찬을 준비하라고 할 까요?”

“아냐, 됐어. 대신 마차를 준비하라고 해 주렴.”

앤이 정중하게 고개를 꾸벅이고는 방을 나섰다. 브리젯은 연신 무언가를 조잘거렸다.

“마스터께 레이디가 떠나신다고 전해드릴까요?”

“음, 아냐. 그 이를 귀찮게 하고 싶지 않아. 그냥 부탁 하나만 들어주렴.”

“네! 무엇이든지요.”

“저어기, 침대 옆 서랍 위에 저 컵 보이니?”

“네!”

“저 컵, 아무도 모르게 네가 씻어서 원래 자리에 가져다 놓을 수 있겠니?”

“그럼요!”

“아무도 모르게.”

“아무도 모르게 가져다 둘게요.”

“고마워.”

그때 앤이 돌아왔다.

“레이디, 마차가 준비되었습니다.”

나는 웃으며 그녀의 뒤를 따랐다. 그때 내 뒤로 컵을 들어올리는 잘그락 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 소리를 애써 무시하며 걸음을 옮겼다. 좋은, 아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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