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느날 사랑하는 사람이 물었다. -->
어느날 사랑하는 사람이 물었다.
화이트 공작가의 오후는 유리컵 깨지는 날카로운 비명으로 요란했다.
쨍그랑.
갈색 머리 하녀는 바닥에 엎드려서 그저 흐느끼며 빌고 있었다. 라스트 바빌론의 집사는 그저 뻣뻣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리고.
쿵.
“꺅!”
공작의 책상이 뒤집혔다. 잉크가 엎어져 제멋대로 비싼 카펫을 물들였고,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던 서류들이 바닥에 흩어졌다. 그는 분을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자리에 서 있었다.
제롬 화이트 공작은 미간을 찌푸리며 제 머리를 거칠게 쓸어올렸다. 그리고서는 몇 걸음을 떼더니 그대로 한숨을 쉬었다.
그는 의자에 쓰러지듯 기댔다. 한 손을 쭉 펼쳐 엄지와 검지 사이로 제 이마를 짓누르며. 한동안 저택에 정적이 내렸다. 아무도 감히 말을 하지 않았다.
“다시, 한번.”
그가 분노를 짓누르며 말했다.
“다시 한 번 말해보거라. 저 찻잔에 담긴 약재가 뭐였는지.”
“전하.”
“말하라고 하지 않았느냐, 랄프 파커. 네가 유능하다던 내 평가에 대해 재고해봐야겠군.”
그리고 한동안 정적이 내려앉았다. 화이트 공작가의 유능한 집사장 랄프 파커는 정자세로 단정히 서 한참을 주저한 뒤에서야 입을 열였다.
“……학자들의 조사에 따르면, 피임을 돕는 약재라고 합니다.”
“그 약재가 레이디의 몸에 끼치는 악영향은?”
“흔하게는 구토나 메스꺼움, 심하게는 하혈이 멈추지 않을 수도 있다고 합니다.”
“……나가.”
그는 가만 눈을 감았다.
“그리고 앞으로 이런 일이 다시 일어난다면, 그때는 이 일을 숨기려고 했던 하녀, 그리고 그 가족까지 중징계 할 테니 레이디 화이트에 대해서라면 누락되는 보고가 없게 하도록.”
“명심하겠습니다.”
그리고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이어 감흥없는 눈빛으로 바닥의 하녀를 바라보았다. 하녀의 갈색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여있었고, 밝은 표정은 온데간데 없었다.
이름이 브리젯이었나. 그는 희미한 기억을 더듬었다.
그는 바닥에 천천히 앉아 그녀와 시선을 맞췄다. 눈이 마주치자 그가 싱긋 웃어보였다. 그 모습이 브리젯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공포를 주기에 충분했다.
“마, 마스터. 자, 잘못했습니다. 레이디께서 그저 찻잔에 대해서는 비밀로 해 달라 하시기에……. 저는, 정말 몰랐습니다. 그런 약재일 줄이야. 정말 몰랐습니다.”
“됐습니다. 변명은.”
그는 찬란하게 아름다운 그 얼굴에서 곧장 미소를 지웠다. 브리젯은 그런 그의 모습에 딸꾹질을 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계속 제 입을 틀어막으려 했지만 딸꾹질이 나오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그러자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폭포수마냥.
“그 차를 레이디 화이트에게 올린 것이 누구입니까?”
그는 차분하게 물었다. 브리젯은 누가 죽이기라도 한다는 듯 도리질을 하기 시작했다.
“아, 아닙니다. 전하. 올린 것은 애초부터 차가 아니었습니다. 그저 따뜻한 물 한 컵이었습니다. 제가 봤습니다. 욕실에서 문 틈 사이로요! 레이디께서 그녀의 가방에서 작은 약재 통을 꺼내는 걸요. 그리고 그 약재 통에 든 것을 찻잔에 섞어 직접 드셨습니다. 제발, 마스터. 이 집의 사용인들은 결백합니다. 저희는 모두 한 마음으로 레이디 화이트를…….”
“시끄럽습니다.”
싸늘한 목소리에 브리젯은 제 입을 틀어막고 흐느꼈다. 공작이 일어나서 제 의자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녀는 겨우 울음으로 터져나오는 숨을 틀어막으며 공포에 떨고 있었다.
늦은 오후의 찬란한 햇살, 그리고 석양이 섞여 찬란한 핏덩이 햇빛이 창 틈을 넘어 그를 감싸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뒤를 돌아 브리젯을 보았다.
“브리젯이라고 했습니까.”
“예, 예, 전하.”
“다른 하녀들이 그나마 브리젯이 내 세실리아와 대화를 많이 했다고 하더군요.”
“죽여주십시오, 전하! 정말 레이디께 그런 무례를 저지르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그는 한참동안 생각에 잠겨 있다가, 다시 느린 보폭으로 브리젯 앞으로 가까워졌다. 그가 천천히 고개를 낮추자, 브리젯이 헉 하고 숨을 다시 삼켰다.
그것은 미친 듯이 찬란한 그의 아름다움 때문이기도 했으나, 그걸 감싸고 있는 그의 강력한 힘 때문이기도 했다. 그가 천천히 시선을 낮추어 브리젯을 보았다.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다음부터 세실리아가 이 저택에 오면, 브리젯이 그녀의 시중을 들어 줬으면 좋겠습니다. 알겠습니까?”
“제, 제가 말입니까, 마스터?”
“예. 그리고 제게 세실리아가 했던 말들, 행동들, 그리고 마셨던 차들이나 먹었던 음식이 따로 있다면 그대로 보고해 주십시오.”
“아, 알겠습니다. 마스터. 기, 기꺼이 그러겠습니다.”
“좋습니다.”
그가 싱긋 웃어보였다.
“이만 나가 보셔도 좋습니다.”
브리젯이 후들거리는 다리로 간신히 예를 차리고 방 문 밖으로 사라졌다. 방에 혼자만 남자, 제롬이 낮게 읊조렸다.
“왜 그런 약재를 스스로…….”
그 때, 노크 소리가 그의 상념을 방해했다.
“전하, 집사 프레드입니다.”
“들어와.”
문이 열리고 단정하게 차려입은 사내가 들어왔다.
“레이디 피오나 그린힐께서 답신을 보내 오셨습니다.”
“무슨 내용이지? 확인해봐.”
편지를 뜯는 소리였다. 제롬은 공허한 시선으로 그저 허공만을 응시했다.
“물으셨던 레이디 카밀리아와, 로드 에드거의 결혼 날짜에 대한 답신입니다. 두 분의 의사에 따라 결혼 날짜를 잡긴 하겠지만, 이번 달 안으로는 식이 있을 거라고 합니다.”
“더 빨리…….”
“예?”
“됐어. 나가 봐.”
“방을 치울 하녀들을 불러 올까요?”
“……그래.”
문이 닫히자 그는 천천히 걸어가, 노곤한 햇빛이 들어오는 발코니 앞에 섰다. 그는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안절부절못하며 제 손가락을 꼼지락대며 차가운 금속의 감촉을 느꼈다.
그녀는 항상 제 옆에 있을 것 같다가도, 매일 떠날 준비를 한다. 언제든지, 시원하게 이별을 고하고 떠나 버릴 사람처럼.
같이 미래를 이야기하다가도, 뒤돌아서면 또 저를 이렇게 불안하게 한다. 애를 태운다. 그 여자 때문에 기분이 요 근래 이상했다.
한번도 냉정하지 않은 적이 없었는데, 사랑이라는 것이 그의 약점이 되어 파고든다.
숨이 막힌다. 감히 타인에게 보여주지 않는 제 친절과 애정을 퍼부어도, 제 선 안에 기꺼이 그녀를 들여도 그녀는 묵묵부답이다.
하지만 괜찮다. 그 가깝고도 먼 거리마저 그녀가 허락해주지 않았더라면, 그는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감정이 폭포처럼 밀려와 이성을 씻어내고, 정신을 어지럽히며, 저를 미치게 한다.
차라리 나를 증오하지, 미워하지, 싫다고 하지. 그러면 저도 제 멋대로 굴 수 있었을 텐데. 그녀가 제게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라고 하니 그 작은 마음의 불씨마저 꺼트리면 안 될 것만 같아서, 이렇게 겉으로는 태연한 척 하며 안절부절못한 채 누가 불면 꺼질까 그녀의 곁을 맴돌 뿐이었다.
결혼. 그래서 카밀리아와 에드거의 결혼은 빨리 거행되어야만 했다.
보통 율러 사교계 관습에 의하면, 첫째가 결혼하기 전에 둘째가 먼저 결혼하는 것은 악덕으로 여겨졌다. 첫째에게 결혼하지 못할 만한 결함이 있어서 여태 결혼을 못한 거라며 사람들이 숙덕였고, 남겨진 첫째와 결혼하는 것은 신사들 사이에서 불명예로 여겨졌다.
그러니 카밀리아가 먼저 결혼하면, 세실리아에게 구혼하려는 자들이 현저히 줄어들 것이었다. 그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자켓 속에 넣어두었던 편지 꾸러미들을 꺼냈다.
수신인은 모두 같았다. 세실리아 로즈에게 보내는 편지들이었다. 다 그녀에게 구혼하려는 신사들의 편지이기도 했다.
당연하지. 그는 생각했다. 다들 앞에서는 로징턴의 가시다, 뭐다 하면서 비아냥거리고는 뒤에서는 그녀의 아름다움을 숭배하며, 천년의 사랑이라도 될 듯 열렬하게 구애한다. 다들 앞에서는 점잖을 떨면서도 뒤에서는 못 가져서 안달이라니. 위선자들이란. 그는 비웃었다.
그는 쓴 미소를 지으며 그 편지들을 타오르는 장작 속으로 던져 넣었다. 그러니 나쁜 기억이 그의 뇌리를 비집고 올라왔다. 아, 그 건국제 날 밤. 겁에 질린 눈동자로 저를 바라보던 세실리아의 얼굴. 그때 그는 직감했다.
이미 한번 수를 쓰려다가 들켰다. 두 번은 분명 없을 것이었다.
게다가 비밀……. 그는 생각했다. 그녀가 디어뮈르 전투에서 일어났던 그 끔찍한 일들을 알게 된다면, 그녀는 저를 더 이상 바라보지 않을 것이였다.
다들 그렇듯 파멸을 몰고 다니는 괴물이라고 쑥덕이겠지. 앞에서는 그렇게도 위대한 화이트 공작이라고 찬양하면서도. 그는 쓴 웃음을 지었다.
저와 같이 참전했던 오스카를 벗으로 데리고 다니는 그녀라면 곧 자신의 비밀에 대해 알게 될 것이었다.
만일 그녀가 그 사실에 대해 알게 된다면, 이렇게 희미하게나마 이어지는 애정 따위도 기대할 수 없을 것이었다. 그는 초조한 눈빛으로 불타는 편지꾸러미를 바라보며 구두코로 바닥을 탁탁 쳤다.
이 방에서 왼쪽으로 세 번째에 위치한 그 방. 제 치부만큼은 그녀에게 들킬 수 없었다. 그러니 그녀가 알아내기 전에, 그 이전에 그녀를 잡아야 했다. 제게서 떠나갈 수 없게끔.
그러다 그는 피식 웃었다. 사랑이 이렇게 어려운 일이었던가. 역시 수없이 많은 일들 중에서 사람이, 그것도 제가 사랑하는 사람이 가장 어렵다. 어떤 권력과, 어떤 부와, 어떤 명성으로도 얻을 수 없는 것. 그는 한숨을 쉬었다.
다른 생각마저 들었다. 그녀가 혹시 좋아하는 다른 사람이 있는 건지. 그래서 저를 그렇게 못 밀어내서 안달인 건지. 그래, 그러고 보니 그 놈도 있었다. 파티장에서 연신 제 세실리아를 아련한 눈빛으로 쳐다보던 그 남자.
그는 주먹을 꽉 쥐었다. 만일 그렇다면…….
생각이 그 쯤 미쳤을 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이지?”
“전하, 블루 다이아몬드에서 편지가 왔습니다.”
“나중에 확인하지.”
“발신인이 레이디 세실리아 로즈입니다.”
제롬이 재빨리 고개를 돌려 문을 열었다. 집사는 눈이 동그랗게 뜨인 제 마스터를 가만 바라보며 곱게 접힌 편지를 그에게 내밀었다.
“여기 있습니다.”
제롬은 급한 마음을 감추지 않고 재빨리 편지를 낚아챘다. 그는 문을 닫고는, 그 편지를 제 가슴에다 한번 가져다 댄 뒤, 떨리는 손으로 인장을 떼어 편지를 확인했다.
바쁘신지 모르겠네요.
좋은 소식이에요. 아마도 알고 계셨겠지만, 카밀리아가 결혼해요. 도움은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요. 그린힐 가문, 카밀리아, 오스카 슐츠 백작과 같이 식사를 하려고 해요. 블루 다이아몬드에서, 오늘. 바쁘지 않으시면 같이 어울려 주시겠어요?
-세실리아
그는 재빨리 코트를 꿰어 입고는 문 밖으로 나섰다. 급한 걸음으로 문을 나서자 집사 랄프 파커가 뒤따랐다.
“마차를 준비하라고 하겠습니다.”
“됐다. 말을 타고 가겠다.”
그는 빠른 걸음으로 계단을 내달렸다. 그런 그를 보던 하녀들이 멈춰 서 속닥였다.
‘정말 사랑이라는 게, 무서운 건가봐.’
‘그러게, 그 공작께서 레이디 화이트의 편지를 받자마자 저렇게 급하게…….’
재빠르게 말을 타고 내달리는 그는, 생각에 가만 잠겼다.
어느 날 사랑하는 사람이 물었다.
그저 단순한 물음이었다. 식사 같이 하자고. 그랬는데, 그 물음에. 갑자기 어두웠던 머릿속이 환해지고. 끝없이 바닥을 쳤던 기분이 바뀌어 온 몸에 아드레날린이 돌았다.
그리고 생각하기를, 아니 그저. 당신밖에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저 온몸에 전율이 돋고 번개에 맞은 듯 짜릿했다. 그저 사람과 사람간의 일이었는데, 이렇게 단순한 편지가.
어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