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한겨울밤의 고백-43화 (43/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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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5.

사랑한다는 것은

What love is really all about

나는 현관문을 의식하지 않으려 하며 다이애나가 추천해준 소설책을 읽고 있었다. 요즘 꽤나 유명한 책이라, 모르는 영애가 없다고들 하는데 분명 재밌어야 할 책이 읽히지를 않았다.

까만 것은 글씨요, 하얀 건 종이라 글자만 대충 머릿속에 둥둥 떠다니는 것 같았다. 의미는 그런 대로 파악이 되는데, 몰입이 되지 않았다. 손이 차가웠다.

그 사람은 왜 편지에 답장도 하지 않는 걸까? 내가 이리로 오라고 했던 게 조금 건방졌나? 애초에 그 사람을 좋아하지 않았더라면 조금 더 과감하게 생각할 수도 있었을 텐데.

그래. 그 때, 내가 내 마음을 몰랐을 때엔 정말 이런 걱정 따위는 하지 않아도 되어서 좋았다. '되면 되는 거고, 아니면 말지' 와 같은 마음가짐으로 내 마음대로 행동했다. 하지만 좋아하다 보니, 새삼 모든 게 다 조심스러워졌다. 마치 새를 손에 쥐는 것만 같이.

너무 꽉 쥐면 죽어버릴까 걱정되고, 너무 살살 쥐면 날아가 버릴까 걱정되고. 마음대로 밀어붙이자니 갑갑하다면서 떠나버릴 것 같고, 무심하게 굴면 또 지쳐서 떠나버릴까봐 걱정된다. 하여간에 그 사람, 정말 안 오는 거 아닐까. 그러려면 제발 편지에 답장이라도 하지. 역시 안 올 거라니까…….

기대하지 말자, 바라지 말자, 그냥 지금에 만족하자. 이러자고 생각했는데, 이게 왜 이렇게 힘든 걸까. 그래서 애초에 그 사람을 밀어낸 건데. 사랑은 달콤하면서도 쓰다.

그때, 턱, 턱 문고리를 내리치는 소리가 났다.

나는 재빨리 책을 덮고 일어나 문가로 다가갔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주방에서 다이애나와 에드거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렸고, 블루 다이아몬드의 문 앞에 있는 것은 나뿐이었다. 올 사람들도 정해져 있는 차에 내가 문을 열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나는 재빨리 문을 열었다.

문 앞에 있었던 건, 그를 닮은 하얀 장미 꽃다발을 든…….

“오, 당신이군요.”

오스카였다. 다이애나의 현 약혼남 되시는 분.

오스카에 하얀 장미 꽃다발이라니, 정말 어울리지 않았다. 나는 문 뒤에 그를 보고선 그저 웃음을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그는 그런 내가 썩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제 아름다운 미간을 구겼다.

“미리 말씀드리자면…….”

나는 그가 말을 계속할 수 없을 정도로 계속 웃었다. 한번 터진 웃음이 멈추지 않았다.

“당신 주려고 가져온 거 아닙니다만.”

“아, 네에. 당연하시겠죠.”

“만나서 안 반갑습니다.”

“저도 다시 만나서 안 반갑네요, 오스카 슐츠 경.”

그는 피식 웃었다. 어쩌면 그는 어떻게도 이렇게 한결같을 수 있을까. 꼿꼿하고, 고지식한 그 인상에 숨겨진 작은 부드러운 미소. 그와 다이애나는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누구 기다리십니까?”

“네? 안 기다리는데요?”

그는 그 조각같은 얼굴로, 나를 가만 내려다보며 웃었다.

“문이 열리는 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리지도 않았으니 레이디가 있었을 곳은 정문 앞 저 의자. 책이 놓인 곳 옆에.”

그의 손가락이 내가 아까 앉아있었던 의자로 향했다. 역시 똑똑하다. 못 속인다니까.

“게다가 남의 집 정문에서 방문자가 누구인지 묻지도 않고, 빠른 발걸음으로 문을 달칵 열었다. 흐음. 그러면 분명하군요.”

“뭐, 뭐가요?”

“이랬을 때, 누구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결론이 나오는 게 당연한 거 아닙니까?”

그가 팔짱을 끼고 나를 나른한 미소로 내려다보았다. 나는 입술만 못마땅하다는 듯 삐죽였다.

“동생이요! 동생! 카밀리아도 올 거라고 했다고요!”

그가 웃기 시작했다.

“흐음, 그렇습니까. 동생이라.”

그러고서는 나를 지나쳐 걸어갔다. 그리고서는 그 자리에 잠깐 멈춰 서서는.

“그 사람에게 너무 빠지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하고는 멀어졌다. 순간 제롬을 기다리며 쌓아왔던 기대감이, 쿵. 하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나는 한동안 문을 닫지 않은 채로, 멍하게 오스카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오스카는 알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푹 숙이고는 문을 닫았다. 찬바람이 조금 들어와 실내 공기가 알싸해졌다. 나는 터덜터덜 다시 원래 자리에 가 앉았다. 한숨을 쉬었다.

회중시계를 꺼내 보니, 벌써 시침과 분침은 다이애나가 당당하게 내건 다섯시 삼십분을 지나 있었다. 나는 감히 책을 다시 펼칠 기분조차 느끼지 못한 채, 의자에 쓸쓸하게 앉아 있었다.

두 번째 방문자는, 카밀리아였다.

문고리가 턱턱, 하는 소리를 듣고 이번에는 서투르지 않게 대처했다. 2층에서 내려온 듯, 조금 뜸을 들이고, 문가에서는 최대한 발걸음을 사뿐하게 해 목청을 고른 뒤.

“누구세요?”

“언니!”

카밀리아였다. 문을 열자 카밀리아가 내 목을 감고 폭 안겼다. 그러자 카밀리아에 묻어있었던 바깥의 차가운 냉기가 내 옷에 스며들었다.

나는 그대로 카밀리아를 꼭 안고 있었다. 우리 카밀리아, 이제 카밀리아가 결혼을 한다. 그래서 내 곁을 떠난다.

이 시원하고도 섭섭한 감정으로, 나는 그녀를 꼭 안고 있었다.

“언니…….”

두 번째 목소리는 조금 떨렸다.

“카밀리아…….”

나는 그대로 카밀리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대로 감정의 폭포에 파묻혀 있었다.

아, 우리 카밀리아. 벌써 결혼을 다 하고. 네가 열 살 때, 이빨 하나 빠졌다고 그 어두운 방 안에서 이빨 요정이 올까? 내게 물은 게 어제 일만 같은데. 벌써 이렇게 다 커서.

“축하해. 정말로.”

카밀리아는 내 품에서 제 얼굴을 떼어 나를 보았다. 그녀의 두 눈엔 눈물이 맺혀 있었다. 그때, 그녀가 미소를 지어 보일 때, 나는 문득 깨달았다. 사람들이 왜 굳이 어렵다는 부모의 길을 자처해 걸어가는지.

저 얼굴. 그녀의 얼굴에 묻어 있는 감사, 행복, 그리고 고마움이 내게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리고 그 때, 이 세상 모든 기쁨을 쌓아도 그녀가 내게 보여준 그 감정의 색만큼은 찬란하지 않을 것만 같아서.

타인에게 받는 그런 감정은 돈이나 부귀로 감히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라서. 그 마음 벅차는 떨림은 이 세상에 내가 혼자일 때 누렸을 행복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것만 같아서. 이 순간이 내게 그저 찬란했다.

“고마워 언니. 항상 이 말을 하고 싶었어.”

나는 작게 웃어보였다. 그때 구석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직 식은 올리지도 않았는데, 얼마 떨어져 있었다고 벌써부터 정겨운 가족 상봉입니까?”

오스카였다.

“카밀리아…….”

그리고 에드거.

카밀리아는 내 손을 놓고, 식당 문 앞에 서 있는 에드거에게 그대로 달려갔다. 나는 뛰어가는 그녀의 뒷모습, 그리고 흔들리는 예쁜 금발머리를 그저 가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가 에드거에게 조심스레 안겼다. 에드거는 카밀리아를 부드럽게 끌어안았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두 예쁜 커플을 나붓이 바라보았다.

“난 항상 저 둘이 마음에 들었어.”

어느새 옆에 온 다이애나가 거들었다.

“응.”

나는 감정에 벅차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공작님은…아직이셔?”

“역시 그래.”

나는 피식 웃었다. 그리고 부러 뽐내듯 말했다.

“두 사람, 완전 잘못 짚었어. 이제 에드거의 성 세 채와, 오스카가 선물한 그 다이아몬드 콜렉션은 곧 내 수중에 있을 거라는 말씀이지.”

“앗. 역시 사랑은 통한다더니. 공작님께서 딱 그걸 알고는 일부러 안 오시나보다.”

답례로 작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슬퍼보이지 않으려고 애썼다.

“저녁 다 됐어. 가자.”

다이애나가 내 손목을 잡았다. 나는 고개를 조금 저었다.

“아냐. 따로 갈게. 네 방에 책도 다시 끼워놔야 하고.”

그녀는 책과, 나를 번갈아 보더니 고개를 가만 끄덕였다. 사실 책은 핑계였다. 저 커플들 사이에 끼면 괜히 부러워질 것만 같아서. 내가 분위기를 망칠 것만 같아서.

시간이 필요했다. 괜찮아질 시간. 나는 책을 천천히 집어들었다.

“응, 그래. 그러면 나는 먼저 가 있을게.”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다이애나가 천천히 오스카에게 걸어갔다. 걸음은 빨라지고, 끝에는 달리기였다. 그녀가 오스카의 손을 잡자, 오스카가 멈칫 하더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얼굴 빨개졌어.”

다이애나가 귀엽다는 듯이 미소짓자, 오스카가 귀는 새빨개져서 고개를 돌렸다.

“더워서 그럽니다.”

다이애나가 입술을 쭉 찢어 시원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서로를 마주보는 커플의 모습이 아름다워보였다. 나는 층계 손잡이를 쓸며 천천히 2층으로 걸음을 옮겼다.

눈물 한 방울이 볼을 가르는 건 어쩔 수 없다. 사랑을 하면 눈물이 많아진다. 여태껏 많은 일을 겪어왔어도, 눈물 한 번 보인 적 없었는데. 왜.

나는 한숨을 쉬었다. 계단에 멈춰선다. 실내의 공기가, 아주 느리고 부드럽게 떨어진다. 고개를 숙이고, 다시 걸음을 옮기려 했을 때.

턱, 턱. 문고리를 내리치는 소리가 들렸다.

눈이 동그래졌다. 주위를 둘러보니 사람은 없었고, 대문 앞에는 나 혼자였다. 나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계단을 내려가, 문 앞으로 가까워졌다. 아무 말 없이, 문고리를 당기니.

그가 있었다.

우리는 아무 말도 없이 서로를 그저 바라보고 있었다. 제롬은 급하게 말을 타고 왔는지, 머리에 땀이 나고 있었다. 내 손이 문고리에서 천천히 떨어졌다.

“제가 너무 늦지 않았어야 했는데, 늦었습니까?”

나는 천천히 고개를 흔들었다.

“다행이군요.”

그가 웃어보였다.

“편지를 보자마자 최대한 빠르게 달려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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