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한겨울밤의 고백-55화 (55/108)

<-- 어둠을 부수고 불타오르라 -->

“어머, 저 예쁜 친구는 누구?”

마르사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카밀리아는 그대로 굳어서 문 앞에 가만 서 있었다. 나는 카밀리아를 가만 바라보았다. 우리 대화 내용을 어디까지 들었을까.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카밀리아는 제롬의 악행을 알아서는 안 된다.

“세상에, 언니. 이 사람 내가 아는 그 사람이 맞아?”

“안녕. 난 마르사 로렌스야.”

“언니! 언니 마르사 로렌스랑 친하다고 얘기 안 해줬잖아.”

“그랬니? 네 언니랑 나는 단짝 친구가 될 거란다.”

“말도 안 돼! 자비로운 율러의 모든 신이시여!”

카밀리아가 내게 재빨리 달려왔다.

“잠깐 저희 좀 실례할게요.”

그리고 나를 끌다시피 해서 식당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충분히 식당에서 멀어졌을 때, 층계 아래에서 카밀리아는 내게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언니, 마르사 로렌스가 우리 집에서 뭐 하고 있는 거야?”

“그게……. 카밀리아.”

“둘이 친해?”

“많이…는 아니고.”

“둘이 같이 어디라도 가는 거야? 아니면 그냥 대화?”

“그게, 같이 어디 가자고 하더라고. 거절할 생각이었어.”

“언니!”

카밀리아의 목소리가 커서 나는 화들짝 놀랐다.

“저기 앉아있는 건 마르사 로렌스잖아.”

“그래서? 내일은 네 결혼이잖아.”

“젠장할, 언니. 우리 평생을 지긋지긋하게 서로를 보면서 보내왔잖아. 언니도 좀 쉬어야지. 이런 재밌는 기회를 내가 언니에게서 빼앗으려 했다니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야.”

“카밀리아, 나한테 있어서 더 중요한 건 네…….”

“쉿!”

카밀리아는 반짝이는 눈으로 내 입을 막았다.

“오늘 로즈블룸은 내게 맡겨. 그리고 언니는 즐겁게 놀다 와.”

“말도 안 돼. 난 아직 네 드레스를 보지도 못했고…….”

“드레스는 내일 신부 대기실에서 봐도 충분하잖아! 언니, 마르사의 라리아 궁이 얼마나 멋진지는 알아? 인간이 빚어낸 천국이라고들 해. 마르사가 예쁜 것들에 수집벽이 있어서, 이 세상에 곱고 반짝이는 것들은 다 살아 숨쉬는 채로 거기 박제되어있다고 하잖아.”

마르사의 라리아라면 유명하다. 그 아름다운 정원과, 성, 그리고 들어오는 사람은 있어도 나오는 사람은 없다는 그 신비주의.

모두가 한번쯤 들어가 보기를 소망하지만, 마르사의 선택을 받은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들어가 봤다는 사람이 뿌린 근거 없는 헛소문이 유일한 정보인 곳. 온통 구름에 둘러싸여 있어서 ‘구름 사이의 성’ 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몇몇은 그곳에 유니콘이 살고 있을 거라며 우스갯소리로 말하기도 할 정도로 성은 신비로운 율러의 예술품이었다. 게다가 성 자체가 모든 예술품과 진귀한 것들의 보석함인 곳이다. 그 사실을 상기하자 그런 곳에 흥미가 생기지 않을 리가 없었다.

라리아 궁이라. 말로만 들어 봤는데, 정말 그곳에서 하루를 보내는 느낌은 어떨까. 게다가, 나는 어쨌든 제롬의 비밀을 지키고 싶었고, 카밀리아까지 괜찮다면야…….

“언니, 제발 조금 쉬어. 평생 내 옆 지키느라고 힘들었던 거 알아. 돌아와서 라리아에 대한 모든 걸 알려줘. 나랑 상자 포장지 뜯으면서 오후를 보내는 건 평생 할 수 있잖아.”

이때 깔끔한 구두소리가 가까워졌다. 우리는 소리의 근원지를 바라보았다.

“대화는 모두 끝났나요? 나, 조금 지루해지려고 해서.”

“언니가 간대요!”

카밀리아가 내 등을 떠밀었다.

“어머, 정말? 카밀리아 양은 정말 친절하군요.”

마르사가 내 팔에 팔짱을 꼈다.

“그럼, 세실리아를 빌려갈게요. 고마워요.”

“가요.”

나는 마르사를 힐끗 보았다. 카밀리아가 손을 흔들어 주었다. 모든 게 너무나도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다. 그녀의 깔끔한 구두굽 소리만이 로즈블룸에 낭낭했다.

페넬로페가 문을 열자, 동화를 찢고 나왔을 것 같은 몽환적인 푸른 마차가 마당에 서 있었다. 봄이 오고 있었는지, 햇빛은 따스하게 마차를 덮고 있었고 깃털을 귀에 꽂은 네 마리의 백마는 푸레질을 하며 발굽으로 땅을 조금 파고 있었다.

“와.”

“왜 놀라는 거죠?”

내가 마르사를 돌아보자, 마르사가 궁금한 듯 고개를 조금 옆으로 틀었다.

“마차가 너무 예뻐서…….”

마르사가 깔끔하게 까르륵 웃었다. 웃음소리가 너무나도 깨끗해서 선명한 유리 깨지는 소리보다도 더 맑았을 것이다.

“세실리아, 세실리. 세실리라고 불러도 되죠?”

“상관없어요.”

“세실리는 너무 귀여워요. 정말 귀여워.”

그녀가 천천히 마차로 걸음을 옮겼다. 나는 딸려가듯 그녀 옆을 쫓았다. 마차가 가까워지자 나는 마차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푸른빛의 반짝이는 마차는 현실이라기에는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세상에, 그리고 나는 마차가 왜 멀리서도 반짝였는지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온 벽면이, 푸른 보석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크고 작은 보석들이 촘촘하게 마차에 박혀 있었다. 보석으로 만든 마차였다. 나는 마차 벽을 천천히 쓰다듬어 보았다. 칼라일 공작가의 인장이 창문을 사이에 두고 다른 색색의 보석으로 수놓아져 있었다.

“안 타요?”

마르사가 매혹적인 붉은 입술을 끌어올렸다. 그늘 속의 그녀는 이 세상의 사람이 아니라고 해도 될 정도로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웠다. 그녀의 곱슬거리는 짧은 백금발과, 흰 피부, 진한 눈썹과 매혹적인 붉은 입술은 그녀를 짓궂은 천사처럼 보이게 하기 충분했다.

그녀와 하얀 드레스는 정말 잘 어울렸다. 그녀는 거의 흰 빛에 둘러싸인 사람이었다.

나는 멍한 얼굴로 마차에 탔다. 이 세상에서 가장 빛나는 사람은 제롬이라고 생각했는데, 제롬의 여자 버전이 있다면 그게 마르사일거라고 생각했다. 마르사는 여자인 내가 봐도 정말 아름다웠다. 샬롯을 봤을 때의 충격을 잊어버리게 할 만큼.

“무슨 생각해요?”

“아, 그냥 이것저것이요.”

“이리로 와요.”

마르사가 제 옆 자리를 툭툭 쳤다. 그곳으로 가자 마르사의 히아신스 향이 훅 퍼져왔다.

“우리 세실리아는 생각이 너무 많아요.”

그녀가 시원하게 웃어보이며 나를 내려다보았다.

“생각을 하지 않으면, 얻을 수 있는 게 너무나도 많은데. 나랑 정 반대야.”

“어, 네.”

나는 멋쩍게 웃어 보이며 그녀로부터 조금 떨어져 앉았다.

“그래서 우리 어디로 가나요?”

“라리아.”

그녀는 깔끔하게 말했다.

“대낮에 여자 둘이서 갈 만한 환상적인 곳은 그곳밖에 없지 않나요?”

“맞아요.”

“도착하기까지 조금 오래 걸릴지도 몰라요. 깊은 곳에 있어서.”

“내일 동생의 결혼식이에요, 마르사.”

“잠깐만.”

마르사는 맞은 편 의자 위에 있던 피크닉 바구니를 들고 다시 제자리에 앉았다. 그녀는 좋을 대로 와인병의 코르크를 뽑아, 익숙하게 제가 들고 있는 와인잔에 부어댔다. 와인이 잔 안에 적당히 차자, 그녀가 나를 보았다.

“와인?”

“아, 아뇨.”

그녀는 와인을 한 모금 마시고는, 무언가가 떠올랐다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

“세실리, 뭐라고 했나요?”

“내일 동생의 결혼식이라고요. 너무 멀면 안돼요. 해 지기 전에는 다시 로즈블룸에 있을 거예요, 게다가 술도 안 돼요.”

“한 모금 마시는 건 괜찮지 않아요?”

“라리아가 그렇게 먼가요?”

“재미없게 굴지 마요, 시시.”

마르사는 와인잔을 깨끗이 비우고는 새 잔을 꺼내 와인을 채웠다.

“일단 마셔요. 라리아가 그렇게 멀지는 않아요.”

“안 마시고 싶다면요?”

“술 없이 당신 남자 얘기 할 수 있나요?”

“…….”

“하고 싶은 말이 많지 않나요? 당신 남자 때문에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텐데, 사람들은 그 고통을 모르잖아요. 그렇지 않아요? 아마 쌓인 것이 차암 많았을 텐데.”

그녀의 붉은 손톱이 팔을 부드럽게 움켜쥐었다. 그녀가 내게 잔을 내밀었다. 마치 영혼을 팔라 말하는 악마처럼, 그녀는 매혹적으로 웃으며 내게 그것을 건넸다.

나는 두 손으로 그것을 받고서는 그 위에 흐릿하게 비친 내 얼굴을 보았다.

“하루 정도는 쉬어도 괜찮아요. 당신 동생이 말했잖아.”

“어디까지 들은 거예요?”

“글쎄요, 세실리.”

그녀가 붉은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내가 어디까지 알고 있을까요?”

“……원하시는 게 도대체 뭔가요?”

“흐음.”

그녀가 뜸을 들였다.

“역시 말하면 재미없죠. 마셔요.”

나는 말없이 와인잔을 비웠다. 얼굴에 화기가 훅 올라왔다. 마르사가 그 사이에 잔을 또 채워 주었다. 내 손이 떨리고 있었다. 내가 그녀를 바라보자 그녀가 예쁘게 웃어보였다.

“또. 또, 마셔요. 한 잔으로는 힘들잖아요.”

“…….”

“내가 잡아먹을까봐?”

참 무시무시한 말을 그녀는 빙글빙글 웃으면서 했다.

“그럴 리가. 여자 취향은 아니에요. 예쁜 건 좋아하지만.”

“그렇다고 하셨더라도 믿기 힘들지는 않았을 거예요.”

마르사가 또 다시 그 깨끗한 웃음을 웃었다.

“그러니까 마셔요.”

나는 또 다시 잔을 비웠다. 꽤 독한 술이었는지, 취기가 올라왔지만 오기로 마셨다. 목이 타는 것 같고 정신이 울렁였다. 마차가 흔들리고 있어서 더욱 속이 좋지 않았다.

그러나 기분은 좋아졌다. 고민에 대해서 고민하고 싶지 않았고, 마치 뽀송뽀송한 이불 속에 둘러싸인 듯 몸이 편해졌다. 마르사는 그새 다시 잔을 채워주었다. 나는 말없이 마셨다.

“그 동안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그런 강력한, 강력한 남자가 감당하기 좋은 상대는 아니죠. 세상에, 이 세상을 속이면서까지 당신을 얻겠다니. 얼마나 로맨틱하면서도 끔찍할까.”

나는 말없이 빈 잔을 내려다보았다. 마르사는 또 다시 그것을 와인으로 채워 주었다.

“나도 알아요. 나도 알죠. 나는 조금 상황이 달랐지만, 결국 비슷하거든요. 벤, 그이는 아주 내게 끔찍하게 집착했어요. 내가 열아홉,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을 때였죠. 그의 정원사를 사랑했어요. 음, 그래 이런 겨울이었을 때. 나는 도망치기로 했어요, 그 정원사와.”

마르사는 무언가를 회상하는 얼굴로 제 배를 쓰다듬었다.

“왜요?”

나는 물었다.

“왜 도망치기로 결심했나요? 그럼 벤 칼라일 대공전하를 사랑하신 게 아니었나요?”

“사랑했죠.”

그녀는 앳된 얼굴로 답했다. 고통스러운 기억이었는지, 와인잔을 깔끔히 비우며.

“하지만 그는 나를 사랑하지 않을 거였어요. 그 사람은 대공이었고, 나는 그의 코르티잔이었으니까. 그 때, 그의 정원사는 내 좋은 벗이 되어주었어요. 나는 곧 공허한 내 마음을 채워준 그를 사랑하게 되었고, 우리는 대공 몰래 사랑을 나눴죠. 그리고 나는 곧 내 실수를 깨닫게 된 거였어요. 나는 곧 어머니가 될 거였죠.”

그녀의 표정은 고통에 차 있었다.

“누구 아이였나요?”

“몰랐죠.”

그녀는 깔끔히 답하며 또 와인을 마셨다.

“애초에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어요. 벤이 알게 되면 그 아이와, 나는 죽을 거였어요. 혼외 자식은 상속에 있어서 아주 골머리를 썩이는 존재거든요. 그때 덴버가 나보고 도망치자고 했어요. 애 아빠가 누구든 아버지가 되어주겠다고. 그는 좋은 사람이었죠. 나는 그를 따랐어요.”

몽롱한 기분에 나는 모든 일을 잊고 그녀의 말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래서 어떻게 됐나요?”

“내가 이곳에 이렇게 살아가고 있으니, 결말은 이미 뻔하지 않나요?”

그녀가 한숨을 쉬며 마차에 기댔다.

“덴버는 그 겨울에 내가 보는 앞에서 목이 잘려 죽었어요. 아이는 내 뱃속에서 죽었어요. 그러지 않기만을 바랬는데. 의사는 내 정신상태에 대해 왈가왈부했지만 결국 벤이 내게 준 음식, 차에 섞인 약초 때문이었을 거예요. 아이가 죽은 건.”

“…….”

“그럼에도 내가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었던 건, 내가 가장 사랑하던 두 사람을 무참히 죽여 버린 그 남자를 보면 아직도 가슴이 뛴다는 거죠. 그를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었어요. 끔찍하죠.”

그녀가 조소하듯 피식 웃었다.

“그 이후에 그는 내게 모든 것을 주었어요. 라리아, 이 마차도, 내가 갖고 싶다는 것은 뭐든지. 바라기만 하라고 했죠. 나는 그때 그저 생각하는 걸 그만 뒀어요. 그냥 편해지고 싶었죠.”

“…….”

“그저 벤의 궁에서 하녀로 꿈꾸기만 하던 시절이 가장 행복했던 것 같아요. 주인님을 몰래 흠모하는 어린 하녀. 하지만 그 때로 돌아가도 똑같은 선택을 했을지…….”

그녀의 눈이 꿈에 젖어 있었다. 나는 침을 꼴깍 삼켰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제게 해주는 이유가 뭔가요.”

마르사는 힘없이 눈을 굴려 나를 보았다.

“내가 벤을 사랑했을 때, 벤은 항상 그의 옆에 격이 맞는 약혼녀가, 아내가 있었어요. 그리고 당신 남편 되실 분도, 사실 옆자리에 내정된 ‘진짜’ 신부 되실 분이 있거든요. 당신은 모르죠?”

“말도 안 돼요. 그 사람, 분명 애인이나 여자, 약혼녀가 없다고…….”

마르사는 피식 웃었다. 그녀가 천천히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세실리아 로즈, 이 정말, 정말, 정말 순진한 여자같으니라고.”

“거, 거짓말 하시는 거죠? 그 사람이 그럴 리가…….”

“놀아줘요.”

그가 내 손을 꼭 붙잡았다.

“그럼 얘기해 줄게요. 제롬 공작의 옆자리에 설 여자에 대해서. 오랜 신탁 얘기인데, 지루하진 않을 거예요.”

정신이 혼란스러웠다.

“약속해줄게요. 내 말은 진짜야.”

마차가 멈춰섰다. 나는 마르사의 와인 잔을 빼앗아, 그것을 비웠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