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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울밤의 고백-66화 (66/108)

<-- 어둠을 부수고 불타오르라 -->

그의 검은 무거웠기에, 나는 그것을 거의 바닥에 질질 끌다시피 해서 마르사 앞으로 향했다. 생명도 참 질기지, 그녀는 몸을 부들부들 떨며 고통에 몸서리치고 있었다.

“유언이라도 남기시겠어요?”

나는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천천히 웃어보였다. 그것은 분명한 비웃음이었다.

“너는…….”

“…….”

“분명, 흑, 불행…….”

그녀가 핏덩어리를 토해냈다. 그녀의 얼굴이 새하얗게 변했다.

“신, 신탁대로……. 모든 건 분명 신탁대로.”

“편히 가세요.”

칼이 그녀의 복부에 내리꽂혔다. 그녀가 차가운 바닥에 피를 토하고 축 늘어졌다. 칼을 빼자마자 몸에 힘이 쭉 빠졌다. 무너져내리는 내 몸을 단단한 손이 받는다.

챙그랑. 바닥에 칼이 구르는 소리와 함께 정신이 천천히 흐려진다. 너무 무리했다. 품에서 나는 제롬의 체향이 마음을 편안하게 했다. 그 때 갑자기 베개 속에 넣어놓았던 그 약포지 생각이 났다. 나는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열심히 달싹였다.

“베개. 배게 안에 약포지, 2층에…….”

그때 방 안으로 들어오는 여러 장정들의 발걸음 소리가 났다. 제롬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린다.

“2층에 있는 모든 방의 베개를 수색한다. 배게 안 약포지를 찾아 가져와라.”

어지러웠다. 그럼에도 버텼다. 그래야 했다.

화려했던 라리아 궁이 그날, 불탔다. 끝나지 않는 새벽을 부수는 해처럼. 숨이 막혔다. 나는 그 광경에 압도되어 불에 삼켜진 궁과, 솟아오르는 연기, 그리고 그것을 받아 삼키는 새카만 어둠인 하늘을 바라보았다.

제롬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숨을 죽이고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본다. 시선이 마주친다.

“저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모르겠다. 너무나도 많은 일이 일어났다.

그때, 목소리가 들렸다.

“전하!”

병사가 투구를 벗고 제롬에게 한쪽 무릎을 꿇는다. 제롬은 아무 말 없이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에 내가 알던 그가, 미소 짓던 그가 아닌, 완연한 군인의 모습이다.

“일어나도 좋다. 고하라.”

“시신을 수습했습니다. 보고받은 마르사의 수집품, ‘리오’ 와 ‘리오네’ 라고 불린 시신은 남자 아홉, 여자 아홉 모두 거둘 수 있었습니다.”

“사망 경로는?”

“남자 일곱, 여자 아홉은 모두 타살입니다. 칼에 급소를 찔려 즉사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한 사람의 소행으로 보입니다. 그 외, 남자 하나는 자살. 그리고 남자 하나는 복부를…….”

제롬의 몸이 움찔하는 게 느꼈다. 그는 병사를 싸늘하게 바라보았다.

“그만 듣지. 시신은 모두 각 가문에 돌려보낸다. 모두 귀족인 만큼 예를 다하도록.”

“무어라 전합니까.”

“전원 모두 대공의 코르티잔 마르사 로렌스에 의한 타살이다.”

“하오나, 전하.”

“두 번 말하게 하지 마라. 피곤하군.”

“죄송합니다.”

그가 돌아가자 다른 병사가 다가와 투구를 벗고 한쪽 무릎을 꿇었다. 제롬은 고갯짓으로 답했다. 그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 보고했다.

“그 외 평민 사상자는 없는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이들은 대부분 성에서 일하는 자들이었는데, 낌새를 알아채고, 궁이 불타기 전에 자리를 비웠다고 합니다.”

“기사 사상자는?”

“아직 그 수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만, 전하. 거의 전원 사망에 가깝습니다. 남은 기사들이 선처를 부탁하고 있습니다. 마르사의 모든 기사들이, 듣기론 마르사의 계획에 참여하지 않고 대공 전하께 돌아가고자 하였으나 요청을 기각당했다고 합니다.”

대공은 마르사를 버렸다. 하지만 그것은 대의를 위해서였지 마르사에 대한 마음이 변해서는 아니었으리라 생각했다.

마르사에 대한 그의 마지막 명령이 그 사실을 입증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개죽음인 것을 알면서도, 대공은 끝내 제 기사들에게 마르사를 지키라 명했다. 사랑이란.

“베어라. 고통스럽지 않게 최후를 맞이할 수 있도록 예우를 갖추라.”

“분부에 따르겠습니다.”

기사가 팔을 굽혀 예를 갖추고는 물러났다. 그러자 제롬이 한숨을 낮게 내쉬었다. 봄이 오려는지, 새벽은 더더욱 추웠다. 흰 입김이 여기저기서 새어나오고 있었다. 모두가 바쁘게 움직였다.

“미안해요.”

그에게 말했다. 그는 천천히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눈빛에 모든 것이 있었다. 걱정, 안도감, 그리고 애정까지 모두. 눈물이 흘렀다. 이 얼굴을 내가 얼마나 그리워했던가.

“괜찮습니까.”

그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어둠 속으로 흰 입김이 퍼져나간다.

“저는, 저는. 괜찮아요.”

“정말 마차 안으로 들어가지 않으셔도 괜찮겠습니까.”

“네. 아직, 아직 잭이 돌아오지 않았어요.”

그는 침묵했다. 마음이 약해지자, 어느새 내 시야를 흐리는 눈물방울들이 볼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내 목소리는 어느새 물기에 젖어 있었다.

“잭은 내 좋은 친구였어요. 그리고 평생 그럴 거고요.”

“그의 희생에 애도합니다.”

“그는, 정말 그는…….”

말이 더 나오지 않았다. 그때 멀리서 횃불이 가까워졌다. 내가 몸을 일으켜 그 쪽을 유심히 바라보자, 제롬이 나를 고쳐안았다. 그가 갑옷을 입고 있어서였는지 절그럭 소리가 났다.

“전하, 찾았습니다!”

“잭 제커시스 경의 시신을 찾았습니다.”

나는 더는 망설이지 않았다. 제롬의 품을 밀어내고 다리를 버둥거렸다. 그는 나를 내려주었다.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온 줄은 정말 몰랐지만 나는 달렸다. 몇 번 넘어지고 일어나면서도 그들에게 달렸다. 불이 타오르는 곳으로 향했다. 그들이 들것을 바닥에 내려놓자마자 나는 잭의 가슴에 내 머리를 묻었다.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내 뒤로 천천히 걸음 소리가 가까워졌다.

“사인은.”

“칼에 복부를 찔려 즉사하셨습니다.”

“우선 최고예우를 다해…….”

나는 천천히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나를 바라보았다.

“공작가로 수송한다. 그러는 편이 좋겠군.”

“레이디. 실례하겠습니다.”

나는 몸을 일으켰다. 그들은 나에게서 잭을 데려갔다. 나는 잭이 점이 되어 멀어질 때 까지 그 자리에서 가만 앉아있었다. 슬펐다. 슬펐지만 내게 잭이 소중한 만큼, 오늘의 전사자들 또한 누구에게 소중한 사람이었을 것 같다는 생각에 내색할 수 없었다.

“걸으실 수 있겠습니까.”

나는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그가 나를 조심히 안아들었다.

“잭은 나를 지키다 죽었어요. 그리고 나는 그 순간 정말 무력하게, 아무것도…….”

“그는 훌륭한 사내였고, 명예롭게 죽었습니다.”

“……무서워요.”

나는 그의 차가운 갑옷에 머리를 묻었다.

“너무, 너무 무서워서. 그래서. 무서워요.”

“제가 여기 있습니다, 레이디. 괜찮습니다.”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나를 바라보았다.

“괜찮습니다.”

그가 나를 어르듯 차분히 말했다. 나는 그래서 빨리 이성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때였다.

“공작 전하.”

한 사내가 무릎을 꿇었다. 그는 그리고 일어나 무언가를 내밀었다.

“찾으라고 분부하신 약포지입니다. 가루가 소실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했습니다.”

“마르사의 사용인들이 제게 준 약이예요. 전 해독제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나는 제롬을 바라보았다. 제롬의 굳은 시선은 사내가 손에 들고 있는 약포지로 향했다.

“그럼 완전히 믿을 순 없군. 와인과 칼라일을 가져와.”

“카, 칼라일이라고 하면.”

“이 곳에 한 명 이상의 칼라일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그러니까 제롬이 말하는 ‘이곳에 있는 칼라일’은 대공 벤 칼라일의 장자이자 후계자인 칼라일 소공자를 일컫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내 생각에는 제롬은 칼라일 대공에게서 데려온 볼모, 칼라일 소공자에게 약을 시험해볼 생각인 듯 했다.

반대하려던 참에, 병사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떨어졌다.

“하, 하지만 전하! 이미, 칼라일 대공 전하께서는 연인과, 수많은 장정들과, 라리아를 잃으셨습니다. 칼라일 대공 전하께서 자제분까지 잃게 할 수는 없습니다. 칼라일 소공자께서 잘못되신다면 분명 화이트 공작가에 보복이 있을 거라고 감히 아룁니다. 위험을 감수할 수 없습니다.”

그의 기사의 충언에 제롬이 조금 유해질 줄 알았는데, 그의 굳은 표정은 미동도 없었다.

“번복은 없다. 만약 칼라일 그 치가 약을 먹고 죽어버리면 좋은 본보기가 되긴 하겠군.”

“전하! 죽여주시옵소서. 칼라일 소공자를 모셔올 수 없습니다.”

“그렇게 바란다면 군법대로 할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죽기 전에 청이 있습니다.”

기사는 제롬을 바라보았다. 곧은 눈빛에는 분명 제 주군을 향한 충성이 있다. 그것은 심지어 나도 알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니 제롬도 알고 있을 게 분명했다.

“제게 레이디의 약을 시험해주십시오.”

“…….”

“전하,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제롬은 천천히 입을 떼었다.

“그럼 네게 약을 시험한 나는, 어떤 주군이 되는 거지?”

“전하.”

“네가 죽기라도 하면 나는 어떤 주군이 되는지 물었다.”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마르사의 소유였던 약이다. 칼라일의 손을 거치지 않았을 리가 없다. 그랬을 때, 칼라일이 아꼈다는 소공자가 이 약을 모를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더 말해야 하나?”

기사는 즉시 팔을 굽혀 예를 표하고는 재빨리 멀어졌다. 그는 곧 칼라일 소공자를 데려왔고, 소공자는-대략 내 또래 같아 보였다-제롬이 말한대로 몇 분 되지 않아 그 약을 파악해냈다.

“수면과 신체마비 효과가 있는 독초 ‘유피타’ 의 해독제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의 녹색 눈동자가 지혜롭게 반짝였다.

“그 말에 책임을 질 수 있겠습니까.”

“와인이 필요합니다.”

그러자 그의 옆에 서 있었던 기사가 제 허리춤에 매고 있었던 가죽 수통을 정중히 내밀었다. 소공자는 그것을 받아들어, 흰 가루 한 줌을 와인 속에 풀었다. 그리고 서슴없이 그것을 제 입으로 가져갔다. 그의 목울대가 바삐 울렁였다.

“모두 비웠습니다.”

그가 수통을 뒤집어 수통이 빈 것을 확인시켜주었다. 제롬은 그럼에도 선뜻 내게 약재를 권하지 않았다. 그저 내게 약포지를 받게 해 그것을 내 손에 쥐어줄 따름이었다. 그가 다시 입을 뗀 것은 그로부터 조금 시간이 지난 뒤였다.

“아마 율러의 모든 학자들을 모아도 칼라일 소공자보다는 이 약재에 대해 더 잘 알지 못할 겁니다.”

“과찬이십니다, 공작 전하.”

칼라일 소공자가 겸손하게 기뻐했다.

“만일.”

하지만 이어진 것은 제롬의 강경한 목소리였다.

“내 레이디가 이 약물을 먹고 몸이 나아진다면, 소공께서 웨스트 체셔를 3년 동안 떠날 수 없다는 조약을 파기하고 곧바로 집에 돌려보내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하지만 반대로, 내 레이디가 이 약물을 먹고 조금이라도 이상 증세를 보이거나 아프게 된다면, 소공을 포함한 칼라일 공작가는 무사하지 못할 겁니다.”

제롬의 목소리가 놀랍도록 서늘했지만, 칼라일 소공자는 여유있게 답했다.

“이해합니다. 제가 고한 것에는 한 치의 거짓도 없습니다.”

제롬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장정들의 그의 명을 기다리고 있었다.

“돌아간다.”

그리고 그것이, 내가 기억하는 그 날 밤의 전부였다.

***

삶을 살아가다 보면 가끔씩은 정말 믿지 못할 기상천외한 일들이 일어나는 걸 볼 수 있다. 그것은 행운일 수도, 불행일 수도 있다.

집으로 돌아가는 흔들리는 마차에서 나는 가만 상념에 잠긴다.

지금은 얼마만큼이나 내게 현실일까?

모른다.

다만 불행에 대해서는 알았다. 불행은 갑자기 내 일상에 들이닥쳐 내 세상을 완벽히 바꾸고서는 나를 비웃고 사라진다. 나는 출처모를 불안감에 휩싸여 몸을 떨었다. 정해지지 않은 미래가, 또 내게 다가올 미래에 이런 불행들이 몇 개일지 몰라 불안하다.

불행이라.

어머니가 집을 나가셨고, 그 뒤에는 술고래 아버지가 전쟁영웅이 되어, 또 시체가 되어 집에 돌아오셨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신께서는 내 신실한 친구를 훔쳐가셨다.

그리고 나는 그 순간. 그 순간에 멈춰서 스스로에게 물어본다.

지금 이 순간은 내게 얼마만큼이나 현실일까?

대략적으로 몇 퍼센트?

나는 모른다. 그리고 영영 모를 것이다. 환상보다 무서운 것이 있었다면 그것이 현실. 환상은 한계가 있지만 현실에는 그 한계라는 것이 없어서 몇 퍼센트의 현실이란 내게 존재하지 않았다.

어떤 일이 일어나도 우리는 결국 운명 앞에 정해진 결말 없이, 스스로의 이야기를 살아가는 수많은 삶들의 주인공들. 나는 힘없이 바깥을 바라보며 가만 눈을 감았다.

언젠가 봄이 올 것이고, 이 상처도 언젠간 아물 것이었겠지만 나는 지금은 잠시 휴식이 필요했다. 조금 숨을 쉬고. 이 모든 것을 잊고 일상의 안정 속에 녹아들 시간이.

나는 제롬의 품속에 파고들었다. 제롬은 말없이 내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어디로 가나요?”

“라스트 바빌론, 제 성으로 갑니다.”

그가 내 귀에 속삭였다.

“레이디는 그 곳에선 안전할 겁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시 창 밖을 바라보았다.

겨울이 빨리 지나가기만을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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