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한겨울밤의 고백-67화 (67/108)

<-- 당신이 모르는 이야기 : 오스카의 기억 -->

비가 왔다.

또한 이런 새벽은 오스카에게 익숙한 것이기도 했다. 블리시스에는 비가 자주 왔다. 아마 넓은 바다 뒤에 있는 육지이니 그럴 법도 했다. 그는 머리를 쓸어넘기고서는 몸을 일으켰다. 가운을 입고, 책상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그는 잔을 와인으로 채우고서는 입에 가져다 대었다. 달짝지근 한 것이 목을 타고 넘어간다. 정신이 맑아진다.

노크소리가 들린다. 그는 문을 바라보았다. 이 시간에, 그가 침대 옆 줄을 당기기 전에 그의 문을 두드릴 수 있는 사람은 적었다. 아마 그의 정보원일 것이다. 그리고 그는 옳았다.

“마스터.”

빗속을 뚫고 급히 왔는지, 정보원의 재킷은 비에 조금 젖어 있었다. 오스카는 눈을 나붓이 내리깔고는 다시 와인잔으로 시선을 돌렸다. 목소리는 고저없이 무심했다.

“듣기론 마르사가 엄청난 일을 꾸몄다는데.”

“그렇다고 합니다.”

“어떻게 되었지? 어제 일이 일단락되었다는 것 까지는 알아.”

“레이디 로즈께선 무사히 공작 전하의 품으로 돌아오셨다 합니다.”

오스카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잘 된 일이군. 그리고 사상자는?”

“잭 제커시스 경이 어제자로 타계하셨습니다.”

“……유감인 일이군.”

오스카가 알고 있던 몇 없는 좋은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세상을 뜨다니, 그렇게 젊은 나이에 후계도 남기지 않고. 율러의 경제가 걱정되었다. 물론 세상은 결국 제자리를 찾아 흘러가겠지만, 그래도 그는 몇 없는 귀인貴人이면서 심성이 좋은, 맑은 사람이었다.

“시신은?”

“화이트 공작가에 안치되어 있다고 하고 합니다.”

“곧 성대한 장례가 있겠군.”

오스카가 쓰게 웃었다. 덧없다. 정말 삶이라는 것이 덧없다. 신께서도 참 무심하시지, 저렇게 좋은 사람을 이리 일찍 데리고 가나 한숨이 나왔다.

“후계 문제는?”

“제커시스 경의 강력한 조력자 해리엇 칼라일 경께서 맡기로 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모두의 존경을 받는 훌륭하신 분이시자, 타계하신 제커시스 경의 대부이신 분이시죠.”

“그 사람이 벤 칼라일 대공의…….”

“형제입니다. 해리엇 칼라일 후작이시죠.”

“아.”

오스카가 기억났다는 듯 손가락을 튕겼다.

“그리고 다른 소식은?”

“항상 그랬듯, 별다른 일은 없습니다.”

“그렇겠군. 이만 가봐.”

그가 고개를 꾸벅이고 문 뒤로 사라졌다. 오스카는 한참동안 와인을 바라보았다. 그는 와인잔을 손에 끼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천천히 걸음을 옮겨 창가로 가까이 걸어갔다. 비가 그칠 듯 실처럼 쏟아진다. 퍼붓기라도 하면 속이라도 시원할 텐데 그저 눅눅하다.

“그러고 보니…….”

그러고 보니 그 날이 떠올랐다. 오스카 자신이 로징턴에 방문해 세실리아 로즈를 만났던 날. 그때, 떠나려고 문을 열었을 때 잭 제커시스를 본 기억이 있었다. 그 날도 이 날처럼 비가 왔고, 다른 게 있었다면 그 날은 하늘이 쏟아질 듯 비가 왔다는 것이었다. 소나기였다.

잭 제커시스는 비를 배경으로, 문 뒤에서 그저 세실리아를 보러 왔다고 했다. 딱 그를 닮은 순정이고 순애보였다. 그때, 문을 닫는 세실리아의 표정이 너무나도 창백해 보여서, 그녀에게 무심결에 물었더랬지.

‘괜찮으십니까.’

그녀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저,

‘그래요.’

그렇게 말했다. 전혀 괜찮아 보이지 않아서 물었다.

‘제가 도울 거라도 있습니까.’

‘아뇨. 그냥 모른 척 해 주세요.’

그녀는 모른 척 해달라고 했다. 그래서 그는 그렇게 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로즈블룸을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마차가 멈추었다. 오스카는 천천히 눈을 뜨고 끼고 있던 팔짱을 풀었다.

‘무슨 일이지?’

유능한 마부였고, 그가 마차를 멈추었다는 것은 분명 큰 문제가 있었다는 말이었다.

‘로드시여, 사람입니다. 분명 아까 레이디 로즈의 저택을 방문하신 그 분이십니다.’

오스카는 재빨리 후드를 뒤집어쓰고 마차에서 내렸다. 비가 내리고 있었고, 시원한 비 냄새가 폐부를 메웠다. 그는 마차 앞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길 위에 사람이 쓰러져 있었다. 투명한 바늘처럼 내리는 비가 그 사람의 젖은 옷에 물방울 조각으로 부서져 내리고 있었다.

콰광! 마른 하늘에 번개가 치고 눈이 마주쳤다. 오스카는 그 사람을 물론 잘 알고 있었다. 까만 머리카락, 금빛 눈동자. 다이애나의 눈빛이 항상 이 사람에게 향해 있어서 모를 수가 없었다. 잭 제커시스. 유능한 사업가, 승부사, 율러에서 직위 없이도 왕국에 끼치는 영향력이 그 자체로 강한 사람. 무엇보다 제 연인 다이애나의 첫사랑이었다.

언젠간 질투심에 이 사람을 무너트리고 싶어서 그의 뒤를 캤었다. 하지만 알고 보니 정말 좋은 사람이라 대놓고 싫어할 수도 없었던 인간. 오스카는 그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오스카는 이 사람이 싫었다. 그래서 그냥 모른 체 하고 가고 싶었다. 그냥 열병을 앓다가 죽기라도 하면 다이애나가 조금이라도 이 사람 생각을 덜할까 싶었다.

‘안녕하십니까.’

잭은 무시하고 다시 제 고개를 땅바닥에 떨구었다. 오스카는 자리에 앉아 그의 팔을 몇 번 콕콕 찔러보다가 잭이 의식이 없다는 것을 발견했다. 오스카는 한숨을 내쉬었다. 으휴, 세실리아. 이 죄많은 여자야. 그는 읊조리고서는 잭의 팔을 제 어깨에 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부가 도와서 오스카는 잭을 마차에 태울 수 있었다. 잭의 발 주변의 카펫이 물을 머금고 짙은 빛으로 번져갔다. 오스카는 마차가 움직일 때 잭의 얼굴을 천천히 뜯어보았다. 확실히 남자가 봐도 잘생겼다. 게다가 그 인품에다가, 훌륭한 사업가인데 그 자작가 아가씨한테 꽂혀가지고는. 역시 사랑이 여러 사람 버려놓는다니까, 오스카는 피식 웃었다.

‘딱한 사람.’

세실리아도 잭이 이렇게 될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아마도 배려하려고 했던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만일 그녀가 조금이라도 돕는다면, 딱한 처지의 그를 조금이라도 봐주려고 한다면 잭은 희망을 가질지도 몰랐다. 그래서 아마 그를 그냥 보낸 거겠지.

그래도 일이 이렇게 된 거, 오스카는 도울 수 있어서 기뻤다. 잭은 제 연인 다이애나가 사랑했던-어쩌면 지금도 사랑하는-남자였다. 막상 이 사람이 끔찍한 상황에 처해있는 것을 보니 기분이 생각보다 좋지 않았다. 다이애나도 그렇게 생각할 것이겠지.

그렇게 마차는 한참을 달렸다. 잭은 몸 상태가 좋지 못했는지, 자면서도 퍼래진 입술을 떨었다. 그렇게 얼떨결에 잭을 제 성으로 데리고 온 오스카는 예상 외의 지원군을 만났다.

‘어머, 세상에! 오스카. 네가 선물을 가져온다고 내게 얘기해주지 않았잖아.’

제 누이였다. 율리아 슐츠는 얼굴을 붉히며 잭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두 사람 친하니? 어머, 어머. 딱 봐도 엄청 추워 보이시는데, 의식이 없어 보이고 비는 엄-청 내리는데 이 분 우리 성에서 쾌차하실 때 까지 있어도 되겠다. 그렇지? 응?’

‘예, 누님. 부탁드리겠습니다. 저는 처리할 업무가 밀려서.’

‘어머, 그럼 그러엄. 내가 잘 돌봐드릴게. 너는 어서 가서 쉬렴.’

율리아는 상기된 얼굴로 손을 퍼덕이며 오스카를 쫓아냈다. 오스카는 힘좋은 시종인들의 손에 잭이 끌려가는 것을 보고서는 뒤돌았다. 제 누이 율리아는 간만에 신나는 일을 만나 행복한 듯 가벼운 걸음으로 그들의 뒤를 쫑쫑 따라갔다.

그렇게 한동안 잊고 있었는데, 그 다음날 제 누이 율리아가 방 문을 부술 것 같이 열어재끼며 숨을 헐떡거렸다. 오스카는 차분히 깃펜을 내려놓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오스카, 잭 제커시스 경께서 깨어나셨어!’

‘그렇군요.’

‘방금 식사를 하시고 다시 누우셨어. 의사가 열이 좀 있다고 해서.’

오스카는 자리에서 일어나 제 누이를 따라갔다. 길게 늘어진 복도를 지나 손님 방 중 하나 안으로 들어가니 침대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인기척이 느껴졌는지, 잭이 눈을 천천히 들어올렸다. 오스카는 침대 앞 의자에 앉았다. 제 누이가 줄곧 간호하고 있었는지 의자가 따뜻했다. 두 사내의 눈이 마주쳤다.

‘친절에 감사합니다.’

잭이 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율리아는 두 사람 얘기하라며 자리를 비켜주었다.

‘아닙니다. 그저 해야 할 일을 한 것 뿐입니다.’

‘못 볼 꼴 보여드려서 죄송합니다.’

그러고서는 잭이 거칠게 제 머리를 쓸어올렸다. 오스카는 피식 웃었다.

‘모두 사랑 앞에서는 죄인 아닙니까. 사과는 됐습니다.’

‘잭 제커시스입니다.’

‘오스카 슐츠입니다. 레이디 세실리아 로즈와는 친구입니다.’

세실리아 로즈 얘기가 나오니, 잭이 고통스럽게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 오스카를 바라보았다.

‘그날.’

잭은 뜸을 들이다 결심한 듯, 말을 이었다.

‘레이디 세실리아와 무슨 이야기를 했는 지 제가 조금 알 수는 없겠습니까.’

‘개인적인 이야기였습니다.’

‘그렇군요.’

잭이 쓴 미소를 지었다. 오스카는 망설이다 입을 뗐다. 이것 정도는 괜찮겠지.

‘불안하다고 하셨습니다. 레이디께서.’

‘그게 무슨…….’

‘외사랑을 하고 있는 것만 같다고. 불안하다고 하시덥니다.’

그리고 정적이 있었다. 정적을 깬 것은 오스카였다.

‘하지만 두 분, 그러니까 공작 전하와 레이디 세실리아께서는 서로를 각별히 생각하고 계십니다. 그러니까, 경께서는 만일 레이디 세실리아의 최선을 바라신다면…….’

‘저는.’

잭이 불타오를 것만 같은 눈빛으로 오스카를 바라보았다.

‘한 번도 그녀의 최선을 생각하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

‘다만 그 최선이 제가 아니라는 게 조금 힘들 뿐입니다.’

잭은 그 이후로 묵묵히 앞을 바라보았고, 오스카는 침묵했다.

‘저도 그렇습니다.’

잭이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

‘물론, 레이디 세실리아 이야기는 아니지만. 다른 레이디를 그렇게 사랑한 적이 있어서 그 심리를 모를 것 같지는 않습니다.’

‘혹시 세실리아가 보내셨습니까?’

‘아닙니다. 그저 당신을 모른 척 해달라더군요.’

잭은 체념하듯 눈을 천천히 감았다. 오스카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수 일이 지나서 오스카는 마르사와 세실리아에 대한 소식을 전해들었다. 마르사가 세실리아를 끌고 가 놓아주지 않는다고.

물론 오스카는 마르사의 이야기, 즉 그녀가 왜 제롬을 경멸하는지 알고 있었기에 이 사실에 크게 놀라지 않았다. 그저 제롬이 작전 회의를 한다기에 그 초대에 응해 그에게 조언을 해 주었을 따름이었다. 오스카는 훌륭한 책사였고, 제롬은 그의 작전을 신뢰했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안 됩니다!’

제롬의 훌륭한 기사 중 하나가 당치도 않다는 듯, 책상을 치고 일어났다.

‘전하께서는 군사들의 총사령관이십니다. 그런데 마르사의 성 안에, 그것도 홀로 진입해서 레이디를 빼오신다니요. 당치도 않습니다. 저희는 그런 위험을 감수할 수가 없습니다.’

‘옳습니다. 다른 방법이 있을 겁니다, 전하. 너무 위험합니다.’

제롬은 오스카를 보았다. 오스카는 차분히 답했다.

‘마르사가 레이디 세실리아를 인질로 잡고 있는 이상, 전면전은 불리합니다. 누군가가 레이디 세실리아를 빼와야 수월한 전투가 가능합니다. 그렇지 않은 이상, 전투에서는 이길 수 있어도 레이디의 생사는 보장할 수 없습니다.’

제롬은 그저 미간을 찌푸렸다. 그야말로 딜레마였다. 제롬이 탁자 위로 쥔 손에 힘줄이 도드라졌다. 오스카는 그의 심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침묵했다.

‘다른 기사가 레이디를 빼오는 방법도 있지 않습니까.’

기사 중 한명이 건의했다. 오스카는 냉정히 고개를 저었다.

‘우선 첫째, 그 기사는 레이디에게 신뢰를 줄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레이디가 지레 겁을 먹어 소리를 지르거나 기사를 따르지 않는다면 일이 복잡해집니다. 둘째, 라리아를 잘 아는 사람이거나, 라리아 궁의 설계도를 외울 만큼 똑똑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라리아 궁. 미궁이라고 불릴 만큼 설계가 복잡하다는 그 성이었다. 그리고 그 복잡한 설계도를 하루만에 다 외울 수 있는 사람은 이 곳에 제롬과, 오스카 자기 자신밖에 없었다.

‘그럼 오스카 경이 가면 되지 않겠습니까.’

기사들 중 한명이 건의했다.

‘맞습니다. 오스카 경이 가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때 침묵 속에서 제롬 공작이 반박했다.

‘그는 슐츠이지, 화이트가 아니다. 내가 가겠다.’

‘전하!’

‘안 됩니다, 전하! 부디 스노우스톰과, 웨스트체셔, 발리타로크를 생각해 주십시오.’

웨스트체셔, 발리타로크는 제롬의 영지였고, 스노우스톰은 제롬의 기사단의 이름이었다. 확실히. 오스카는 생각했다. 제롬 공작은 어깨에 진 짐이 많은 사람이었다.

‘차라리 저를 베 주십시오, 전하. 저희는 군주를 잃을 수 없습니다.’

‘그의 말이 맞습니다, 전하. 부탁드립니다.’

기사들이 일제히 칼을 꺼내들어 바닥을 짚고는 한쪽 무릎을 꿇었다. 제롬은 그들을 싸늘하게 바라보았다. 오스카는 그저 침묵으로 일관했다.

그때, 문이 열렸다.

‘전하.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제롬의 시선이 불청객에게로 향했다. 오스카는 그를 잘 알고 있었다. 잭 제커시스.

‘제가 레이디 세실리아를 안전하게 모셔오겠습니다.’

‘…….’

‘저는 마르사와 친분이 있어 라리아 성을 잘 알고 있습니다. 게다가…….’

‘네가 마르사와 친분이 있다면, 내가 왜 너를 믿어야 하지?’

제롬이 차갑게 일갈했다. 잭은 미동도 하지 않고 그저 평온하게 미소지었다.

‘그것은…….’

잭의 눈이 반짝였다. 제롬은 그를 싸늘한 눈동자로 바라보았다. 잭이 천천히 입을 떼었다.

‘제가 그녀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오스카는 넋을 놓고 잭의 미소를 바라보았다. 태어나서 그런 미소를 보는 것이 처음이었다. 그것은 인간이 자아낼 수 있는 사랑의 극단에 있는 것과 같은 평온함이었다.

잭은 죽음을 감안하고라도, 제 목숨을, 제가 가진 모든 것을 걸고서 다른 사내를 사랑하는 여인을 구하려 하고 있었다. 모든 것을 체념한 얼굴로. 그의 얼굴에 그리 쓰여 있었다.

‘윤허한다.’

‘감사합니다, 전하.’

오스카는 이해할 수 없었다. 다이애나를 사랑했지만, 제가 가진 세계 이상으로 그녀를 사랑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잭 제커시스는, 그야말로 제 여자의 행복을 위해 제 목숨을, 삶을 희생하려고 하고 있었다. 미친 짓이었다. 오스카는 그와 대화를 해야 했다.

회의가 끝나고, 오스카는 잭을 따라잡았다. 잭은 무언가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편지였다.

‘잭 제커시스 경.’

그는 잭 제커시스를 잡아세웠다. 잭이 천천히 뒤돌았다. 그 남자의 눈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다. 오스카는 그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를 바라보았다.

‘부탁이 있습니다.’

잭은 묵묵히 말했다. 그리고서는 멍하니 고개를 끄덕이는 오스카의 손에 손때가 묻은 편지를 쥐어주었다. 누구에게 보내는 것인 지는 묻지 않아도 뻔했다.

‘제가 만일…돌아오지 못한다면. 레이디 세실리아께 전해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그 뒤의 미소는, 끝을 아는 자의 미소였다.

‘제 가문의 명예를 걸고 약속드리겠습니다.’

‘그거면 됐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리고 잭은 뒤돌아 오스카에게서 멀어졌다. 오스카는 편지를 소중히 제 안주머니에 보관했다. 기억은 거기서 끝이 났다.

오스카는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비 오는 창가 뒤의 그로. 어두운 유리에 오스카의 우울한 표정이 반사되어 보인다. 그가 낮게 한숨짓는다.

“사랑 앞에서 우리는 모두 죄인이지 않습니까…….”

그는 제가 했던 말을 읊조려 보인다.

그때, 그 날처럼. 비가 왔다. 비는 퍼붓지 않고 그저 불쾌할 정도로만 흩어져 바람의 결대로 내린다. 나무가 흔들린다. 온통 우중충하다. 하늘도 슬프긴 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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