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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7.
비가 내린 후에는
After the rain
‘그 일’ 이 있고 이틀이 지났다.
의식이 돌아오면 나는 또 소리지르고 있는 내 자신을 발견한다.
눈에는 눈물이 말라붙어 끈적였고, 속이 좋지 않았고 머리가 띵했다. 발걸음 소리가 가까워진다. 아마도 서재 구석에 있는 책상에서 업무를 보고 있었던 제롬일 것이다. 희미한 의식 사이로 낮은, 달콤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세실리아.”
내 이름이다. 그가 나를 가볍게 안아든다. 다리 아래 그의 무릎이 느껴지고, 등 뒤로 그의 체온이, 심장박동이 느껴진다. 그는 나를 품에 넣고 어르며 내 등을 천천히 쓰다듬는다. 그의 숨이 이마에 닿는 게 느껴진다.
“세실리아.”
“……제롬.”
힘없이 말라붙은 입을 뗀다.
“세실리아.”
그가 나를 꼭 끌어안아준다. 울었다. 그의 손이 내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는다.
“나쁜 꿈이었습니까.”
“꿈은 좋았어요. 꿈은. 꿈에선…잭이 살아있었어요. 그런데 눈을 뜨니까, 갑자기 현실이. 현실이. 너무 잔인해서. 그래서 그게 너무 무서워서.”
계속 잭의 꿈을 꾼다. 꿈은 좋은 기억들만 담은 꿈. 잭이 당연하게 살아숨쉬는 꿈. 그랬기에 현실이 더 잔인했다. 눈을 뜨면 그가 없다는 걸 매번 인정해야 하는 게 구역질나게 싫었다.
“세실리아.”
“미안해요. 그게, 사실 잊는 게 쉬운 게 아니라서.”
“이해합니다.”
그가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이 진중했다.
“레이디는 이곳에서만큼은 안전합니다.”
나는 그에게 몸을 기댔다. 그의 단단한 팔이 좋다.
“그래도 걱정돼요. 아그니스가 로즈블룸을 잘 경영하고 있을지. 그러고 보니까 제가 항상 아그니스한테 말해뒀었거든요. 나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네가 카밀리아와 로즈블룸을 맡아줬으면 좋겠다고. 로징턴의 레이디라니, 아그니스는 그런 따분한 일은 싫다면서 무서운 소리 하지 말라고 그랬는데…….”
“그녀는 분명 잘 해낼 겁니다.”
한숨을 쉬었다. 그는 따스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앞으로 잘 해내야 할 겁니다. 세실리아는 웨스트 체셔와, 발리타로크의 레이디가 될 사람입니다. 이제 로징턴은 잊으셔야겠지 않습니까.”
“맞아요, 맞아요. 항상 그러는데, 자꾸 마음이 쏠려서.”
잊자. 잊으려고 이틀동안 무던히 노력해왔다. 이제 보내 주자고.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제롬이 나를 보며 싱긋 웃어보인다.
“레이디의 짐들은 그럼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로징턴으로 사람을 보내도 괜찮겠습니까.”
“됐어요. 사실 짐이라고 할 것도 없고, 아그니스한테 쓸 거 아니면 다 내다 버리라고 했으니까 상관없어요. 아, 그러고 보니까 당신한테 선물 받은 것들 아직 안 꺼내 봤네요.”
까마득한 기억이 떠오른다. 마르사가 나를 급히 데려가기에 미처 풀어보지도 못했던 선물들. 생각에 잠겨있으니, 제롬이 내 볼을 지분댔다. 나는 그가 그렇게 하게 두었다.
“다시 가져올 필요 없을 겁니다. 어차피 제가 고른 것들이었는데 제 안목은 그리 좋지도 못하니, 레이디가 마음에 드는 걸로 다 골라서 새로 주문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뭐, 그럼 제롬만 상관없다면 그건 다 아그니스에게 선물하는 걸로 하죠.”
“제게도 즐거운 일일 겁니다. 이제 아그니스 카터 경도 제 가족 될 사람 아니겠습니까.”
나는 그를 본다. 그는 헌신적이고, 놀라울 정도로 내게 제 돈을 아끼지 않으며, 잘생겼고, 잘 하고, 강력했다. 아마 모든 여자들이 원하는 그런 남자일 것이다.
그러니까 신탁인가 뭔가에 나오는 물의 언어술사도 분명 제롬을 원하겠지.
“제롬.”
“세실리아.”
“어디 가버리지 마세요.”
진심이었다. 내 영혼 뿌리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나오는 말이었다.
“지금도 그러고 있지 않습니까. 원하신다면 앞으로 업무는 저택에서 모두 처리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그러고 보니 저도 꽤 즐기고 있는 것 같습니다. 왕궁은…….”
“제롬.”
“예. 세실리아.”
“그런 거 말고요. 그러니까, 단위가 오늘 내일이 아니라 평생이요.”
“당신만을 바라보겠습니다.”
“증명해줘요.”
“제가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항상 마음에 새겨두세요.”
그는 나만을 차분히 바라보며, 내 입술이 열리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좋았다. 정말로 좋아서 미칠 것만 같았다. 편안하고 좋고, 행복했다. 그러면 이런 게 정말로, 다 아닐까.
“내일도 오늘 했던 대로만 한다.”
평생이라는 게 넓게 봐서 평생이지, 어떻게 보면 그냥 수많은 내일들의 집합체인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그 약속이 필요했다. 내일도 오늘 했던 대로만 한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이 룰에 충실하게 맞추어 살아간다. 바꾸려 해봐도 관성이라는 것이 너무 강력해서, 사실 오늘 하지 않는 일은 내일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제롬의 관성을 믿기로 결심했다. 그는 정말 좋은 남편이자, 아버지가 될 거라고. 더 이상 영원을 믿지 않는 것은 그만두기로 했다. 내가 그 동안 얼마나 이기적이었는지. 나는 그에게 믿음을 준 적이 한 번도 없으면서, 그에게 맹목적인 신뢰를 요구했다.
관계는 마치 천칭과 같아서, 한 쪽으로 틀어지면 항상 문제가 일어난다. 한 쪽이 다른 쪽에 비해 너무 사랑해도, 너무 사랑하지 않아도, 믿음의 균형이 맞지 않아도 수평을 이루지 못하는 게 인간관계였다. 그래서 나는 내가 원하는 신뢰만큼, 그를 믿기로 결심했다.
“그렇게 하긴 힘들 것 같습니다.”
그가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고는 말했다.
“내일은 오늘보다 더 잘할 겁니다.”
내가 힘없이 웃었다. 그리고 그의 크라바트를 만지작거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역시 제 기대를 배반하지 않는군요, 공작 전하.”
“반칙 아닙니까. 침대에서 ‘공작 전하’ 는. 그러면 저는 세실리아를 레이디 로즈라고 부를 겁니다.”
“제롬.”
나는 그의 이름을 천천히 불렀다. 이 지붕 아래서, 나만, 나만이 부를 수 있는 그의 이름.
“제롬.”
“세실리아.”
그가 그의 말과 함께 내게 부드럽게 키스해왔다. 입술이 맞닿고-그는 항상 조심스럽다-눈은 감은 채로 내 혀와, 제 것을 얽는 것에 몰입한다. 나는 그를 관찰한다. 그가 낌새를 눈치 채고 눈을 뜬다. 억울하다는 눈치다. 내가 피식 웃는다. 그의 상체를 뒤로 민다. 그래서 그에게 지금껏 안겨있었던 내가 그의 위에 있다.
나는 이럴 때가 항상 좋다. 그가 홀린 듯, 마치 여신이라도 보는 듯 경배하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볼 때. 나를 거부하지 않을 때. 어서 해 달라는 듯 갈증난다는 표정으로 내 손짓만 기다리고 있을 때. 바깥에서, 이 사람은 웨스트체셔, 발리타로크의 두 대영지의 군주이다. 침대 위에서, 이 사람은 내 것이다. 나만의 것이다. 나만 이 사람을 가질 수 있다.
“똑똑히 잘 들어 두세요.”
내가 그를 내려다보며 미소짓는다.
“내 거야. 내 거에요. 어떤 사람이 와도 나한테서 당신 못 뺏어가.”
그는 가만 나를 바라보고 있다. 그의 황홀하게 빛나는 두 눈이 나를 담는다. 가슴이 뛴다. 제국에서 제일 잘난 남자가, 모든 여자들이 한번쯤은 눈여겨볼만한, 모두의 구설수에 오르는 그 남자가 내 것이었다. 생각해보면, 나는 그동안 이 사람을 얼마나 원해왔던가.
욕망에 솔직해지니 좋았다. 그의 큰 손이 내 옆 허리를 부드럽게 쓴다. 나는 그에게서 내려와 침대에 앉는다. 그는 상체를 일으켜 제 머리카락을 정리한다.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미소지어보인다. 내 턱을 잡고 볼에 입을 맞춘다.
“제게서 당신을 갈라놓을 수 있는 건 없습니다.”
“으응.”
“사랑합니다.”
그가 내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나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저도요.”
그가 키스해온다.
딱 이 정도의 애정과, 신뢰와, 보호. 이것이 있기에 나는 지금 안도한다. 나는 제롬이 필요했다. 이런 완벽한 사람을 내 인생에서 가져갈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했다.
오후에는 라스트 바빌론, 그러니까 제롬의 성에 방문객이 왔다.
그때 제롬은 나를 그의 무릎에 앉히고 책을 읽어주고 있었고, 나는 거의 잠들려던 참이었었다. 의식이 몽롱해지려던 찰나, 노크소리에 눈을 번쩍 떴다.
“방금 노크 소리 들렸던 것 같은데…….”
“아닙니다, 세실리아 그건.”
그때 노크소리가 또 들렸다. 내가 제롬을 바라보자 제롬이 표정을 지우고 문을 바라보았다.
“누구지? 내가 방해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송구합니다, 전하. 방문객이 있습니다.”
“돌려보내.”
“레이디 세실리아를 찾고 있습니다. 다이애나 그린힐 양이십니다.”
“다이앤!”
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롬이 나를 힐긋 보고 문쪽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레이디가 곧 가신다고 전해라. 그리고 하녀들을 불러, 레이디의 치장을 돕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나는 옷을 금방 차려입고 제롬을 바라보았다. 제롬이 미소지어보였다.
“다녀오십시오.”
“그래요.”
내가 그의 볼에 입을 쪽 맞추고는 문쪽으로 향했다. 시선이 느껴져 뒤를 돌아보니 그가 멍한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작게 미소지어보인다. 기쁘다.
그의 성은 로즈블룸보다 훨씬 크고 복잡했지만, 걷다 보니 응접실의 대략적인 위치가 기억이 났다. 게다가 내가 틀릴 듯 싶으면 하녀가 눈치껏 나를 잘 안내해 주었다.
응접실 안으로 걸어들어가자, 다이애나가 그곳에 있었다. 눈이 마주치고, 우리는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이애나가 많이 울었는지, 눈이 많이 부어있었다. 그녀가 내게 달려와 안겼다. 나는 그녀를 조심스레 끌어안고 등을 쓰다듬어 주었다.
“너를 영영 못 보는 줄 알았어.”
“나도.”
그리고 다시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다. 다이애나가 울음을 터트렸다.
“나 어떡해…….”
“다이애나.”
그녀의 슬픔을 모를 리가 없었다. 아무리 오스카를 사랑하겠다고 그녀가 말하긴 했어도, 그녀의 마음 한 구석에는 아직도 어쩌면. 잭이 있었을 지도 모른다.
“나, 진짜. 그 사람 좋아했는데.”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진짜, 좋아해서 놓아주려 한 건데. 그러려고 오스카를 보려고 노력했던 거고. 그 사람 행복해지는 거 보려고 놓아주려 한 건데, 나 이제 어떡해.”
그녀는 감정에 북받쳐 히끅거리며 말을 잇지 못했다. 가슴에 묵직한 추가 내려앉는 것 같았다. 미안했다. 잭에게. 나는 울 수가 없었다. 울 자격도 없다고 생각이 들기도 했다.
“진짜, 진짜 좋아했는데…….”
그녀가 나를 품에서 놓고 나를 바라보았다. 눈에 눈물이 맺혀있었다. 눈물 한 방울이 그녀의 볼을 가르고 떨어져내린다.
“제발, 세실리아. 여기에 잭이 있다고 했어. 그 사람 얼굴 한번만 볼 수 있을까. 제발, 얼굴만이라도. 제발. 나 한번만 도와줘, 미칠 것 같아. 제발. 한번만, 한번만…….”
“다이애나…….”
나는 말을 이을 수 없었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만일 다이애나가 잭을 정말로 많이 좋아했다면, 그의 시신만큼은 절대로 보여줄 수 없었다. 잭의 마지막 모습은 다이애나의 마음을 많이 아프게 할 것이었다. 다이애나가 그대로 그 자리에 무너져 내렸다.
“다이애나!”
나는 그녀에게 감히 손을 댈 수 없었다. 그녀는 마치 언제 떨어져 내릴지 모르는 빈 나뭇가지에 흔들리는 마지막 잎새였다. 나는, 나는…….
“왜 너인 걸까.”
그녀가 나를 바라보았다.
“왜 너여야 했던 걸까.”
“…….”
말을 하지 못했다.
“잊을 수 있었으면 좋겠어. 그저.”
그녀는 그 말을 남기고 떠났다. 그녀의 걸음이 비틀거렸고, 벽을 짚고 숨을 몰아쉬는 그녀의 모습에 나는 그저 가슴이 아리었다. 그래서 나는 다시 아무도 없는 응접실에 돌아와, 가슴쪽 옷자락을 움켜쥐고 그대로 주저앉았다. 숨을 몰아쉬었다.
내일이 잭의 장례식이었다. 잊으려 해도, 잊으려 해도, 행복해 보려 해도, 삶 안으로 파고들어 숨도 못 쉬게 하는 것들이 있다. 숨이 가빠진다. 시야가 뿌얘진다.
‘레이디!’
‘빨리, 로드를 불러와!’
정신이 흐릿해진다. 다시 암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