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한겨울밤의 고백-70화 (70/108)

<-- 비가 내린 후에는 -->

성당 안에서의 의례가 끝나고 많은 사람들이 되돌아갔다.

그 다음 일정은 관을 땅에 묻는 것을 지켜보는 것이었는데, 사람이 몰려 혼잡할 것을 방지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집으로 떠나야 했다.

나는 다행히도, 선택받은 소수의 사람들에 속했기에 관이 땅에 천천히 묻히는 것을 지켜볼 수 있었다. 신사들은 주로 덤덤했고, 숙녀들은 신사들의 품에 머리를 묻었다. 나는 울지 않았다. 잭이 싫어할 것 같아서 그랬다.

성녀 셋이 축복의 노래를 불렀고, 나는 멍하게 그때,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느새 오후가 다 지나 노을이다. 다이애나가 또다시 주저앉으려는 것을 오스카가 안아든다.

흙이 목재 관을 덮는다. 나는 공허하게 그것을 지켜본다. 그렇게 한참이 지난다. 우리는 교황과 함께 같이 손을 모으고 그를 위해 기도한다. 그것이 장례의 마지막 의례였다.

모든 것이 남의 이야기처럼 느리게 지나가고 나는 시간의 흐름을 놓친다. 그저 사람들 하나하나가 되돌아가는 것을 멍하니 서서 느낀다. 모은 손이 저렸고, 다리가 슬슬 아팠지만 나는 그대로 서있는다. 제롬이 나의 눈치를 살피며 뒤돌아 멀어지고, 어느새 해가 진다. 어둠이 떨어진다. 정신이라는 것을 차렸을 때 나의 눈 앞에 있는 것은…….

내 볼에 말라붙은 눈물 한방울. 어두워진 밤하늘, 그리고 눈 앞에 있는 그림같은 사내.

“괜찮으십니까.”

오스카.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잭의 비석을 바라본다. 그 앞에는 동화책이 있다. 아까 다이애나가 두고 간 것이었다. 나는 그 앞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긴다. 풀이 버석거리는 소리가 난다. 나는 천천히 뻐근한 다리를 접고 책을 내려다본다.

“인어공주.”

나는 그리고 오스카를 올려다본다. 오스카는 묵묵히 나를 내려다본다.

“왜 다이애나가 인어공주 책을 잭에게 선물했을까요?”

묻는다. 오스카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이유를 모를 것 같지는 않습니다만.”

“네?”

“못 들으셨다면 됐습니다.”

그의 목소리가 짐짓 싸늘했다. 나는 그 이유를 알 것 같으면서도 굳이 말은 하지 않는다. 왕자를 사랑한 인어공주. 왕자를 구해 물거품이 되면서도 왕자와 이웃나라 공주의 행복을 빌어준 인어공주. 다이애나는 그 인어공주에게서 잭을 본 모양이었다.

나는 천천히 입을 다물고, 목청을 골랐다.

“제게 할 말씀이 있다고 들었어요.”

“그렇습니다.”

오스카의 말에 나는 천천히 일어나 그와 시선을 맞추었다. 오스카는 주위를 살피더니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 풀벌레 우는 소리만 낭낭하다.

“우선 마차로 가시지요. 제가 웨스트 체셔로 바래다 드리겠습니다.”

“좋아요.”

그가 팔을 내밀었고, 나는 그의 에스코트에 응했다. 우리는 걸었다. 서로에게 아무 말도 건네지 않은 채.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려 자리에 주저앉을 뻔했지만, 오스카의 강한 팔힘이 나를 지지했다. 나는 그를 바라본다. 곱게 생겼지만 암만 해도 남자는 남자였는지 힘이 대단하다.

“괜찮습니까.”

“다리에…힘이 빠져서.”

“걸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네. 그냥 몸이 좀 놀란 거였어요.”

“다행입니다.”

그가 알면서도 모를 것 같은 미소를 지어보인다.

“레이디를 안고 걸어가야 하는 최악의 상황만큼은 면하고 싶습니다.”

“저도 바라지 않아요, 오스카 경.”

“그렇다니 감사합니다. 저와, 블리시스는 오늘 또 이렇게 안전하군요.”

내가 피식 웃는다.

“그 냉소가 그리웠어요, 오스카.”

“너무 그리워하시진 마십시오.”

“그 오만한 위트도 그리웠고.”

“좋게 봐주시니 감사합니다.”

오스카의 냉소, 오만 그런 오스카스러움이 좋다. 제롬이 내 곁에서 든든한 지지축이 되어 주어서 좋다. 내 일상이 좋고, 처음으로 무언가가 기대되는 내일이 오는 것만 같아서 기쁘다. 이런 내일을, 내 자유를 선물해준 잭의 희생에 감사한다. 마음이 따뜻해진다.

멀리서 보였던 그의 마차가 가까워진다. 나는 그의 에스코트를 받아 마차에 탄다. 오스카의 마차는 처음인데, 그의 가문색인 크림슨 레드, 붉은 실내가 온통 시각을 자극한다.

마차에 탄 나를 보고 오스카는 무언가를 회상하는 모양인지 그저 생각에 잠겨 있었다.

“할 말이 있다더니, 무슨 생각해요. 오스카?”

“얼마 전, 그 자리에 앉았었던 사람이 기억을 비집고 나와서 말입니다.”

그리고 정적이었다. 말굽 따박이는 소리에 나는 고개를 천천히 저으며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었다. 한숨을 내뱉고 오스카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가 천천히 제 입술을 뗀다.

“짐작이 가십니까?”

“잭이었다고 말하지 마세요.”

“잭 제커시스 경이 맞습니다.”

“절 그만 괴롭히세요.”

“레이디.”

오스카가 내 손을 잡았다. 내가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본다. 표정이 진중하다.

“제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고백할 것이 있습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내가 알고 싶지 않았을, 고통스러운 진실.

“제가 레이디의 저택을 방문했던 그 비오는 날의 이야기입니다. 기억하십니까?”

물론 기억했다. 하지만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비오는 날, 나를 찾아온 잭을 외면한 것. 나는 그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지만, 그 순박하고 숭고한 사람에게는 얼마나 큰 상처였을지.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고 믿었는데 마냥 죄인이 된 것만 같았다.

그의 말이 이어졌다.

“저는 레이디의 말에 따르지 않고 제커시스 경을 제 저택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비오는 날 거리에 몸을 뉘이신 신사를 외면할 수 없었으니 말입니다.”

“충분히 들었어요, 경. 이제 그만…….”

“레이디.”

오스카가 다시 한번 내 손을 꼭 잡아왔다. 온기가 느껴진다. 눈이 마주친다. 내가 그의 시선을 회피한다. 그러고 싶다. 이 사람이 내게 그런 고통스러운 사실을 왜 자꾸 주입하려는지 이해가 잘 가지 않는다. 숨이 가빠진다.

“잭 제커시스 경께서 물으시기에, 제가 감히 그분께 말씀드렸습니다. 레이디께서 공작 전하에 대한 마음으로 힘들어하시고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오스카 경!”

“하지 않았어야 할 이야기인 것은 압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를 지금 제게 하는 이유가 뭐죠?”

“제가 잭 제커시스 경의 죽음에 일정 부분 책임이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는 당신의 행복을 위해 죽었으니 말입니다.”

그가 천천히 제 품에서 편지 하나를 꺼내 내게 건네주었다. 잭의 인장이었다. 나는 천천히 그것을 떨리는 손으로 받아들었다. 우리에게 내린 고즈넉한 어둠, 그 아래 일렁이는 오스카의 굳은 표정. 그리고 숨을 죽이고 있는 나. 나는 이 무게를 감당할수, 아니 감당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손의 힘이 희미해질 때 쯤, 오스카는 다시 내게 그 편지를 종용했다.

“펼쳐보십시오. 저는 무슨 내용일지는 대충 알고 있습니다만.”

“그게 무슨……. 이 편지를 열어보기라도 했다는 말인가요?”

“레이디. 정보에 능한 신사들 중, 잭 제커시스 경의 재산 반쪽의 행방을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시선이 흔들린다. 정신이 멍해진다. 편지를 열어본다. 그러자 편지로 보이는 잘 접은 종이 뒤에, 분명 빳빳한 수표가 있었다. 나는 입을 틀어막는다. 잭의 위대한 재산의 반 가량 되는 어마무지한 부의 소유자가, 나라고 명시되어 있었다. 나는 급히 편지를 꺼내본다.

많은 말들이 적혀있지 않았다. 그저…….

‘항상 네가 옳은 선택을 했으면 좋겠어. 이 선물이 그런 너의 결정을 돕기를.’

손이 떨린다. 시야가 흐려진다.

“제 예상대로군요.”

오스카의 차가운 목소리가 떨어진다. 나는 그를 바라본다.

“레이디께선 억만장자 상속녀가 되셨습니다.”

“…….”

“그 말은 공작 전하를 고르신 이유가 경제적 안정 때문이라면 더 이상 그 선택에 매달리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지요. 또는, 공작 전하를 거부한 이유가 그와의 격이 맞지 않는다는 이유였다면 더 이상 그런 고민은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나는 그저 고개를 숙인 채 머리를 천천히 저었다. 오스카가 미웠다. 그가 잭에게 쓸데없는 소리만 하지 않았더라도, 잭이 끝을 예상하고 제 몸을 내던지지 않았을 텐데. 잭은 분명 자신의 죽음을 어느정도 예감했을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가장 믿었던 오스카에게 편지를 맡기고 마르사를 배신하면서까지 라리아 궁에 잠입했겠지.

그러면서도 저는 내 옆자리에 설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나더러 조금이라도 더 좋은 선택을 하라고 이런 멍청한 짓을…….

“저는 이 돈 필요 없어요. 못 가져요. 제가 어떻게 그래요.”

“레이디.”

그가 나를 진중하게 바라보았다.

“가지고 계시는 편이 나을 지도 모릅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신탁에 대해서는 아시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신탁에 의하면…….”

“그 이야기라면 알고 있어요. 마르사가 죽기 전까지도 내게 신신당부했죠. 불세출의 물의 언어술사가 이곳에 모습을 드러낼 거라는 거. 그리고 그 사람이…….”

나는 오스카를 굳은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제롬의 옆자리를 빼앗으러 온다는 것도.”

“잘 알고 계시는군요, 레이디.”

“오스카는 그게 진짜라고 믿나요?”

“시간의 언어술사이자, 선지자인 아니타의 유언이었습니다. 그 일은 언젠가 꼭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 세상의 온갖 권력자들이 물의 언어술사의 행방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강력한 물의 언어술사야말로 제롬 공작을 견제할 수단이니 말입니다.”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오스카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런 얘기를 제게 해주는 이유는 뭔가요?”

“물의 언어술사만이 제롬 공작을 견제할 수단만은 아니니 말입니다.”

“네?”

“레이디는 가장 유력한 공작부인 후보이십니다.”

그가 놀라울 정도로 차분하게 말했다.

“저는 레이디께 도움이 되고 싶습니다. 그리고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하.”

“레이디.”

오스카가 나를 진중하게 바라보았다.

“모르시겠습니까? 그만 슬퍼하실 때도 되었습니다. 이미 잭 제커시스 경은 타계하셨고, 어떤 이 세상의 위대한 힘도 그를 다시 살려낼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제 현실을 보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직 예언을 바꾼 선례는 없습니다만, 선례는 만들면 됩니다.”

“선례를…만들자구요?”

“운명을 바꾸자는 말입니다. 물의 언어술사 대신 당신이 공작 옆에 서서 공작부인이 되는 이야기를 쓰자는 말이지요.”

나는 조용히 내 손에 든 편지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혼란스러운 머릿속이 착 가라앉았다. 사교계의 소리 없는 전쟁. 나도 이제 그것의 일부가 된 것이었다. 그리고 오스카는 그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나는 그의 좋은 친구이자, 훌륭한 패였다.

그리고 오스카 또한, 나에게 마찬가지로 그랬다.

오스카는 똑똑하고, 소름끼칠 정도로 이성적이며, 잘 사용하면 체크메이트를 선물할 수 있는 비숍이 될 것이었다. 나는 생각을 정리했다. 지금 나의 상황은 무엇인가.

나는 억만장자 상속녀이다.

물의 언어술사가 오고 있다.

물의 언어술사를 노리는 세력이 많다.

그리고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아마 제롬의 옆자리겠지.

“생각이 정리 되십니까?”

“그래요.”

나는 침착하게 답했다.

“레이디는 언어술사를 믿습니까?”

나를 바라보는 오스카의 눈빛이 진중하다. 나는 빠르게 바뀌는 창밖을 내다본다.

“믿어요.”

“…….”

“내가 직접 봤으니까. 제롬이 만든 불을.”

“그는 이 세상 모두에게 위협입니다. 그럼에도 그가 두렵지 않습니까?”

“두려워요.”

내 대답은 간단했다.

“하지만 그만큼 더 사랑해요.”

오스카와 나와의 눈빛이 마주친다. 오스카가 너털웃음을 지으며 말한다.

“욕망에 솔직하시군요. 훌륭한 자세입니다.”

“난 공작부인이 될 거예요.”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당신은 나를 도와줄 거예요. 아시겠어요?”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우리는 눈빛을 주고받았다. 우리에게 얽힌 이해관계를 봤을 때, 우리는 정말 훌륭한 파트너였다.

========== 작품 후기 ==========

더 섬세하게,

더 치밀하게,

이야기는 점점 더 절정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여기까지 잘 따라와 주시고 계신 것 같아 마냥 기쁘네요.

여러분들은 아마 모르실 수도 있겠지만 저는 소중한 의견 전해주시는 독자님들의 목소리에 항상 감사한 마음으로, 열심히 귀기울이고 있답니다.

항상 응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특히 자주 보이시는 분들껜, 여러분들은 모르는 저만의 내적 친밀감을 쌓아가고 있답니다. 특정할순 없겠지만 항상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만큼은 기억해 주세요 :D

그리고 항상 즐겁게 읽어주시고, 따라와주시고, 추천도 꾹꾹 눌러주시는 커튼 뒤에 숨어 계시는 독자님들도 모두 감사합니다.

여러분이 읽어주시는 것만으로도 저는 너무 기뻐요.

행복한 전기수가 된 느낌이랍니다.

이만 각설하고.

새 챕터이지요?

그리고 아직 풀리지 않은 이야기가 남아있습니다.

이제부터는 제롬과 세실리아의 이야기에 점점 더 초점을 맞춰 사건이 진행될 예정입니다. 강력한 전환점-앞 챕터의 서사-를 기점으로 두 사람이 서로에게 더욱 적극적이게 되고, 현실의 장벽을 넘어서 서로를 더욱 더 강렬하게 갈망하고. 원하고 탐하게 됩니다.

앞으로는, 서로 다른 두 직선이 앞으로 쭉쭉 나아가다 결국 한 점에서 만나게 되는 것처럼 둘 사이의 간격이 점점 좁혀지는 이야기들이죠.

가장 완벽하면서도 불안정하고 결여된 존재이기에

이 두사람들이 주인공이 될 수 있었지 싶습니다.

그리고 하나가 되어 서로를 통해, 더 완전해지는 것도요.

62화 이후로는, 혼자 글을 써나가며 원고를 만들어 두었었군요.

항상 독자 여러분들께 보여드리고 싶어 끙끙대며 혼자 꼭꼭 가지고 있던 원고인데 이렇게 빛을 보게 되는 것 같아 기쁩니다.

한 문장 한 문장 공을 들였던 기억이 납니다.

잠시 잊을 뻔 했는데 다시 들춰 보니 그러하네요.

날 것이라도 본래대로의 이야기를 전할 수 있어서 기쁩니다.

앞으로 글은 별다른 지장이 없는 한, 머지 않은 완결까지.

하루 세 편, 또는 그 이상 업데이트됩니다.

연참(1/3) 등의 표기를 하지 않으니, 조아라의 책갈피 기능을 활용해주시길 바랍니다.

사담이 길었네요. 이만 마무리하겠습니다. 모두 좋은 밤 되시고 행복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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