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가 내린 후에는 -->
나와, 샬롯. 그러니까 우리는 그 다음에 실컷 놀았다. 사실 그것은 단지 솔이나, 미세로, 레상의 신상 구두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만남과는 달랐다. 우리는 암묵적인 동의를 했고, 그랬기에 서로를 더 잘 ‘인간적으로’ 이해하기 위한 이 시간이 소중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야말로 동맹 강화였다. 우리는 서로를 의식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내가 알렉산더, 그러니까 왕세자를 본 것은 글쎄. 눈이 오는 어느 겨울이었어. 열 둘, 열 셋이었나. 그러니까 내가 곧 달거리를 시작할 그 쯔음이었지.”
“와, 감흥이 남다르셨겠네요.”
나는 내 앞에 있는 쿠키를 집어들었다. 쿠키 안에는 굳은 잼이 담겨 있었는데 달달한 맛이 일품이었다. 그래서 아까부터 그 쿠키만 열심히 집어먹고 있었다.
“쿠키가 맛있나 보지?”
“아, 네. 왕궁 페이스트리 셰프가 열심히 일하시나 보네요.”
“아냐, 아냐. 테네시 제과에서 들여온 것들이야. 좋아한다면 보내줄게.”
“고마워요, 샬롯.”
“아, 나한테 고마워하지 마. 내가 한번만 사서 보내줘도, 네 남편 될 사람은 베이커리를 사서 네 발 아래다가 가져다 놓을 테니까, 뭐.”
“하하.”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차를 한번 마시고는 다시 샬롯을 바라보았다.
“샬롯, 부디 더 말해주세요. 제가 재미있는 이야기를 놓치고 있어서요.”
“그래. 맞아. 나는 그때, 그러니까 알렉산더를 처음 만났을 때. 어떤 기분이었을까? 네가 감히 맞춰 보려고 해도 좋아.”
샬롯은 흥미어린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평생 따분하다는 표정만 지었을 것 만 같은 사람의 얼굴에 떠오른 흥미어린 표정. 나는 그녀의 기대에 부흥하기 위해 내 머릿속에 있는 모든 상상력을 짜내려고 노력했다.
“글쎄요. 저 같았으면, 조금 화났을 것 같기도 하고……. 평생 같이 살아야 할 사람이 태어나자마자 정해진 거잖아요. 왕가의 청혼을 거절할 수 있는 사람은 없으니까요.”
샬롯이 내 대답에 큭큭거리며 웃었다. 나는 동그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문득 나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이 앳돼어 보였다. 그녀의 눈은 빗발치는 흰 눈을 담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런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조용히 찻잔을 들어올린다.
“아냐, 놀라울 정도로. 나는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와 체스를 많이 해 왔어. 아버지는 파티장 꼭대기 층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체스의 룰을 알려주었어. 그 게임에서 나는 아버지의 거대한 퀸이었건 거야. 휼륭한 아버지 밑에서 나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어. 세상의 규칙은 간단해.”
나는 그녀가 조금 취했다고 생각하면서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처음에는 체스 판의 규칙에 순응해. 훌륭한 말이 되는 거지. 그리고 네 아름다움이든, 가문이든, 부든 네가 가지고 있는 힘을 사용해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거야. 그러면 언젠간, 너도 너만의 게임을 할 수 있을 때가 와.”
“제가요?”
“그렇지.”
그녀의 아름다운 눈이 내 손을, 그리고 나를 훑는다.
“그러면 너는 생각해야 하는 거야. 내가 가진 가장 큰 패는 뭐지?”
“…….”
“내가 가진, 가장 큰 무기는 뭐지?”
나는 그녀의 물음에 답하지 않았지만, 마음속은 이미 해답을 알고 있었다.
“눈이 오는 날, 사람들은 그렇게 말해. 나는 마치 감정없는 인형처럼, 아직은 저에게 맞지 않는 화려한 옷을 입고 눈 속을 걷고 있었다고. 내 발 밑으로 끌리는 옷자락엔 눈이 묻어 있었고, 내 앞에 보이는 것은 번뜩이는 섬광의 눈빛을 한 한 사내였지.”
그녀의 결혼식. 문득 그녀 뒤에 있던 태피스트리가 눈에 들어왔다. 많은 시녀들과, 엄숙한 신도들. 그리고 자신의 나이보다 더 큰 옷을 입고 있었던 한 작은 어린 아이. 그리고 그녀 앞에서 그녀를 기다리던 젊은 왕세자 알렉산더.
“‘고개를 들라’고 알렉산더가 말했어. 그리고 내가 고개를 들었을 때, 알렉산더와 눈이 마주쳤지. 그리고 난 단번에 사랑에 빠지게 된 거야, 사내가 아니라 사내의 욕망에. 열정에. 야망에. 그 순간, 나는 느꼈지. 내가 이 사람의 옆자리에 선다면 불행하지는 않을 것을 말이야.”
눈을 파르르 내리까는 그녀의 눈빛에는 무언가가 담겨있었다. 무엇이었을까. 젊은 날에 대한 회한? 아니면 옛 이야기를 말하는 사람의 노련함일까.
그때, 내 턱을 들어올리는 부유감에 나는 아래를 바라보았다. 단단한 부채가 내 턱을 짚고 있었고, 그 너머로 샬롯의 짓궂은 미소가 보였다.
“넌 지금도 생각을 하고 있구나.”
“샬롯?”
그녀가 탁, 소리나게 부채를 치웠다.
“하나 가르쳐 줄게.”
그녀가 벌꿀주를 들이켰다. 그리고 턱을 괴며 나를 특유의 미소로 바라보았다.
“넌 생각이 너무 많아.”
그녀가 손을 기울여 세공된 주전자를 잡았다. 그러자 내 잔은 붉은 와인으로 가득 찼다. 나는 그것을 가만 내려다보았다. 내 얼굴이 반사된다.
“그냥 생각을 하지 마.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하지만 샬롯, 전 그냥 차를 마시고…….”
“세실리.”
그녀가 찻잔을 잡으려는 내 손을 잡아세웠다.
“마지막으로 너를 술먹여서 죽이려던 사람은 궁 채로 불타서 죽었어.”
내 놀란 표정에 샬롯은 비웃듯 입꼬리 한 쪽을 끌어올렸다.
“그리고 나는 마르사처럼 멍청하지 않아. 마셔.”
나는 와인잔을 들이켜, 와인을 비웠다. 도수가 꽤 높은 것인지, 나는 목이 타오르는 느낌에 몇 번이고 잔기침을 하며 조금 흐릿해지는 시야로 앞을 보려 노력했다. 어지럽다. 그런데 기분이 확 좋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어때?”
샬롯의 목소리였다.
“어지러워요.”
“아하. 그래, 그 느낌이야.”
샬롯이 천천히 걸어와 내 옆에 앉았다.
“생각을 하지 마. 그냥 하고 싶은 대로 해. 세상 복잡하게 살아서 훈장을 주는 것도 아니잖아?”
나는 그녀에게 기댔다. 그녀는 내게 또 다시 한 잔을 가득 채워 주었다. 나는 그것을 받아들었다. 샬롯은 제 잔 또한 채워 집어들고는 나를 미소로 바라보았다.
“미래의 공작부인께, 건배.”
“건배.”
정신을 차리니, 입에는 와인 같은 것이 묻어있다는 느낌이. 그리고 책상에 놓여 있는 잔은 깨끗이 비어 있었다. 생각조차가 마비될 정도로 기분이 좋다.
“생각을 하지 말라…….”
읊조리듯 뱉은 말이 제멋대로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다.
“그래. 생각하는 걸 그만두는 거야.”
그 말을 뒤로 나는 정말로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샬롯의 가녀린 손가락이 나를 쓰다듬고 있었고, 나는 그녀에게 기대 잠시 눈을 감았다.
정신이 들었을 때, 우리는 웃고 있었다. 너무 크게 웃어서 웃음소리가 향기가 되었으면 온 세이지 궁을 다 물들였을 것이다. 나는 거울을 보고 있었다. 거울에 있었던 나는 온갖 보석을 치렁치렁 두르고 영문도 모른 채 그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시야가 조금 흔들린다.
“오, 오. 세상에. 정말 잘 어울리잖아. 역시 루비는 당신 색깔이라니까.”
샬롯이 등 뒤에서 루비 목걸이를 하나 더 둘러 주었다. 듣기로는 왕궁에 오래 묵혀 두었던 천문학적인 가격의 돌, 아니 보석들이라는데. 나는 고개를 숙여 내가 낀 목걸이에 박혀있는 크고 예쁜 루비를 바라보았다. 루비가 빛 없이도 여러 방향으로 반짝 빛났다.
“너무 예뻐요, 샬롯.”
“그렇지? 이카로스가 처음 세워졌을 때. 우리 가문 선조께서 선물받은 루비야.”
“세상에.”
나는 놀란 표정으로 샬롯을 보았다.
“이런 귀한 걸 제가 하고 있어도 돼나요?”
“당연하지.”
샬롯은 내 손을 부드럽게 잡아, 내 목에 걸린 루비에게서 떼어놓았다.
“그리고 가져도 좋아. 지금 네가 걸치고 있는 것들 모두.”
“말도 안 돼.”
“왕세자비는 한 입으로 두말 안 해.”
“샬롯, 저는…….”
“세실리. 내가 아까 생각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말했더라?”
“저는 반짝이는 것들이 좋아요.”
제정신이 아니었다. 취기로 머리는 어지러웠고, 기분은 좋았다.
“그래, 그럼 네가 다 가지는 거야.”
꿈속에 있는 것만 같았다. 내가 평생 그림으로만 보았던 왕궁에서, 왕세자비와 함께 보석을 고르고 있었다. 나는 기분이 좋아서 가쁜 숨을 쉬며 미소지어보였다. 샬롯은 그런 나의 뒤에 서서 내 어깨를 쓸며, 작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세실리. 네가 다 가지는 거야.”
그 이후, 시간이 조금 지나고 문이 벌컥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샬롯 왕세자비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방문객을 보았다. 나도 그랬다. 아하. 샬롯은 내게 자고 가라는 이야기를 했고, 나는 좋은 생각이라고 했지만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한 사람이 있었나 보다.
그 사람은 내가 궁에서 자고 간다는 편지를 받아보자마자 말을 타고 급히 달려왔는지 얼굴이 열기로 붉게 달아오른 채,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세이지 궁에 외부인, 그것도 ‘남자’ 라니. 알렉산더 왕세자가 분노로 펄쩍 뛸 일이기도 했지만 그 사람에게는 문제되지 않았던 모양이다.
“너무 급작스러운 방문이지 않은가요, 화이트 공작?”
“세실리아를 데리러 왔습니다.”
나는 샬롯의 무릎에 누워, 카탈로그를 보고 있었다.
“추워요, 샬롯. 밖에서 찬 바람이 들어와요.”
“쉬이, 세실리. 미스터 프로퍼Mr.Proper께서 오셨답니다.”
나는 샬롯의 농담에 정신을 놓고 웃었다. 하지만 제롬은 웃지 않았다.
“데려가겠습니다.”
“세실리아는 애가 아니에요, 공작.”
샬롯이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응수했다.
“게다가 ‘데려가겠다니’, 세실리는 아직 화이트가 아닌걸요?”
“그렇다고 베르디게츠도 아닙니다.”
그 말과 함께, 부유감이 느껴졌다. 나는 제롬의 차가운 옷자락에 얼굴을 부볐다. 그러다 제롬의 서늘한 눈빛과 마주쳐 미소를 지어보였다.
“혹시 화났나요, 제롬?”
제롬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나를 들어올려 복도를 걸었다.
왕가의 마차를 빌려 집으로 향할 때는, 제롬은 무언가에 화가 났는지 말을 하지 않았다. 나는 그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리라고 나름 다짐하면서도 제멋대로 튀어나오는 말들에 그만 입을 막고 싶었다.
“제롬, 자세 불편해요.”
그가 나를 고쳐 안았다. 내 등을 받치고 있는 그의 팔이 단단했고, 내 무릎 아래 다리를 받친 그의 팔 또한 그랬다. 하지만 나는 괜히 버둥거리며 그의 무릎 아래에서 내려오겠다고 애를 썼다. 그러게, 그와 함께 이동할 때는 왜 이렇게 비효율적인 자세로 있어야 할까, 생각하며.
“저도 의자에 앉아서 가고 싶어요.”
“어리광 부리지 마십시오.”
“화났어요?”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냥 샬롯이랑 노는 거였는데요.”
“세실리아.”
그가 나를 조용히 내려다보았다.
“당신이 그렇게 마르사의 궁으로 떠났을 때, 저는 거의 당신을 잃을 뻔 했습니다.”
“……미안해요.”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하다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앞으로는 일찍 들어오십시오. 많이 바라지 않습니다.”
“그래요, 제롬.”
나는 분위기를 좋게 하려는 양, 교태어린 미소-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를 지어보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곧 샬롯이 여는 무도회잖아요. 드레스는 뭘 입을까요?”
“생각해 놓으신 것이라도 있습니까?”
“글쎄요. 율리아랑 상의해 보아야 하나…….”
“그 계획에 오스카 백작은 빠져 있는 것이라고 약속해 주십시오.”
“알았어요.”
나는 고개를 두어번 끄덕여 보였다. 그러자 제롬의 표정이 조금 풀어졌다.
“그리고 보석은…….”
그가 그 말과 함께 미간을 조금 찌푸렸다.
“샬롯 왕세자비의 것들을 돌려주는 것부터 시작해야겠습니다.”
“하지만 제롬, 이건 샬롯이 제게 선물로 준 거라고요.”
“세실리아.”
제롬의 단호한 눈빛이 내 것과 마주쳤다. 나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비슷한 것으로 다 사 놓겠습니다. 그러니까 이번 건 제 뜻대로 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좋아요. 좋아요.”
나는 아쉬운 마음을 감추며 목걸이를 만지작거렸다. 그러다 한숨을 쉬었다.
“무도회라니. 정말 벌써부터 머리가 복잡해요.”
“괜찮을 겁니다.”
그가 나를 안심시켰다. 나는 그의 품에 폭 파고든다. 그가 있어서 좋다. 항상 옳은 길에서 조금 벗어나려고 하면, 그가 다시 환한 곳으로 나를 이끌어 온다. 그는 내 완벽한 지지자이며, 안식처이며, 빛이다. 그래, 그랬다. 그는 내 어두운 일상에 환한 빛이 되어 주었다.
희미한 정신 속으로 내 손가락이 보인다. 손가락은 그의 깔끔한 크라바트를 희롱한다. 제롬은 그런 나를 내려다보며 한숨을 쉰다.
“왜 한숨 쉬어요, 제롬?”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왜요?”
거듭 묻는다.
“사랑합니다.”
그가 한참 뒤 내놓은 답은 이것이었다. 나는 영문을 모르고 눈을 깜박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네?”
“정말, 많이. 레이디가 생각하는 것보다 많이. 사랑하고 있습니다.”
“알아요, 제롬.”
그가 나를 간절한 눈빛으로 바라보자, 나는 두어번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금 이야기했다.
“알아요.”
그의 얼굴을 쓰다듬는다. 그는 목마른 짐승이라도 되듯, 내 손길에 안도한다. 우리는 서로의 체온을 느끼며 서로의 존재에, 안락함에 취해 있었다. 나는 그를 바라본다. 그리고 굳은 결심을 한다. 무도회, 그 날에 물의 언어술사는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그리고 나는 제롬이 그녀를 보고 ‘운명처럼’ 사랑에 빠지기 전에. 그녀를 죽…목숨을 앗아갈 것이다. 그래, 아마 할 수 있을 것이다.
창문 너머, 흐린 구름 사이로 흰 달이 보인다. 나의 눈빛은 달을 쫓는다. 아무런 죄 없이, 순백의, 깨끗해 보이는 아름다운 달. 나의 죄악을 비추어 빛나는 그런.
나는 투명한, 보이지 않는 칼을 품 속에 안고 있다.
나에게 ‘당신이 사랑할 사람을 죽일 권리’가 있을까. 과연 의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