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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8.
당신이 사랑할 사람을 죽일 권리
The Rights to kill the one you'll cherish
다음날, 그리고 다음날, 그리고 다음날, 또 다음날.
무도회 준비는 생각보다 많은 힘이 들었다. 이것저것 고르고 관리하고 또 고르고……. 그리고 내 몸을 관리하는 소피아 부인이 먹는 것도 마음대로 못하게 해서 아주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또, 제롬이 내가 집 밖으로 나가는 걸 좋아하지도 않으니 아주 지루함으로 죽을 것 같았다. 내가 이렇게 죽는다면 아마 사인이 ‘지루함’ 으로 기록 되겠지. 아마 웨스트 체셔에서 유일할 것이었다. 망할 귀족 도감. 망할 네임북.
왜 왕세자비 샬롯이 그렇게 많은 밀고자들을 거느린 건지도 나름 짐작이 갔다. 집에 박혀서 할 일이 없으면 이야기라도 들어야 하지 않겠는가.
앗. 또 꽃병을 다듬고 있는 하녀와 시선이 마주친다. 이렇게 제롬의 성 안에 있는 모든 시종인들의 눈이 나를 검문하듯 지켜보고 있다. 그리고 그 행동은 모두 제롬에게 보고될 모양이겠지. 이걸 어떻게 아느냐고?
내가 이것을 시험해보기 위해 정원의 장미들을 꺾은 적이 있었는데 제롬은 일을 마치고 저택에 돌아와 내게, ‘왜 장미를 꺾었습니까, 세실리아.’ 라고 했다.
물론 내가 장미를 꺾은 건 어떻게 알고 있느냐 물었더니, 제롬의 눈이 흔들렸다.
‘내가 장미를 꺾은 건 어떻게 알고 있냐고 물었잖아요, 제롬!’
‘손이라도 다쳤더라면 어쩔 뻔 했습니까.’
그는 이유는 알려주지 않은 채, 내 손에 제 입술을 맞추었다.
‘내 손이에요, 내 손에 내가 상처 내게 되는 건데 그게 왜요!’
‘세실리아.’
‘……미안해요. 요즘 좀 예민한가봐요.’
그리고 그럴 수밖에 없었다. 물론이었다. 물의 언어술사가 오는데 나는 아무것도 안하고 이렇게 제롬의 정원에 핀 꽃마냥 가만히 있기만 하고 있으니 예민해지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게다가 제롬의 집착이 조금 과한 것 같다는 생각도 들고. 그러고 보니 그렇다. 그가 나를 항상 안을 때, 너무 조심스럽다. 여자를 안는 것이 아니라 꼭 여신을 안는 것 같달까. 그 숭배하는 듯한 입맞춤과, 부서질 듯 조심스러운 그 손길.
생각해보면 나는 단순히 그의 안주인 이상의 대우를 받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매일 향유로 몸을 마사지받고, 옷은 가장 귀한 실크로 만든 드레스를 걸친다. 그는 나를 안으며 항상 내 머리를 쓰다듬고는 내가 그의 여신이라고 말해준다. 그러면 마음이 무겁다.
언젠간 이 자리를 누구에게 내어주어야 할 것 같아서. 그가 잘 가꾸어 놓은 정원 속에서 영원히 그의 여신으로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숭배 받는 기분은 나쁘지 않으니까.
그는 가장 행복한 순간이, 집에 돌아와 내가 그의 방에 있는 것을 확인할 때라고 말했다. 내가 있어서 라스트 바빌론이 의미 있다고 말한다. 그의 장소에, 영지에 내가 살아 숨쉬어서 행복하다고. 나는 솔직하게 말하자면, 그렇게 원해져서 기쁘다.
그와 나만 있을 때, 그의 눈빛에 들어찬 그 음험한 욕망이 다 나에 관한 것일 때.
“레이디.”
그때, 브리젯, 저택의 하녀가 나를 부른다.
“손님이 찾아오셨어요.”
“아마 아그니스일거야.”
아그니스가 오늘 오기로 약속했다. 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서 문가로 향한다.
“앗, 잠깐만요. 레이디.”
“응?”
“리본 풀어졌어요.”
브리젯이 내 등 뒤, 허리쯤에 있는 리본을 다시 곱게 묶어준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통을 꺼내 제 손에 노란 기름같은 것을 부었다.
“아, 그건 뭐니?”
“향유요.”
그녀가 제 손에 묻은 향유를 비벼 내 머리를 몇 번 쓸어 풍성하게 만들어준다.
“고마워.”
“감사합니다.”
나는 이제 익숙하게, 복도를 걸어 응접실로 향했다. 머리에서 좋은 향기가 났다. 기분이 좋아, 웃으며 문을 열자 그 뒤에 차를 마시고 있었던 아그니스가 있었다.
“아그니스!”
“세실리!”
그녀가 내게 걸어와 안겼다. 나는 그녀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잘 지냈어?”
“물론 그랬지, 세실리. 너도 잘 지낸 것 같아서 다행이다.”
우리는 자리에 앉았다. 나는 아그니스와 내 주위를 둘러싸며 어색하게 청소를 하고 있는 하녀들을 의식하고는 에헴, 헛기침을 했다.
“얘들아. 이만 자리를 비켜 줄래?”
하녀들은 고개를 꾸벅이고는 일제히 문 뒤로 사라졌다. 아그니스가 나를 본다. 내가 시큰둥하게 말한다.
“하녀들이란.”
“그러게.”
아그니스가 어깨를 으쓱한다. 나는 웃는다.
“그래서, 새로운 소식이라도 있어?”
아그니스는 내 말벗이다. 샬롯이 전문 밀고자들이 있듯, 나에게는 아그니스가 있었다. 피는 물보다 진하고, 아그니스는 내 가족이었다.
그래서 항상 믿을 수 있었다. 제롬도 아그니스를 믿었다. 그래서 아그니스는 나와의 만남에 제약을 받고 있지 않았다.
“아. 물론 있지.”
아그니스는 책상 위 머랭을 바쁘게 집어먹었다. 테네시 제과의 것들이라 맛있을 것이었다.
“다이애나가 결혼한다잖아.”
“정말? 오스카랑?”
처음 듣는 소식이었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거듭 물었다.
“진짜?”
“어엉. 어떻게 모를 수가 있니, 세실리아? 다이애나가 너한테 말 안 해줬어?”
“응. 그러고 보니 요즘 바빠서 다이앤을 못봤네.”
“그럴 수도 있지, 뭐. 다들 무도회 준비로 바쁘잖아.”
아그니스가 차를 마시고는 찻잔을 내려놓았다.
“뭐, 잘 된 일이라고 생각해. 그럼 확실히 쓸데없는 소문도 줄어들 거니까.”
“소문?”
“왜, 그런 소문 있었잖아. 다이애나랑 오스카랑 불화설 있었다는 거.”
“다들 떠들기 좋아하는 사람들의 헛소문이지.”
“그러니까. 뭐 어쨌든 이상한 소문 잠재우기엔 두 사람 결혼이 딱이지 뭐.”
나는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잘 된 일이네. 두 사람 정말 잘 어울리잖아.”
“뭐 그렇지.”
아그니스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다이애나 본인은 막상 그렇게 행복해 보이는 것 같지 않아서 걱정이야.”
“다이애나가?”
“아직도 잭 제커시스 경의 죽음에서 벗어나지 못한 건지, 원. 그런데 그럴 거면 결혼은 왜 한다고 했는지 몰라. 슐츠 백작만 불쌍하지.”
“그래도 소문을 잠재우긴 해야 하니까.”
나는 차를 마셨다. 씁쓰름한 차의 향내가 혀끝으로 밀려들어왔다.
“그러면 불화설같은 말도 안 돼는 소문이 잠잠해지겠지. 확실히 그럴 거야.”
아그니스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고 나를 보고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다이애나가 행복하지 않은 신부같은 건, 내 착각일까. 세실리?”
“그건 나도 모르지.”
“두 사람의 결혼식에 다른 사람이 관련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어. 외압이 있었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
나는 일갈했다.
“우리가 보게 될 건 정말 예쁜 결혼식일거야. 다른 사람들의 가십에 귀 기울이는 건 시간낭비야. 두 사람은 정말 훌륭한 커플인데 애초에 그 결혼 뒤에 누가 있었겠어.”
“그러겠지. 그래.”
아그니스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무엇이라도 생각났다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무도회 뒤에 축제가 다가오네. 우리 같이 가기로 했잖아. 기억나지?”
“아. 그래.”
물의 언어술사를 찾는 축제. 매년 있는 연례행사였다.
“정말 재밌겠다.”
내가 웃어보였다. 아그니스가 답례로 웃어보였다.
아그니스는 나와 카드 게임을 하고 있었는데, 그때 누군가가 또 찾아왔다. 그리고 그 사람은 정말 잘 왔다고 할 수 있다. 내가 지고 있던 참이었으니 말이다.
“아, 율리아!”
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율리아는 나를 보더니 흠칫 놀라하다 다시 웃어보였다.
“아, 세실리아. 아그니스.”
“앉아, 앉아. 우리 막 카드 게임 하고 있었어.”
율리아는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녀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율리아……. 괜찮아?”
“응?”
“안색이 안 좋아 보여서.”
“괜찮아, 세실리아.”
율리아는 그리고 가방을 뒤졌다. 그리고서는 흰 봉투 하나를 꺼내 내게 건넸다.
“이건 네 거야 세실리.”
왕가의 인장이 찍혀 있는 것이었다. 발신인은 분명히 샬롯. 나는 그것을 조심히 받아들었다.
“혼자 봤으면 좋겠어. 왕세자비께서 부탁하셨어.”
“그래. 꼭 그럴게.”
“고마워 세실리.”
그리고서는 율리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벌써 가?”
“아, 응.”
율리아는 대답하고는 옷자락을 정리했다.
“세실리아, 그 편지 빨리 보고 싶을 거야. 그리고 잘 있어.”
나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편지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아그니스를 바라보았다.
“그럼 나도 이만 가 볼게.”
아그니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샬롯이 내게 보낸 편지가 어떤 것인지 대략 짐작이 가서였다.
아그니스가 방문을 나선 뒤, 나는 실내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편지를 뜯어보았다. 그리고 나는 숨이 멎는 것만 같은 감정을 느껴야 했다. 편지봉투 안에는 약포지가 들어 있었다. 그리고 깔끔하게 접은 종이 하나. 나는 그 종이를 펼쳐보았다.
무색, 무향, 무취의 독이에요, 세실리.
당신이 현명하다면 어디에 쓸지 알겠지.
-샬롯
나는 눈을 여러 차례 깜박이다 떨리는 손으로 종이를 접어 다시 편지 봉투 안으로 집어넣었다. 숨겨야 했다. 그리고 이것을……. 이 독을……. 무도회날에 가져가 물의 언어술사가 마실 와인잔 안에다가 뿌릴 것이었다. 그래. 그래야 했다.
나는 빨리 편지를 디저트 상자 하나에 넣은 뒤, 뚜껑을 닫았다. 다행이 실내에 보는 눈이 없었다. 나는 디저트 상자를 들고 빠르게 걸음을 옮겨 내 방으로 향했다.
성공적으로 도착한 후, 문을 닫은 뒤. 나는 문에 기대 숨을 헐떡였다. 내 방에도 다행히 사람이 없었다. 조용했다. 그래서 나는 베개 속에 샬롯의 편지봉투를 숨길 수 있었다.
성공적으로 편지봉투를 숨긴 뒤, 나는 드디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방 주위를 한참동안 서성거렸다. 손이 차가웠고, 무언가 저질렀다는 마음에 속이 울렁였다.
“뭐지……?”
나는 문가로 다가간다. 그리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을 느낀다.
“내가 아까 제대로 못 닫았나?”
방 문이 조금 열려 있었다. 나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문을 부러 쾅 소리나게 닫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