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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울밤의 고백-84화 (84/108)

<-- 당신이 사랑할 사람을 죽일 권리 -->

율러의 왕세자비 샬롯과, 왕세자 알렉산더. 그리고 왕은 사람들을 불러모았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왕궁의 입구, 계단 위에서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언어술사의 전설을 알고 있는 사람은 소수였기에 대부분 하늘에서 비가 정말 올지 반신반의하는 분위기였다.

‘저 여자가 정말로 비를 내릴 수 있다고? 말도 안 돼!’

‘물의 언어술사라는 게 정말로 존재하는지 몰랐는데…….’

‘물과 불이라니. 제롬 공작과 레이디 제인은 정말 잘 어울리는 한 쌍이겠어요.’

웅성임. 그리고 차가운 공기가 폐부에 밀려들어왔다. 군중들 속에서, 푸른 드레스를 입은 제인이 계단을 한 칸, 한 칸 차례로 내려갔다. 모두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향했다.

제인은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손을 모았다. 그러자 모두의 탄식이 뒤따랐다. 공기에서는 비냄새가 섞여 나고 있었고,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아 적막했다.

그때 종소리가 들렸다. 정확히 열시를 알리는 깔끔한 종 소리.

뎅. 뎅. 뎅. 종이 세 번 쳤을 때, 하늘에서 과연 비가 오기 시작했다. 조금씩 내리던 비가 폭우가 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그리고 열 번 종이 쳤을 때엔 하늘이 무너질 듯 비가 내리고 있었다. 신사건, 숙녀건 지금 제가 보고 있는 광경이 믿기지 않는다는 눈치였다.

‘나는 언어술사 이야기는 전설인줄로만 알았는데…….’

‘구세주다. 구세주야!’

‘물의 언어술사가 정말 하늘에서 내려오셨다!’

빗속에서 기도를 하던 여자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환호 속에서 그녀가 뒤돈다. 제인의 아름다운 푸른 눈동자가 반짝인다. 눈을 곱게 휘며 사람들을 바라본다.

나는 멍하니 그녀를 바라본다. 그리고 제롬을 바라본다. 제롬은 제인을 바라보고 있다. 무표정한 얼굴이었지만 그의 시선은 분명 제인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번개가 반짝이고, 천둥이 친다. 순간. 나는 내 자신이 너무나도 초라하게 느껴져서 참을 수가 없었다.

예언대로, 물의 언어술사가 제롬의 옆자리를 찾으러 왔다. 그럼 이제 나는 어떻게 되는 걸까. 손이 떨렸다. 나는 홀로 궁 안으로 들어간다. 궁 안은 비어있다.

바깥에서 환호 소리가 들린다. 다들 제인의 이름을 부르며 그녀를 구세주라고 하고 있었다. 천둥이 쳤다. 물의 언어술사의 기도에 마른하늘에 천둥이 치고 비가 내렸다.

나는 경외감에, 그리고 한 편으로는 두려움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와인이 놓인 책상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주위를 살피고는 브로치에서 약재를 꺼낸다. 약포지를 뜯어 와인 안에, 하얀 독가루를 푼다. 흰 가루는 와인에 잘 녹아든다.

나는 그 와인을 들었다. 이 와인을, 꼭 물의 언어술사에게 먹일 것이다. 나에게서 제롬을 빼앗아갈 수 있는 것은 없다. 아무리 하늘의 뜻이, 우니베르 신의 뜻이, 그리고 운명이 그렇다고 해도. 제롬을 나에게서 빼앗아갈 수 있는 것은 없다.

손이 광기로 떨린다. 숨이 막힌다. 그때,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있었다.

“세실리아?”

나는 와인잔을 들고는 천천히 뒤돈다.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었다. 다이애나였다. 다이애나의 손에는 오스카가 준 반지가 끼워져 있었고, 그녀는 항상 그렇듯 푸른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다, 다이애나.”

“세실리.”

“너…는 물의 언어술사 보러 안 나간거야? 레이디 제인이 비를 내린다고 하던데…….”

내 목소리가 떨렸다. 그때 다이애나가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나는 몸을 흠칫 떨었다.

“네 브로치 로켓 열렸어.”

나는 뚜껑이 열려있는 내 브로치를 바라본다. 급히, 내 손이 브로치 뚜껑을 닫는다.

“고마워, 다이애나.”

어색하게 웃었다. 다이애나는 미소로 답례한다.

“다이앤. 그동안 많이 못 봤는데, 잘…지냈어?”

내 목소리가 떨린다. 다이애나는 고개를 젓는다.

“나 결혼해. 세실리아.”

“아, 맞아. 아그니스한테 들었어. 언제가 결혼식이야?”

“세실리아.”

다이애나의 목소리가 짐짓 단호했다.

“미안하지만, 내 결혼식에 안 와줬으면 좋겠어.”

“뭐? 다이애나, 그게 무슨 말이야?”

“하.”

다이애나가 비웃듯 말했다.

“너는 정말 몰랐구나? 지금까지. 아무것도?”

“그게……. 무슨.”

잔을 쥔 내 손이 떨린다. 다이애나의 목소리가 점점 낮아진다.

“세실리아, 너 때문에 몇 사람이 피해를 봐야 되는 거야? 잭도 그렇고, 오스카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그러고서는 어떻게 너는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을 수 있니?”

“다이애나. 나 정말 이해가 안 돼.”

“너랑 오스카랑 어울려 다니니까 이상한 소문이 났잖아!”

“그게 왜? 그건 떠들기 좋아하는 사람들의 가십일 뿐이야.”

그 말에 다이애나가 미간을 찌푸렸다.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그래. 그리고 그 소문을 잠재우려고, 네 공작 전하께서 그린힐 가문에 압력을 넣었어. 모르고 있었구나. 너랑 오스카랑 자꾸 엮이니까, 그 소문을 잠재우려고 나랑 오스카를 억지로 결혼시키려 하고 있다고. 네 공작 전하께서.”

나는 그만 손에 쥐고 있던 와인을 떨어트릴 뻔 했다.

“하, 하지만……. 다이앤.”

“아니, 세실리아.”

그녀가 단호하게 내 말을 끊었다.

“나와 오스카를 결혼시키라는 공작의 명에 아버지와 어머니는 기뻐하셨어. 나와 오스카의 결혼은 정해진 일이었고, 그걸 줄곧 거부해온 건 나였으니까. 그리고 나도 네 동생한테는 악감정 없으니까, 게다가 에드거는 아직도 카밀리아를 아끼니까.”

다이애나의 목소리가 분노로 떨리고 있었다.

“우리 가족이 카밀리아한테 끼칠 악영향은 없어. 그러니까 더 이상 나한테 말 걸지 마.”

“다이애나!”

“안녕, 세실리아.”

그녀가 뒤돌아 멀어졌다. 나는 비틀거리다, 와인 테이블 옆에 있던 의자에 가서 앉았다. 내가 들고 있었던 금빛 와인잔의 표면에 나의 표정없는 얼굴이 반사되었다.

세상에, 제롬은 무슨 일을 저지른 걸까?

제롬에게 나와 오스카와 관련된 추문을 잠재워달라고 부탁했다. 제롬은 승낙했다. 그리고서는 그 소문을 잠재우기 위해 다이애나와 오스카를 억지로 결혼시키려고 하고 있었다. 손이 떨렸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그야말로 오스카를 기혼자로 만듦으로서, 모든 소문을 종결하는 것이었다. 나와 관련된 추문도. 다이애나와 오스카와의 불화설도.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제롬은 저보다 아래에 있는 사람들을 체스 패마냥 마음대로 사용했다. 그 사람들에 대한 존중은 없었다. 그리고 이건 분명한 나의 잘못이었다.

내가 제롬에게 그렇게 해달라고 했다. 그가 가진 힘을 너무나도 가볍게 알고서는.

나는 그리고서는 다시 독이 든 와인 잔을 바라보았다. 제롬이 나를 위해 한 일은 끔찍했다. 그리고 나는 차마 그와 똑같은 일을 저지를 수 없었다.

그때, 사람들이 돌아오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람들의 중심에 있는 제인이 보였다. 그리고 그녀의 옆에 있는 제롬도.

나는 고개를 돌린다. 진심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두 사람의 행복을 빌었다.

그 뒤로, 나는 다이애나를 찾아다녔다. 하지만 다이애나를 봤다는 사람은 없었다. 나는 열심히 두리번거리다, 한 사람과 부딪힐 뻔 한다. 나는 위를 올려다본다.

“오스카.”

오스카였다. 그가 미소와 함께 인사한다.

“잘 지내셨나봅니다.”

“오스카.”

나는 가쁜 호흡을 원래대로 하려고 노력한다. 오스카가 곱게 미소짓는다.

“무슨 일이십니까. 그렇게 서두르시면서.”

“다이애나를 찾고 있어요.”

“아. 그녀라면 아까 정원에 있는 것을 보았는데 말입니다.”

“정원에요?”

“그렇습니다.”

오스카가 차분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왜 이렇게 서두르십니까. 레이디.”

“다이애나와 이야기를 해야 하니까요.”

“흐음.”

“실례할게요.”

내가 그를 지나치려 할 때, 그가 내 팔을 가벼이 쥔다. 나는 그를 돌아본다.

“무슨 얘기를 하려고 하십니까.”

그가 묻는다. 나는 눈을 굴리다 그에게 말한다.

“두 사람, 억지로 결혼하게 될 뻔 해서 미안해요. 그 말 하려고요.”

“그렇습니까.”

“그래요. 그리고 두 사람, 저 때문에 결혼 할 일 없을 거라는 말을 전하려고요.”

“그렇군요.”

그가 너털웃음을 지어보인다. 그리고 내 손을 놓아주었다.

“저는 곧 다이애나 양이 제 신부가 된다는 게 너무나도 기뻤는데, 안타깝습니다.”

“유감이네요. 실례합니다.”

나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 뒤돌았다. 그가 나를 다시 불렀다.

“아, 레이디 세실리아?”

내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보통 정원까지 와인잔을 가져가는 일이 흔한 건 아닌데, 그 와인은 누구 주려는 것입니까?”

그가 내가 들고 있었던 황금 와인잔을 가리킨다. 내가 웃어보인다.

“안 그래도 막 버리려고 했어요.”

나는 고개를 돌려 앞으로 걸어간다. 미소짓는다.

제롬이 우리의 사랑을 위해 사람들을 체스 말처럼 이용할 수 없는 거라면, 나 또한 그러면 안 되는 거였다. 내 사랑이 남에게 피해가 되면 안되는 것이었다. 나 정말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스스로가 바보같았다.

내 이익을 위해, 물의 언어술사를 죽이려고 했던 내 자신이 바보 같다. 예언이 옳다. 제롬의 옆에 있을 사람은, 내가 아니라 물의 언어술사인 제인이다. 그리고 두 사람은 행복하게 이 나라의 굳건한 기둥이 되어 이 나라에게 평화를 가져올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제 모든 것을 내려놓고 평범한 삶을 살아갈 것이다. 이제 이런 감정, 감상에서 벗어나. 애초에 이러면 되는 이야기였는데, 내가 행복하자고 나는…….

그러기 위해서 마지막으로 모든 일을 제 자리로 돌려놓아야 했다. 나는 정원으로 향했다. 하늘에 보름달이 떠 있었고, 나는 어렵지 않게 다이애나를 찾을 수 있었다. 그녀는 분수대에 앉아 울고 있었다. 나는 다이애나에게로 다가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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