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당의 종이 칠 때 -->
우리는 자리에 앉아, 긴 책상을 사이에 두고 서로를 마주보았다. 때는 저녁이었고, 하녀들이 멋지게 장식해놓은 은촛대 위에서 촛불이 은은하게 타고 있었다.
그리고 음식 너머로 보이는 제롬은 정말 천상 귀족처럼 완벽한 예법으로 고기를 썰고 있었고, 나는 그를 보며 넋을 놓고 있었다.
예법을 배우면 배울수록 그가 얼마나 예법에 능한지 알게 된다. 그의 행동거지 하나하나에는 정말 격식이 배어 있어 완벽하고, 웃음은 저를 닮아 또 고결하다. 그가 나를 본다.
“세실리아.”
“네?”
“아직 식사에 손을 대지 않으셨습니다.”
“아.”
내가 웃으며 주변에서 고기 한 덩이를 그릇에 옮겼다. 나는 소피아 부인에게 배운 대로 조심스럽게 포크와 나이프를 쥐고 제롬이 하는 것처럼 고기를 썰려 노력했다.
근데 안 썰어진다. 제롬은 어떻게 이걸 잘 하는 거지. 나이프를 쥔 손에 힘을 주니까 드레스 소매가 흔들린다. 고기의 결을 보라. 고기의 결을…….
“세실리아.”
“네?”
나는 고기를 보고, 다시 제롬을 보았다. 그가 눈을 휘며 미소지어보인다.
“편하게 식사하셔도 좋습니다.”
“전 충분히 편하게 식사하고 있어요, 제롬.”
“알겠습니다.”
나는 고상하게-세상에, 그는 먹는 것도 고상하고 아름답다-포크 끝의 과일을 먹는 그를 바라본다. 나도 배운 것을 써먹어서 저렇게 하고 싶었는데 생각대로 잘 되는 것이 아니었다.
“오늘 하루는 어땠습니까, 세실리아?”
“좋았어요.”
나는 고기를 써는 것에 집중하다, 그를 한번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샬롯이 내게 말해준 것을 기억해냈다. 많이 말하고, 대화하려고 노력해라. 나는 눈을 굴리다 그를 다시 바라보았다.
“음, 어……. 그리고 샬롯을 만났어요.”
“그랬습니까.”
그가 나를 바라보며 미소지었다. 샹들리에 빛 때문인지 나를 보는 그의 눈이 반짝였다.
“부디, 더 말해 주십시오.”
“그리고 저는 음, 어. 당신 얘기를 했는데.”
나는 와인을 마셨다. 그에게 내 이야기를 하는 게 익숙지 않아서였다.
“나중에 볼 우리 아이들이 얼마나 사랑스러울지. 그런 얘기도 했고.”
나는 이야기를 하며 그와 눈을 맞추는 게 부끄러워 고기를 입에 넣었다. 그는 내가 고기를 충분히 씹고 삼킬 때까지 내 말을 기다려 주었다.
“뭐, 그랬어요. 아, 맞다. 그리고 시녀 얘기도요.”
“시녀, 말입니까?”
“그래요. 저도 시녀를 곁에 둬 볼까 생각도 해 봤어요. 예전에 로즈블룸에서 살았을 때는 시녀를 두는 건 생각도 못 해봤거든요. 그런데 일을 도와줄 시녀 하나나, 둘 정도 있으면 좋을 것 같아서…….”
제롬은 내 말에 대해서 생각을 하는 듯 조용했다. 그는 고개를 두어번 끄덕이고는 나를 다시 보았다.
“옆에 사람을 두는 일은 신중해야 합니다. 믿을만한 영애라도 있습니까?”
“제 시녀로 적합한 사람 중에서는 아니요. 없는 것 같아요.”
“그럼 제가 알아보는 건 어떻겠습니까?”
제롬의 눈이 기회라도 잡은 듯 반짝였다. 이, 이게 아닌 것 같은데.
“아뇨. 괜찮아요. 제가 천천히 알아볼게요.”
시녀 자리는 제롬의 사람들이 아니라 내 사람들로 채우고 싶었다. 이미 그의 눈과 귀 역할은 저택의 하녀들이 충분히 하고 있는 것 같아서 말이다.
“마음에 드는 사람이 생기면 말해주십시오.”
“그래요. 그럴게요.”
나는 뿌듯한 생각이 들었다. 그와 함께 있으면, 주로 말하는 것은 제롬이었는데 내가 대화를 이끈 것이었다. 나는 고기를 베어물었다. 양념도 적당하고, 육즙이 환상적이었다.
“좋은 일이라도 있습니까.”
듣기 좋은 중저음의 목소리였다. 나는 그를 바라보았다.
“좋아서요.”
“무엇이 말입니까?”
“제롬이랑 이렇게 식사하는 거요.”
그의 미소가 커졌다. 가슴이 뛴다. 행복했다.
“저도 좋습니다.”
대답이 돌아온다. 편안하고 안락하고, 좋다.
식사를 마치고 우리는 서재에 있었다. 나는 그의 소파에 앉아 소피아 부인이 내게 선물한 세계사 책을 읽고 있었다. 제롬은 책상에서 업무를 처리하고 있었다. 나는 페이지를 넘겼다.
세계사는 첫 번째 접할 때에는 정말 지루했지만, 읽으면 읽을수록 이야기처럼 이어져 점점 몰입하게 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래서 내가 뒤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란 걸지도 모르겠다.
“이 책, 제 것은 아니군요.”
뒤를 돌아보니 제롬이 나를 흥미롭게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미소지었다.
“아, 제롬. 이건 소피아 부인께서 선물해주신 거예요.”
“아. 못보던 것이라 생각했는데, 역시 그렇군요.”
그의 말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제롬은 그렇게 책이 많은데, 정말요? 아니, 그러니까. 조금 놀랍네요. 그 많은 책들을 다 기억하고 계신다는 거잖아요. 이 책이 당신 게 아니라는 걸 단번에 알 정도라면.”
“별 거 아닙니다. 어릴 적부터 공부해왔던 게 쌓였을 뿐이죠.”
나는 눈을 굴렸다. 별거 아니라니. 그 어릴 적에 나는 뭘 했더라. 아마도 성당의 친구들이랑 낡은 로맨스 소설의 표지가 너덜거릴 정도로 돌려봤던 것 같은데.
“좋아요.”
나는 책을 덮고 제롬을 바라보았다.
“릴케 신성국이 리바에던 제국을 무너트리고 룩스 열강의 반열에 든 게 언제였죠? 년도로.”
“세실리아, 저는 숫자에 약합니다.”
“역시 제롬도 그건 모르는 거죠? 그건…….”
“카사로의 제국력을 기준으로 안센 398년이었습니다.”
“일부러 어려운 걸로 냈는데 맞추시네요.”
약이 올랐다. 저 똑똑한 남자가 틀린 답을 말해 쩔쩔매는 걸 보고 싶었는데, 너무나도 여유롭게 답이 나온다. 나는 그가 볼수 없게 책장을 몇 번을 넘기고는 그를 바라보았다.
“릴케 왕국이 스스로를 신성국이라 선포한 날은요? 날짜까지.”
“안센 165년 1월 9일이었습니다.”
“지금 아무 날짜나 대신 거죠?”
“확인해보십시오.”
나는 그를 미리 한번 비웃어주고는, 책 뒤에 있는 연표를 펼쳤다. 그리고 그가 맞았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책을 탁 소리나게 덮었다.
“어떻게 그렇게 잘 알고 계시는 거죠, 제롬?”
“저는 화이트 가의 차남이었습니다, 세실리.”
제롬이 천천히 걸음을 옮겨, 내 옆에 앉았다.
“아버지는 제게 너무 많은 희망을 주려 하지 않으셨습니다. 제게 놀라셨던 적이 없었죠. 그래서 아버지의 관심을 끌려면, 저는 항상 제 형보다 배로 노력해야 했습니다.”
“그랬군요.”
“그리고 진리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 돕기도 했습니다.”
그가 너털웃음을 지어보였다. 나는 제롬의 눈을 그저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 담긴 공허함이 보여, 나는 그대로 굳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런 게 모성애인가, 싶기도 하고. 나는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어 제롬의 손을 꼭 잡았다.
“이젠 괜찮아요.”
그가 나를 보며 아름다운 미소를 지어보인다. 나는 그만 무언가 부끄러워져, 시선을 내려 맞잡은 손을 바라보았다. 그의 거칠고 큰 손은 단단하고 남자다웠다.
“감사합니다.”
그가 내 뺨에 입을 조심스레 입을 맞추었다. 그가 내게 입을 맞춰오려고 할 때, 나는 갑자기 불현 듯 무언가가 생각나 그를 밀어냈다. 그가 나를 진득한 눈빛으로 바라본다. 무언가를 갈구하는 눈빛. 하지만 나는 완강했다. 알아야 할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그가 침을 꿀꺽 삼킨다. 그의 시선이 흔들린다.
“제롬, 짚고 넘어갈 게 있어요.”
“무엇입니까, 그게.”
그가 내 손을 잡았다. 나는 그의 손을 놓고는 팔짱을 꼈다.
“제가 샬롯에게서 독을 선물받은 건 어떻게 알고 있었어요?”
“세실리아, 그건…….”
“똑바로 말하는 게 좋을 거예요. 변명하려고 하면 오늘부터 독방 쓸거니까 알아서 해요.”
“세실리아!”
제롬이 다급해졌다. 나는 미간을 더 좁히고는 그를 쏘아보았다.
“샬롯이랑 많이 친한가 보죠? 아, 그건 아닌가? 그럼 누군가가 당신한테 내가 독을 숨긴 걸 밀고했다는 건데, 그게 누구일까요?”
그는 한참동안 말을 꺼내지 않았다. 얼굴에는 망했다는 기색이 역력한 채로. 저 남자의 포커페이스가 처음으로 무너진 순간이었다. 축제라도 하고 싶었지만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이름!”
내가 목소리를 높이자 제롬이 애절한 얼굴로-미인계다-나를 바라보았다.
“세실리아, 제발…….”
“됐어요. 밀고한 하녀 이름도 제가 몰라야 하는군요. 그럼 여행도 그 하녀랑 가세요. 저는 오늘부터 독방을 쓰렵니다.”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낮은 목소리가 뒤따랐다.
“하녀 브리젯이었습니다.”
나는 씨익 웃었다. 그리고서는 표정을 지우고는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아아, 그리고요?”
“그 하녀가……. 당신이 편지를 받았다고 고했습니다. 사람을 통해 직접 전달받아야 할 만한 은밀한 편지 말입니다.”
“계속 말하세요.”
나는 그리고는 다시 제롬 옆으로 걸어가 앉았다. 제롬은 조심스럽게 내 눈치를 살폈다.
“저는 그리고, 그 편지의 위치를 듣고는 제가……. 세실리아가 베개 안에 숨겨놓은 편지를 먼저 발견했습니다.”
“그리고요?”
“그리고, 그 독을 설탕과 바꿔 놓았습니다.”
“왜요?”
그는 한참동안 답하지 않았다. 나는 전략을 바꿔야겠다 싶어 그의 무릎 위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제롬의 눈이 순간 크게 뜨였다. 나는 그의 품에 머리를 기대고는 그를 지긋이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그의 크라바트를 만지작거렸다.
“왜요?”
내 손가락이 올라가 그의 귓바퀴를 쓸었다. 눈이 마주치자 그가 시선을 피했다.
“왜 그러셨을까…….”
내가 속삭이자 그가 몸을 움찔했다.
“그 편지가.”
“네에.”
“오스카 백작에게서 온 편지인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네?”
순간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이 들었다. 나는 나를 끌어안으려는 제롬의 팔을 뿌리치고는 몸을 일으켜 팔짱을 꼈다.
“제가 왜 오스카 백작에게서 편지를 받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것도 율리아를 통해 몰래 받을 만한 은밀한 편지를?”
“그게…….”
그가 시선을 피했다.
“레이디와, 오스카 백작이 깊은 관계인줄 알았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우스꽝스러운 말이었다. 나는 할 말을 잃고 잠시동안 그를 바라보았다.
“제가 말했잖아요! 나랑 오스카는 친구라고요!”
“이제 그를 이름으로 부르는 겁니까?”
그의 목소리가 순간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나는 그의 서늘한 눈빛에 몸이 움찔했지만 기죽지 않고 쏘아붙였다.
“지금 그게 중요해요?”
“중요합니다.”
나는 할 말을 또 다시 잃고 말았다. 이거,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