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한겨울밤의 고백-93화 (93/108)

<-- 성당의 종이 칠 때 -->

제롬은 익숙하게 성 안으로 향해, 적절하게 큰 방을 골라잡았다. 하녀들은 대충 주판을 튕기며 셈을 하는 눈치였지만 그들의 계산은 명백했다.

레이디 화이트는 아무리 그들의 실권자라 해도 이미 한물 간 노장. 그리고 제롬은 떠오르고 있는 해였다. 그는 오랜 시간동안 발리타로크와, 웨스트 체셔를 다스릴 것이었고 그것은 의문을 제기할 수 없이 명백했다.

제롬은 한동안 타오르는 장작 앞에 가만 서 있었다. 보다 못한 내가 그의 옆으로 향했다. 그의 팔에 내 것을 끼워놓고는 그를 바라보았다.

“듣게 되어서 유감이에요.”

“듣게 해 드려서 죄송합니다.”

그가 거칠게 머리를 쓸어넘겼다. 그리고는 나를 눈에 담았다.

“당신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그의 목소리가 떨렸다.

“당신에게 숨기려던 사실이었습니다. 제가 오스카 백작을 경계하는 이유이기도 했습니다.”

“그게 무슨…….”

“제가 디어뮈르 전쟁에서 벌인 일을. 오스카 백작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제 스콰이어이자, 참모였으니 말입니다. 저는 당신이 이 일을 모르길 바랐습니다, 평생.”

나는 말을 잇지 못하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이 불길로 향했다.

“당신도, 제가 무섭습니까?”

“아니요.”

“거짓말하지 마십시오.”

“저는 진심이에요.”

“당신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습니다, 레이디.”

나는 참을 수 없는 그런, 뜨거운 무슨 감정 같은 것에 이끌려 그에게 충동적으로 키스했다. 그는 처음에는 소극적으로 응하다가, 내 혀를 거칠게 탐했다. 입술이 떨어진다.

“화가 나서요.”

나는 그의 아름다운 얼굴을 어루만졌다.

“어떻게 참아오신 거예요.”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그의 시선이 나만을 담는다.

“나는, 정말 못 견뎠을 거예요. 제롬이 겪은 그런 것들 다. 그런데 제롬은 어떻게, 지금껏 그걸 다 견뎌 온 거예요. 기댈 곳도 없었을 거 아녜요.”

그의 눈빛이 처음으로 흔들린다. 나는 그를 꼭 끌어안는다.

“고마워요, 날 여기까지 데려와 줘서.”

나는 그의 목에 내 팔을 감은 채로 그와 시선을 맞췄다.

“절 누구보다 정당한 레이디 화이트로 만들어 주겠다는 말이, 새삼 이해가 가서요.”

“세실리아.”

그가 천천히 내 눈물을 닦아 주었다.

“세실리아.”

그의 고운 눈꺼풀이 천천히 눈을 덮는다. 그가 눈을 감았다 다시, 떠 그 안에 나를 담는다.

“내가 신탁의 물의 언어술사가 아니더라도 나는 당신을…….”

나는 말을 마무리 지을 수 없었다. 그가 다시 내게 키스해왔기 때문이다. 그의 큰 손이 내 등을 쓸더니 천천히 아래로 내려간다. 나는 그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입술이 떨어졌다, 다시 맞물리고, 몇 번이고 그것을 반복한다. 우리는 서로의 맞물린 입술로 체온을 공유하며 서로를 느끼려 하고 있었다.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려 나는 그를 밀어내고 문 쪽을 돌아보았다. 문이 열렸다.

“레이디 세실리아.”

시녀였다. 그것도 그녀의 복장을 보아하니, 수석시녀 쯤 되는 모양이었다.

“레이디 화이트께서 부르십니다.”

레이디 화이트, 제롬의 어머니는 제 최측근을 보내 나를 보고 싶다는 의사를 강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내가 걸음을 옮기려고 했을 때, 그의 손이 내 손목을 꽉 쥐었다.

내가 뒤를 돌아보자, 제롬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시녀를 돌아보았다.

“다녀올게요, 제롬.”

내가 차분히 말하자, 내 손목을 잡고 있는 제롬의 손힘이 점점 약해졌다. 나는 제롬의 뺨에 입을 맞추고서는 뒤돌았다. 그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뒤돌아보지는 않았다.

“이곳입니다.”

문이 열리고, 나는 레이디 소피아에게 배운 예법을 몸으로 기억해내며 차분히 레이디 화이트 앞으로 걸어갔다. 아마 제롬이 내게 예법 선생님을 붙여 준 건 이럴 때 써먹으라고였을 것이다. 나는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그녀 맞은편에 앉았지만, 내가 본 것은 내 상상과는 달랐다.

“좋은 밤입니다. 내가 아까는 좋지 못한 모습을 보였군요, 사과합니다.”

“받아들이겠습니다, 레이디 화이트.”

아까 그 철혈의 여인은 온데간데없고, 그저 평범한 노부인만이 내 앞에 있을 뿐이었다. 그녀의 기품도 여전했고, 세월이 녹아든 아름다움은 여전했지만 아까 그녀에게 느껴졌던 격한 감정의 흐름이 잘려나간 듯 없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힘이 없었다.

“내 아들이 사랑하는 여자라 들었습니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찻잔을 들어,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자작가. 부친은 전쟁중 전사. 가진 것은 제도 가까이에 있는 작은 영지.”

나는 침묵했다. 그녀의 손이 내 것을 잡았다.

“아, 드래곤 블러드. 이것을 반지로 만들 거라고는 생각을 못했는데, 참.”

그녀가 너털웃음을 짓는다.

“내 아들이 정말 사랑하는 여자였나 봅니다.”

“이 반지에 대해서 아시나요?”

“모르는 화이트가 없고, 아는 외부인이 없을 겁니다. 드물죠.”

“이 반지에 대해서 아는 사람이 있었어요.”

그러고 보니 최근에, 율리아와 함께 네임북을 뒤적였던 기억이 났다. 그때 노아는. 그래, 분명 화이트 가문의 방계였다. 그래서 이 반지에 대해 알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 사람이, 당신에게 이 반지에 대해 말해 주더랍니까?”

“아뇨, 레이디 화이트. 듣지 못했어요.”

그녀가 미소짓는다.

“세상엔 알려져서는 안될 가문의 비밀이니 말입니다.”

“이 반지가요?”

“그렇지요. 당신도 언젠간 알게 될 겁니다.”

“그게 언제일까요?”

내가 눈을 반짝이자 레이디 화이트가 눈을 곱게 휘어보인다.

“언젠간. 어쩌면, 스스로 알게 될 수도 있겠죠.”

한동안 침묵이 머물렀다. 나는 그녀를 조심스레 바라보았다.

“제게 하고 싶은 말이 있으시다 들으셨어요.”

“오, 그러고보니, 내 정신이야. 나를 용서해요, 아가씨. 나이가 드는 건 이렇게 잔인한 일이랍니다. 가끔 혼자 생각 속에 너무 깊이 빠지게 돼요.”

그녀가 내 손을 조심스레 잡는다.

“최근에 대단한 상속녀가 되었다 들었습니다.”

“사실이에요.”

“좋군요.”

그녀가 천천히 차를 마셨다.

“도망가세요, 레이디.”

“네?”

“내 아들에 대해서 말하려는 게 아닙니다. 그 아이를 미워할 수 있는 건, 세상에 나뿐이어야 하니까요. 다만 내가 말하려는 건 다릅니다.”

그녀의 푸른 눈동자가 강하게 일렁였다. 내 손을 쥔 그녀의 악력이 강해진다.

“레이디 화이트의 자리는 매혹적인 저주입니다.”

“……저는 이해하지 못하겠어요.”

“오, 그렇겠지요.”

그녀의 주름진 입가에 미소가 졌다. 하지만 그녀의 눈은 눈물으로 젖어가고 있었다.

“나도 이해하지 못했답니다. 그땐 내 나이 열다섯이었어요. 나는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남자가, 나의 남편이 된다는 것에 설렜습니다. 그리고 결혼식 날, 그에게 반해버렸죠.”

그녀의 눈은 옛 추억을 회상하는지, 이상에 젖어 있었다.

“하지만 이 자리는 저주였습니다. 행복했던 결혼 생활은 오래 가지 않았죠, 신탁이 그러더랍니다. 내가 낳은 아이는 내 인생을 망가트릴 이 세계의 구원자라고요.”

그녀가 낮게 웃었다.

“나는 그 아이에게 정을 줄 수 없었습니다. 내 아인데. 내 아인데, 내 아가였는데. 예뻐할 수가 없었습니다. 제롬은 요람에서도 울지 않아 나는 그 아이가 귀머거리인줄 알았습니다…….”

레이디 화이트의 한숨이 뒤따랐다.

“나는 예언대로 되지 않게 하려 노력했습니다. 다만, 내 아들이라. 내 아가라 죽일 수만큼은 없었습니다. 나는. 그리고 운명은 나를 뒤덮었습니다. 나는 내 남편을 잃었고, 내 다른 아들은 거처를 찾지 못해 온 세상을 떠돌아다닌답니다.”

눈물 한 방울이 그녀의 눈을 갈랐다.

“당신은 이 운명의 피해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레이디 화이트의 눈이 선명하게 나를 담고 있었다. 그녀의 눈동자에서 불꽃이라도 번쩍이는 것 같았다. 나는 할 말을 잃었다.

“레이디. 당신이 제롬을 사랑하는 걸 압니다.”

“…….”

“그래도 충분한 재력이 있으니, 그에게서부터 도망치라는 겁니다. 레이디 화이트가 쓸 왕관은 가시왕관입니다. 당신의 머리에서 흘러내린 피가 세상을 구한다고 해도…….”

그녀의 손이 속절없이 떨린다.

“물의 언어술사는 단순히 그저, 구원이 아닙니다.”

“그게…무슨 말이세요?”

“또 다른 신탁이 있었습니다. 당신도 아시시라 믿습니다. 잊혀진 왕가의 핏줄. 물의 언어술사가 율러에 모습을 드러내, 운명적으로 제롬과 사랑에 빠질 거라고.”

도망치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다. 이 세상 사람들이 내게 하는 말들이 다, 물의 언어술사에 대한 것이었다. 이 자리는 네 것이 아니라고. 네가 감히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한없이 떨리는 레이디 화이트의 핏발서린 눈동자가 나를 담는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닙니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 여자는 단순히 이 나라의 기둥뿐만이 아니라, 나의 구원이기도 합니다. 나의. 그녀는 내 아들 요나단이 더 이상 방황하지 않게끔 도울 겁니다. 그럴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녀가 도와야, 내 아들이 진정한 짝을 찾아 정착할 것이며 평화를 찾을 것이라고요.”

그때, 문이 벌컥 열려 나는 문 쪽을 바라보았다. 문 뒤에 서 있는 것은 역시 제롬이었다.

“어머니, 세실리아가 피곤해하는 것 같군요.”

그가 천사같은 미소를 짓는다. 레이디 화이트는 손에 얼굴을 파묻고 흐느낀다.

“데려가겠습니다.”

그가 내게 제 손을 내민다. 나는 조심스럽다. 레이디 화이트와, 그를 바라보았다.

“……신이시여, 제발. 내 아들 요나단에게 구원을.”

나는 레이디 화이트를 바라본다. 그녀의 손틈 사이로 보이는 뜬 눈이 광기에 절어 있다. 그녀는 주문처럼 똑같은 말을 되뇌이고, 되뇌인다. 제롬이 뒤돌았다. 나는 그를 따라간다.

“같이 가요.”

나는 그와 보폭을 맞춘다. 닫힌 문 사이로 흐느낀 울음소리가 새어나온다.

0